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승의 禪, 세상과 만나다
들어가고 나갈 문 없는 ‘중도’
22. 대도무문大道無門
혜개선사 지은 ‘대도무문’ 의미
〈금강경〉 가르침과 일맥상통해
분별망상 없는 삶 속 수행 강조
본래성불로 수행 불필요 주장
유무의 양변 집착과도 같아서
수행은 망상 완전히 비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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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에
대도무문(大道無門)이란 말이 있다.
큰 도에는 문이 없다.
무슨 뜻일까?
대도무문의 뜻을 바로 알면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를 알고
선(禪)의 지혜가 열리는 것이니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 대도무문에 대하여 알아보자.
김영삼 대통령의 대도무문 일화
흔히 ‘YS’라 불리운 김영삼 대통령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아
붓글씨도 자주 썼다.
그는 교회 장로로 널리 알려졌는데,
개신교 신자인 그가
선어(禪語)인 대도무문을 즐겨 썼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은 김영삼 대통령은
과연 대도무문의 뜻을 바르게 알고 썼을까?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도무문(大道無門) 휘호를 선물하면서
“대의를 행하는데 거칠 것이 없다”
고 설명했다고 한다.
클린턴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통역자가
‘고속도로에 톨게이트가 없다’고 하니
웃으면서 알았다고 한 일화가 있다.
기독인을 믿은 한국과 미국 대통령이
선어인 대도무문을 화제로
대화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대통령은 대도무문을
글자만 풀이했지 참 뜻은 몰랐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의 뜻
그렇다면
선에서 말하는 대도무문은 무슨 뜻인가?
대도무문이란 말은
송나라 후기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가 지은
‘무문관(無門關)’에 나온다.
무문 스님은
선문의 대표적인 화두 48개를 소개하면서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처의 말 중에 근본은 마음이다.
진리의 문에는 문이 없다.
문이 없는데 어찌 뚫고 갈 것인가?
듣지 못했는가?
‘문을 통해서 들고나는 것은 잡된 것이요,
인연으로 얻은 것은 결국 부서지고 말 것이다.’
실은 이런 말도 평지풍파요,
멀쩡한 살에 종기짜는 칼을 들이댄 것이니
하물며
언어문자에 집착하여 지혜를 구하는 짓이야…”
大道無門 千差有路
큰 도에는 문이 없다.
천 갈래 길이 어디나 통한다.
透得此關 乾坤獨步
이 관문을 뚫고 간다면
천지에 홀로 걸어가리라.
무문 스님은
불교의 진리를 깨치는 길은
들어가고 나가는 문이 없는
무문(無門)이라 한다.
만약 문이 있어
들어가고 나감이 있다 한다면
상대분별에 떨어져 양변이 되니 잡스럽다.
또한 얻을 것이 있다 한다면
상(相)이니 결국 허망할 것이라 한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여래는 오고감이 없다.’
‘모든 있는 바 상(相)은 다 허망한 것이니
상이 상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
하는 말과 같은 이치다.
이런 말조차
옥상옥이고 긁어 부스럼이다.
그래서 게송을 하나 지으니
“큰 도에는 문이 없다”는 대도무문이고
이 관문을 뚫으면
천지에 가장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선사의 법문이나
부처님의 〈금강경〉이나
중도와 무상(無相) 도리를 말하는 것은 똑같다.
우리가 ‘나’가 있다는 분별에 떨어지면
오고 가는 나도 있고, 들어가고 나감도 있으니
결국 생사 윤회하는 괴로움을
영원히 피할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무아, 중도의 정견을 세우면
‘나’라고 한 실체가 없으니
오고 감도 없고, 들어가고 나감도 없으며,
안과 밖이 중도불이로 존재함을 알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친 불교의 진리다.
이 불교의 진리에는
들어가고 나오는 문이 없는 무문(無門)이다.
그래서 불교의 진리인 큰 도는
들어가고 나오는 문이 없는 대도무문이라 한다.
대도무문, 선(禪)의 본래성불을 말한다
불교는 우리가 깨달음을 통하여
생사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대자유를 누리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불교의 진리에 대도무문이라 하니
수행도 필요 없고 깨달음조차 없다는 말인가?
참으로 알쏭달쏭하다.
이것을
禪과 敎의 입장에서 풀어보면 이렇다.
부처님께서는
우주 만물이 연기로 존재함을 깨쳤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로 존재하니 ‘나’라 할 실체가 없다.
이것을
무아(無我), 무상(無相), 공(空)이라 한다.
우주 만물이 연기, 무아로 존재하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中道)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제자인 조사들도
부처님처럼 이것을 깨달아
생사의 괴로움을 여의고
우리에게 이 길을 알려준 것이 불교이고 선이다.
그런데, 禪은
이 불교와 깨달음에 대하여
독특한 입장을 보여준다.
부처님이
우주 만물이 중도연기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우주 만물은 모두
본래 완전하고, 본래 청정하며,
본래 깨달아 있다고 본다.
〈화엄경〉에
“일체 중생이 여래와 같은 지혜와 덕상을
다 갖추고 있건만
분별망상에 가로막혀 보지 못하고 있구나!”
라는 부처님 말씀이 그것이다.
이처럼 일체 중생이 중도연기로 존재하니
본래 완전하여
깨달음의 성품이 보편되어 있다.
이것을
불성(佛性), 법성(法性)이라 한다.
즉 깨달음의 성품이
일체 중생에게 본래 다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불교 교리적으로는
이것을 중도연기, 진여연기라 하고
禪은 본래성불, 본래부처라 한다.
禪의 본래성불(本來成佛), 본래부처를
무문스님은
대도무문이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본래
깨달음이 다 완성되어 갖추고 있으니
‘내가 있다’ ‘내가 중생’이라는
분별망상만 찰나 간에 깨치면 되는 것이다.
지금 나 이대로 중도연기로 존재하니
본래 완성되어 있고,
온갖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는 본래부처이다.
그래서 6조 혜능대사는
“반야 지혜는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법문한다.
대도무문,
본래성불에 수행과 깨달음이 필요한가?
혹자는
“우리가 본래성불해 있으니
수행도 깨달음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있다-없다’의 없다는 양변에 떨어져
삿된 소견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원리인 중도연기는
깨달은 부처님이나 중생이 다 하나이지만,
부처님은
자기가 중도, 무아라는 것을 깨친 분이고
중생은 자기가 있다는
분별망상에 집착하고 있어 중도를 알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자기라 할 것이 없어
우주 만물과 더불어 중도연기로 존재하는데,
‘자기가 있다’는 양변에 떨어져
집착하고 살아가니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6조 혜능대사는 〈단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지식아!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본래 차별이 없지만,
깨닫지 못하면
긴 세월 동안 윤회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 청정한 부처이나
분별망상에 사로잡혀 미망 속에 살아가고 있다.
자기 안에 망상을 비우는 수행과
깨달음이 없다면
영원히 생사 윤회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니 자기 안에 분별망상을 비우고
본래 마음을 보아 깨쳐야 한다.
그래서 수행과 깨달음이 필수적이다.
수행하여 깨쳐도
뭔가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분별망상을 완전히 비우는 것이다.
본래성불의 정견으로 수행하면
즐겁고 행복하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이 중도연기라는 것을
이치로라도 확실히 이해하면
대도무문, 본래성불도 알아 정견이 선다.
자기가
본래성불해 있는 부처라는 것을 알고
믿음이 서면
깨달아 부처로 살겠다는 마음이
스스로 일어난다.
이것을 화두선에서는
정견과 믿음, 그리고 발심이라 한다.
이 정견과 신심, 발심이 갖춰진 사람은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조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정진하는 힘이 나온다.
현대인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하고 살아가야 한다.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도 있지만,
뒤져 낙오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런 시대에
자기가 본래 완전하고
부처님의 지혜와 능력을 다 갖추고 있다는
자기 가치를 알게 되면
남과 비교하지 않는 자존감을 갖추게 된다.
자기가
부처님처럼 존귀하다는 것을 아는 불자라면
가난하고 어려운 삶일지라도
남들이 나를 욕하고 핍박해도
스스로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
부처님과 조사들의 삶이 그러했다.
부처님은 깨친 후
평생 걸식과 무소유의 삶을 살아도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자기가 본래성불해 있다는
정견을 세운 사람은
자기 마음이 부처님 마음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자기 안의 분별망상을 부지런히 비워간다.
망상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집착하거나 머물지만 않으면 된다.
하지만, 착각이 깊은 사람은
망상을 걷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본래성불 알고 하면
깨달음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아니
두려움 없이 용기 내어 나아갈 수 있다.
만약 대도무문을 몰라
자기가 본래 부처인줄 모르고
중생이라 생각하고 믿고 수행해 나간다면
아마도 수행은 힘든 고행이고
부처가 되는 깨달음은 요원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중생이 아라한과를 성취하려면
3아승기겁 동안
세세생생 닦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자기가 부처가 아닌 중생이라 생각하고
부처가 되고자 수행하는 사람은
수행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장애를 극복해 나가는데
더 힘이 들고 주저앉기가 쉽다.
중생이 다 그렇지 뭐…하는 마음이
자기를 속박한다.
반대로 자기가
그대로 본래 부처이고
깨달음이 다 갖춰져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믿고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은
훨씬 힘이 나고 즐겁고 보람이 있다.
자기 안의 분별망상을 비운만큼
가볍고 밝고 행복하다.
그래서 禪, 화두선을
가장 빠른 수행이라고 최상승이라 한다.
그렇다고
선이 다른 불교 수행법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다.
화두선이든
위빠사나든 염불 등 불교 수행법은
모두 평등하고 우열이 없다.
다만, 화두선은
본래부처가 부처되는 길이니
좀 빠르다고 하는 것이다.
본래 부처가 부처되는 길이니
선 수행은 고행이 아니라 행복한 길이다.
중도는
들어가고 나갈 문이 없는 대도무문이다.
▶ 한줄 요약
본래성불,
본래부처의 또 다른 말이 대도무문.
박희승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현대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