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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셨다.
28. 제자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께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막8:27-33)
27. Then Jesus and his disciples went away to the villages near Caesarea Philippi. On the way he asked them, “Tell me, who do people say I am?”
28. “Some say that you are John the Baptist,” they answered; “others say that you are Elijah, while others say that you are one of the prophets.”
29. “What about you?” he asked them. “Who do you say I am?”
Peter answered, “You are the Messiah.”
30. Then Jesus ordered them, “Do not tell anyone about me.”
31. He then began to teach them that the Son of Manmust suffer many things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and that he must be killedand after three daysrise again. 32. He spoke plainlyabout this, and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
33. But when Jesus turned and looked at his disciples, he rebuked Peter.“Get behind me, Satan!”he said.“You do not have in mind the concerns of God, but merely human concerns.”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셨다.
27. Then Jesus and his disciples went away to the villages near Caesarea Philippi. On the way he asked them, “Tell me, who do people say I am?”
서로 좋아해서 결혼하더니 이혼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연애할 때는 사랑한다는 말로 통했습니다.
결혼하고는 피부를 맞대고 사는 삶으로 사랑을 전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통의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말로는 자기를 감출 수 있었지만 삶은 자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삶을 통해서 말로는 몰랐던 진정한 모습을 깨닫게도 되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애향원이라는 나병인들의 교회를 시무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반대하며 투옥되어 일본놈들에게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두 아들이 당시 공산당에게 끌려가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손목사님의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 안재선이 사형을 받게 되었을 때 그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목사님이 애양원 교회의 나환자들을 돌보며 목회를 하던 중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6・25가 발발하자 손 양원 목사님은 "잘 죽자"라는 제목을 걸고 특별 집회를 열었습니다.
요즈음에 이런 제목을 걸어두고 부흥회하는 목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곱빼기로 배가하자!
영육 간에 죽지 말고 잘 살아라!
교인들은 손 목사님께서 틀림없이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할 것을 알고 목사님을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교인들의 간청에 못 이겨서 송별 예배를 드린 후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손 목사님이 갑자기 가방을 들고 배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 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목사님은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950년 9월 28일 여수 근교 미평에서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셨습니다.
손 목사님은 우리가 결코 갈 생각을 안 한 곳에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우리 생각에 해서 안 되는 일을 골라서 하셨습니다.
손 목사님은 꼭 좁은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님의 삶에 대해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물을 흘리며 진짜 목사님이시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목사님 입을 볼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을 볼 것입니다.
대리석의 교회에
값비싼 승용차를 몰고 다니고
자신이 무슨 대통령이나 되는 듯이 경호받으며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하는 그런 목사들의 그럴듯한 말이 아닙니다.
그의 삶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을 거부해야 여러분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주님께서는 공생애의 마지막 이방 땅으로 가셨다가 이스라엘의 최북단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너희들 내 삶을 보지 않았느냐? 내가 누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두 부류로 갈라서 물으셨는데 먼저 세상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제자들보다는 먼 거리에서 주님의 삶을 경험했습니다.
또 주님과 한솥밥 먹었던 제자들에게 고백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물론 그 답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들의 답이 그래도 서로 엇비슷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답입니다.
가끔 보너스에 칭찬을 하며 돈 잘 벌어주기만을 바라는 회사의 사장님이냐?
좋은 소리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명까지 기꺼이 희생하시는 어머니냐?의 차이입니다.
28. 제자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8. “Some say that you are John the Baptist,” they answered; “others say that you are Elijah, while others say that you are one of the prophets.”
사는 일이 왜 이렇게 고달픕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고달픈 삶을 두고서 하나님께서 과연 살아서 내 삶을 섭리하시는지 고민한 적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은 유대인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백성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실재 역사를 훑어보면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조금 번성했나 그 뿐입니다.
노상 침략당하다가 북이스라엘이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망한 것입니다.
그들을 점령한 앗수르는 거룩한 백성들의 피와 이방인들과 피를 섞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들의 의도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뒤섞이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말 충격적인 사건은 주전 587년에 일어났습니다.
바벨론이 이제 남 유다를 공격하더니 여지없이 하나님의 성전까지 훼파한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 백성들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바꾸어 가면서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렇게 된 것은 힐카누스 2세 때문이었습니다.
형제간의 권력 싸움을 위해 로마의 폼페이 장군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내분이 문제입니다.
무지한 정치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입니다.
외부의 적을 끌어들이는 놈들이 문제입니다.
동생으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기 위해 로마를 불러들여서 유대를 로마의 식민지로 만든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주전 63년)
스스로 그 짓을 했으니 가슴을 칠 일인데 안티파타라는 이두메인이 끼어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힐카누스 2세에 빌붙어서 이두메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이 교활한 이방인이 로마를 등에 업고 그의 아들 헤롯 대왕으로 하여금 유다의 왕이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헤롯 대왕이 무엇을 했는지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화려하게 증축한 것입니다.
이방인 바벨론인의 손에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이 이제는 이방인의 손 이두메인의 손에 의해 화려하게 증축이 되는 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가 성전을 증축한 것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뜻에서가 아닙니다.
그 짓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속 보이는 정치술이었습니다.
이 이방인 헤롯이 이제는 제 입맛에 맞는 대제사장들을 임명한 것입니다.
7대에 걸쳐서 이 이방인이 대제사장을 임명한 것입니다.
그 이후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3 대의 대제사장을 임명하게 됩니다.
하나님 백성의 나라의 왕은 로마를 등에 업은 이두메인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성전을 책임지는 대제사장들은 이 이두메인을 상관으로 모시는 간신배들이었습니다.
좀 생각 있는 사람들은 도무지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고 하나님!
도대체 엎어도 뒤집어도 길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엄청난 좌절 속에서 그리스도의 대망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말라기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5.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말4:5,6)
그 때에 요한이 등장한 것입니다.
7.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8.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눅3:7,8)
요한은 세례를 받기 위해 그를 찾아오는 무리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술 마시고 노름하러 간 사람을 두고 그렇게 호통을 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제정신을 가지고 제대로 살겠다고 요한을 찾았는데 그들이 독사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요한이 그들을 이렇게 고발한 이유는 그들이 자신이 베푸는 세례 의식을 제게 올 징벌을 피하는 방식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여태껏 거짓을 일삼으면서 성전의 제의를 자신의 거짓과 위선에 대한 책임을 회피 방식으로 삼아왔던 것입니다.
그런 종교 문화의 관성을 가지고 요한의 세례도 꼭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이든이 날리면이라고 해놓고는 교회 가서 두 손 들고 기도하면 거짓말한 죄를 다 씻을 수 있다는 식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구조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집단의식 속에서 거짓 평화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그의 죄와 상관이 없이 진짜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가 되는 줄 잘못 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돌멩이로도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모든 실존들이 삶의 현장에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이런 면에서 당시의 구조에 대해 엄청나게 과격했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과 사회는 그들의 의를 위해 당연히 종교적인 제의를 언급했는데 요한의 주장은 그것을 고쳐서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종교적인 제의는 이제 유통기간이 지났으니 내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국가 선민의식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런 조건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실천적인 삶을 요구했습니다.
요한의 메시지에서 왕과 제사장의 공간은 유통기간이 지나 폐기 처분된 상품이었습니다.
모조품 천국인 성전은 사라지고 진짜 천국이 왔으니 회개하라!
10.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13. 요한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14.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을 하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해라."(눅3:10-14)
거창하게 종교적인 발언과 하나님 운운하지 말고 하나님의 정신을 현장에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이 주장을 펼친 것입니다.
간신배가 득실거리는 절대 권력 앞에서도 그는 자신을 굽히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왕이라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누가 봐도 죽기로 정해진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요한의 삶을 보면서 그를 그리스도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요한에게 사람들은 엄청난 기대를 기대를 했었는데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활동하시는 삶을 보면서 예수께서 바로 그 요한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요한입니다.
물론 요한은 이런 시각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열심을 다 해서 했던 일은 예수님과 자신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19.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을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20.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고백하였다.
21.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엘리야요?" 하고 물으니, 그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예언자요?" 하고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22. 또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23.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24.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그들이 또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시오?"
26.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27.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조차 없소."(요1:19-27)
요한은 엘리야라는 명칭을 부인했지만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의 내용성을 인정했습니다.
대제사장 왕 목사 그 명칭을 드러내면서 내용성이 전혀 없이 그리스도를 죽인 꼭 그 반대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면서 대충 구약의 한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병도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시고
옳은 소리하시고.......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29. “What about you?” he asked them. “Who do you say I am?”
Peter answered, “You are the Messiah.”
그 말을 들으신 다음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시나요?
그런데 이 예수님의 질문 이전에 우리는 먼저 나 자신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따라서 나에게는 어떠한 그리스도가 요구되는가?
당시 하나님 백성의 왕은 로마에 빌붙어서 정치적인 술수를 일삼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 헤롯에게 아부하는 간신배였습니다.
이런 정치 종교적인 한계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혹시 당시의 유대인들을 두고 그들이 너무 어리석어서 정치적인 메시야를 잘못 기다렸다고 치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일제 치하의 경험을 듣는 그런 간접경험을 통해서도 그 작자들을 참아낼 수 없는데 제가도 그 당시에 살았더라면 둘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첫째 무서운 공포심에 일본 순사의 꼬붕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둘째 단도를 품에 넣고 다니다가 반역자를 죽이는 열심당원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제가 그런 상황에 놓였더라면 좌우간에 정치에서 내 사고를 해방시키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성을 전혀 다른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14.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15.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롬3:10-18)
너희는 일본놈과는 다른 존재라고 여기느냐?
나의 눈에 똑같은 죄인이다.
죄 아래에 놓인 죽음의 존재들이다.
로마의 지배 밑에 놓인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 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여 주실 바로 그 그리스도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죄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죽음 때문에 그리스도가 요구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30.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30. Then Jesus ordered them, “Do not tell anyone about me.”
제자들의 입에서 드디어 예수님에 대한 그리스도 고백이 나왔음에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주님께서 이 고백을 들으시고 베드로에게 성령의 역사 또 천국의 열쇄를 주시겠다는 최상의 영적인 축복을 선언하셨는데 마가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엄중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말하지 말라!”
주님의 갑작스러운 경고에 대한 그 주님의 동기를 두고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왜 메시야 비밀을 선언하신 것인가?
신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실은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내용들이 수두룩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지으시고 동산의 중앙에 과일나무를 심으시고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하필 먹으면 문제가 되는 나무를 그 중앙에 심으셨을까?
이 문제는 당시에 그들의 메시야 비밀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극찬하시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어놓으시고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에 죄인의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탄이 사용한 방식입니다.
그는 궁금해하는 이 사람에게 이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아니면 이 문제를 궁금해하도록 자극한 다음에 이 나무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4.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3:4,5)
이렇게 친절하게 이해시키자 그들이 그 열매를 먹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은 그 말씀을 잘 이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으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그 말씀을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순종한 것입니다.
그렇게 물 위를 잘 걷다가 이 어부에게 중학교 삼 학년 물리 공식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물에 빠지고만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었을 때 필요한 것은 그것을 누가 말씀하셨냐는 것입니다.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조자가 그 말씀을 하셨을 때 피조물을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피조물의 이해를 뛰어넘는 기묘자(beyond understanding)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베드로가 그의 신앙고백을 사람들에게 말해서 안 되는 그 이유를 밝히신 것입니다.
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음에도 그리스도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1. He then began to teach them that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and that he must be killed and after three days rise again.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자 곧바로 그리스도의 내용성을 규정할 고난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를 가게 되는 법입니다.
그 과정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므로 베드로는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것입니다.
초등 과정의 학습 목표: 예수=그리스도
이제 중학교의 과정에서는 본인이 고백한 그리스도의 단어의 뜻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중등 과정의 학습 목표: 그리스도의 단어 뜻 제대로 알기
단어에 대한 세상의 개념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에 적용하게 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20년을 목회한 제주도에서는 낫을 호미라고 합니다.
어떤 제주 사람이 군대에서 상관이 호미 들고 연병장 집합했는데 낫을 들고 갔다가 몸쓰락 두들겨 맞았다고 했습니다.
군대 일이야 한 대 맞고 끝날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일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복이란 무엇입니까?
누구 복권을 한 장 샀는데 1등에 당첨된 것이 하나님의 복입니까?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1,2)
복 있는 사람은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분명해서 악을 분연하게 거부하는 의지의 소유자입니다.
복권을 샀는데 그것이 1등에 당첨된 일은 성서의 복과 하등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 복을 신앙에 적용해 대기 때문에 교회 문제가 심각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제대로 하기 원한다면 성경의 단어 정리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란 오직 그 고난의 내용성으로 정의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성경은 계속 암시해 오셨던 것입니다.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1:29)
51.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6:51)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이니,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마9:15)
주님이 말씀을 들려주셨는 때 그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을 뿐입니다.
주님은 3년의 공생애를 보내시다가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을 듣는 순간 주님은 본격적으로 고난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고난(십자가)을 언급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실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가짜 하나님의 나라를 이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주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장로 대제사장 목사들이었습니다.
이 대상들이 너무 의외라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사람을 다 모아두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는 엘리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통해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입에 담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성전을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아도 국가를 대표하는 자들이 국가를 팔아먹었습니다.
진정으로 이 나라를 지킨 사람들은 민초들입니다.
그들은 국가를 자신의 생계의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목사들이 교회를 제 생계 보장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에 교회가 이 모양이 된 것입니다.
31.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1. he must be killed and after three days rise again.
놀라운 일은 예수께서 그 전능하신 능력을 두고 나약한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분이 십자가에서 땅으로 걸어 내려오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욕설을 하며 얼굴에 침을 뱉어도.......
의로운 자로써 불의의 폭력을 수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도 가장 큰 유혹이셨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이것을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도 이해하실 수 없는 일이셨습니다.
34.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막15:34)
주님도 그 고난을 두고 성부 하나님께 마구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부의 요구이시므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 순종의 죽으심이 최고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께 혹은 삼촌 옆집 아저씨 등등
혹은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의 증언을 들었을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반인들과 전혀 달랐는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의 신도들은 의심 없이 이 부활을 믿었을까요?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15.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거슬러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이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고전15:12-19)
어떤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어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의 죽으심을 앞두고 그리스도의 내용성을
첫째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것과
둘째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다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베드로에게 네가 고백했던 그리스도는 이 분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단어를 정의해 주셨던 것입니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께 항의하였다.
32. He spoke plainly about this, and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때만큼은 비유의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학교를 다니며 시를 읽고 외우고 쓰기도 했지만 아직도 시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에 대한 정의는 물론이고 그것을 읽고도 알아먹기가 힘이 듭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비유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은 시란 살아있어서 또 독자들이 자유로이 해석할 수 있다는 말로 저를 더 헷갈리게 했습니다.
시도 소통인데 시인의 의도와 상관없는 다른 의미를 읽어도 되는 것인가?
주님은 말씀을 하실 때에 이 비유를 많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 고난을 말씀하실 때 그 비유의 방식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의미를 읽어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적 고난까지 이른 것인데 혹시 마음만 고통스러우면 된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정확한 의사 전달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고난의 문제는 주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자유로이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내용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실 때 왜 꼭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일까?
우리는 특별 계시인 성경 말씀과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본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볼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첫째 그 나라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신뢰하므로 소망하게 될 뿐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자연을 통해 그 나라를 읽어내야 합니다.
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 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롬1:19,20)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써 놓으신 시가 자연인 셈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자연이라는 비유를 통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읽어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는 출산하는 산모를 통해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산고가 없는 출산이 없습니다.
그 산고를 치른 후에 생명을 출산합니다.
얼마나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입니까!
베드로는 산고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서 예수님을 막아 세운 것입니다.
주님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신 하나님의 시를 읽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특별히 사용하시던 비유의 방식을 버리시고 드러내 놓으신 방식으로 주께서 베드로에게 고난에 대해 말해 주었는데 베드로는 전신으로 주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말로 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주의 뜻을 반대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32.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께 항의하였다.
32.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
이 행위는 확고한 신념을 의미했는데 그 신념이 베드로의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간절한 예수님의 충고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에 대한 악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거역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까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드럼을 치면서 두 손을 들고 오직 감정에 충동 되어서 소리를 질러대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 십자가가 있는지 자기 성취가 있는지
그릇된 신학에 기초한 신학이 있는지
베드로가 고난을 거부하는 신학으로 무장하고 두 손을 들고 제 원하는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가식이 없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주님을 위해 주님의 몸을 밀어내면서 주님의 말씀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그 주소지에서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난을 수용하는 의지를 기초로 하는 것입니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막8:27-33)
33. But when Jesus turned and looked at his disciples, he rebuked Peter. “Get behind me, Satan!” he said. “You do not have in mind the concerns of God, but merely human concerns.”
주님은 이렇게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향해서 그 말을 했던 것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님이 제자를 향해서 이처럼 심각하게 비난하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것은 사탄이다.!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을 배역하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주의를 무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성령을 경험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사탄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학을 고수하며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막는 것을 두고 사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머리에 뿔이 돋은 자를 두고 사탄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했음에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부인하는 자를 사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내용성을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33.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막8:27-33)
33. “You do not have in mind the concerns of God, but merely human concerns.”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하나님의 의지와 사람의 의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와 사람의 의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지가 목표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난으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수용하는 일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위한다면서 주님의 말씀에 제 귀를 막을 것입니다.
그 치명적인 일을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가치를 전도시키실 것입니다.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