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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숙자의 ‘눈물의 연평도’
☞ 서해 최북단의 섬 백령도!
이곳은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방문을 해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개인이 찾아가기엔 마음먹기가 엄청 어려운 곳이다.
북녘 땅 코밑을 통과하는 해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연평도〉, 〈소청도〉, 〈대청도〉를 경유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인천에서 백령도까지의 여객선 승선료가 김해에서 제주도 가는 비행기 값보다 비싼 것도 그 원인중 하나이다.
☞ 2015.10.29(목) ~ 11.1(일) 백령도 일원
2009년도에 통일부 부설 ‘통일교육원’에서 ‘사이버통일’ 연수를 실시하였다.
연수 후에 실시하는 평가에서 성적우수 수료생을 전국에서 40명 선발하였다.
이들은 통일부에서 비용을 부담하여 ‘판문점’일원을 견학시켰다.
이때 운이 좋게도 나는 영천에 근무하는 대학동기 정○태 군과 함께 다녀 온 적이 있다.
2015년에도 동일한 과정으로 연수를 실시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령도’를 탐방한다는 정보를 접하다.
정년으로 교직생활을 마감하는 해라서 이번이 나에겐 마지막 기회이다.
그리하여 연초부터 3번의 각기 다른 과정에 도전하여 좋은 성적을 받았다.
결과는 전국에서 30명에 선발이 되어 참여를 하게 되었다.
물론 ‘통일교육원’에서 일체의 경비를 부담하는 일정이다.
교육원에서 나온 직원이 모든 일정을 책임지고 안내를 했다.
‘백령도’현지에서는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정훈장교’가 멋진 브리핑을 하여 아주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배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동북방향에 보이는 북녘 땅'옹진반도'를 바라보며 운항을 하였다.
북한 땅이 바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곳이라 긴장이 되었다.
더구나 최근에만 하여도 [연평해전], [천안함폭침사건], [연평도포격도발사건] 등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바다, 바로 그곳을 통과하는 길이기에 더욱 긴장이 되었다.
뱃머리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저 멀리 북녘 땅이 그림같이 희미하게 누워있다.
우리가 탄 배는 [연평해전]이 벌어진 바로 그곳을 통과하고 있다.
길게 말없이 조용하게 누워있는 저 섬이 바로 ‘연평도’다.
- '백령도'와 '연평도' 부근 -
지도를 보면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는 모두가 북한 땅 코밑에 위치하고 있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자기네 코 밑에 있는 섬인데 우리에게 빼앗겼으니 분통이 터질 일이다.
6.25당시 해군력에서 밀리다보니 코앞에 땅도 빼앗겼다고 한다.
우리로서는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연평도’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김남풍 작사, 김부해 작곡으로 1964년에 가수 최숙자가 발표한 ‘눈물의 연평도’이다.
1. 조기를 담뿍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배는 어이하여 아니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이름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
♩♪♬ ~ ♩♪♬ ~
2. 태풍이 원수더라 한많은 사라호
황천간 그얼굴 언제다시 만나보리
해저문 백사장에 그모습 그리면
등대불만 깜박이네 눈물의 연평도
♩♪♬ ~ ♩♪♬ ~
또 다른 사연은 온 국민이 월드컵 열풍에 젖어 있을 무렵에 벌어진 [연평해전]이다.
♣ [연평해전]은?
☞ 역사적 배경
1999년 6월 7일부터 14일까지 북한 경비정이 어선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해상의 북방한계선(NLL)을 무시하면서 침범 및 철수를 반복하였다.
우리 해군은 참수리급 고속정을 이용하여 북한 경비정의 선체 뒷부분을 부딪쳐서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 경과
1999년 6월 7일 연평도 서북쪽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 3척이 어선 보호 미명하에 북방한계선을 3.5㎞ 침범했다.
다음날에도 북한은 경비정 4척과 어선 10척을 북방한계선 남쪽 9㎞까지 침범시켰다.
이에 우리 해군은 「교전규칙」과 「국제법」에 의해 퇴각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경비정 3척을 추가 투입해 전투적인 행동을 계속하였다.
6월 9일에는 북한 고속정이 우리 해군의 고속정을 충돌하여 손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북한 경비정의 침범이 계속되자 우리 해군은 6월 11일 북한 경비정 4척에 대해 선체 뒷부분을 부딪치는 〈충돌작전〉을 실시했다.
그러던 중 6월 15일 오전에 북한 경비정 7척이 우리 해군 고속정에 접근하여 충돌공격을 실시하였다.
이에 맞대응하여 우리 해군도 충돌공격을 가하였다.
양측 간에 혼전이 벌어지던 중 북한이 먼저 사격을 가해옴에 따라 우리 해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즉각 대응사격을 하였다.
쌍방 간의 교전은 14분간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북한은 어뢰정 1척이 격침되고 5척이 크게 파손 당하여 북으로 도주하였다.
반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 5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이것이 〈제1차 연평해전〉이다.
제1차 연평해전이 벌어지고 3년이 지났다.
2002년 6월 29일은 ‘2002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이었다.
북한은 또다시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여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이날 오전에 북방한계선을 넘기 시작한 북한 경비정들은 근접차단을 실시하던 우리 해군의 참수리 357호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우리 해군도 참수리 ‘357호’와 ‘358호’가 대응사격을 개시하는 한편 인근의 제천·진해함과 참수리급 경비정 4척을 투입해 격파사격을 실시하였다.
교전은 31분간 진행된 후 북한의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 북으로 퇴각함으로써 종결되었다.
☞ 결과
우리 해군은 기습 공격을 받은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되었다.
정장인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한상국 상사 및 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의 전사자와 18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북한은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다.
정부는 이 처절한 전투를 당초에는 ‘서해교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추모행사도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정부기념행사가 아닌 군부대에서 하였다.
이 해전은 군인들만의 전투가 아니다.
국가를 지키는 일이니 추모행사도 당연히 정부가 주관하는 것이 맞다.
용감하게 싸우던 호국용사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체 2008년 2월이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그러자 그해 4월에 〈제2연평해전〉으로 명명하고 추모행사도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정부기념행사로 격상시켰다.
나라를 위해서 꽃다운 청춘들이 목숨을 지키며 사수한 전투다.
북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 군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못해준 셈이다.
정권에 따라서 ‘호국용사’들에 대한 대우가 오락가락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겠다.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비겁한 짖이다.
☞ 의의와 평가
우리 해군은 연평해전을 계기로 교전규칙을 소극적 대응에서 적극적인 응전 개념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 시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밀어내기 작전)·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5단계 대응에서
“시위기동·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3단계 대응으로 개정하였다.
♣ [제2연평해전]은?
[평범한 군인들의 평범하지 않은 하루 - 2002년 6월 29일]
제1연평해전에서 패하고 북으로 도망친 3년이 지난 2002년에 대한민국은 월드컵 열기에 붉게 달아올랐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되는 것만으로도 감동이거늘 그해의 태극전사들은 월드컵 참가 이래 최고의 성적을 국민들에게 선사했다.
준결승에서 독일에게 진 우리는 터키와의 3,4위전에 필승의 각오를 다진다.
온 국민의 관심이 저녁에 있을 터키와의 경기에 쏠려있던 6월 29일 오전 9시 37분.
서해를 경비 중이던 〈참수리 357〉함의 레이더에 이상한 점 하나가 포착된다.
20노트의 속도로 남하하고 있는 작은 점이 윤영하 정장(당시 대위)의 눈에 들어온다.
<“나라 잘 지킬 테니 마음 편히 월드컵을 즐기라!”며 인터뷰를 했던 故 윤영하소령 - 이 모습이 그의 마지막이 되었다.>
해군 고속정은 두 척이 1개의 편대를 이뤄 작전을 수행한다.
당시 참수리 357이 속해있던 232편대의 김찬 편대장(소령)도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윤영하 정장이 발견한 점보다 서쪽으로 7마일 떨어진 등산곶 부근에서 다른 점 하나가 17노트의 속도로 남하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이 상황은 해군2함대사령부로 보고가 되었고 긴급 출동명령이 내려진다.
동시에 2함대사령부에는 위기조치반이 가동되었고 편대장 김찬 소령은 2함대에 식별한 내용을 보고한다.
〈232편대〉는 전투배치를 하고 긴급 발진을 한다.
차단 기동을 위해 적선에 다가가던 윤영하 정장은 북한 경비정의 배 번호를 확인한다.
자주 보던 번호였지만 배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처럼 상당히 낯설었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탱크의 포신 같은 육중한 포가 함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새롭게 대포를 보강한 것이었다.
배를 확인한 232편대는 경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북방한계선을 월선 했으니 즉각 북쪽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메시지를 무시한 채 적의 경비정 684호는 12노트의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 남하한다.
10시 25분
〈232편대장〉이 타고 있던 고속정이 북한 경비정 684호의 선수 앞을 가로지르며 커브를 그리며 돌아나갔다.
동시에 〈참수리 357〉도 북한 경비정의 선수 부분에서 좌현을 드러내며 지나가려는 그 순간에 북한 경비정에서 섬광과 함께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북한의 684호가 참수리 357호를 선수를 치며 기습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은 참수리 357을 계획적으로 노리고 있었다.
[31분-그 짧고도 긴 장렬한 전투-떠나버린 전우여]
〈참수리 357〉의 대원들은 본능적이고 반사적으로 반격을 한다.
모든 무기와 총에서는 불꽃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북의 선제 기습공격에 조타실과 기관실이 피격당하며 전원이 끊어졌다.
전원이 끊어져 자동 사격이 불가능해지자 수동으로 전환하여 격렬한 전투를 이어간다.
조타실이 피격당하며 조타장비가 고장이 난 배는 더 이상 앞으로는 가지 못하고 오른쪽으로만 돌았고 북의 경비정은 도망을 못가는 이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 사격을 한다.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에서 참수리 357은 필사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 순간 윤영하 정장이 적의 공격에 쓰러졌고 동시에
“정장님을 보호하라!”
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지혈을 하지만 이내 전사를 하고 말았다.
정장이 전사하자 부 정장이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절대로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계속 사격하라!”
라며 대원들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부 정장 이희완 중위 역시 포탄에 한쪽 다리뼈가 으스러지고 다른 쪽 다리는 관통을 당하는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K-2 소총으로 응사를 하고 있던 권기형 상병도 파편에 맞아 왼쪽 손가락에 큰 부상을 입었다.
간신히 붙어 있는 손가락을 보고도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방탄조끼 끈으로 팔목을 묶어 지혈을 한 뒤 한쪽 손으로 탄창을 네 개나 갈아 끼우며 전의를 불태웠다.
20mm포 사수였던 조천형 하사는 포탑에서 끝까지 응사하다 포탑이 불길에 휩싸이며 눈을 감았다.
조하사와 함께 전투를 하던 황도현 하사는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아 두부의 1/3이 없어진 채 전사를 한다.
날아온 총알이 서후원 하사의 왼쪽 가슴에 파고들었고 그 역시 못다 핀 청춘의 눈을 감았다.
조타실에 있던 한상국 하사도 피격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피가 흘러나오는 것도 잊은 듯이 키를 더 꼭 붙잡았다.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상병이 빨리 피신할 것을 권고했지만 한 하사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틀 후면 꿈에 그리던 중사로 진급하는데…….
불이 붙은 배, 빗발치는 총알, 매캐한 연기, 피로 뒤범벅이 된 갑판에서 박동혁 상병은 더는 대원들의 희생이 없길 바라며 의무병이었지만 그도 공격에 가담한다.
그리고 그는 수없는 파편을 맞고 쓰러지고 맙니다.
31분.
〈참수리 357〉에 타고 있던 대원들에게 31분이란 시간은 과연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그 장렬하고도 슬픈 31분의 시간이 지나고 현장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 해군의 또 다른 고속정이 북의 684호에 집중 사격을 가했고 달아나는 684호를 추격하며 응분의 의지를 불태웠다.
[참수리 357호 서해에 잠들다!]
북 함선이 퇴각하자 명중탄을 맞아 뚫린 선체 구멍으로 해수가 차오르는 〈참수리 357호〉 예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미 함미와 조타실이 공격을 당해 자동 조타가 되지 않는데다 유입되는 해수로 인해 회복 불능 상태가 된 상태였다.
화염에 휩싸인 조타실과 통신실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고 갑판에는 대원들의 피가 흥건했으며 살점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후송하고 생존자들을 대피시키는 등 참수리 357의 갑판은 유난히도 바빴다.
당시 편대장 김찬 소령은
“수습을 위해 참수리 357에 올라 대원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부상당한 대원 중 어느 누구도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 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라고 한다.
그 31분의 상황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옆자리를 채워주던 전우의 전사 앞에 당한 만큼 갚아주지 못한 응어리 맺힌 심장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모든 것을 월드컵이라는 이름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232편대가 죽을힘을 다해 영해를 지키는 그 순간에 초계함은 후방 지원에 나섰고 공군의 KF-16과 F-4가 초계비행을 했다.
해군의 링스헬기도 미사일을 싣고 비상대기에 들어갔다.
우리 함정들로부터 함포와 기관포 세례를 받은 북한경비정에서는 화염이 치솟고 시커먼 연기에 휩싸이며 선체가 기울어졌으나 침몰하지는 않았다.
화력에 열세를 느낀 북한경비정들은 속도를 높여 퇴각을 했다.
그때 시각이 10시 50분이다.
예인되던 참수리 357은 계속되는 침수로 급격히 기울었고 결국 예인 불가 판단이 떨어짐에 따라 연평도 앞 바다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게 되었다.
우리 해군의 피해는 전사 4명, 부상 19명, 실종 1명. 그리고 바다 속에 잠든 고속정 1척.
피비린내 자욱한 전쟁은 그렇게 많은 상처를 남긴 채 〈서해교전〉이란 이름표를 달고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 인양 후 평택 해군 기지에 전시 중인 참수리 357호의 포격 흔적 -
♣ [연평도 포격전]은?
2010년 11월 23일에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북한군이 벌인 도발이다.
그들은 기습적으로 방사포 170여발을 민간 시설을 포함한 군부대에 무차별적으로 퍼 부었다.
이에 우리 해병대는 K9 자주포 3문으로 80여발을 쏘며 대응 포격으로 맞서다.
피해 규모는 군인전사자가 2명, 16명이 부상이고 민간인이 2명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당하다.
또한 연평도의 각종 시설 및 가옥이 파괴되어 재산 피해를 입었다.
국군은 서해 5도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뒤 곧 전군으로 확대 발령하였다.
휴전 협정 이후 북한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직접 타격하여 민간인이 사망한 최초의 사건인 탓에 국제 사회의 큰 관심을 끌었다.
당시 국제 사회는 북한을 규탄했으나 그들은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었으며 전적인 책임은 대한민국에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하였다.
천안함 피격 사건에 이어 8개월 만에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양측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2021년 3월 31일.
국방부는 해병대와 전사자 유족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건의 공식 명칭을 〈연평도 포격 도발〉에서 〈연평도 포격전〉으로 변경했다.
앞서 해병대사령부는 2012년과 2015년에 '연평도 포격 도발' 명칭을 '포격전'으로 바꿔줄 것을 국방부에 건의했지만 변경되지 않았다.
전사자 유족들로부터도 변경 요청이 있었다.
변경되기 전에도 해병대는 자체적으로 '연평도 포격전'이라는 용어를 계속 써왔다.
♣ [눈물의 연평도]는?
4분의 2박자 트위스트 곡으로 멜로디는 흥겹지만 가사 내용은 그렇지 않다.
연평도의 슬픈 사연이 그림을 보는 듯 잘 묘사되어 있다.
‘눈물’, ‘황천’ 등 노랫말 속의 단어들이 그런 분위기를 읽게 한다.
1959년 9월에 한반도를 휩쓸었던 태풍 ‘사라호’에 희생된 어부들을 추모하기 위해 곡이 만들어졌다.
- 최숙자의 원음 노래 -
작사가 김남풍은 그 때의 눈물겨운 사건을 노랫말로 엮어 숨진 어부들의 넋을 달랬다.
그 때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사람은 어민이다.
조기떼를 쫓아 연평도 앞바다에 모였을 때 사정없이 불어 닥친 사라호로 변을 당했다.
추석명절을 앞뒤로 나흘간 휩쓴 사라호 태풍으로 사망 및 실종 800여명, 이재민 37여만 명으로 피해가 엄청났다.
연평도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후유증이 수년간 이어지는 가운데 ‘눈물의 연평도’ 노래가 만들어져 연평도 사람과 유족들의 마음을 달랬다.
‘눈물의 연평도’는 분단시대를 몸소 겪으며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잃어버린 꿈이요!
못 다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어촌사람들의 외로움은 눈물이고 한이 되었다.
연평도 사람들 중에서 장·노년층들은 요즘도 ‘눈물의 연평도’를 자주 부른다.
술자리나 회식, 즐겁거나 슬플 때 빠지지 않고 부르는 곡이다.
특히 지아비를 잃고 홀로된 아낙들이 애창한다.
‘눈물의 연평도’는 당시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며 국민애창곡이 되었다.
이미자, 조미미, 하춘화, 김상진, 나훈아 등 다른 가수들도 리바이벌해서 취입을 했다.
연평도전망대의 조기전시관 앞에는 ‘눈물의 연평도’ 노래비까지 세워졌다.
♣ 가수 [최숙자]는?
노래를 취입한 최숙자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그녀는 1941년생이다.
1957년에 데뷔했으며 히트곡은 개나리 처녀, 눈물의 연평도, 처녀 뱃사공, 갑돌이와 갑순이,어머니 전상서 등이다.
‘나룻배 처녀’, ‘효녀심청’, ‘모녀기타’ 등을 부른 그녀는
‘가는 봄 오는 봄’을 백설희와 듀엣으로 불러 연속 상종가를 쳤다.
특유의 구성진 음색에 기교가 넘쳤던 가수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끈 가수지만 음반과 방송을 통해서만 활동하고 무대엔 자주 서지 않았다.
1977년 미국으로 이민 가서 생활하다가 2012년에 지병으로 향년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 [연평도]는?
우리나라 3대 어장의 한 곳인 연평도는 가요 ‘눈물의 연평도’ 바람에 더욱 유명해졌다.
1968년까지만 해도 ‘조기의 섬’이었다.
해마다 4월 중순에서 6월 초까지 조기 철이 되면 엄청나게 북적댔다.
전국 각지의 어선들이 조기떼를 따라 이곳에 몰려들었다.
성어기엔 3천~5천척의 배들이 모여들어 큰 어장을 이뤘다.
연평도는 북위 37°38'의 서해안 북단 섬이다.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에 속한 곳으로 지명의 한자풀이대로 길쭉하고 평평한 섬이다.
인천에서 서북방 122㎞, 북한과는 불과 3.4㎞거리다.
휴전선과 닿은 장방형의 ‘대연평도’, ‘소연평도’와 작은 무인도들로 이루어져있다.
중심섬인 대연평도는 127m의 언덕을 축으로 한다.
연근해에서 조기가 많이 잡혔으나 지금은 꽃게가 대신하고 있다.
농어, 홍어, 새우 등이 잡히고 굴과 김, 바지락도 양식이 된다.
마을은 동쪽에 연평마을을 중심으로 몰려있다.
인천항에서 정기여객선이 오간다.
소연평도는 214m의 언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연평도는 생태계의 보물섬이기도 하다.
천연기념물인 ‘저어새’와 ‘검은머리 물떼새’의 서식지다.
구리동 자연해변, 얼굴바위, 등대공원, 가래칠기 오석해안, 빠삐용 절벽, 아이스크림 바위(송곳바위), 관광전망대(조기역사관), 망향비 등이 볼거리다.
화려했던 연평도의 모습 뒤엔 태풍과 북한도발 등 아픈 역사가 있다.
1999년 6월에 ‘제1차 연평해전’, 2002년 6월 ‘월드컵 축구대회’ 기간에는 ‘제2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연평도는 전쟁의 공포에 잠 못 드는 사람과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갈 수 없어 눈물짓는 이들이 함께하는 곳이다.
첫댓글 침으로 상세하게 서술 하시어 가슴아픈섬 추억해 봅니다.
재향군인회 총무이 사 시절 연평도를 가게 되었는데 배멀미로 엄청고생하여 숙소에 뻗어 자느라 행사장엔 가지도 못했습니다.
한숨자고 행사장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니 그곳엔 택시가 없어 군부대 연락하니 기다리면 나간다고 연락와서 기다리던중 벌써 행사 마치고 오는 분들 만나 포기하고, 저녁에 포격맞은곳에 한번 둘러보러 갔답니다.
음식이고 숙소고 모두 군인들이 운영하는 곳에만 간건지? 그곳엔 군인들만 운영하는지~~
횟집같은건 일반인 들이고 작은섬에 싱싱하게 살아 뛰는 바닷가제를 둥지체 방치해둬서 한봉투 챙겨와 저녁에 삶아 먹곤 했답니다.
저녁12시에 관광차로 출발 했는데 한숨만자고 가려고 10시경 누웠는데 단톡이 계속 와서 한숨도 못자고 갔더니 멀미로 엄청 고생하고, 올때는 멀미 없이 잘 왔답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일뿐~~
좋은 경험 잘 하셨네요!
젊은 시절에 기회가 될 때 부지런히 많은 경험을 해두면, 나이 들어서 좋은 추억이 됨을 새삼스럽게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