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의 장령이자 예학의 태두로 기호유학의 초석을 세운 사계 김장생이 금강가에 지은 임리정 논산여행
웅진강, 백마강, 고성진강 이라고도 불리던 금강이 강경젓갈로 유명한 논산 강경뜰로 가는 절경에 자리잡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사계 김장생·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우암 송시열 등의 여섯명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교육하
기 위해 세운 죽림서원 왼편 언덕에 자리잡은 정자가 바로 임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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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서원 전경>>
임리정은 서인의 장령이자 예학의 태두로 기호유학의 초석을 세운 사계 김장생(1548∼1631)이 율곡 이이·우계 성혼을
모시기 위해 황산서원(죽림서원)을 세운 후 조선 인조 4년(1626) 아름다운 금강을 바라보는 언덕에 세운 정자로 김장생
은 이곳에서 자신의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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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정자 이름을 황산정으로 지었으나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항상 신중을 기하라”라는 [시경]의 구절을 따서 임리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송익필로부터 사서와 근사록 등 학문을 배운 사계 김장생은 20세 무렵에 율곡 이이에게 이기설 등의 학문을 배워 1578년
(선조 11) 학행으로 벼슬길에 나섰으나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이 치열했고
이괄의 난과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혼란스런 시기여서 사상계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적 정통주의가 훨씬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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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리정비각과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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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은 국가의 위기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체계로서 예를 강조하여 일상생활에서 항상 계구신독을 염두
에 두고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그 마음이 발함에 모두 예에 맞게 행하고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여겨 가례를 통한 유
교적인 가족질서를 확립하고 관혼상제를 중시하는 등 예학론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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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익필에게서 배운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예학에 정통한 사계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이기설을 예론에서 이론적 배경
으로 삼아 예학의 태두가 되었으며 학문을 아들 김집에게 이어받게 하여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하였으며 죽림서원
(황산서원), 연산 돈암서원을 비롯하여 안성 도기서원 등에 제향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사계 김장생의 저서로는 상례비요, 가례집람, 전례문답 , 의례문답 등 예에 관한 것과 근사록석의, 경서변의 와 시문집
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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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의 아들 김집과 우암 송시열을 비롯하여, 송준길, 이유태, 강석기, 이시직, 최명길, 이덕수, 최명룡 등을
중심으로 기호학파가 크게 성하여 이황의 뒤를 이은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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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리정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어진 건축물로 앞면 3칸의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왼쪽
2칸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을 두었으며 뒤쪽으로는 사랑방을 2개를 꾸며 사람들이 모여서
학문을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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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리정 앞에 세워져 있는 임리정기비의 비문은 김상현이 찬하고, 김영목이 썼는데 김장생의 강학처에 정자를 세우고,
서원을 창건, 추배, 훼철되기까지의 일과 임리정기비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고 “슬프도다. 정자는 한 도리
의 작은 규모이나 우주 변화의 묘함을 거두어들이고 음양의 커지고 작아지는 기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험준한 바위를 끌
어안고 큰 물결과 급한 소용돌이를 가슴에 안으니 앞으로 오래도록 이지러지지 않으며 장차 더불어 그 수명을 함께 할
것이다” 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임리정에서 보는 죽림서원과 팔괘정, 황산전망대>>
충남 논산 기호유학 역사여행
임리정 시도유형문화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95번지
첫댓글 아도니스님 덕분에 한수 배우고 다녀갑니다
저도 배우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