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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동학,증산 스크랩 해월 보은 장내리와 해월신사-삼암 표영삼
멩이 추천 0 조회 17 08.01.23 23: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보은 장내리와 해월신사

표영삼__ 서울교구·선도사

머리말


   포덕 28년(1887년,丁亥)에 접어들면서 동학은 강원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점차 남쪽 지역인 전라도와 경상도 쪽으로 뻗어나갔다. 동학 조직이 확대되자 새로운 관리체계가 필요했다. 즉 전국 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중앙협의기구가 필요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도소(都所) 설치와 육임제(六任制)를 신설했다. 해월신사는 이미 육임제에 대해 가섭사(迦葉寺)에서 기도할 때 구상을 끝낸 바 있다. 동학 도소는 지금의 천도교 중앙총부와 같은 것이며 육임제는 협의 기구와 같은 것이다. 육임직의 구성은 교(敎, 敎長, 敎授)·집(執, 都執, 執綱)·정(正, 大正, 中正) 등 세 분야로 나뉘어져 있다. 교화하고 지도하는 교(敎)의 부분과 조직체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집(執)의 부분과 업무를 공정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정(正)의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 해월신사는 보은 장내리에 도소를 설치하고 육임을 임명하는 새로운 조직의 관리체계를 만들어 동학을 한 차원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장내리 시대를 연 셈이다. 여기까지 이른 전후 관계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경상도 남부에 포덕


   포덕 28년(1887년,丁亥) 1월 1일 해월신사는 상주 앞재에서 새해를 맞았다. 새해를 맞은 이날 시 한 수를 지었다. “무극대도작심성(無極大道作心誠) 원통봉하우통통(圓通峰下又通通)”이라는 시이다. “작심하고 무극대도에 정성 드리니 원통봉하에서 통하고 통하고 또 통하는 구나”라는 내용이다. 원통봉(587m)은 해월신사가 살던 전성촌 집 뒷산이다. 시의 내용은 새해를 맞아 무극대도를 발전시켜야겠다는 결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포덕 27년에 해월신사의 위생 준칙이 널리 보급되어 도인들의 전염병 예방에 큰 화제를 모아 일반 민중들도 동학에 관심이 높아가고 있었다.
   이 해(1887년)에 아들 덕기(崔德基, 陽鳳, 率峰)는 13세가 되고, 1월 15일에 장가를 보냈다. 해월신사도 기뻐했지만 김씨 사모님의 기쁨은 더했다. 청주 율봉(栗峰)의 음선장(陰善長, 1840년생) 둘째 딸과 혼인을 했다. 음선장의 첫째 딸은 서인주(徐仁周, 璋玉)의 부인이다. 덕기의 혼사도 서인주의 중매로 이루어졌다. 덕기와 서인주는 동서간이 되었다. 사위 서장옥의 권유로 포덕 25년(甲申年, 1884년)에 입도한 음선장은 동학혁명에도 참여하였고 그 후 동학 활동에 힘쓰다가 66세 되던 포덕 41(1900)년 체포되어 11월에 종신형을 받았다. 그러나 김씨 사모님의 기쁨은 잠시였다. 한달 후인 2월초에 우연하게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해월신사의 간호가 지극했으나 20여 일 만인 2월 24일에 상을 치르게 되었다. 원통봉 아래 밭머리 끝자락에 모셨다. 마을에 사는 박성순(朴聖順)에게 논 네 마지기를 사서 주고 묘소를 관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포덕 120(1979)년 가을에 손자 최익환(宗法師 崔益煥)이 화장하였다. 당시에는 주변에 밤나무도 여러 그루 있었다. 지금은 논으로 바뀌어 어디가 묘소 자리인지 분간이 어렵다.
   김씨 부인과 사별한 해월신사는 2월 그믐께 이곳에서 떠났다. 보은 장내리로 나와 첫째 부인 손씨 사모님이 살고 있는 집으로 가서 살림을 합쳤다. 『해월선생문집』에는 “을유년(1885) 2월에 서인주가 돈을 내고 황하일이 주선하여, 선생의 초취(初娶) 부인 손씨(孫氏)를 보은 장내의 한 전장(田庄)에 모시었다. 이때 전성(前城)의 전답 소출은 김연국에게 주었다. 장내(帳內) 큰댁에 살림을 합쳤다. 모시고 있던 사람은 장한주 한 사람이었다.”

해월신사의 회갑


   3월 21일은 해월신사의 회갑일(回甲日)이다. 각 포 지도자들은 회갑잔치를 마련하였다. 해월신사는 김씨 부인이 환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용히 지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일생에 한번 있는 회갑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잔치를 푸짐히 차렸다. 각지에서 많은 지도자들이 모였다. 헌수(獻壽)도 올렸다. 어느덧 3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해월신사는 조용한 산중에 들어가 당분간 물 소리와 바람 소리와 새 소리를 들으며 묻혀 있고 싶었다. 장한주에게 손씨 부인과 식구들을 돌보게 하고 정선으로 갔다. 무은담 유시헌을 찾아가자 고한(古汗) 갈래사(葛來寺, 靜岩寺)를 주선하여 주었다. 여기서 49일간의 기도를 드리면서 싱싱한 5월을 맞았다. 이곳으로 온 지 얼마 후 서인주와 손천민이 따라왔다. 유시헌의 큰아들 유택하(劉澤夏, 1867∼1925)는 “정해(1887년) 3월에 서일해(서인주)와 더불어 태백산 갈래사(정암사) 공부 시 주승은 청암이요, 과량(過糧) 등유(燈油) 등절을 다 준비하시고 부친께서 당부하기를 잡인을 분주케 말라 하시다. 각처 도인들이 자연 알고 혹 밀밀 상봉하더니 4월에 이르러 손사문(孫士文, 天民)이 내도하야 왈 태백산 공부할 곳을 정하여 주면 감자로 양식하고 지내기를 청하거늘 부친이 동거하여 해월 선생께 알현하시고 근처 능이 암자의 주승 전수자(全首子)로 부탁하여 감자 과량으로 지내게 하시다.”고 하였다.
   기도하던 중 해월신사는 시 한 수를 지었다. “뜻하지 않은 사월에 사월이 오니 금사(金士) 옥사(玉士) 또 옥사로다. 오늘 내일 또 내일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을 알리. 날이 가고 달이 오고 새날이 오니 천지 정신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구나.”라는 시였다. 난해하다. 세상이 빠르게 새로워져 가고 있으니 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인 것 같다.

장내리에 도소 세워


   기도를 마친 해월신사는 5월 중순경에 보은 장내리로 돌아왔다. 소식을 들은 각지 도인들은 다시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도인뿐만 아니라 경상도와 전라도 도인들도 많이 찾아왔다. 전국적으로 도인 수가 늘어나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동시에 조직을 관리하는데 뜻밖의 어려운 일들이 생겼다. 관의 탄압도 더욱 심해갔으며 조직간(연원간)의 분쟁, 지도자 양성의 시급성도 대두되었다. 그 중에서도 시급한 일은 찾아오는 도인들의 묵고 갈 숙소가 없다는 점과 많은 인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강론을 베풀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살림집은 열명만 들어앉으면 꽉 차 버린다. 해월신사는 이들을 수용할 집을 한 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6월에 측근들을 불러 상의하였다. 모두가 찬성하며 성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가을이 되자 도소(都所)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많은 인원이 동원되자 두 달 만에 건물은 모습을 드러냈다. 교중 기록에는 도소 자리가 장내리에 있었다고만 되어 있다. 언제 어디에 지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이로부터 “서울 장안만 장안이냐, 보은 장안도 장안이다“라는 이야기가 생겼다 한다. 척왜양창의운동 때 보은 관리의 보고에 “두목은 조석으로 집에서 돌담까지 출입하였다. 좌우에 죽 늘어서서 호위하고 오갔다”고 하였다. 동학 도소는 돌담자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장내리 1구 웃말에서 서원쪽으로 60m 가량 올라가면 왼편 산기슭에 관개수로(灌漑水路)가 나타난다. 여기서 산기슭 쪽으로 130m 가량 들어가면 오른쪽 논 가운데 돌담 흔적이 보인다. 바로 여기가 돌담(石城)자리이다. 여기서 산기슭 쪽으로 들어가면 큰 둑을 만난다. 지번(地番)으로 27의 4(畓)이다. 샘물이 솟아오르고 둑에서는 기와조각과 사금파리 조각을 찾을 수 있다. 여기가 바로 도소 자리로 추측한다. 『양호우선봉일기』 1894년 10월 14일조에 장위영 관령 이두황(李斗璜)은 이곳을 다음과 같은 기록하였다. 즉 “장내리의 모습을 둘러보니 산천은 험악하고 형세는 넓게 열렸으며 동리의 모양은 즐비한데 새로 지은 큰집 한 채가 주산 아래 있었다. 이 집은 최법헌의 처소라고 한다.” 하였다. ‘새로 지은 큰집 한 채’라고 하였으므로 도소 건물은 새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추측컨대 포덕 28(1887)년 6월에 발의하여 가을에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도소 건물이 완공되자 육임소를 설치하였다. 처음으로 동학 본부가 설치된 셈이다. 이후 도인들의 출입은 줄을 이었다. 해월신사를 보고자 찾아오는 이도 많았으나 동학본부 즉 도소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도 많았다. 육임소 임원들은 온종일 이들을 맞고 전송하느라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규제 방법을 마련하였다. 즉 대접주나 육임소의 소개장을 가지고 오도록 하였다. 『시천교종역사』에는 “도인들이 갈수록 밀려들어 응해 줄 수가 없었다. 해월은 육임소를 설치하여 매월 1회씩 각 포 두령들을 도소에 오게하여 강론을 듣고 돌아가 지도하도록 하였다. … 그리고 도인들이 장석(丈席, 신사)을 배알하려면 육임의 인가를 받도록 만들었다.”고 하였다. 『천도교서』에도 “정규(定規)하되 만약 육임의 선표(先票) 인가를 부득(不得)하면 장실에 진알(進謁)치 못하게 하니 자금으로 신사의 전권(全眷) 조제(調濟)의 방이 전혀 도집(都執)에게 재하더라.”고 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 의하면 “육임원은 매월 2회씩 교대케 하고 … 북접법헌(北接法軒)이라 쓴 첩지(帖紙)를 만들어 해월장(海月章)을 날인하시어 육임에게 반포하였다.”고 하였다. 육임원 6명 중 3명씩 한달에 두 번 교대하여 나오도록 하였다. 『전봉준 공초』에 “간혹 접주(接主) 등이 차출하기도 했다.”고 하였다. 대접주 또는 수접주가 자기 관내의 육임직을 선정하여 품달하면 해월신사의 승낙을 받은 다음 필요한 인원수만큼의 육임직 첩지를 받아다가 이름을 써넣어 차출했다는 말이다.

영ㆍ호남 조직 안정


   해월신사는 포덕 28(1887)년 11월이 되자 호남 지방을 순회하였다. 『천도교회월보』 통권 제203호 『여산종리원연혁』에 “익산군 남이면 남참의리(南參議里) 남계천(南啓天), 김정운(金正運), 김집중(金執仲) 가에 왕하사 포덕에 착수한지 미기(未幾)에 교도를 다득(多得)했다.”고 하였다. 1888년(戊子)을 맞은 해월은 1월에 호남 북부 지방 도인들의 요청에 따라 다시 순회에 나섰다. 전주에서 도인들과 같이 기도식을 봉행하였고 2월초에는 삼례로 나왔다. 『천도교서』에는 “1월에 신사 전주에서 기도식을 필하시고 도제(徒弟) 10여 인으로 더불어 삼례리(參禮里) 이명로(李明老) 집에 왔다.”고 하였다. 해월신사가 순회하고 나자 호남 지역은 자리잡아 갔다. 보은으로 돌아온 해월은 천식으로 고생하는 손씨 부인의 간호에 성심을 다하였다. 육임직을 비롯한 여러 측근들은 병간호에 매달려 있는 스승님을 안타깝게 여겼다. 포덕 29(1888)년 2월 하순에 지도자들은 해월신사에게 새 부인을 맞아 살림도 맡기고 손씨 부인의 간호도 맡기라고 권하였다. 해월신사는 완강히 거절하였다. 환갑이 지난 늙은이가 무슨 새장가냐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해월신사가 활동하게끔 하기 위해 적당한 분을 찾고 있었다. 이때 의암 손병희 성사가 나서서 자기 누이동생이 스승님을 모실 만하다고 제안했다.
   스승님은 승낙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성사 손병희는 3월 초 어느 날 청주에서 누이동생을 가마에 태워 보은으로 데려왔다. 육임직은 손병희의 누이동생이라며 해월에게 인사드리게 하였다. 『시천교종역사』에는 “무자년(戊子年) 3월에 스승님은 그 부인(손씨)을 걱정하였다. 손씨 부인은 점점 나이가 많아져 주인을 수발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육임직들은 뜻을 모아 새 부인으로 밀양 손씨를 맞으라고 강청하였다. 손씨는 손병희의 누이동생이었다.”고 하였다. 손씨 부인은 26세였고 해월신사는 63세였다. 결국 제자들의 강권에 따라 3월에 손씨 부인을 맞아들였다. 전언에 의하면 손씨 부인은 부상(夫喪)으로 친정에 돌아와 있었다. 몇 차례 해월신사의 옷을 지어 드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해월신사는 바느질 솜씨가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결론


   보은 장내리가 유명해진 것은 동학 도소가 처음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덕 34(1893)년에는 척왜양창의운동이 여기에서 시작되었고 포덕 35년 10월에는 충청·경기·강원 지역 동학군이 이 곳에 모여 재기포(再起包)의 깃발을 올렸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이처럼 산골 고을의 하잘 것 없는 마을에 도소를 세운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한마디로 동학도들이 모이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전라도에서 이곳으로 오자면 고산을 거쳐 진산→옥천→청산을 지나면 바로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상주 쪽과 황간 쪽, 괴산 쪽도 사통오달이다. 관의 지목이 심한 상황에서 도소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조건 때문이라 여겨진다. 장내리와 척왜양창의운동 및 동학혁명운동의 관계는 후에 다시 다루어 보기로 한다.
(신인간 146.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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