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도
곽 흥 렬
“많이 읽어라, 그러나 많은 책을 읽지는 마라(Read much, but not many books)”
한 일간지 단평란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칼럼의 글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칼럼의 필자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생전에 남긴 불후의 명언으로 소개해 놓았다. 언어유희를 즐기듯, 앞뒤 구절의 낱말들을 서로 모순되어 보이게 얽어 짠 프랭클린의 한마디가 오늘따라 심장하게 다가온다.
영어 원문 가운데서 유독 ‘much’와 ‘many’에 줄곧 생각이 머문다. 복수로 쓰일 수 없는 much와 복수로 쓰이는 many의 차이에서, 책을 많이 읽기는 하되 무조건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말고 가려서 읽으라는 것이 행간에 숨겨진 의미임을 알아차린다.
세상에는 양서도 많지만 악서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 덮어놓고 읽는 것은 오히려 읽지 아니함만 못하다. 양서는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지만, 악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세상을 부패케 만드는 독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불현듯 프랭클린의 명언을 인생살이의 교분으로 환치시켜 보고픈 충동을 느낀다. 둘 사이에 유비類比가 서로 썩 어울림직 하다는 전제를 세우고 들어간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이야기쯤이 될 것 같다.
‘많이 사귀어라, 그러나 많은 사람을 사귀지는 마라.’ 이래 놓고 보니 이 말은, 사람을 사귀되 어중이떠중이 덮어놓고 사귀지 말고 진정 사람다운 사람을 깊이 있게 사귀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거니 싶다.
세상에는 발걸음에 차이는 것이 사람이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사람다운 사람은 그 가운데 얼마나 될까. 선한 사람도 많지만 악한 사람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고 했다. 주사를 가까이하면 붉게 되고 먹을 가까이하면 검게 된다는 가르침 아닌가.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고 읊은 옛시조도 벗을 사귐에 있어서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는, 같은 아포리즘일 터이다.
사람이 지구별 여행을 끝내고 세상을 떠날 때, 옆에 단 한 명의 친구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고 한 금언을 떠올려 본다. 친구가 아무리 많다 한들 하나라도 제대로 된 친구가 없다면 그는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평가를 면키 어려우리라.
오늘 같은 날이면, 지금껏 수십 년 세월 동안 그리 적달 수 없는 책을 읽었으되 과연 얼마만큼 가려서 읽었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육십갑자가 넘도록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친구를 사귀었으되 그 가운데 정작 몇이나 제대로 사귀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게도 된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영 자신이 서지 않는다. 나의 독서도讀書道 그리고 교우도交友道는, 모르긴 모르지만 그예 실패작으로 끝나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제까지의 부끄러움에다 또 다른 부끄러움들을 보태게 될 판이다.
사람살이, 이래저래 참 호락호락하지 않은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