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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용/KBS 아나운서: 천하를 호령했던 세계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어쩌면 칭기즈칸 만큼이나 아니면 더 잘 알고 열심을 기울이게 되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올제이 쿠툭(Oljei Khutugh)-----------------
김성곤/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杏臉桃弱柳腰 那知福是禍根苗(행검도약유요 나지복시화근묘)
이광용: 붉은 볼 보조개에 버들처럼 가는 허리 복이 바로 화근일 줄 그 어찌 알았으랴
김성곤: 高麗妃子初封冊 六月陰寒大雪飄(고려비자초봉책 유월음한대설표)
이광용: 고려의 기황후를 책봉하던 해에는 6월 한 여름에도 음산해 대설이 날렸어라. 이 한시의 주인공, 들으셨죠? 바로 기황후입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황후 자리에 까지 올라간 인물이죠.
이시원/배우: 대체 얼마나 예뼛길래~
김성곤: 원궁사(元宮詞)란 작품은 원나라 궁전에 알려지지 않은 일, 비사를 다룬 작품입니다. 살구꽃 처럼 하얀 얼굴, 거기다가 복사꽃 처럼 윤기나는 붉은 뺨, 그런데다가 나긋 나긋한 버들같은 허리, 이것이 제왕의 마음을 확 사로 잡아 가지고서 그것이 화근(?)이 됐다.
이광용: 화근이라는 건 안 좋은 이미지잖아요.
김성곤: 그렇죠, 그렇죠.
이시원: 말 그대로 경국지색~
김성곤: 그래가지고 유월에도 대설이 내리는 나라가 망할 징조가 나타나게되었다고 하면서 기황후를 비난하는 건데 종종 기황후를 비난하는 기황후에 대한 비난하는 시들이 중국문학에서 종종 있어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백제 멸망에 3천 궁녀가 등장 하듯이 원 멸망에 기황후가 등장하는 군요.
이광용: 저희가 운만 띄웠는데도 여러분들, 정말 궁금하시죠? 고려 출신으로 대원제국 거의 최고의 자리에 까지 올랐던 인물 기황후는 왜 후대 중국에서 이렇게 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걸까요?
최원정/KBS 아나운서: 333번째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특별히 김성곤 교수님을 모셔서 기황후에 대한 한시를 멋드러지게 읊으셨습니다.
최태성: 한 편의 경극을 보는 것 같았어요.
이시원: 한시는 몰라도 그냥 귀가 즐거워요.
허준/방송인: 아니 근데 들어보면 정말 예쁘긴 옛뻣나봐요.
이시원: 그러니까 드라마 기황후를 하지원씨가 맡았겠죠. 제가 그 드라마를 찾아봤는데 그 당시 시청률이 거의 30% 가까이 나왔데요. 시청률이 그렇게 나왔다는 건 캐릭터가 그만큼 매력적 이라는 얘기죠. 배우로서 솔직히 그런 역할이 탐나기는~
최원정: KBS에서 드라마 기황후와 관련된 사극이 나오면 꼭 하세요.
최태성: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애요.
이시원: 버들 나무 같은 허리 술을 한잔 마시고 붉은 볼? 같이 하실 분은?
허준: 얘기 들어보면 정말 앞에 예쁘다는 얘기는 뒤에 욕하기 위한 수식어 같은 느낌이에요.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기황후는 예쁜게 문제가 아니예요. 성품과 행동이 문제가되는 거지요. 원사열전에 보면 기황후를 가리켜서 영힐(穎黠) 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최태성: 穎黠(영힐)?
이익주: 참 안 쓰는 단어인데 영리하다 라는 뜻인데 뭔가 좀 나쁜 쪽으로 영리하다.
최원정: 교활하다는 의미~
이익주: 교활하다 라는 의미를 가져요. 일반적으로는 기황후 때문에 원나라가 망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공통점은 전부 한족들이 그런 말을 해요. 몽골 사람들은 그런 말을 안 하고, 그러니까 자기들 앞서 원나라가 망한 것이 기황후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원나라 멸망의 빌미를 제공한 사람 이런 이미지를 자꾸 만들어 나가는 거죠.
허준: 그런데 한족이 그랬다 하는 거 이거 음모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이시원: 망할 때 죄를 뒤집어 씌울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혹시 그게 기황후가 아닌가?
최원정: 권영철 박사님은 몽골사를 연구하셨으니까 진짜 몽골사에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어요?
권용철/단국대학교 북방문화연구소: 우리 기황후에 대해서는 대원제국 말기에 굉장히 극심했던 권력투쟁에 본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국을 더 혼란하게 만드는 그런 인물이라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기황후가 권력투쟁에 몸을 바치게 된 거는 극심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제국 조정에서 자기가 고려출신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혈통의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했던 나름의 처절한 노력이 아니었겠나 그렇게 평가해 볼 수도 있죠.
이시원: 비운의 여인의 기운이 나는데 살아남기 위해 태풍을 일으킨 느낌이에요.
최원정: 특히나 기황후가 대원제국 몰락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 오늘 그 진실을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최태성: 기황후, 그녀가 누구인가? 기황후는~
이름: 기황후(奇皇后) (올제이 쿠툭)
남편: 대원 순제 (大元 順帝) (토곤 테무르칸)
가족사항: 행주 기씨 집안 8남매 中 막내딸
특이사항: 고려에서 차출된 공녀출신의 대원(大元) 황후
권용철: 몽골제국은 네 개의 울루스의 연맹 형태로 칭기즈칸의 후손이라는 연대감-일체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이 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카안 울루스(大元)+주치 울루스+ 차가타이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고려). 그 중에서 카안 울루스 라고 나와 있는 대원이 명분적으로는 네 울루스 중에서 종주국의 위치에 있는 거지요. 기황후가 카안 울루스의 대원의 공녀로서 오게 된 겁니다.
이시원; 그런데 어떻게 해서 황후까지 올랐을까요?
이익주: 고려는 대원으로부터 정치적 간섭을 받죠. 그리고 여러가지 물자를 수탈당해요. 물자수탈에 더해서 사람까지 뺏기는 데 (물적수탈+인적수탈), 사람은 환관과 공녀 두 가지를 뺏기게 돼요. 공녀는 처음에는 몽골과 전쟁을 하고 협상을 할 때 고려에 들어와 있는 몽골군과 결혼할 사람을 빼앗아 가는 거죠. 이러면서 공녀가 시작이 돼요. 그때는 뭔가 신분적으로 하자가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반역한 사람들의 처 라든가 과부, 승려의 딸 이런 특별한 사람들이 갔는데 점차 시간이 가면서 일반 여성들이 어린 나이에 끌려가게 된 거죠.
최원정: 가서 어떤 일을 해요?
이익주: 운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집니다. 가서 정말 비참하게 노예 같은 삶을 살수도 있고 또 일부는 궁에 들어가서 궁녀가 되기도 하고 운이 좋은 경우에는 고위관료와 결혼을 해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는 사람도 소수지만 있어요.
이시원: 그런데 인생이 너무 뽑기처럼 되어 버렸어요.
이익주: 그렇죠, 그게 불행한 거죠. 그러니까 장래가 불안하고 서로 안 갈려고 한 거죠. 그래서 남장을 하기도 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도 하고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이 조혼을 하는 거에요.
최원정: 결혼을 하면 안 끌려 갈 수 있나요?
이익주: 동녀를 데리고 가기 때문에 그래서 고려 후기에 조혼의 풍속이 생기게 돼죠.
이시원: 원나라가 고려 말고도 다른 나라에서도 공녀를 데려 갔나요?
이익주: 전쟁 중에 약탈은 있을 줄 몰라도 전쟁을 안 하는데 공녀로 어린 여자 아이를 끌고 가는 것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것 같애요. 이 공녀가 고려와 원 관계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나니까 이게 또 달라져요. 일부 계층에서 딸을 공녀로 보낼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요.
일동: 일부러요?
이익주: 네, 왜냐면 가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고위관료와 결혼해서 권세를 누리기도 한단 말에요. 그러니까 자기 딸을 일부러 보내는 사람들, 특히 기황후가 등장한 이후로는 일종의 몽골 드림(Mongol dream) 같은 것이 생기는 거에요.
이시원: 원 드림~
이익주: 네, 그래요. 몽골 드림을 이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데~
이시원: 그런데 그건 소수잖아요.
이익주: 지금 보면 자기 딸을 사지로 몰아넣어서 자기의 권력을 잡을려고 한다는 게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죠. 그리고 아주 소수고~ 대부분은 비참한 삶을 살죠.
허준: 뭐냐면 456억을 벌 수도 있으니까 자기 자식을 오징어 게임에 보내는 거예요.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고 456억을 벌 수도 있으니까~ 이게 말도 안 돼요.
이시원: 기황후는 운이 좋았던 건가요?
최원정: 거기 가서는 미모와 지성을 마구 뽑내야지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서바이벌 게임이 되겠네요. 어떻게 기황후는 궁에서 눈에 딱 들었을까요?
권용철: 기황후를 간택하는 사람은 원나라 순제라고 하는 카안인데 기황후가 1333년 순제가 즉위한 딱 그 해에 황궁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때 황궁으로 들어올 때 환관의 추천을 받습니다. 고려인 환관이라고 알려져 있죠. 뭔가 연결이 되는 측면이 있죠. 그 다음에 역할이 부여된 게 순제에게 차를 따라 주는 차 시중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최원정: 굉장히 근접해서~
권용철: 또 순제가 처음에 즉위했을 때 10대 어린 소년이었는데 순제의 당시 상황은 주변에 신료들이 자기를 무시할 정도로 권력이 세지 않았을 상태였습니다. 그 옆에서 궁녀인 기씨가 뭔가 안식처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해보게 돼죠.
허준: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노예로 부리고 있는 나라는 아닐지 몰라도 그래도 상하 관계가 분명한 나라에서 왔는데 황후가 된다는 건 아무리 모든 문화를 받아들이는 몽골 입장에서도 반대가 극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최원정: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잖아요. 고려 여인이 고려출신 공녀 기씨가 몽골의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해설: 1339년 고려 출신 후궁 기씨와 원 순제 사이에서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탄생한다. 아들의 탄생으로 고려인 기씨는 제2 황후 자리에 오른다. 그로부터 13년 뒤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제국의 (?)가 된다. 대원제국 말기에 대파란이 예고되는 순간이었다.
최원정: 아들의 탄생으로 황후가 됩니다. 이런 인생역전이 없어요. 이건 딱 드라마네요.
이시원: 장희빈이 생각나요. 장희빈이 어떻게 보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잖아요. 어찌 보면 기황후도 아들이 최고의 패가 아니었을까
권용철: 기황후 스스로도 아들 출산도 물론 있습니다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갖은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을 텐데요. 제2 황후가 된 이후에 자정원(資政院) 이라는 기구를 만듭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권력기반이자 재정적인 기반이 되기도 했던 기구인데요. 이 자정원이라는 기구는 원래 휘정원(徽政院) 이라는 기구가 있었는데 이 휘정원은 태후의 궁정사무를 관활하는 태후를 보좌하는 기구였습니다. 그런데 기황후가 휘정원이라는 기구를 흡수해 가지고 자기 이름 자정원 이라고 고쳐버린 거죠.
최태성: 돈을 장악했네요.
권용철: 그렇죠, 돈을 장악했지요. 그래서 자정원 이라는 기구가 기황후의 세력형성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박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황후가 고려 출신 환관들을 데려와 가지고 자정원에 배치를 시킵니다.
이시원;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게 기반을 마련해놨던 거네요.
최태성: 권력 돈 사람을 갖춘 기황후
권용철: 궁정에 핵심 인력을 심어놓고 권력기반을 만들어놓고 결국은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이것으로 등극시키겠죠.
최원정: 방금 이것을 보셨잖아요. 제국의 이것이 되면서 파란을 예고했다. 이것의 정체는? 이것은 무엇이 되었을까요?
이시원: 이건 답이 솔직히 정해져 있는 거 아녜요.
최원정: 제국의 아이들?
최태성: 시원씨, 무얼 거 같애요?
이시원: 답이 뻔하죠, 황태자!
최원정: 후계자로 지명하는 거죠.
허준: 근데 지난 번에 우리 배웠잖아요. 정말 부인이 많아도 몽골은 첫번째 부인의 아들만 권력계승에 싸움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제2 황후의 아들은 황태자가 될 수 없다.
이익주: 근데 공교롭게도 토곤 테무르 칸 순제한테 황후가 3명이 있었거든요. 기황후가 세번째인데 앞의 두 황후한테서는 아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토곤 테무르의 첫번째 맏 아들이 된 것 입니다. 그래서 자격이 생긴 거죠.
최원정: 몽골의 황태자 제도 낯설지 않아요?
허준: 몽골군이 유럽원정 갔을 때 독일 프랑스 영국을 모두 지배해 버릴려고 하는 순간 칸이 돌아가셨습니다. 투표하려 오셔야 합니다. 투표를 통해서 몇 년 동안이나~
최원정: 10년의 공백이 생기고 그랬는데~ 황태자가 있었으면 왜 그렇게 했겠어요.
이시원: 쿠릴타이를 그때는 안 했어요?
이익주: 쿠빌라이 이후로 달라져요. 쿠빌라이는 실제로 자기가 칸이 된 바로 그 다음 해에 자기의 맏아들을 황태자로 책봉을 합니다. 중국의 제도를 본 거죠. 그런데 이 맏아들이 일찍 죽어요. 그러니까 둘째 아들 친킴을 황태자로 또 책봉을 하는데 이 아들도 먼저 죽어요. 그 바람에 모처럼 황태자 제도를 도입을 했는데 이것이 실현되지를 못합니다.
최원정: 여기는 아버지가 너무 오래 사셨네 그게 가장 결정적인~
이시원: 지금 영국 처럼요.
최원정: 지금 영국 촬스 왕세자가 48년생 73세에도 계속 왕세자에요!
권용철: 황태자 제도가 없기 때문에 계속 직계로 이어지지 않는 복잡한 몽골제국 황제계보!
제1대 세조(1260~1294)-친킴-카말라/다르마발라/제2대 성종(1294~1307)-제3대 무종(1307~1311)/제4대 인종(1311~1320)-제5대 영종(1320~1323)-제6대 태정제(1323~1328)-천순제(1328)-제7대/제9대 문종(1328~1329/1329~1332)/제8대 명종(1329)-제10대 영종(1332)/제11대 혜종(1333~1370).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을 보면 세조라고 나와 있는 쿠빌라이는 1294년에 사망했죠. 제일 밑에 11대 혜종이라고 나와 있는 혜종이 순제인데 이 사람이 즉위한 연도가 1333년입니다. 그러니까 50년도 안 돼죠 (1294년 1대 쿠빌라이 칸 (세조) 사망 -> 39년 -> 1333년 11대 토곤 테무른 칸(혜종) 즉위). 그런데 지금 황제가 몇 명입니까?
최원정: 몇 명이에요?
권용철: 39년간 8명의 칸이 등장합니다. 평균 재임기간이 5년도 안 돼요.
허준: 그때 당시의 5년제 대통령 제도네요.
최원정: 심지어 단임제야.
권용철: 칸들이 사망할 때 병으로 죽은 사람들도 있지만 암살된 경우가 있거나 독살되기도 했습니다.
최태성: 병사~ 독살~ 암살~ 피살~
권용철: 대부분 30~40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시원: 이 정도면 칸 되기가 무서웠을 것 같애요. 칸이 되는 순간에 내가 어떻게 죽을 지 모르는 거잖아요.
권용철: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또 권력 옆에 붙은 측근들 움직임에 의해서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간 겁니다.
최원정: 결국 황제계승 원칙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대원 제국이 멸망의 길을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허준: 저 정도로 황제가 바뀌면 황태자는 일도 아니네요.
이시원: 거기다가 기황후의 아들 같은 경우는 고려 출신의 피가 섞인 거잖아요. 그러면 더 위태롭지 않았을까요? 황태자 된 게 황제가 되는 게 아닌 거 같애요.
허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네요.
최태성: (이시원씨에게 본인이 기황후라면) 이 상황 속에서 아들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시원: 어떻게든 빨리 황제를 만들어야 될 것 같애요. 그거 밖에 살 방법이 없을 것 같애요. 황태자가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언제 갈릴지 모르잖아요.
최태성: 내 아들을 황제로 만들려는 눈빛이 활활 타오르네요!
최원정: 그건 다르다. 만약 나한테 그런 질문을 했으면 나는 우리 황태자 데리고 다른 나라로 가! 진짜로 저런 데서 어떻게 황제를 시켜요!
이시원: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에요. 그게 외통수인 같애요. 황태자가 된 이상 내가 살길은 이길 밖에 없구나 그래서 공격으로~
최원정: KBS 드라마 기황후 주연 이시원씨로 예약합시다.
최태성: 조금 전에, 맞습니다. 기황후가 그런 선택을 합니다.
이시원: 저가 영힐한 여자 같습니다.
최태성: 1356년 카마 라는 권신을 앞세워 가지고 황태자를 황제의 자리에 올리자 왜냐면 황태자가 너무 똑똑하고 총명하니까 자격도 됐다 그리고 지금에 있는 황제는 태상황으로 올라가라 라고 순제에게 요청을 합니다. 쉽게 무슨 말이에요?
이시원: 너 황위 위에서 내려와라 내 아들 올리겠다.
최원정: 지금 순제가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요?
최태성: 황태자는 나이가 16살이었고 순제의 나이가 36세 밖에 안되었어요. 이 정도면 자칫 역모로 연결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요?
이시원: 무리수를 둔 기황후?
최태성: (이시원씨를 향해) 배팅을 한다면서요?
이시원: 아~ 그러면 어떻게 하지 독살이라도 해야 하나? 권력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익주: 실제로 첫번째 황후는 독살돼요. 거기는 정말로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아서~ 황실내 독살이 흔한 일이었던 거지요.
이시원: 이렇게 어떻게 도발적으로 황제에게 내려오고 내 아들 올릴 시도를 했는데 순제는 가만히 있었나요?
권용철: 이 사건을 기황후의 첫번째 내선(內禪) 시도라고 합니다. 내선이라고 하는 말은 황제가 살아있는데 그 후계자한테 양위하는 것, 이걸 내선이라고 일컫는 거죠. 지금 기황후는 순제가 30대 중반의 팔팔한 나이인데 너 이제 뒷방으로 가고 황태자한테 양위를 해라. 이걸 내선이라고 한 겁니다.
최태성: 이쯤되면 사약감인데~
권용철: 제가 지금 첫번째 내선 시도라고 했어요. 이것을 포함해서 세번이나 해요.
최원정: 세번이나 이러면 사실 황태자의 목숨은 위태로운 거 아녜요? 아들을 담보로 해서 어떻게 보면 권력 투쟁을 하는데 아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거예요.
허준: 여기선 아들이 문제가 아니에요. 이 정도면 순제는 기황후 없으면 못 살아!
이시원: 그러니까요!
허준: 너무 사랑해~오늘 너무 잘못했어요. 너 진짜 내일부터 그러지마! 그러고 또 넘어가고~
최원정: 그래도 뭔가 있었겠죠. 사랑만으로 용서가 어려운 세번의 내선 시도~ 황제 입장에서는 용서하지 못 했을 것 같은데~
권용철: (최태성씨를 향해) 약간 말씀하신대로 되는게~
허준: 그거 아니면 기활후에게 뭐가 있어요.
이시원: 부부관계에서 엄청난 권력을 기황후가 쥐고 있어요. 그래서 다신 안 봐! 너 죽었어 뒤돌아서면 용서가 되는 거야.
권용철: 굉장히 토론이 활발하네요. 첫번째 내선 시도 이후에 아까 카마라고 하는 사람이 제안을 했다고 했는데 결국 그 카마는 처형이 됩니다. 반면 기황후는 딱히 처벌을 받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온질 않아요.
최태성: 거기까지는 일단 카마의 처형으로 이 정도로 내가 보여줄게 상식적으로 이해됐음,
권용철: 그 다음 3년 정도 이따가 1359년 두번째 내선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때에는 순제가 화가 나가지고 기록에 보면 기황후를 두달 동안 안 봤다.
최원정: 청춘 남녀가 싸워도 6~7개월은 연락을 끊는데 ~ 지금 딱 두 달~
권용철: 나 아직도 머리카락도 검고 이도 튼튼한데 날 벌써 뒷방으로 몰아낸다고~ 기항후 두 달 안 보고 거기까지예요, 강력한 처벌을 내렸다고 하는 기록이 없어요.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기황후가 처음에 제2황후였잖아요. 그런데 제2황후가 된지 25년이 지나서 제1황후로 책봉이 됩니다.
최태성: 아니~ 내선 시도를 했는데 제1황후가 된다는 건? 이것 뭐가 있네~
이익주: 우리 너무 드라마처럼 생각하지 말고 정치적으로 해석을 해보죠. 순제가 어떤 황제냐면 몽골제국의 여러 황제 중에 제위 기간이 제일 긴 사람이에요. 37년 동안 일반적으로 왕이든 황제든 자리에 오래 있으면 힘이 점점 세어져요. 왕권은 시간에 비례해요. 왜나면 다 알기 때문에~ 신하들하고 이야기 할 때 신하가 말 안 들으면 내가 네 할아비를 아는데~
최태성: 영조~
이익주: 내가 해봐서 다 알아~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에요. 그런데 순제는 그게 안 돼요. 자기 힘이 없어서 그랬던 거지요. 그래서 어찌 보면은 자기 부인, 이 기황후의 힘이 내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애요. 자정원의 힘이 기황후 뿐만 아니라 나도 보호해 줄 수 있다. 황후가 밉지만 황후를 쳐내게 되면 황후가 싸우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상대로 싸울 수도 있다. 여기서 脣亡齒寒이라는 거죠. 그러면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기황후의 세력을 그대로 둘 수 밖에 없는 이런 불쌍한 처지였을 가능성이 큰 거죠. 사랑의 힘이라기 보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최원정: 강력한 황제의 나라에서 황제는 정작 힘이 약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황제에 대적했던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이광용: 천하를 호령하던 대원제국의 황제에 견줄만큼 위세가 든든한 인물을 오늘 역사저널 그날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최태성: 아니, 교수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김성곤: (원나라 관료복장을 하고 등장) 난 김성곤 교수가 아니오.
이시원: 그럼 누구십니까?
김성곤: 나는 원나라 순제를 황위에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권신 바얀이올시다.
이광용: 바얀님, 오늘 스튜디오에 어렵게 모셨는데요. 먼저 원나라 조정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요?
김성곤(권신 바얀役): 네~, 제 직함이 좀 긴 편이라서 (두루마리를 보면서) 커닝을 좀 하겠습니다. 제 직함을 말씀 드리자면~
元德上輔廣忠宣義正 節振武佐運功臣 (---)
최태성: 아니 어디까지 가시는 거예요?
김성곤: 太師開府儀同三사 秦王答刺공 中書右丞相 (---)
이광용: 저, 바얀님, 죄송한데요. 저희 방송시간이 제약이 있어서~ 일단 이걸 참고하시고요.
최태성: 이게 정말 직함이에요? 언제 끝나는 거야?
김성곤: 두루두루 관직을 다 겸직하고 있습니다.
이광용: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관직명이 몇 자일까요? 246자 밖에 안 됩니다.
최태성: 우리나라 고려시대 때 문신 이자겸의 직함이 54자도 놀랬는데~
이광용: 근데 이게 한 관직명은 아닐 것이고 여~~러 직함을 한 곳에 모은 거죠?
김성곤: 그렇습니다.
최태성: 관직들이 엄청나요 주로 뭘 맡으신 거예요?
이광용: 딱 봐도 뭔가 그럴듯해 보이고 근사해 보이고 힘이 있어 보이는 관직들이 눈에 띄어요.
김성곤: 太師 황제의 스승이자 최고의 명예직, 그 다음에 행정을 장악하는 대원의 최고관직 中書右丞相 또 군대를 장악해야 힘이 있어요 錄軍國重事 그래서 저의 생일 때는 온갖 관리들이 저한테 잘 보일려고 문전성시 야단법석이 납니다.
최태성: 과로로 쓰러지시겠어요. 너무 일이 많아요.
이시원: 눈이 몇 개예요?
이광용: 그런데 교수님, 과몰입으로 지금 정신이 없어요.
김성곤: 여기서 부터는 김성곤 교수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긴 직함이 바로 원나라의 쇠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사실 권력이라는 것은 분산이 되어야 서로 견제함으로 정치가 잘 작동하기 마련인데~ 한 사람이 독식을 하다 보니 정치가 엉망이 되고 그래서 나라가 기울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이광용: 그런데 문제는 원나라를 쥐락펴락했던 그 권신의 횡포, 과연 하나에 그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원나라의 막장 권신 정치~ 다음 이야기는 원탁에서 책임지세요------------
일동: (김성곤 교수를 항해) 교수님, 감사합니다.
최원정: 권신들이 황제에 맞먹는 권력을 갖고 나라를 쥐락펴락했다는 거잖아요.
이익주: 태자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서로 황제가 되겠다고 싸우고 이러다 보니까 아까 어떤 황제에게 줄을 설까 이런 얘기를 했잖아요. 이제 이게 꺼꾸로 됩니다. 황제가 될 사람이 어떤 신하 누구에게 가서 줄을 설까. 누가 나를 황제로 만들어줄까 이렇게 바뀌는 거예요. 그러니까 킨 메이커가 있는 거고 킹 메이커가 자기가 믿는 사람이 황제가 되면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이것이 원 말기의 권신정치죠.
권용철: 이런 권신들 중에서도 바얀뿐만 아니라 톡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톡토는 바얀의 조카입니다. 바얀이 무려 246개의 직항을 가지고 전횡을 부리니까 이거 잘못하면 우리 집안이 다 날라가겠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순제하고 아주 은밀하게 모의를 합니다. 그리고 바얀을 쫓아내게 되는 거죠.
최태성: 조카가~
권용철: 조카가 큰 아버지를 쫓아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순제 조정의 1인자로 올라서게 되는 거죠. 그리고 또 톡토의 특징은 공녀 기씨가 제2 황후가 되는데 있어서 든든한 조력자의 역할도 합니다. 그 전에 바얀은 안된다. 고려인 황후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된다 라고 결사반대 했던 사람인데 쫓겨났잖아요. 그 다음에 정권이 바뀐 거죠(바얀 -> 톡토). 그럼으로써 기황후가 제2 황후로 올라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었죠.
최태성: 기황후가 아들 있지~ 권력자 있지~ 조건들이 지금 굉장히 좋아요.
권용철: 그런데 약 13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기황후의 아들인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이 되냐 마냐 이것을 가지고 조정에서 논쟁이 있을 때 톡토는 약간 미온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허준: 여지 껏 밀어주었는데 도움 줘 놓고서는 왜?
권용철: 결국 제2 황후라는 것과 그리고 아유시리바라도 고려인 출신이라는 걸 극복하지를 못했다. 엄연히 제1 황후가 존재했습니다. 여기서 기활후와 톡토의 갈등이 시작되다.
최원정: 이런 상황 속에서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 시키는 일이 또 벌어집니다.
--------------------다큐멘터리 <대황하> 中----해설: 물이 터졌다. 사람이 빠졌다. 제방이 무너지는 상황을 예상한 대대적인 방제훈련이 시작됐다--------------------
최태성: 저거 진짜야~
허준: 훈련이라고 했어요, 훈련
해설: 징소리를 신호로 마을 사람들이 달려온다. 진짜 황하 물을 채운 저수지의 제방을 파괴하고 그것을 응급 복구하는 훈련인데 연습 같지가 않다.
최태성: 실전처럼 하는구나
허준: 그런데 진짜 터뜨렸데요.
이시원: 실제 해보는 거구나.
허준: 저건 훈련이지만 훈련이 아닌 거야.
해설: 홍수계절을 맞아서 이와 같은 방제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이시원: 얼마나 재난이 크면 이런 훈련까지 하겠어요.
해설: 제방 복구에 버드 나무 가지가 사용된다.
최원정: 1917년도에 방송된 다큐멘터리 인데요. 지금도 실제로 저렇게 벌어지고 있다는 거죠.
허준: 1980년대에도 사람들이 훈련할 정도니 그때 당시에는 어마어마 했을 거예요.
이시원: 재난 그 자체예요.
최태성; 실제로 1330년부터 1369년 까지 40년 동안 황하 중 하류에 제방이 터져가지고 무려 7번이나 범람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한번 범람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재해예요. 이 주변의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사람을 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아주 극한에 처했다고 그래요.
이익주: 특히 1351년의 황하 범람은 굉장히 유명한 사건이구요. 황하의 물길이 바뀔 정도의 큰 범람이라고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수하기 위해 15만명의 백성과 군 2만명을 동원했다고 해요. 동원된 농민들이 몽골 사람들이 아니라 한족이죠. 그러다 보니까 민족감정까지 여기에 얼키게 되는 거예요. 한족 농민들의 반감이 자연재해에 더 증폭이 되는 거죠.
권용철: 그리고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업친데 덥친 격으로 전염병까지 창궐을 하게 되고요. 14세기에 서유럽을 휩쓸었던 전염병 있죠.
이시원: 흑사병~
권용철: 네, 흑사병~ 그와 비슷한 전염병이 당시 중동, 중앙 아시아, 동아시아 전체에 비슷한 전염병이 발생합니다. 생각해 보면 몽골 제국 전체 영역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데요. 일설에 의하면 당시 몽골 인구의 3분의 1이 전염병 때문에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최원정: 지금 몽골은 역참제 하면서 네트워크가 활발한 나라인 데 흑사병이 얼마나 빨리 돌았겠어요. 감염 경로가 다양하게 이루어 졌을 것 같애요.
최태성: 온 지역에 역동적인 몽골 제국의 네트워크가 일시 정지된 그런 모습이 나온 거죠.
권용철: 그렇죠, 교류에 장애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물자의 흐름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고 정보의 교류도 원할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아예 이 시기를 전염병 기근 홍수 기타 등등 이런 걸 다 포괄해서 14세기의 위기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허준: 다 같이 뭉쳐서 여러 인종과 문화가 섞이잖아요. 이런 식으로 전염병이 확산되면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변해요. 그래서 자신들의 커뮤니티만 단단해지고 다른 모든 것들은 느슨해 지는 것 같은 느낌에~
이시원: 뭔가 조화롭게 만들었던 나라에 지금 균열이 생기고 있는 느낌이에요.
최태성: 진짜 죽어가는 상황이네요. 이러니까 그러면 이런 말 나와야죠. 못살겠다! 갈아보자! 이게 나라냐! 이러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쓴 농민들이 등장합니다 (드라마 <개국>中), (홍건적의 난-몽골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족의 농민반란),
권용철: 바로 이때 순제가 홍건적을 진압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보내야 되는데~ 계속 진압이 안되니까 결국은 권신이었던 톡토라는 조정 최고 관료가 직접 출정할 정도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입니다. 전쟁에서 톡토가 열심히 싸우고 있던 도중에 조정에서는 황태자 문제도 있었고 톡토하고 갈등을 빚고 있었던 카마 라고 하는 사람이 톡토를 견제하기 위해서 기황후와 몰래 계책을 짜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계획이 먹혀들어서 결국 전쟁중 톡토가 관직을 다 잃게 됩니다.
최태성: 전쟁 중 장수는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시원: 그러면 나라는 도대체 누가 지켜요?
이익주: 그런데 이 톡토가 싸우러 간 그 사람들을 우리는 홍건적(紅巾賊) 이라고 했잖아요. 근데 본인들 스스로 한족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홍건군 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몽골의 시각에서는 홍건적 이렇게 부르게 된 겁니다. 어쨋거나 톡토가 해임된 뒤 몽골군이 괴멸돼요. 일설에 의하면 800만 대군으로 까지 추정되거든요. 그런데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전 괴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홍건군이 싸우는 것에 대해서 몽골군이 전혀 대응을 하지 못해요.
이시원: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는데 그럼 이제 누군가 한번 등장할 것 같은데요.
이익주: 맞아요, 홍건군이 막 이렇게 세력을 키울 때 그때 주원장이 등장하는 거예요 (주원장-명나라의 태조,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움). 이 사람이 전쟁의 와중에서 주변의 홍건군을 규합합니다. 이게 다 한족농민들이잖아요. 이 사람들을 규합해서 세력을 넓혀 가요.
최원정: 톡토의 퇴출이 독이 됐어요.
이익주: 원사 톡토 열전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만약 톡토가 죽지 않았다면 어찌 천하에 지금과 같은 환란이 있겠습니까. 원이 쇠망하는 것이 톡토가 퇴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톡토가 퇴출되는 것은 기황후 때문이다. 이러면서 기황후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허준: 말도 안돼.
이시원: 이건 근데 좀 희생양인 거 같애요. 어찌 보면 그 당시 권신정치라는 건 구조적인 문제인데 이걸 기뢍후한테만 물어보나
최원정: 지금 권신들이 득세하고 재난에 기근에 민중 봉기 까지 왕조 말기까지 징조들이 한꺼번에 다 나타나고 있는 거죠. 대원제국이 쇠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외적인 사건이 또 발생합니다.
-----------------이광용: 대원제국이 점점 솨락의 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 고려 공민왕과 기황후는 또 다른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원 나라에서 기황후가 득세하자 자연스럽게 고려에서는 기씨 집안이 얼마나 기세가 등등 했겠습니까. 특히나 기황후 오빠들의 횡포가 어마어마 했습니다. 특히 기철은 공민왕에게 시를 지어 올릴 때 자신을 신하라고 쓰지 않았어요. 게다가 기원은 왕과 말을 탈 때 뒤에서 타야 되는데 왕이랑 나란히 타요. 같은 위치에서 동등하다 이거예요 (안하무인).
최태성; 그 엄청난 대원 제국의 황태자의 삼촌뻘이 되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거죠.
이광용: 1356년 그러던 어느날 궁에서 잔치가 열립니다.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기철을 포함해서 친원파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요.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매복해 있던 장사들이 이들을 망치로 다 때려 죽여 버립니다. 친원파 싹쓸이~ 공민왕 Win~ 홍건적이 원의 존망을 뒤흔들고 있을 때 공민왕이 그 틈을 타서 기황후의 고려내 인척들을 싹으리 없애 버린 겁니다.
이시원: 가만히 있을 기황후가 아닐 것 같은데요.
이광용: 이 소식을 듣고 기황후는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복수를 결심하죠. 고려로 쳐들어가자 라고 된 겁니다.
최원정: 아무리 화가 나도 그건 아니지~
이시원: 그런데 또 이해는 가요. 자기 친척들을 다 죽였는데~ 자기가 그 만큼 힘이 있고 그러면 복수할 것 같애요.
이광용: 기황후의 고려 침공결과는 어땠을 것 같애요?
이시원: 참패?
이광용: 왜 기황후 세력이 참패했을까요? 우리에겐, 우리 고려에는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준: 대원제국이 사실 홍건적 한테도 다 털리고 힘을 못쓰던 상황인데 고려 정규군과 같이 붙었다. 이건 기황후가 아무리 분노했어도 무리수를 둔 것입니다.
이시원: 이성을 잃은 거죠 그 당시에는~
이광용: 여기서 재미있는 것 하나가 있는데요. 기황후가 고려를 침공하기 위해 준비한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무려 8년이었답니다.
일동: 8년 동안이나??
이광용: 군사를 끌어 모우고 설득하고 막상 쳐들어가는 날까지 8년이나 걸렸다는 겁니다. 그만큼 전쟁을 준비하고 결행하는데 힘이 모자랐던 상황이었던 거죠. 대원 제국이 이렇게 속빈 강정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알았던 주원장, 결국 무서운 기세로 원을 압박해 들어가는 데요. 1368년 순제와 기황후, 황태자는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버리고 북쪽으로(상도-응창) 도망가게 됩니다. 이렇게 천하를 호령했던 그 몽골제국, 대원제국은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권용철: 결국 순제가 대도를 벗어나서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는 상황인데요. 그렇게 1년반 정도의 도피생활을 하다가 아까 지도에 맨 북쪽에 지명이 하나 있었는데 응창이라고 하는 곳에서 1370년 병에 걸려서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했을 때 나이가 51세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칸이 죽었으니 드디어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그 뒤를 이어서 칸이 될 수 있었죠. 소종(북원의 2대 황제 재위 1370~1378년), 그리고 칸이 되고 나서 8년 만에 1378년에 사망합니다. 그러면 기황후는 도망가서 어떻게 되었을까? 이게 굉장히 궁금한데 관련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의 기록이 나와 있는게 뭐냐면 북쪽으로 도망갈 때에 기황후가 자기 아들인 아유시리다라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왜 고려한테 복수 안해줘~ 고려의 최영과 이성계 한테 한번 참패를 당했거든요. 그런데도 미련을 못버리고 도망을 가면서도 고려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최원정: 근데 몽골제국의 칸이 여럿 있잖아요. 대원 제국이 망했다고 해서 몽골 제국 자체가 망한건 아니지요?
이익주: 그렇죠, 몽골제국은 네 개의 울루스로 이루어져 있는데~(주치 울루스+차가타이 울루스+훌레구 울루스+ 카안 울루스(대원)+고려), 오늘 우리가 이야기를 한 것은 전부 대원 카안 울루스의 멸망을 이야기 한거고 나머지 3개 울루스는 각기 자기들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은 훌레구 울루스(1335해체), 차가타이 울루스(1347분열)는 대원(카안 울루스) 보다 먼저 멸망하거나 유명무실해져요. 그리고 지금 러시아 지역에 있었던 주치 울루스는 오래 갔는데 1480년에 모스크바 공국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등장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몽골의 영향이 가장 오랫동안 남은 지역이 러시아 지역이죠.
권용철; 그 다음에 명나라가 중원 땅에 들어서게 되지만 우리가 잊으면 안될 게 몽골 사람들이 완전히 멸망한 게 아니라 북쪽 초원으로 도망을 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후퇴한 몽골인들이 나중에 명나라와 계속해서 대치 상태로 가게 되는 거죠. 심지어 15세기 중반에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몽골세력이 침입을 해가지고 명나라 황제를 포로로 잡습니다. 그 정도로 아직은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대원이 힘을 갖고 있었어요.
이익주: 저게 언제까지 가느냐면 병자호란 때까지 가요. 병자호란 때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청나라 홍타이지(청제국의 초대 황제)가 조선을 공격해 오기 전에 몽골을 점령합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 계속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던 몽골의 칸으로 부터 1635년 도장 하나를 뺏는데 이 도장이 칭기즈칸으로부터 전해지던 옥쇄였다는 거에요(大元傳國 이름의 금도장). 그래서 내가 칭기즈칸의 정통성을 잇는 황제가 될꺼야 라고 해서 황제에 직위하고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어요. 이걸 주변 나라들은 다 인정을 했는데 조선만 우린 인정할 수 없어 이랬고 이래서 병자호란 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뒤에 중앙 아시아 쪽에도 유목국가로 계속 명목을 유지하다가 준가르 라는 나라가 있어요. 준가르가 18세기에 청나라에 점령 당하면서 중앙 아시아의 유목 역사가 끝이 납니다. 준가르가 망한 그 지역이 지금의 신장지역이에요.
이시원: 풀 게티가 이런 말을 했더라구요. 부자가 되는 것 보다 부자로 사는 게 훨씬 어렵다. 이게 몰골제국과 비슷한 거 같아요. 대제국을 이루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으나 그 대제국을 유지하는 건 정말 힘들었다. 어찌보면 기동성으로 제국을 만들었는데 그걸 유지하는데는 힘이 부치지 않았나.
허준: 기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조건들이 있는데 군사전문가들의 말로는 말을 아무리 빠르게 타도 총을 쏘면 끝난다. 화약 무기의 등장은 유목 민족의 기동성을 약화시켰다.
최원정: 시대 변화를 꾀하지 못한 게 몽골의 패착이었다. 몽골제국을 몇 년 지속했다고 우리가 봐야 할까요.
이익주: 1206년 몽골 울루스가 만들어졌고 대도를 뺏기고 북쪽으로 올라간 그 나라가 1388년에 멸망하니까 182년이 되나요.
최원정: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기간이지만 하여튼 역사 속에서 몽골이 각인되는 게 굉장히 확실한 거 같애요.
이익주: 유산이 분명히 있습니다. 몽골 제국이 망한 다음에 유라시아 대륙에 커다란 제국들이 만들어져요. 동쪽에는 명나라 (1368~1644), 중앙 아시아에 티무르 제국(1370~1507), 중동에 오스만 제국(1299~1922), 그 다음에 북쪽에 모스크바 대공국-러시아 제국(1283~1917), 인도의 무굴제국(1526~1857) 등이 만들어지는데 이 넓은 제국들이 전부 사라진 몽골제국과 경쟁을 해요. 내가 몽골제국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영토를 확장하고 그러면서 중앙 아시아가 커다란 전쟁터가 돼죠.
이시원: 몽골의 그림자와 싸우는 느낌이에요.
이익주: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몽골의 그림자, 몽골의 유령하고 싸우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까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나가지를 못하는데 이것이 바다로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에요. 오히려 몽골 제국 바깥에서 몽골제국으로부터 여러가지 정보를 얻고 했던 유럽의 나라들은 몽골제국 이후의 대항해 시대를 열거든요. 그런데 몽골제국 안에 있던 이 지역에서는 계속 내륙지향의 정책을 써가면서~
이시원: 방향성이 아쉽네요.
이익주: 새로운 뭔가를 하지 못한 거죠. 몽골이 했던 거를 그대로 할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 다음 세기에는 유럽과의 경쟁에서 뒤쳐지기 시작합니다.
권용철: 몽골 제국은 강력한 기마군단을 형성하면서 농경국가를 정복했고 심지어 바다까지 장악을 하면서 유례없는 광역 네트워크를 만들어 냈죠. 그래서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네트워크를 통해 왕래를 하면서 세계에 대한 정보를 쌓게 되는데요. 예를 들자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들 수 있는데 서아시아 쪽의 지리지식이 몽골 제국을 통해서 한반도까지 전파가 됐던 거고, 그 결과 1402년에 조선에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라는 위대한 유산이 탄생할 수 있었죠. 이 지도를 보게 되면 한반도, 중국은 당연히 있고 아라비아 반도도 그려져 있어요. 아프리카 대륙도 그려져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아프리카까지 갈 일이 없었거든요. 직접 가서 저걸 측량할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몽골 시대에 지리지식의 전파를 통해서 좀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한 결과가 바로 저 지도입니다.
이시원: 어찌보면 몽골에 의해서 동양 쪽에서는 서양을 알고, 서양 쪽에서는 동양을 알고 이게 나중에는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어떻게 보면 그 시초네요.
이익주: 세계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는 게 하나가 있습니다. 세계가 만들어지니까 그 세계의 역사를 쓰는데 우리가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책 한 권이 있어요. 훌레구 울루스의 라시드 앗딘 (Rasid al-Din) 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습니다. Jami al Tawa rikh를 집사(集史)라고 번역을 하는데 이 책은 정말 재밋는 구성으로 되어 있어요. 훌레구 울루스에서 썼는데 자기네 역사만 쓴 게 아니라 몽골의 역사도 쓰고, 몽골 칭기즈칸 조상들의 역사도 쓰고, 자기들과 동시대의 다른 지역의 역사도 써요.
이시원: 먼 나라 이웃 나라 같은 이야기 네요.
이익주: 그렇죠, 그렇죠, 중국, 인도, 프랑크, 유대의 역사까지 저술해 놔요. 최초의 세계사가 만들어진 거에요.
최원정: 칭기즈칸부터 시작해서 기황후까지 몽골제국의 흥망성쇠를 7편으로 해서 살펴 보았는데 특별하게 마무리를 몽골제국하면 떠오르는 사자성어로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어려운 숙제죠?
이시원: 저는 몽골제국의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가 세계사를 바라봤던 눈이 정저지와 井底之蛙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았다 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냥 세계사 라는 게 이 나라 땅, 저 나라 땅, 그냥 따로 따로 인줄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 따로 인줄 생각했는데 몽골의 역사를 배우면서 이렇게 유기적으로 역사가 연결되어 있구나 내가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눈으로 세계사를 바라 보았구나 라고 깨달았습니다.
권용철: 저는 상전벽해 桑田碧海(세상이 몰라보게 달라짐) 라는 한자 성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칭기즈칸 시기부터 시작된 정복으로 인해서 사람들 진짜 많이 죽었구요. 많은 국가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기존세계의 모습이 몽골로 인해 변화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는 거죠. 몽골제국도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도 상전벽해 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는 전쟁, 잔인함, 약탈, 야만 이런 용어가 이미지를 통해서만 몽골제국을 묘사했다면 이제는 거기에 덧부쳐서 유라시아에 대교류의 장을 형성했던 플랫폼 국가로서의 모습, 이런 것까지 조명을 하게 되면서 몽골제국이 세계사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한 전환기를 만들었구나.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구나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익주: 저는 루트2 라고 하는 깨달음입니다.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 길이가 루트2입니다. 이 숫자는 우리 주변에 벌려있고 석굴암에도 이 숫자가 있어요. 그런데 이 숫자를 우리 식으로 풀려고 하면 대단히 어렵습니다. 1.41421356237…이러고도 끝나지 않아요. 루트2를 우리 식으로 번역을 할려면 어렵지만 루트2야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쉽거든요. 우리와 다른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자꾸 우리 식으로 요구하지 말고 그건 그런 거야 이렇게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거죠. 몽골이 낯설지만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보다 못한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저건 저대로 의미가 있는 거야. 인정하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저들이 우리를 보면 똑 같을 수 있어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어 우리를 상대화하고 세번째 단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몽골을 합쳐야 전체가 되는 거야. 인류의 역사로서 두개가 합쳐져야 되는 거야 라는 종합적인 시각을 가질 때까지 이것이 한국사와 세계사를 동시에 공부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최원정: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두분께 감사드리고요. 세계사의 시작, 몽골제국의 이야기는 오늘 마무리 하고요.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세계 역사로 돌입하는 대항해의 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33회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제국 [제7편] 고려인 기씨氏, 원나라의 황후가 되다 에서 정리).
① 천하를 호령했던 세계 역사 속에서 어쩌면 칭기즈칸 만큼이나 열심을 기울이게 되는 인물이 있다. 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 그녀의 남편은 대원 순제(大元 順帝) (토곤 테무른칸)이다, 그녀는 예쁜게 문제가 아니고 성품과 행동이 문제였다. 그녀를 영힐(穎黠) 하다고 했다, 영리하고 교활하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기황후 때문에 원나라가 망했다고 하는데 이는 전부 한족들이 하는 말이고 몽골 사람들은 그런 말을 안 한다, 한족은 기황후가 원나라 멸망의 빌미를 제공한 사람이란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몽골사는 기황후에 대해서 대원제국 말기에 극심했던 권력투쟁에 본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국을 더 혼란하게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하고있다. 기황후가 권력투쟁에 몸을 바치게 된 거는 고려출신으로 혈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처절한 노력이었다.
② 기황후는 고려 행주 기씨 집안 8남매 中 막내딸, 고려에서 차출된 공녀출신, 몽골제국은 네 개의 울루스의 연맹 형태로 칭기즈칸의 후손이라는 연대감-일체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이 되고 있었다. 카안 울루스(大元)+주치 울루스+ 차가타이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고려, 그 중에서 카안 울루스는 네 울루스 중에서 종주국의 위치에 있었다. 기황후가 공녀로 대원에 오게 되었다. 고려는 대원으로부터 정치적 간섭을 받았다. 여러가지 물자를 수탈당했다. 물자수탈에 더해서 사람까지 뺏기는 데, 사람은 환관과 공녀였다. 몽골은 처음에 고려에 들어와 있는 몽골군과 결혼할 사람을 빼앗아 갔다. 이렇게 공녀가 시작됐다. 그때는 신분적으로 하자가 있는 사람들, 반역한 사람들의 처 라든가 과부, 승려의 딸 이런 특별한 사람들이 갔는데 점차 시간이 가면서 일반 여성들이 어린 나이에 끌려가게 되었다. 공녀는 운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졌다. 정말 비참하게 노예 같은 삶을 살수도 있고 일부는 궁에 들어가서 궁녀가 되기도 하고 운이 좋은 경우에는 고위관료와 결혼을 해서 나름대로 소수지만 잘 살았다. 장래가 불안하니까 서로 안 갈려고 남장을 하기도 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도 하고 조혼을 하였다. 원나라는 다른 나라에서는 공녀차출이 없었다. 공녀차출이 고려와 원 관계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나니까 일부러 공녀를 보내는 사람들도 생겼다, 가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고 고위관료와 결혼해서 권세를 누리기도 하고 특히 기황후가 등장한 이후로는 일종의 몽골 드림이 생겼다.
③ 기황후는 1333년 순제가 즉위한 그 해에 황궁으로 들어온다. 이때 환관의 추천을 받았다. 고려인 환관이다. 역할은 순제에게 차를 따라 주는 시중이었다. 순제는 10대 소년때 즉위했다. 순제 당시 상황은 주변에 신료들이 무시할 정도로 권력이 약했다. 그 옆에서 궁녀인 기씨가 안식처 역할을 하였다. 고려출신 공녀 기씨가 어떻게 몽골의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1339년 고려 출신 후궁 기씨와 원 순제 사이에서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탄생한다. 아들의 탄생으로 기씨는 제2 황후 가 된다. 그로부터 13년 뒤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제국의 (?)가 된다. 대원제국 말기에 대파란이 예고되는 순간이었다. 기황후는 제2 황후가 된 이후 자정원(資政院)을 만든다. 자정원은 권력기반이자 재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자정원이라는 기구는 원래 휘정원(徽政院) 이라는 기구가 있었는데 휘정원은 태후의 궁정사무를 관활하고 보좌하는 기구였다. 그런데 기황후가 휘정원을 흡수해 자정원으로 고쳐버렸다. 자정원은 기황후의 세력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기황후는 고려 출신 환관들을 자정원에 배치시켰다. 궁정에 핵심 인력을 심어놓고 권력기반을 만들어놓고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이것(?)으로 등극시킬려고 했다. 제국의 이것이 되면서 파란을 예고했다. 이것의 정체는? 이것은 무엇이 되었을까? 순제한테는 황후가 3명이 있었다. 기황후가 세번째인데 앞의 두 황후한테서는 아들이 없었다. 기황후의 아들이 순제의 첫번째 맏아들이 된 것이다.
④ 쿠빌라이는 칸이 된 다음 해에 자기의 맏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중국의 제도를 본 땄다. 맏아들이 일찍 죽었다. 둘째 아들 친킴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는데 이 아들도 죽었다. 모처럼 황태자 제도를 도입을 했는데 실현되지 못하였다. 황태자 제도가 없기 때문에 직계로 이어지지 않는 복잡한 몽골제국의 황제계보! 제1대 세조(1260~1294)-친킴-카말라/다르마발라/제2대 성종(1294~1307)-제3대 무종(1307~1311)/제4대 인종(1311~1320)-제5대 영종(1320~1323)-제6대 태정제(1323~1328)-천순제(1328)-제7대/제9대 문종(1328~1329/1329~1332)/제8대 명종(1329)-제10대 영종(1332)/제11대 혜종(1333~1370). 제1대 세조 쿠빌라이가 1294년에 사망했다. 제11대 혜종 순제는 1333년에 즉위하였다. 50년도 안 되었다. 39년간 8명의 칸이 등장하였다. 평균 재임기간이 5년도 안 되었다. 칸들의 사망은 병사~독살~암살~피살~대부분 30~40대에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권력 옆에 붙은 측근들 움직임에 의해서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갔다. 결국 황제계승 원칙이 자리잡지 못해서 대원 제국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다. 기황후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었다. 1356년 그녀는 카마 라는 권신을 앞세워 황태자를 황제의 자리에 올리고자 시도했다. 왜냐면 황태자가 똑똑하고 총명하고 자격도 됐다. 지금 황제에게 태상황으로 올라가라고 요청한다. 황태자 나이 16살, 순제 나이 36세 밖에 안되었다. 이 정도면 자칫 역모가 될 수도 있다. 무리수를 둔 기황후,
⑤ 첫번째 황후는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독살됐다. 황실내 독살이 흔하였다. 기황후의 도발적인시도에 순제는 가만히 있었다. 이 사건을 기황후의 첫번째 내선(內禪) 시도라고 한다. 내선이라고 하는 말은 황제가 살아있는데 그 후계자한테 양위하는 것, 이걸 내선이라고 한다. 기황후는 첫번째 내선을 포함해서 세번이나 한다. 세번이나 이러면 사실 황태자의 목숨이 위태롭다. 사랑만으로 용서가 어려운 세번의 내선 시도, 황제 입장에서는 용서하지 못 했을 일이다. 부부관계에서 기황후가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다. 첫번째 내선 시도에 권신 카마가 처형이 되엇다. 반면 기황후는 딱히 처벌을 받지 않았다. 기황후는 3년 정도 이따가 1359년 두번째 내선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때에는 순제가 화가 나가지고 기황후를 두달 동안 안 봤다. 강력한 처벌을 내렸다고 하는 기록이 없다. 기황후가 처음에 제2황후였다. 제2황후가 된지 25년이 지나서 제1황후로 책봉이 되었다. 내선 시도를 했는데 제1황후가 된다(?). 순제가 어떤 황제냐면 몽골제국의 여러 황제 중에 제위 기간이 제일 긴 사람이다. 37년 동안 일반적으로 왕이든 황제든 자리에 오래 있으면 힘이 점점 세어진다. 왕권은 시간에 비례한다. 그런데 순제는 그게 안 되었다. 자기 힘이 없었다. 어찌 보면 자기 부인, 기황후의 힘이 내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정원의 힘이 기황후 뿐만 아니라 나도 보호해 줄 수 있다. 황후가 밉지만 황후를 쳐내게 되면 황후가 싸우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상대로 싸울 수도 있다, 脣亡齒寒. 그러면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기황후의 세력을 그대로 둘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였다. 사랑의 힘이라기 보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강력한 황제의 나라에서 황제는 정작 힘이 약했다. 그렇다면 황제에 대적했던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⑥ 원나라 순제를 황위에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권신 바얀이다. 관직명이 246자가 된다. 고려시대 때 문신 이자겸의 직함이 54자 였다. 太師 황제의 스승이자 최고의 명예직, 그 다음에 행정을 장악하는 대원의 최고관직 中書右丞相, 군대를 장악하는 錄軍國重事, 생일 때는 온갖 관리들이 잘 보일려고 문전성시 야단법석이다. 이 긴 직함이 원나라의 쇠망과 관련이 있다. 권력이라는 것은 분산이 되어야 서로 견제함으로 정치가 잘 작동하는데 한 사람이 독식을 하면 정치가 엉망이 되고 나라가 기울 수 밖에 없다. 원나라를 쥐락펴락했던 권신의 횡포, 하나에 그친 게 아니었다. 원나라의 막장 권신 정치, 권신들이 황제에 맞먹는 권력을 갖고 나라를 쥐락펴락했다.
태자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서로 황제가 되겠다고 싸우다 보니까 어떤 황제에게 줄을 설까가 아니라 황제가 될 사람이 누구에게 가서 줄을 설까. 누가 나를 황제로 만들어줄까 이렇게 바뀌었다. 그러니까 킹 메이커가 있고 킹 메이커는 자기가 믿는 사람이 황제가 되면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이것이 원 말기의 권신정치였다. 권신 중에는 바얀뿐만 아니라 톡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톡토는 바얀의 조카다. 바얀이 무려 246개의 직항을 가지고 전횡을 부리니까 이것 잘못하면 우리 집안이 다 날라가겠다 라고 생각을 해서 순제하고 아주 은밀하게 모의를 한다. 그리고 바얀을 쫓아낸다. 조카가 큰 아버지를 쫓아내었다. 톡토는 순제 조정의 1인자로 올라서게 되었다. 톡토의 특징은 공녀 기씨가 제2 황후가 되는데 든든한 조력자 역할도 했다. 그 전에 바얀은 결사반대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었다. 기황후가 제2 황후로 올라갈 여건이 마련됐다. 기황후에는 아들 권력자 조건들이 생겼다
⑦. 약 13년이 지난 후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이 되냐 마냐를 가지고 조정에서 논쟁이 있을 때 톡토는 미온적이었다. 결국 제2 황후라는 것과 아유시리바라도 고려인 출신이라는 걸 극복하지 못했다. 엄연히 제1 황후가 존재했다. 여기서 기활후와 톡토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 시키는 일이 또 벌어졌다. 1917년도에 방송된 다큐멘터리 <대황하>에서 보듯이 황하는 물이 범람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황하 물을 채운 저수지의 제방을 파괴하고 응급 복구하는 훈련을 한다. 1980년대에도 사람들이 훈련할 정도니 당시는 어마어마 했다. 실제로 1330년부터 1369년 까지 40년 동안 황하 하류에 제방이 터져가지고 범람하는 일이 무려 7번이나 벌어졌는데 한번 범람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재해를 당했다. 주변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심지어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아주 극한에 처했다. 특히 1351년의 황하 범람은 굉장히 유명한 사건이다. 황하의 물길이 바뀔 정도의 큰 범람이었다. 이것을 보수하기 위해 15만명의 백성과 2만명의 군인이 동원됐다. 동원된 농민들은 몽골 사람들이 아니라 한족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민족감정까지 얼키게 되었다. 한족 농민들의 반감이 자연재해에 더 증폭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업친데 덥친 격으로 전염병까지 창궐하였다. 14세기에 서유럽을 휩쓸었던 전염병이 당시 중동, 중앙 아시아, 동아시아 전체에 발생했다. 몽골 제국 전체 영역에 전염병이 돌고 있었다. 당시 몽골 인구의 3분의 1이 전염병 때문에 사망을 했다고 한다. 몽골은 역참제로 네트워크가 활발하여 흑사병이 빨리 돌았다. 감염 경로가 다양하게 이루어 졌다. 역동적인 몽골 제국의 네트워크가 일시 정지되었다. 교류에 장애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물자의 흐름도 정보의 교류도 원할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이 시기를 14세기의 위기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식으로 전염병이 확산되면 사람들은 적대적으로 변한다. 자신들의 커뮤니티만 생각한다. 조화롭던 나라에 균열이 생기고 죽어가는 상황이다. 이때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쓴 농민들이 등장하였다. 드라마 <개국>에서 보듯이 한족이 몽골의 지배에 항거하여 농민반란을 일으킨다,
⑧ 바로 이때 순제는 홍건적을 진압하기 권신 톡토를 출정시켰다. 톡토가 열심히 전쟁 중 조정에서는 톡토하고 갈등을 빚고 있던 카마가 톡토를 견제하기 위해서 기황후와 몰래 계책을 짠다. 그 계획이 먹혀들어서 톡토가 해임되고 관직을 다 잃는다. 톡토가 싸우러 간 사람들을 우리는 홍건적(紅巾賊) 이라고 부른다. 근데 한족 농민들은 홍건군 이라고 부른다. 톡토가 해임된 뒤 800만 추정 몽골군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괴멸이 된다. 그 이후로 몽골군은 홍건군에 대해서 전혀 대응을 못한다. 그때 주원장이 등장한다. (주원장-명나라의 태조,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움). 그는 전쟁의 와중에서 주변의 한족농민 홍건군을 규합한다. 톡토의 퇴출이 독이 됐다. 원사 톡토 열전에 원의 쇠망은 톡토 퇴출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톡토가 퇴출된 것은 기황후 때문이다. 이러면서 기황후 탓으로 돌리고 있다. 지금 권신들이 득세하고 재난에 기근에 민중 봉기까지 왕조 말기 징조들이 한꺼번에 나타나고 있다. 대원제국이 쇠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외적인 사건이 또 발생한다. 대원제국이 점점 솨락의 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 고려 공민왕과 기황후는 또 다른 갈등을 겪고 있었다. 원 나라에서 기황후가 득세하자 자연스럽게 고려에서는 기씨 집안이 기세가 등등해졌다. 기황후 오빠들의 횡포가 어마어마 했다. 특히 기철은 공민왕에게 시를 지어 올릴 때 자신을 신하라고 쓰지 않았다. 게다가 기원은 왕과 말을 탈 때 뒤에서 타야 되는데 왕이랑 나란히 같은 위치에서 탔다(안하무인). 1356년 그러던 어느날 궁에서 잔치가 열린다.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기철을 포함해서 친원파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매복해 있던 장사들이 이들을 망치로 다 때려 죽여 버렸다. 홍건적이 원의 존망을 뒤흔들고 있을 때 공민왕이 그 틈을 타서 기황후의 고려내 인척들을 없애 버렸다. 기황후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당연히 복수를 결심한다. 고려로 쳐들어가자. 기황후는 고려를 침공하기 위해 무려 8년을 준비하였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고려에는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황후의 고려침공은 무리수였다. 그만큼 전쟁을 준비하고 결행하는데 힘이 모자랐다.
⑨ 주원장은 대원 제국이 속빈 강정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알았다, 무서운 기세로 원을 압박해 들어갔다. 1368년, 순제와 기황후, 황태자는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버리고 북쪽으로(상도-응창) 도망갔다. 천하를 호령했던 그 몽골제국, 대원제국은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결국 순제는 1년반 정도의 도피생활을 하다가 맨 북쪽에 응창이라는 곳에서 1370년 병으로 51세에 사망하였다. 순제가 죽었으니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칸이 되었다. 소종(북원의 2대 황제 재위 1370~1378년), 그는 칸이 되고 나서 8년 만에 1378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면 기황후는 도망가서 어떻게 되었을까 이게 궁금한데 관련기록이 없다. 단지 하나의 기록이 나와 있는데 북쪽으로 도망갈 때에 기황후가 자기 아들 아유시리다라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왜 고려한테 복수 안해줘~ 대원 제국이 망했다고 해서 몽골 제국 자체가 망한건 아니다. 몽골제국은 네 개의 울루스로 이루어져 있다, 즉 주치 울루스+차가타이 울루스+훌레구 울루스+ 카안 울루스(대원)+고려다, 오늘 우리는 카안 울루스의 멸망을 이야기 하고있다. 나머지 3개 울루스는 그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실 훌레구 울루스(1335해체), 차가타이 울루스(1347분열)는 대원보다 먼저 멸망하거나 유명무실해졌다. 러시아 지역에 있었던 주치 울루스는 오래 갔는데 1480년에 모스크바 공국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등장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러시아는 몽골의 영향이 가장 오랫동안 남은 지역이다. 그 다음에 명나라가 중원 땅에 들어서는데 우리가 잊으면 안될 게 대원이 완전히 멸망한 게 아니라 북쪽 초원으로 도망을 간 상태였다. 후퇴한 대원이 나중에 명나라와 계속해서 대치 하였다. 심지어 15세기 중반에는 대원군이 명나라를 침입 해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그 정도로 아직은 대원이 힘을 갖고 있었다.
⑩ 저게 언제까지 가느냐면 병자호란 때까지다. 병자호란 때 조선에 쳐들어온 청나라 홍타이지(청제국의 초대 황제)가 조선을 공격해 오기 전에 몽골을 점령한다. 그 지역에서 계속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던 대원의 칸으로 부터 1635년 도장 하나를 뺏는데 이 도장이 칭기즈칸으로부터 전해지던 옥쇄였다는 거다(大元傳國 이름의 금도장). 그래서 내가 칭기즈칸의 정통성을 잇는 황제가 되겠다 해서 홍타이지는 황제 직위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다. 이걸 주변 나라들은 다 인정을 했는데 조선만 인정할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병자호란의 참화를 당하었다. 그리고 그 뒤에 중앙 아시아 쪽에 준가르 라는 유목국가를 유지하다가 18세기에 준가르가 청나라에 점령 당하면서 중앙 아시아의 유목 역사가 끝이 난다. 준가르가 망한 그 지역이 지금의 신장지역이다.
⑪ 기동성으로 대제국을 이루었으나 그 대제국을 유지하는 건 정말 힘들었다. 기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조건들이 있는데 말을 아무리 빠르게 타도 총을 쏘면 끝난다. 화약 무기의 등장은 유목 민족의 기동성을 무력화시켰다. 한마디로 시대 변화를 꾀하지 못한 게 몽골의 패착이었다. 그래서 몽골제국은 1206년 몽골 울루스가 만들어졌고 대도를 뺏기고 북쪽으로 올라간 그 나라가 1388년에 멸망하기까지 182년이 되었다. 세계 역사 속에서 몽골이 각인되는 게 굉장히 확실하다. 유산이 분명히 있다. 몽골 제국이 망한 다음에 유라시아 대륙에 커다란 제국들이 만들어졌다. 동쪽에는 명나라(1368~1644), 중앙아시아에 티무르 제국(1370~1507), 중동에 오스만제국(1299~1922), 그 다음에 북쪽에 모스크바 대공국-러시아 제국(1283~1917), 인도의 무굴제국(1526~1857) 등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제국들이 사라진 몽골제국과 경쟁을 한다. 내가 몽골제국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영토를 확장하고 그러면서 중앙 아시아가 커다란 전쟁터가 되었다. 몽골의 그림자와 싸우는 거였다.
그렇다, 바로 그거 몽골의 그림자, 몽골의 유령하고 싸우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까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나가지를 못하여 이것이 바다로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몽골 제국 바깥에서 몽골제국으로부터 여러가지 정보를 얻고 했던 유럽의 나라들은 몽골제국 이후의 대항해 시대를 열어나갔다. 새로운 뭔가를 하지 못하였다. 몽골이 했던 거를 반복하였다. 그래서 다음 세기에는 유럽과의 경쟁에서 뒤쳐지기 시작했다.
⑫ 몽골 제국은 강력한 기마군단을 형성하면서 유례없는 광역 네트워크를 만들어 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면서 세계에 대한 정보를 쌓게 되었다. 그 결과 1402년에 조선에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라는 위대한 지도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지도를 보게 되면 한반도, 중국은 당연히 있고 아라비아 반도도 그려져 있다. 아프리카 대륙도 그려져 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아프리카까지 갈 일이 없었다. 직접 가서 측량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몽골 시대에 지리지식의 전파를 통해서 넓은 시야를 확보한 결과가 바로 저 지도다. 몽골에 의해서 동양에서는 서양을 알고, 서양에서는 동양을 알고 이게 나중에는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만들었다. 세계사가 만들어졌고 그 세계사 속에서 우리가 살펴보지 못한 책 한 권이 있다. 훌레구 울루스의 라시드 앗딘 (Rasid al-Din) 이라는 사람의 책이다. Jami al Tawa rikh를 집사(集史)라고 번역을 하는데 이 책은 정말 재밋게 구성되어 있다. 훌레구 울루스에서 썼는데 자기네 역사만 쓴 게 아니라 몽골의 역사도 쓰고, 몽골 칭기즈칸 조상들의 역사도 쓰고, 자기들과 동시대의 다른 지역의 역사도 썼다.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다. 중국, 인도, 프랑스, 유대의 역사까지 저술해 놔서 최초의 세계사가 만들어졌다.
⑬ 칭기즈칸부터 시작해서 기황후까지 몽골제국의 흥망성쇠를 7편으로 해서 살펴 보았다. 몽골제국의 역사를 배우면서 세계 역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칭기즈칸부터 정복으로 인해서 사람들 진짜 많이 죽었다. 많은 국가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기존세계의 모습이 몽골로 인해 변화될 수 밖에 없었다. 몽골제국도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도 상전벽해 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몽골 제국을 전쟁, 잔인함, 약탈, 야만 이란 용어로 묘사했다면 이제는 거기에 덧부쳐서 유라시아에 대교류의 장을 형성했던 플랫폼 국가로서의 모습을 조명을 하게 되면서 몽골제국이 세계사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한 전환기를 만들었다.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다 라고 평가하게 되었다. 우리와 다른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자꾸 우리 식으로 요구하지 말고 그걸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몽골이 낯설지만 상대화하고 우리와 몽골을 합쳐야 전체가 되는 인류의 역사로서 합쳐져야 되는 종합적인 시각을 가질 때 이것이 한국사와 세계사를 동시에 공부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