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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1.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폴란드의 자모치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뮌의 해였고, 제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들)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의 글 「맑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맑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맑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부분에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맑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로 '계획'할 수가 없다. 비록 그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갇혀있어야만 했다.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맑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견해를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점 증가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한 제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라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맑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 바탕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1914년 8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후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문제가 제기되긴 했지만, 러시아 자체에서 해결될 수는 없음이 그에게는 분명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 표적을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룩셈부르크와 독일 노동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의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이른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2.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작
1)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이 겪은 1905년 러시아혁명의 생생한 경험에 기초하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을 1906년 가을, 독일 사민당의 만하임 당 대회를 앞두고 발간했다. (한국에는 「대중파업론」으로 알려져 있다)
1906년 룩셈부르크가 팸플릿을 쓸 당시, 그에게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에서 막 일어났던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 그 규모에 있어서 엄청난 어떤 것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1905년 러시아에서 홍수를 이룬 대대적 파업의 물결 전체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물결은 계급투쟁 전대미문의 폭발이었고,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해 그때까지 상상할 수 있던 모든 것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서로 다른 직업군들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즉각적인 요구와 혁명투쟁 사이의 구분도 낡은 것이었다. 갑자기, 전(前)자본주의적 약탈을 제거하는 것은 더는 노동계급이 자본가계급과 나란히 해결할 수 있는 과제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의 자체의 과제로 보였다. 결국, 1905년의 투쟁은 완전히 새로운 조직원칙을 낳았다. 투쟁을 조직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더는 노동조합의 임무도 그리고 노동자 정당의 임무도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자 대중이 이 임무를 스스로 넘겨받았다. 소비에트(독일어로는 레테, 노동자평의회)가 탄생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오직 노동계급 자신의 과업일 수밖에 없다는 맑스의 표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해졌다. 그것은 차르 제국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뒤흔든 역사적인 지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혁명을 현재의 사안으로 세움으로써 그리고 수십 년간 통용되던 전제들의 기반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맑스주의 노동자 운동을 뒤흔들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대대적 파업은 이른바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그런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체의 역사와 그 이전의 역사를 갖는 여러 해에 걸친 성장을 거친다. 대대적 파업의 시작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것들은 종종 나중에 가서야 그런 것으로 인식된다. 러시아에서 그것은 1896에서 1906까지 10년에 걸친 한 시기였다. 그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전히 경제적인 부분적 임금투쟁'으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4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총파업이 되었다. "지금은 이 사건이, 혁명의 엄청난 대대적 파업들에 비해서 사소해 보일지 모른다. 그 당시 러시아의 얼음같이 경직된 정치적 분위기에서 총파업이란 전례 없는 어떤 것이었고, 그것 자체가 일종의 축소판의 온전한 혁명이었다" (룩셈부르크 저작집(독어판), 제2권, 104쪽, 풀무질 162, 163쪽 참조)
이러한 종류의 작은 충돌들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것의 발단은 사소한 의미를 지닌다. 그 발생은 초보적이다.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기에 순전히 경제적이다. 그것이 대부분 겪게 되는 패배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왜 이러한 작은 전투로부터 막강하고 전반적인 운동이 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전체에 쌓이는 어떤 것의 표면을 때리는 가시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가 자본을 축적하는 동안, 노동계급은 궁핍과 비참을, 피폐와 수모를, 소외와 비(非)인간화를, 증오와 분노를 축적한다.” 노동자들은 대대적 파업에 돌입하면 그제야, 로자 룩셈부르크가 썼듯이,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참을 수 없어졌는가를 포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의식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고통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로 인한 고통이자 임금노동체제로 인한 고통이다.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고통에 대한 인식이, 그 원인의 인식이 노동자 투쟁을 더 높은 단계로 이끄는 것이다. 대대적 투쟁의 세기에는, 임금 노예제를 본래 특징짓는 모든 것이 피부로 느껴지게 될 것이고 쟁점화될 것이다. 정체되거나 삭감되는 임금, 노동시간의 연장이나 강화 또는 두 가지 모두, 직장지도부의 교만한 태도와 상사의 잔인성, 문화 결핍 또는 그러한 문화에의 노동자 접근차단, 직장 밖의 주거 - 및 생활 조건, 국가의 억압과 사법체계의 소란스러운 불공평,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패와 와해, 특히 임노동의 전반적이고 증대되는 불안정성 - 이 모든 것과 더 많은 것이 쌓여간다. 이 모든 것이 점점 더 피부에 와닿게 되고 의식된다. 불만이 분노로 바뀌는 시점까지, 어떤 것을 일으키기에 한점 불꽃이면 충분할 시점까지, 계급 일부분에 대한 - 개별적인 노동자 한 명에 대한 - 어떤 공격이라도 계급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그 시점까지. 이렇게 집단으로 저장된 경험은 노동자 대중이 때때로 몽유병자 같은 확신으로 - 행동하게 만든다 - 이것이 의식의 일부인 직관이다. 결국, 그러한 운동은 자본주의의 가장 깊은 내부의 경향 안에 강하게 뿌리박음으로써 그 자체의 힘을 얻는다. 1905년의 사건은 준비된 것이었고, 그것을 위한 준비 투쟁은 무역 및 산업위기로, 실업으로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초래되었다.
노동조합은 오늘날 계급투쟁의 전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제어요소이지만, 1905년 러시아에서 그것은 달랐다. 그 당시는 대대적 파업이 노동조합의 전반적인 창립을 위한 최초의 동력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이 노동조합은 처음부터, 본래 투쟁의 조직자, 즉 노동자평의회의 그늘 안에 있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1905년은, 계급이 단지 공동으로, 투쟁의 확대를 통해서만 어떤 것을 획득할 수 있는 그러한 새로운 시기에로의 진입을 알렸다. 노동조합적인 투쟁방법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낡은 것이 되었다. "혁명적 시기의 뇌우의 기운 속에서만 노동과 자본 사이의 이른바 어떤 부분적이고 작은 충돌도 하나의 전면적인 폭발로 자라날 수 있다. 독일에는 매년 그리고 매일 노동자와 기업가 사이에 치열하고 잔인한 충돌이 발생하지만, 그 투쟁은 관련된 개별 분야나 개별 도시, 공장의 장벽을 뛰어넘어 솟아오르지 않는다" (129쪽, 풀무질 195쪽)
독일에서 대대적 파업의 전개는 그 당시에도 이미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어려웠는데, 그곳에는 막강하고 종종 사회민주주의적이기도 한 노동조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곳의 상황은 그래서 모든 오래된 산업국가에서의 현재 상황과 더 유사했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에 관한 팸플릿을 쓰면서 독일의 상황을 러시아의 상황만큼이나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대적 파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하여 썼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당보다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 내부의, 심지어 당의 의회분파 내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했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쪽에서는 3년 동안 전쟁찬성파와 전쟁반대파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다가 결국 전쟁찬성파가 승리하고 그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노동조합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향토 전선에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로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조합은 전쟁경제와 공장에서 전시법의 수행을 더 많이 넘겨받았다. 게다가 이른바 노동조합 측은 자본이 당을 정복할 때 추진력이었고,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에 있어서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요한 두뇌의 살해에서도 그러했다. 독일에서 노동조합은 본래 사회민주당의 창조물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당의 정치적인 지도 아래 놓여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호황기에 - 베른슈타인이 당의 맑스주의적 기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을 때 - 그 당시 노동자 운동에서 기회주의의 발전은 특히 노동조합이 '후견인'으로서의 당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여 정치적으로 '중립성'의 태도를 보이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력은 러시아의 혁명적 사건에 의해 새로운 양분을 공급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글에서 당이 이제 노동조합에 대한 지도적인 위치를 되찾을 것을 요구했다. 1906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만하임 전당대회에서 카우츠키와 32명의 동지들은 - 룩셈부르크의 혁명적인 채찍질에 의해 또 러시아로부터 전해지는 기운에 고무되어 - 당수뇌의 결정에 대한 한 보충 안에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는 전당대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최고이자 가장 포괄적인 형식임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 제안에서 결정적인 이 문구를 카우츠키는 노동조합 측의 대표자들이 이빨을 드러내자 철회해버렸다. 카우츠키의 중심주의 본질은, 당내의 통일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통일을 위해서 기회주의에 굴복하고 이러면서 당의 맑스주의적 이론적 기초를 내부로부터 스스로 파괴한 것에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좌파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러시아에서의 투쟁 결과를 그 근거로 들었다. 이 투쟁은, 그의 논거에 따르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오랜 구분이 낡은 것이 되어버렸음을 증명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사회민주주의적 대중정당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에 있어서도 단호한 귀결을 갖는다고 한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분은 그리고 이 두 가지의 독립은 의회주의 시대에 역사적으로 생겨난 산물이긴 하지만,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한편으로 여기서, 부르주아사회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시기에 경제투쟁은 분산되고 각 기업, 각 산업 분야에서의 여러 개별적인 투쟁으로 해체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투쟁은 대중 자신에 의해 직접적인 행동으로 수행되지 않고 대신에 부르주아 국가의 형식에 알맞게 입법적인 대리자에 대한 압력을 통해서 이뤄진다. 혁명투쟁의 시기가 시작되자마자 즉, 대중이 투쟁의 장에 출현하자마자, 경제투쟁의 분산뿐만 아니라 정치투쟁의 간접적인 의회주의적인 형식도 사라지게 된다. 혁명의 대대적 행동 속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하나이며, 분리되고 전적으로 독립적인 두 개의 형태로서의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사이의 인위적인 경계도 사라질 것이다. (...) 하나는 경제투쟁 또 하나는 정치투쟁이라는, 노동계급의 두 가지 다른 계급투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직 하나의 투쟁만이 있다. 그것은 부르주아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의 착취를 제한하는 것을 그리고 부르주아사회와 착취의 폐지를 동시에 겨냥한 투쟁이다. (...) 노동조합의 투쟁은 현재의 이해를, 사회민주당의 투쟁은 노동자 운동 미래의 이해를 포괄한다. (...) 노동조합은 그룹의 이해를 그리고 노동자 운동 발전의 한 단계를 대표한다. 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을 그리고 그들의 해방이라는 이해 전체를 대표한다." (155, 156쪽, 풀무질 228, 229쪽)
대대적 파업은, 계급정당이나 노동조합 중 어떤 것도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자들이 자신을 투쟁 중에 조직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당은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과제에, 즉 '정치적인' 지도에, 계급의식의 옹호와 확산과 한층 더한 발전에 집중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역할은 이와는 반대로 점점 더 축소되는데, 이는 파업기금을 통한 파업 준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노동조합의 대대적 파업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는 그 당시에도 있었다. 그것이 노동자 투쟁에 쓸모없어질수록 그만큼 더 계급의 적의 진영에서 그들의 안전을 찾는다. 그곳에서 그들은 계급투쟁에 대항한 걸림돌로 잘 활용될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6년에 소비에트의 완전한 의의를 파악하지 못했듯이 노동조합의 이러한 발전의 종결점을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참 대단하게도 그는 이미 매우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노동조합 투쟁의 한계를 파악해냈다. 그는, 체제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이른바 평화적으로 팽창하는 시기에마저도 (노동조합운동의 고향인 영국에서마저도) 노동계급의 총체는 결코 노동조합으로 포착되지 않았음을 제시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많은 주요부문 자체를 포함하는, 계급의 특히 억눌린 부분, 즉 '서로 뒤엉켜진 노예 무리', 이들에서는 노동조합 조직화가 전혀 접근 불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그 당시 독일제국에서는 광부, 직조공, 철도노동자와 우편노동자 그리고 농촌노동자가 포함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조직화하지 않은 대중과 그들의 정치적인 성숙도를 과소평가하는 것에 대해 호통을 쳤다. 심지어 그는 다가올 혁명투쟁에서 이러한 부문이 선도적인 역할을 할 것을 예언했다 - 이 예언은 독일혁명에서 정확히 적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대대적 파업은 계급 전체가 포함되지 않는 한 좌절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노동자 대중의 이러한 포괄은, 투쟁 속에서의 그들의 결집은 결코 노동조합의 방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바로 이점에 소비에트의 비밀이 놓여있다, 즉 소비에트는 다른 노동조합의 구성원을, '조직된 자들'과 '조직되진 않은 자들'을, 직장인과 실업자를 결합한 것이다.
왜 이 모든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왜냐하면, 노동조합이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계급투쟁의 이해를 위해 활용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에 의해 새로운 노동조합투쟁의 표현이라 환영하는, 독일에서의 부문 노동조합의 재탄생은 사실은 오랫동안 존재해온 그리고 반동이 되어버린 노동조합적인 편협성이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이를 로자 룩셈부르크는 백 년 전에 이미 비난했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로서의 업무의 전문화 그리고 평화로운 시기에 분산된 경제투쟁과 관련하여 당연히 좁을 수밖에 없는 시야는 노동조합 관료들을 생각의 편협성과 관료주의로 이끈다." (163쪽, 풀무질 237쪽)
"다수의 동지들은 주로 '규율'의 미덕, 즉 수동적인 복종의 미덕을 의무로 가지는 판단력이 없는 대중으로 폄하된다. 사회민주당과는 반대로 (...) 노동조합에서는 종속된 대중에 대한 상관이라는 관계가 그 정도에 있어서 휠씬 더 심각하다" (165쪽)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 운동의 발전에서 일시적인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전복이, 계급사회의 극복이 역사의 현안이 된 시기에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족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계급 자체 내부 분업의 특정 단계를 체화하고 영구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업 자체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발전한 것과 같이, 그것을 초래한 계급사회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물질적 비참함에 대항한 투쟁 그 이상이다. 이는 분업 자체를 그 주요한 희생자인 임금 노예의 주도로 폐지하는 것이다. 대대적 파업의 비밀은 프롤레타리아가 다시 전인적인 인간으로 되려는 노력이다. 대대적 파업에서는 직업, 산업 부분, 국가 등의 구분이 없어진다. 경쟁을 부추기는 - 또 사고와 감정 사이에서의 - 이러한 분리가 의문시 될 것이다. 그렇게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어떻게 웃고 노래했는지를 묘사하며 그의 기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고, 밤이 되어도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개별화될 필요가 없도록 거리에 남아있었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집단적인 이상주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혁명 시기의 폭풍 속에서 바로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도움을 청하는 신중한 가장에서 '혁명의 낭만주의자'로 변하고,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최고의 재산 즉, 자신의 목숨마저도 투쟁의 이상에 비해서는 하찮게 보인다." (133쪽, 풀무질 199쪽)
대대적 파업의 결과는 특히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의 전반적인 상승, 즉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지적인 수준의 전반적인 상승"이다. (114쪽, 풀무질 175쪽) 이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찬가지로 분명히 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의 전반적인 상승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의 지속적인 단계로서의 물질적인 생활 수준은 혁명 속에서 설 자리가 없다. (...) 혁명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이러한 날카로운 물결 속에서도 존속하기에 가장 소중한 것은 그 정신적인 결정체이다, 노동계급의 도약적인 지적 문화적 성장이다. 이것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서의 계속적 전진을 확고하게 담보한다." (117쪽, 풀무질 179쪽)
2) 「유니우스 팸플릿」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유니우스 팸플릿]」(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Junius-Broschu're])은 세계의 역사적 변화의 개막을 열었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최초의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분석의 글이다. 이 전쟁에서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인류가 학살되었다. 보기를 들어 북프랑스와 플랑드르(벨기에)에서 독가스와 같은 신무기의 사용으로 단 몇 주 동안 수만 명의 병사가 살해되었다. 종전까지 사망자가 약 2천만 명에 달했고 종전 직후 지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사람들 2천만 명이 이후 '스페인 독감'이라 알려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14년 8월 4일, 독일사회민주당(SPD) 소속 제국 의회 의원들은 전쟁차관 승인에 찬성했다. 처음으로, 제2 인터내셔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롤레타리아 당의 지도부 중의 하나가 국제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원칙을 배반했다. 그 배반자들에 대항해 독일에서 몇몇 남지 않은 국제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여서 국제주의의 옹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후 국제주의자들 최초의 국제대회가 스위스의 침머발트에서 조직되었다. 전쟁의 발발과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에 대응해 혁명가들은 그 전쟁의 뿌리와 결과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 「유니우스 팸플릿」과 그가 초안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는 인류에게 있어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세우려는 국제적 노력의 일부였다. 그는 전쟁이 일어난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15년 4월 감옥 안에서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이 팸플릿을 썼다. 전쟁 상황 속에서 그 글은 즉시 출판될 수 없었고, 1916년 1월에야 독일 밖에서 출판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을 놓고 볼 때, 그의 슬로건은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 전쟁이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이었다. 가차 없고 대담한 자기비판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 팸플릿의 여러 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분석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팽창하면서 어떻게 그리고 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정복해야만 하는지를 밝혔다. 그리고 ‘(너무) 뒤늦게 도착한’ 나라들이 어떻게 해서 ‘먼저 도착한’ 나라들로부터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정복 물들을 빼앗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를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상승을 다룬 이 장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국가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했고 이러한 발전은 어느 한 나라 만에 의해서 개시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 제국주의 정치는 어떤 한 국가 또는 몇몇 국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 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이다.” (본문 제7장)
1890년대에 행한 분석에서 그는 폴란드는 더는 독립국이 될 수 없고 그래서 혁명가들은 더는 민족자결요구를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점은 1차 세계대전의 사건들로 확인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진영 안에서 국가 방어 전쟁에 대한 그 어떤 지지도 거부한 선구자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환경을 도외시하며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고립된 관점에 따라 좌우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치는 이미 사상누각이다.”(본문 제7장)
전쟁발발 후 몇 달 만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참여국들의 경제적 폐허를 초래하는 이 전쟁의 새로운 특성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적 조건들과 이러한 질적으로 새로운 시기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분석한 후, 그는 전쟁의 발발에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의 결론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노동자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없었다면, 그리고 노동조합이 자본가들과 함께 서명한, 공장들에서의 당쟁중지(즉, 파업금지) 선언이 없었다면, 간단히 말해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을 전쟁에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조국을 위한 지원을 호소하는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의 종결에 있어 노동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가 자체의 전쟁과 파괴 충동을 제거할 것이라는 평화주의적 희망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존속한다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할 것이라는 위험을 인식했다.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과 직면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지도부의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등등을 중심으로 한 결연한 독일 국제주의자들은, 당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당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모든 국제주의적 역량을 하나의 당으로 재조직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준비하기를 원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 팸플릿의 부록으로 출판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를 초안했다. 이 초안은 몇몇 변경을 거쳐 새로이 창립된 스파르타쿠스 동맹에 의해 그룹의 지침으로 채택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 팸플릿은 자본주의가 들어선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대한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혁명가들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그것의 주요한 견해들(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쇠퇴기 자본주의 사회의 전망,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노동자 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과 방법(모든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들어 그 원칙들을 규명하는 것, 가차 없는 자기비판, 혁명가들의 임무에 대한 장기 관점)은 모든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이론적-역사적 기능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쓴 다른 저작, 「자본의 축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추동력들과 그 기본모순들 그리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시기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를 초래하게 되는지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자본의 축적」 출판이 이미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축적」의 출판도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열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제국주의는 크든 작든 간에 모든 국가의 암이 되었고 그래서 '민족자결' 요구는 더는 의제가 아니라는 룩셈부르크의 결론은 큰 논쟁을 유발했다. 전쟁 중에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 논쟁에서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논쟁이 공통된 국제주의의 입장, 즉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는 공유된 전망의 틀 안에서 이뤄졌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국주의 발전의 근원들 및 국제주의에 대한 배반의 근원들에 관한 그리고 혁명의 전망에 관한 토론은, 억압과 추방 등 가장 어려운 조건들 아래에서도 그들이 같은 방향을 향해 줄을 당기는 것을, 즉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3. 수난의 역사
제국주의 국가에 있어 로자 룩셈부르크는 더없이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의 수난의 역사는 이미 일찍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는데, 1904년 7월 독일 황제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금고 3개월의 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복역 말기 ‘권력의 은혜를 입는 것을 거부’하려 했지만, 대사면으로 본의 아니게 석방되었다. 두 번째 수난은 1905년 혁명 당시 함께 활약한 요기헤스와 바르샤바의 숨어 지내던 집에서 일어났다. 1906년 3월 상순부터 6월 하순까지 시의회 의사당 내의 유치장에 갇히고 후에 요새 감방으로 옮겨졌다. 당시 그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심경과 전망을 묘사했다.
“사태는 대체로 험악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개조되어야 하는’ 동란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나는 장기 어음이나 채무를 신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사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고 있습니다. 모든 사태는 나의 생애 가운데서도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동란, 탄압의 정세에도 불구하고 임무와 투쟁은 예리하게 잘 진행되고, 진보는 마치 완전히 해방된 체제 아래의 시대를 가져오는 듯한 것이었다는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밖에 시대의 개척을 위하여 전 러시아에서 모범이 되도록 방해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입니다. 건강은 아주 좋습니다.”
또한, 친척이 룩셈부르크의 몸을 염려하여 잘 봐 달라고 원로원 의원에게 부탁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자기의 양심에 반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분노와 슬픔을 느끼며 그것을 막아달라고 동료에게 부탁한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당국뿐만 아니라 같은 동지들도 당장 상대하지 않게 되고, 그 사람의 의향 등은 전혀 고려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경애하는 카를로스, 어떤 경우에도 뷰로프 등이 있는 곳으로는 가지 마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나 그가 관장하고 있는 행정을 선동할 때 자유롭게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수난은 1913년 9월 프랑크푸르트 지구 집회에서 한 반전 연설 - “만약 우리가 프랑스나 그 밖의 나라 형제들을 살해하는 무기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단호히 ‘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하라”는 호소에 관련된 것이었다. 1914년 4월에 그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1915년 2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1년간을 베를린 여자 형무소에서 보냈다. 그런데 판결부터 복역까지의 사이에 잠시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고, 판결 직후 법정에서 나온 그는 급히 프랑크푸르트의 노동자 집회에 참가하여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에 참가할 것을 청중들에게 호소하였다.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이 결의문에 서명한 사람은 모두 기소되었다. 당에 대한 비판과 반전 논문을 담은 「유니우스 팸플릿」은 옥중에서 생생하게 체험한 현실감각과 반전에 대한 열정으로 썼는데, 이 논문은 철창을 아랑곳하지 않고 1916년 4월에 출판되었다.
4.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1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혁명가는 전대미문의 규모의 이러한 야만 그리고 선도적인 노동자당의 배신이 발생함으로 인해 처음에 진정충격과 패배감에 휩싸였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전쟁 동안 갇혀있거나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도 전쟁 동안 대부분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인류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보기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는 많은 동지와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들에게, 그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5.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 투쟁
1) 대중의 자각과 당의 지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시의 사회 속에서 상처받고 학살되고 있는 대중에 대해 한없는 애정과 신뢰를 했고, 더욱이 그 과제를 역사 속에서 해결하는 일에 강한 신념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생애를 바치는 길로 출발했다. 대중이 자신을 자각하고 자각한 의지와 행동을 가짐으로써 이상이 실현되고, 대중은 자신을 고뇌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장이나 직장의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데, 그들은 노동조합에 조직되고 노동자들은 궁핍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그 자체가 이윤의 공격에 대한 조직적인 방위 이상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법칙이 그 수확을 상쇄시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노동자 가운데 의식적으로 진보된 부분이 노동자 정당에 조직되고, 그것이 뒤처진 대중을 이끌어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지표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와 수단을 중심으로 하여 대중과 당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대중과 당과의 관계에 대해 룩셈부르크는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투쟁의 사회적 조건의 이론적 분석을 통해 사회민주당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 속에 자각적 요소를 도입했다. 그것은 명확한 목표를 계급투쟁에 부여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노동자 대중의 영속적인 조직을 만들어 내고, 계급투쟁을 위한 견고한 토대를 확립했다. 하지만 대중의 역사적인 주도성이 여기에서는 사회민주당의 조직으로 옮겨가 버리고, 미조직된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형태를 갖지도 못하고, 역사 속에서 눌려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다. 그와는 반대로 노동대중은 사회민주당을 앞에 세우면서도 세계사의 생생한 내용으로서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조직된 세포와 노동대중 사이에 피의 순환이 있고, 하나의 심장의 고동이 이 양자 모두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면 그것만이 사회민주당이 위대한 역사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 (라이프찌히 폴크스짜이퉁)
여기에서 룩셈부르크는 당 이전에, 혹은 그 내용을 이루는 핵심의 지위에 대중을 두고, 그 창조력과 행동성을 전제로 하여 대중과 당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룩셈부르크의 주장이 별도의 입장에서 자발성의 이론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이 경우 자발성이라는 것은 당의 계획이나 결정에 기본을 두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운동은 객관적인 일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 자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대중의 자각이 필요하고, 그 자각에 기본을 둔 주체적인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올바르게 발현시키고 결실 있는 행동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역사법칙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하면 사회과학의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역사의 전진, 혁명의 추진을 위해서는 그 권위로 서의 당의 지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대중이 아직 충분히 자각된 단계에 도달해 있지 않기 때문에 당과 그 지도자에 의한 강제적인 인도는 범죄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 말한다.
“사회민주당의 투쟁 전술의 중요한 특징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일련의 본질적인 계급투쟁의 위대한 창조적 행위의 결과에 있다. 여기에서는 또한 무의식이 의식에 선행하고, 객관적인 역사발전의 논리가 그 담당자의 주관적 논리에 앞서 존재하고 있다.” (노이에 자이트)
2) 민족문제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2 인터내셔널 좌파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민족문제에서 레닌보다 더욱 명확했다. 그는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민족자결권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본주의 쇠퇴, 민족주의, 제국주의 등에 대한 그의 교훈은 여전히 혁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다. 그에게 자본주의 쇠퇴기의 민족전쟁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 그는 민족의 이익은 단지 대중을 오도하고, 그들의 숙적인 제국주의에 도움이 되도록 유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국제사회주의는 동등한 권리와 더불어 자유롭고 독립적인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자체로도 그러한 민족을 창출할 수 있고 민족의 민족자결권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은 다른 모든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건에 대한 사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혁신적, 적극적인 정책을 위한 이정표와 원동력과 같다. 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제국주의 세계정치가 민족의 삶의 안팎을 결정하고 규제하는 한, 전시든 평시든 ‘민족자결권’은 있을 수 없다. 현 제국주의 환경에서 민족방어전쟁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결정적 역사적 환경에 의존하고, 전 세계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 국가의 관점에서 결정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책은 사상누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팸플릿」)
민족문제에 대한 룩셈부르크 교훈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어떤 억압받는 민족도 제국주의 또는 전쟁의 결과로써 주어진 국가에 의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권력 집단에서 그들의 지배적인 동료들과 한통속이 된 약소국은 강대국의 제국주의 게임에서 한낱 말에 불과하며, 그들을 위한 도구로서 전쟁에서 혹사당한, 그리고 전후에 버려지고 자본주의 이해관계로 인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자유로운 국가와 민족은 자본주의 쇠퇴기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자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흡수되어야 하며 세계시장에 참가해야 한다. 이것은 민족운동에서 발생한 신생국은 그 크기 또는 경제력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제국주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발전의 가장 높은 단계의 표현이자 자본주의 존립의 최후 국면의 표현인, 자본주의의 팽창주의적 제국주의는 경제적 흐름을 야기한다. 전 세계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탈바꿈시킨다. 모든 구시대적이고 전(前) 자본주의적 생산형태와 사회는 일소된다. 그것은 전 세계의 모든 부와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그리고 전 세계의 노동대중을 임금 노예로 전환한다."
"제국주의는 국가의 어느 하나 또는 몇몇 국가의 창조물이 아니다. 제국주의는 전 세계적인 자본의 발전에서 성숙이라는 특정 단계의 산물이며, 국내에서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나눌 수 없는 전체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팸플릿」)
"전 세계 노동자에게는 자본주의 정치적 세계지배의 가장 특색 있는 발현이자 자본주의 최종 단계에서 발생하는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숙적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처음으로 엄밀한 과학적 사상의 목표가 프롤레타리아트와 해방을 위한 길을 밝혀 주었다. 종파, 학파, 유토피아 및 다양한 국가에서 고립된 실험 대신에, 밧줄을 묶는 것과 같이 국가들을 단결시키는 한결같은 국제적인 이론적 기초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맑스주의 이론은 전 세계의 노동계급에 매일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확고한 목표이자 최종 목표로의 정도를 항상 나타낼 수 있는 나침반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팸플릿」)
제2 인터내셔널의 반역 이후, 룩셈부르크는 전 세계 노동계급 투쟁을 이끌기 위한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노동계급의 목표와 이익에 대해 그릇된 일을 저질렀던 가장 중요한 국가들의 사회주의당 지도부의 반역 이후, 그리고 그들이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에서 부르주아 제국주의로 이동했던 퇴행 이후, 전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적 투쟁 행동을 이끌고 조직할 과업을 가진 새로운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창설은 사회주의에 가장 중요하다." (로자 룩셈부르크,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3) 볼셰비키와 러시아혁명에 대한 평가와 비판
로자 룩셈부르크의 견해는 분명히 레닌의 주장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이 대립적 견해는 조직문제(당과 대중)에서 시작하여 1917년 러시아혁명에 있어서 볼셰비키의 행동방식에까지 미쳤다. 물론 룩셈부르크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 대해 최대의 평가를 부여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있어서....볼셰비키는 이 권력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확보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위대한 혁명적 프로그램 전체를 내걸었다. 이렇게 볼셰비키는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궁극목표를 실제 정치의 직접적인 프로그램으로서 천명한 불후의 역사적 공적을 수립했다. ... 당이 역사적 순간에 용기와 혁명적 통찰력과 일관성을 부여했다고 하더라도 레닌과 트로츠키, 그 밖의 동지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서구의 사회민주당에 결여하고 있었던 모든 혁명적인 명예와 행동력이 볼셰비키에 의해 구현되었다. 10월의 폭풍 속에 있었다는 것은 단지 러시아혁명만을 구제한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주의의 명예를 되살린 것이었다.” (러시아혁명)
하지만, 혁명의 성취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룩셈부르크는 무조건 기뻐하며 낙관적으로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농업문제, 민족문제, 민주주의 문제 등에 관한 볼셰비키의 정책은 그가 보기에는 분명히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볼셰비키의 조직론과 그것과 연관되는 자유와 민주주의 문제와 함께 프롤레타리아독재에 관한 견해의 차이에 있었다.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대회에서 조직론을 둘러싼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고, 당을 분열시키는 것이 되었지만, 당시 레닌의 주장은 초 중앙집권적인 조직편성이었다. 거의 무제한적 권한을 갖고 당 대회에만 책임을 지는 중앙위원회를 정점으로 하여 위로부터 아래로 정연하게 조직되고, 직업적 혁명가가 중핵이 되어 움직이는 여러 기관을 포괄한 당이라는 주장을 레닌은 굽히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의 러시아에 있어서 자발적인 대중운동을 그 권위로서의 당의 의식과 조직에 의해 보강하고, 그것에 의해 비로소 노동운동이 혁명의 노선에 올바르게 동참한다고 보아서 그와 같이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레닌의 주장을 깊이 살펴보면 사회주의의 이론이나 방법은 계급 그 자체 속에서가 아니며, 그 차원에서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계급의 외부로부터 부여되어야 하고, 당과 중앙위원회는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오류 없이 극도로 집중화된 지도력 아래서 일하는 직업적 혁명가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레닌의 이런 견해에 대해 당이 계급의 전위라는 것, 그 당이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되어야만 하고, 엄격한 규율로 다수의 의지가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에 있어서는 룩셈부르크도 찬성했다. 하지만 그가 도저히 찬성할 수 없었던 것은 당이 계급의 전위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계급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오류가 없다는 신념 아래 계급을 위로부터 또는 외부로부터 지배하려는 태도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견해를 레닌 입장에서는 자연발생성 이론이라고 비판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대중의 주체적인 창의성을 중시하고, 새로운 투쟁 형태는 지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미리 계획한 완전한 처방전을 주머니에서 꺼내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이 대중의 창의성을 완전히 발휘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상급기관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필요하고, 이 자유의 보장에 의해서만 당의 경직화가 방지되고 운동의 잘못이 수정된다. 그때 “자유란 항시 의견을 달리하는 자유를 의미”하며, 정부의 지지자나 당원 -그들이 다수일지라도- 에 대해서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말하기를 부르주아 국가는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도구이며, 사회주의국가는 부르주아지를 억압하는 도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도된 자본주의국가와 같은 것일 뿐이다. 이런 단순한 생각은 가장 핵심적인 점을 간과하고 있다. 즉,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최소한의 제한된 영역을 제외하고는 전체 인민 대중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고, 교육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독재에 있어서는 전체 인민 대중의 정치적 훈련과 교육이야말로 생명을 좌우하는 공기와 같은 요소이며 그것이 없으면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존재할 수 없다.” (러시아혁명)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계급지배의 파괴와 동시에, 사회주의의 건설과 동시에 시작한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독재이다. 그러나 이 독재는 ‘민주주의의 적용방법’이지 그 ‘폐기’는 아니다. 또한, 그것은 계급의 ‘독재’이지 정당이나 정파의 독재는 아니며, ‘계급의 활동’이지 ‘계급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소수 지도자의 활동’이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가장 광범한, 공공성에 있어서, 인민 대중의 아주 활발하고 자유로운 참가에 있어서,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민주주의에서 계급의 독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대중의 적극적인 참가로부터 생겨나고, 대중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서서 인민 대중의 정치적 훈련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 대신에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데 있으며, 일체의 민주주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수십 명의 당 지도자가 지배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실제로는 극히 소수의 인사가 모든 일을 처리한다. 노동계급의 대표는 가끔 집회에 소집되고, 지도자의 연설에 박수를 보내고, 결의안에 만장일치로 찬성한다. -이것은 독재임이 틀림없지만, 일부 정치가의 독재일 따름이다. 아니 그것뿐만 아니다. 이와 같은 대량의 체포와 처형을 초래하고 공공생활의 황폐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혁명에 있어서 볼셰비키가 행하고 있듯이 지도부의 의지를 계급이나 조직 전체에 일방적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여러 가지 오류를 범하면서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역사의 변증법을 체득해 가고, “참으로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스스로 범하는 오류가 최상의 중앙위원회의 무오류성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성과가 많고 가치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러시아혁명)
6.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1)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1919년 1월 15일, 두 명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구스타프 노스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그 이전 룩셈부르크는 1916년 재투옥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독일혁명이 시작했을 때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전후 1918년 11월 8일, 그는 석방되자마자 독일혁명의 심장부, 베를린으로 달려갔다. 1918년 11월, 독일 부르주아지는 노동자평의회를 해체하고 노동자와 병사의 투쟁을 피로 물든 군화발로 짓밟았다. 1918년 12월,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구성원들이 독일 코뮤니스트당(KPD)을 창설했다. 집요한 추적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노동자 탄압 시기, 유럽 심장부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를 살해했다. 룩셈부르크는 적기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는데,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동지들에 의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범죄자들이 군중들을 설득하여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가두고 베를린 벽보에 그들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벽보의 주제는 섬뜩했다.
“평화, 일자리, 빵을 원한다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결국, 그들의 은신처는 발각되었다. 1919년 1월 15일 밤, 베를린의 부촌 빌머스도르프 거리의 무장한 부르주아 자경단 위원회 구성원 5명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납치했다. 범죄자들은 인질을 경찰에 넘기지 않고, 기병 수비대 소총 사단이 최근 새 본부로 삼은 호화스러운 에덴 호텔로 데려갔다. 범죄자들은 혁명가들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재판이 열리지 못하도록,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들은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는 와중에 총에 맞았다고 했으나,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룩셈부르크 또한 총으로 구타하고 머리에 총을 쏜 다음 수로에 시체를 버렸다.
2) 1919년 1월 15일, 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룩셈부르크의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중위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여성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기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부르주아 언론은 리프크네히트가 도주하던 중 총에 맞아 숨졌으며, 룩셈부르크는 폭도 중 한 명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썼다.
노스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암살에 연루된 공무원들의 무죄방면에 사적으로 사인했다. 기병대 사단의 우두머리로 살해를 명령한 발데마르 파브스트는 후에 나치 정권, 독일연방공화국에 봉사했다. 몇 년 후, 그는 자신이 저지른 독일혁명을 진압한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으며,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구원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히려 독일 국민을 비난했다.
“이 독일 멍청이들은 무릎을 꿇고 노스케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거리와 광장은 모두 우리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1919년 1월 15일의 살인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후 몇 달 동안 노스케 치하의 수천 건의 살인의 시작이자 히틀러 시대의 수십 년 동안 수백만 건의 살인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신호였다.
이러한 잔학행위의 90주년을 맞아 독일자유당은 베를린에 노스케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제안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친애하는 기민당 사무총장 포팔라는 노스케의 행동을 '공화국의 용기 있는 방어'라고 극찬했다. (2009년 1월 11일 베를린 신문 「Tagesspiegel」에서 인용)
3)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 반(反)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칼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배신과 학살로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들이 그곳에서 나치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한 것이다. 나치즘의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과거 자신이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독일 코뮤니스트당(KPD),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독일 코뮤니스트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 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 진행형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비문 1919
붉은 로자도 이제 사라졌다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그녀를 세상에서 쫓아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문
여기 잠들다
로자 룩셈부르크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독일 노동자의 투사는 독일 압제자들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
압제자, 피억압자; 차이를 묻어라!
7.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 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비하하고, 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 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 가증스러운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 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 그것의 1946년 제목(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인 「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은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 「저작집」 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 칼 카우츠키, 에밀 반데벨드, 루돌프 힐퍼딩, 칼 레너, 조지 플레하노프는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聖人)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반(反)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 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민주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다.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 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 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코뮤니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 코뮤니즘과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 그리고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敵)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 하든, 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후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 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가증스러운 선전이 유행했다.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과 "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지배계급에 대항한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동문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책이 룩셈부르크를 볼셰비키와 '독재자' 레닌의 완고한 적(敵)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었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를 변환시키기 위한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코뮤니스트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논리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왜곡의 배후에는 코뮤니즘에 대한 불신과 혁명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 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 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 음모의 대상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 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맑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지배계급의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였다. 비록 문명화된 야만인들, 스스로 민주주의자라 칭하는 이들이 유럽의 심장에서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열망의 원천,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 제국주의 개념, 국가에 대한 질문 등에 대한 가르침은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을 죽인 살인자들이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계급전쟁에서 살아 있다. 혁명가들이 살해된 지 104년이 지난 지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더욱더 강화되고 있지만, 룩셈부르크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나고 있다.
탄압받는 상황에서 자본의 질서에 관하여 쓴 마지막 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를린은 질서를 되찾았다!” 비겁한 아첨꾼들아! 너희들의 ‘질서’는 모래성 위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내일, 혁명은 ‘다시 일어나,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고, 불타오르는 트럼펫 소리가 너희를 공포에 떨게 하며 증명할 것이다.
나는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연보]
1871: 3월 5일, 러시아령 폴란드 자모치에서 태어남
1873: 바르샤바로 이주
1890: 바르샤바 제2 고등학교 입학
1888: 폴란드 여권 발급받음. 독일-폴란드 국경을 넘어 도주
1889: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
1890: 취리히대학 철학부에 등록. 레오 요기헤스 만남
1892: 7월, 폴란드 사회민주주의 잡지 <노동자 문제> 창간
1894: 3월,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 최초의 비합법 전당대회 열림
1896: 7월, 파리에서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만남
같은 달 런던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 참가
1897: 박사학위 취득
1898: 4월, 바젤에서 구스타프 뤼베크와 법률상 결혼
9월, 드레스덴의 <작센 노동자 신문> 주간으로 임명되지만, 11월 사임
1900: 3월, 프로이센 폴란드 사회주의당 전당대회 참석
9월 마인츠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전당대회 참석
1901: 9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와 뤼베크에서 열린 사민당 전당대회 참석
10월, <라이프치히 인민일보> 주필 사망으로 프란츠 메링과 공동주필로 임명됨
1902: 9월, 뮌헨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 전당대회 참석
10월, <라이프치히 인민일보>와 모든 공동작업 중단
1903: 뤼베크와 이혼
1904: 1월, 츠비카우에서 황제 모독죄로 3개월형 선고받음
8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 참석, 같은 달 츠비카우 형무소 수감
1905: 11월, <전진> 편집위원으로 활동
1906: 3월, 체포됨
4월, 바르샤바 요새의 감옥으로 이송
8월, 보석금 예치 후 석방
12월, 공공 평화 위협 혐의로 2개월 징역형 선고받음
1907: 8월,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에 참석
1908: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
1910: 8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에 참석
1911: 9월, 예나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
1912: 11월, 바젤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임시대회에 참석
1913: 9월, 예나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
1914: 2월, 법률 110조 위반으로 1년형 선고받음
3월: 프라이부르크 연설
7월: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본부 회의에 참석 후 국제적 반전대회에 참석
1915: 2월, 체포, 베를린 바르님가 여자형무소에 수감
1916: 2월, 석방,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팸플릿 발간
7월, 보호수감 명목으로 체포, 재수감, 베를린 경찰국에서 바르님가 여자형무소 이감
10월, 포젠 지방의 론케 요새로 이송
1917: 8월, 브로추아프 형무소로 이송
1918: 2월, 건강상의 이유로 출옥 신청, 거절당함
11월, 독일혁명으로 출옥
11월, <붉은 깃발>지로부터 추방당함
12월, 스파르타쿠스단 강령 발표, 독립사회민주당(LSPD) 대베를린 지역 총회 연설
독일 코뮤니스트당(KPD) 창당대회 참석
1919: 1월 15일, 체포된 후 이송 도중 살해당함. 시신은 국경 운하에 수장됨
1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에서 추모행사가 열림
1월 25일,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펠트 묘지에 빈 관이 안장됨
2월, 장례식 거행
5월, 떠내려온 시신이 수문에서 인양되어 6월 프리드리히스펠트 묘지에 안장됨
[저서]
1894: 메이데이의 기원은 무엇인가?
1896: 런던 국제 대회에서 폴란드 문제
1896: 터키의 사회민주주의와 민족투쟁
1898: 폴란드의 산업 발전
1898: 기회주의와 가능성의 예술
1898: 슈투트가르트 대회 연설
1899: 전술의 문제
1899: 하노버 대회 연설
1899: 드레퓌스 사건과 밀란 사건
1899: 민병대와 군국주의
1900: 국적 방어를 위해
1900: 혁명인가 개량인가?
1901: 프랑스 사회주의 위기
1901: 프랑스 노동자당 전국위원회에
1902: 마르티니크
1902: 당 대회에서의 8시간의 하루
1903: 사회주의의 반(反)성직자 정책
1903: 프롤레타리아 당을 기리며
1903: 맑스주의 이론과 프롤레타리아트
1903: 맑스주의의 침전과 진전
1903: 라살과 혁명
1904: 폭풍 속에서
1904: 사회민주주의와 의회주의
1904: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적 문제(일명 레닌주의인가 맑스주의인가?)
1905: 폴란드 문제와 사회주의 운동
1905: 러시아의 혁명
1905: 사회주의와 교회
1906: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1906: 폭동과 혁명
1906: 블랑키주의와 사회민주주의
1907: 노동조합 정책의 두 가지 방법
1908: 맑스 사망 25주기
1908: 노동계급 투쟁의 날인 메이데이
1908: 예산 승인 문제에 관하여
1908: 당 학교
1909: 민족문제
1909: 혁명적 숙취
1909: 폴란드의 특수 문제
1910: 다음 단계
1910: 소모전인가, 투쟁인가? (2부, 3부, 결론)
1910: 이론과 실천 (카우츠키 동지의 대대적 파업 이론에 대한 논쟁)
1911: 모로코에 관하여
1911: 평화 유토피아
1911: 대중 행동
1911: 재미있는 오해
1911: 맨체스터에서 열린 사회주의 단체의 연합 대회에 대하여
1912: 여성 참정권과 계급투쟁
1912: 자유주의의 타락한 여성들
1912: 지금은 무엇인가?
1913: 3월의 메이데이 개념
1913: 개량주의 환상을 타파하라-혁명적 계급투쟁 만세!
1913: 정치적 대대적 파업
1913: 라살의 유산
1913: 자본의 축적
1914: 독일 사회민주당과 전쟁(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클라라 제트킨과 함께)
1915: 자본의 축적: 반비판
1915: 인터내셔널 재건
1915: 유니우스 팸플릿(독일 사회민주당의 위기)
1915: 국제 사회민주당의 임무에 관한 테제
1916: 둘 중 하나/또는
1916: 개 정치
1917: 늙은 두더지
1918: 러시아혁명
1918: 코로렌코의 생애
1918: 러시아의 비극
1918: 오! 어떻게 - 독일은 이 혁명을!
1918: 시작
1918: 명예의 의무 (대사형 반대)
1918: 국회
1918: 세계 노동자를 향한 외침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선언)
1918: 움직이는 아케론
1918: 감옥에서 보낸 다섯 통의 편지
1916-1918: 감옥에서 소피 리프크네히트에게 보내는 편지
1918: 사회의 사회화(볼셰비즘이란 무엇인가?)
1918: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무엇을 원하는가?
1918: 국회 선거
1918: 우리의 강령과 정치적 상황(스파르타쿠스 강령에 관하여)
1919: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19: 하우스 오브 카드
1919: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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