방랑시인 김삿갓(113)
2부(63)
천하(天下)의 명의(名醫)가 되는 법
김삿갓은 삼충(三衝) 선생(先生)이라고
불리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훈장(訓長)
의 손을 떨쳐 버렸다.
"에이, 여보시오.
내가 왜 삼충(三衝) 선생(先生)이란 말이오?"
그러자 훈장(訓長)은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말했다.
"이러나 저러나 내가 선생(先生)한테
꼭 부탁(付託)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소이다."
"무슨 부탁(付託)을 하시려는지
어서 말씀을 해보시죠."
"선생(先生)은 학문(學問)이 놀랄 만큼
박식(博識)한 분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공맹재(孔孟齋)의
훈장(訓長) 자리를 선생(先生)이 맡아 주시오.
나로서는 간곡(懇曲)한 부탁(付託)이에요."
"선생(先生)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선생(先生)과 나는 금시(今時) 초면
(初面)인 사이인데, 나를 어찌 믿고
서당(書堂)의 훈장(訓長) 자리를
맡기시겠다는 말이오?"
물론 김삿갓은 애초 훈장(訓長)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김정은(金正銀)은 김삿갓의 손을
다시 움켜잡으며 간곡(懇曲)하게 말했다.
"나는 물론 선생(先生)의 과거(過去)를
전혀 몰라요. 그러나 사람에게는
직감(直感)이 있지 않소이까?
선생(先生)이 예사(例事) 어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관서(關西) 지방(地方)을
주유천하(周遊天下)로 다니시는 건
몇 해 동안만 늦추시고, 나 대신 이 마을의
서당(書堂)을 좀 맡아 주세요.
간곡(懇曲)히 부탁(付託)합니다."
김삿갓으로서는
상상(想像)도 못 했던 부탁(付託)이었다.
김정은(金正銀)과 같은 협잡꾼(挾雜軍)의
입에서 설마 그와 같은 양심적(良心的)인
부탁(付託)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左右)로 흔들었다.
"나에게 훈장(訓長) 자리를
넘겨주겠다는 말씀은 고맙지만,
나는 훈장(訓長) 노릇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려니와, 아이들을 가르칠 만한
실력(實力)도 없는 사람입니다."
김삿갓이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拒絶)해 버리자,
김정은(金正銀) 훈장(訓長)은
펄쩍 뛰며 손을 내젓는다.
"선생(先生)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이왕(已往)에 말이 나왔으니 모든 것을
솔직(率直)히 말씀드리지요.
내가 오늘날까지 억지로
훈장(訓長) 노릇을 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훈장(訓長)으로 있어서는 앞길이
창창(蒼蒼)한 이 마을 아이들의
장래(將來)를 송두리째 망쳐 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내가 지금은 사리사욕(私利私慾) 때문에
훈장(訓長) 자리에 앉아 있지만, 아이들의
미래(未來)를 망쳐 놓을 수는 없어요.
내가 아무리 거지발싸개 같은 협잡꾼
(挾雜軍)이기로,아직은 양심(良心)의
그루터기만은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훈장(訓長) 자리는
선생(先生)이 꼭 맡아 주세요."
말인즉 옳은 말이었다.
김정은(金正銀)이 훈장(訓長)으로 있으면
아이들의 장래(將來)를 망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삿갓 자신(自身)이 선뜻 나서,
훈장(訓長) 자리를 맡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선생(先生)은 지금까지
훈장(訓長) 자리를 잘 지켜 오시다가
별안간(瞥眼間)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내가 나타나지 않은 줄 아시고,
그 자리를 지금(只今)처럼
그냥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김정은(金正銀) 훈장(訓長)은
도리질을 크게 하면서 말했다.
"선생(先生)을 만났기 때문에
별안간(瞥眼間) 그런 생각이 난 것은 아니오.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적임자
(適任者)를 찾고 있었는데,
하늘이 나를 살려 주시느라고,
선생(先生)같이 훌륭한 분이
나타나신 겁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 분명(分明)한
것이오니,
아무 소리 마시고 훈장(訓長) 자리를
꼭 맡아 주세요.
그래야만 나도 살고 아이들도 살게
되는 거예요."
훈장(訓長)의 말을 듣는 동안,
김삿갓은 불현듯 돈 한 푼 없는
자신(自身)의 신세(身世)를 생각해 보았다.
멀지 않아 추위가 닥쳐올 판인데,
훈장(訓長) 자리를 타고 앉아 있으면
겨울을 편히 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훈장(訓長) 노릇을 하려고
집을 나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김삿갓은 고민(苦悶) 끝에
김정은(金正銀) 훈장(訓長)에게 말했다.
"선생(先生)이 훈장(訓長) 자리를 내놓으면
생계(生計)가 곤란(困難)하실 게
아닙니까?"
"그 점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백중국(百中局)이라는
약국(藥局) 간판(看板)만 있으면
먹고 살아가는데 아무 걱정이 없어요.
만약(萬若) 선생(先生)이
훈장(訓長) 자리를 맡아 주시면,
나는 선생(先生)에게 동의보감
(東醫寶鑑)을 배워 나 자신(自身)도
훌륭한 명의(名醫)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피차간(彼此間)에
얼마나 좋은 일이 되겠소?"
김정은(金正銀)은 워낙 머리가
비상(非常)한 위인(爲人)인지라,
자기가 살아갈 방도(方途)는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꾸며 놓고 있었다.
김삿갓이 대답(對答)을 주저(躊躇)하고 있는데,
마침 젊은 환자(患者) 하나가 찾아왔다.
환자(患者)는 이십이 못 되어 보이는
새서방이었다.
환자(患者)가 방안에 들어와 큰절을
올리자, 필봉(筆峰)은 절을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매우 거친 어조(語調)로,
"자네는 무슨 일로 왔는가?"하고 묻는데,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그 어조(語調)에는
이상(異常)하게도 권위(權威)가 풍겨 나왔다.
환자(患者)는 머리를 조아리며,
"저는 별다른 병은 없사옵니다.
다만 이상(異常)하게도 입에서 몹쓸 냄새가
풍겨 나오기 때문에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필봉(筆峰) 선생(先生)은 빙그레 웃으며,
"입에서 냄새가 좀 풍기기로 어떤가?
잠자리에서 색시와 입을 맞추기가
거북해서 그러는가?"
그러자 환자(患者)는 얼굴을 붉히며,
"선생님도 참!"
"입에서 냄새가 많이 나거든 마늘을
많이 먹게.
마늘은 정력제(精力劑)로 좋은 것이야.
그런 일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약국(藥局)을 찾아오는가?"
김삿갓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웃음을
씹어 삼켰다.
마늘은 강장(强壯) 식품(食品)이지
정력제(精力劑)는 아니기 때문이다.
환자(患者)는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反問)하였다.
"선생님! 마늘을 먹으면 입에서 마늘 냄새가
지독(至毒)하게 날 것 아닙니까?"
그러자 필봉(筆峰) 선생(先生)은
천연스럽게 대답(對答)했다.
"그야 물론이지. 마늘 냄새가
지독(至毒)한 것은 뻔한 일 아닌가?
그러나 마늘 냄새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냄새가 아닌가?
그러니 마늘을 많이 먹고, 하룻밤에 한 번
해줄 것을 두 번 세 번 해준다면,
새댁은 냄새가 좀 나더라도 그편을 훨씬
좋아할 것이 아니겠나? 그러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 마늘이나 많이 먹게!"
환자(患者)가 백배사례(百拜謝禮)하고 돌아가자,
김삿갓은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선생(先生)은 과연(果然)
천하(天下)의 명의(名醫)십니다."
돌팔이 의원(醫員)은 껄껄껄 웃으며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대답(對答)했다.
"명의(名醫)라는 것이 따로 있는 줄 아시오?
자고(自古)로 명의(名醫)란
약(藥)을 잘 써서 되는 것이 아니고,
상황(狀況)에 따라서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말을 잘 둘러대야 명의(名醫)가 되는 것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