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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돌하르방과 석상들 Ⅰ- 돌하르방과 그 기원설
국내·외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원래의 이름이 아니라 근래에 생겼다.
돌하르방은 그 석상이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여 어린이들 사이에서 불리던 명칭이 1971년 8월 26일에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돌하르방은 ‘돌로 만들어진 할아버지’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그렇다면 원래 돌하르방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사실 돌하르방이란 명칭이 대표성을 띠고 사용되기 이전에는
다양하게 불려 제주도에서 전반적으로 통용되던 명칭은 확실치 않다.
우석목, 무성목, 벅수머리, 두릉머리, 돌영감, 수문장, 장군석, 동자석, 망주석, 옹중석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이러한 명칭들은 석상의 형상, 또는 기능이나 신앙적 의미에서 붙여진 듯하다.
그중에서도 우석목, 무성목, 벅수머리, 옹중석이라는 이름이 많이 통용되었으나, 우석목이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이었다.
이런 명칭들은 제주도의 3읍이었던 제주목·대정현·정의현 등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게 사용되었다.
즉 우성목은 제주목에서, 무성목은 대정현과 정의현에서, 벅수머리는 정의현에서 사용되었다.
옹중석은 문헌에는 드러나지만, 민간에서 통용된 예는 확인되지 않는다.
옹중석은 고사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에 완옹중이라는 거인으로 하여금 임조를 지키게 하여서 그
용맹이 널리 북방의 흉노족 사이에 알려졌다.
옹중의 사후에 동상을 만들어 함양궁 사마문 밖에 세워서 지키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호신장류(동상이나 석상)를 옹중 또는 옹중석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한학자들이 시묘석인이나 석장승을 옹중이라 기술하였다.
두릉머리는 대정읍 인성리의 말로 방언에 뿔이 닳아진 소를 ‘두릉머리’라 하는 것으로 보아 석상의 두상에서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불교지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미륵, 돌부처라고도 불렀다.
부녀자들 사이에는 불상이라고는 보지 않으면서도 배례를 드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벅수머리는 표선면 성읍리에서 무석(성)목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호칭인데 제주시나 대정읍에는 없고
성읍리 주민들 사이에서만 사용되었다.
‘벅수+머리’의 합성어로 볼 수 있으며 남부지방에서 장승을 벅수라 하는데 여기에서 생긴 말인 듯하다.
돌하르방은 장승에 비해 머리 부분이 개성적인 형상을 하고 있어,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벅수머리로
불렀을 것이다.
가장 많이 사용된 우석목 또는 우성목은 偶(인형, 짝: 우)石木, 偶成木, 偶像木, 有聲木 등의 변음이고 무석목
또는 무성목은 武石木, 無聲木, 無聲默, 武像木 등을 어원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어쨌거나 모두 목(木)이란 글자가 붙어 있다.
이러한 명칭에서 석상이 세워지기 이전에 석상의 기능과 닮은 목상이 세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돌하르방의 제작 시기의 경우, 심재 김석익(金錫翼)의 「탐라기년(眈羅紀年)」(1918)과 담수계
(淡水契)에서 펴낸 「탐라지(眈羅誌)」에 의하면,
돌하르방을 옹중석이라 하여 1754년(영조 30)에 당시 제주목사 김몽규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제주성의 것들을 만들어 세웠다는 것인지, 정의현성·대정현성의 것들도 이해에 같이 만들어 세웠
다는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만일 3성의 것을 함께 만들어 세웠다는 기록이라면 같은 목사의 지시로 만들어진 3성의 것이 각각 그 형태가
다른 까닭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제주목사가 정의, 대정 2현도 같이 진관하던 제도 하에서 목사의 명으로 설치한 사실과 3개 처의
형태가 유사하며, 배치방법도 성문에 국한 되었고, 제주도에 장승(벅수)이 희소 한 점에서 동 시기에 제주
읍성의 것을 본받아 세웠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자료에서는 대정의 돌하르방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크기가 가장 작고 형태가 온순하고 단순하며 받침대가 없는 것에서 나온 이론인 것 같다.
주강현선생은 정의현에서 사용된 ‘벅수머리’라는 말에 창안하여 제주도의 한 석공이 육지의 남부에 갔다가
조선 후기의 잘 생긴 돌벅수(장승)를 발견하고 고향인 정의현(성읍)에 돌아와서 자신의 손에 익숙한 제주식
조각 형식을 기반으로 해서, 새롭게 보고 온 육지 남부의 양식을 결합하여 돌하르방을 창조했다는 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육지영향설)
돌하르방을 만들 숙종·영조 연간에 제주에는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리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많았다.
그중에는 원귀가 되어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있어 제주목사 김몽규가 동·서·남 삼문 밖에
옹중석을 만들어 세우고 원귀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인구는 큰 자연재해나 질병이 없으면 보통 증가한다.
돌하르방을 세울 당시(1754년)인 1717년에서 1759년까지 42년간 조선의 인구는 역으로 33.081명이 감소
한다.
「숙종실록」에 ‘1713년 제주, 대정, 정의에 대풍우가 밀려와 해일이 산을 덮고, 무너진 가옥도 2천여호가
되었다. 사람들도 많이 죽었는데 폐사한 우마가 4백여 마리나 이르렀다.’라 고 되어 있다.
1764년(영조 40년) 가을에도 큰 홍수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고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리며 다음해까지
굶주려 죽은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육지에서 전염병(두창)과 흉년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제주에 들어 온 제주목사 김몽규는
육지의 장승과 벅수를 본받아 읍성의 수호신상을 세웠을 것이다.
이 당시 육지의 장승(벅수)이 두창 방역역할로 널리 전파된 것을 볼 때 제주에 장승(벅수)이 많이 세워지지
않은 것은 외딴 섬, 통행의 불편 등으로 전염병 유행이 상대적으로 적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돌하르방이 성곽과 관계가 있다는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할 경우, 1754년 김몽규의 명으로 세웠다는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1754년에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제주도는 1416년(태종 16)에 제주목·대정현·정의현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었고, 얼마 후에 각 도읍지에
성곽이 축성되었다.
「탐라기년(眈羅紀年)」에 대정현성은 1418년, 정의현성은 1423년에 축성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다만 제주목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탐라국 당시 쌓았던 것을 고려 때 왜구 방어용으로
보수하여 사용했고 조선 초기에 다시 석성으로 쌓았을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태종 11년(1411) 제주성을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돌하르방이 세워졌다면 그 이전에는 성문 앞에 돌하르방과 같은 석상이 전혀 없었
는지 의문이 생긴다.
제주 돌하르방의 기능
돌하르방은 성문 입구에 서로 마주보게 배치되어 마을의 평안과 융성을 지켜주며 기원하는 수호신적 기능,
사악한 것을 막아주는 주술 종교적 기능, 성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의 구분이나, 성문 출입을 제한하는 위치
표지 및 금지 표시 기능 등 육지부의 장승과 비슷한 기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돌하르방의 기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첫째, 돌하르방은 제주목 성문 입구에 서로 마주보게 배치되어 성안을 지키는 신상으로서 문지기, 수호,
방어의 역할을 지님으로써 마을과 주민들의 안녕과 융성을 지켜주며 기원하는 수호신적 기능을 가졌다.
이는 무덤 앞에 세워진 동자석의 기능과 같은 맥락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정낭을 걸쳐놓은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조각되어 있는 예로 보아 수문신장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칭상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을 ‘벅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벅수’는 육지부에서 ‘장승’을 일컫는 말로 장승과 돌하르방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마을의 경계에 세워져 방사의 기능을 지녔던 거욱대와 같이 악귀의 침범과 재난의 피해를 막아주거나,
아이를 못 낳은 여인이 밤에 몰래 돌하르방의 코를 쪼아서 빻아 먹으면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는 속신과
관련하여 유추해 보면 주술 종교적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속신으로 인해 코가 마모된 돌하르방이 많다.
셋째, 성문 밖에 세워졌다는 것은 주현성(州縣城)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위치 표지 및 성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경계표시 기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외부인들의 성문 출입을 제한하는 금표적 기능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돌하르방은 육지부의 장승이나 거욱대의 변형으로 제주도 특유의 종교와 문화를 표현한 석상으로,
특히 당시 하층민들은 돌하르방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면서 지나갈 정도로 신성시
하였다고 전해진다.
제주도 돌하르방 (현존 47기)
현재 제주도에는 제주시내 21기, 정의(성읍)에 12기, 대정에 12기 전체 45기의 돌하르방이 남아 있고 서울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 제주시의 돌하르방 2기가 옮겨져 있다.
현재 47기의 돌하르방 원형이 남아있다. 전체 48기의 돌하르방 가운데 1기는 사라졌다.
또 돌하르방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시가지 발달 과정에서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제대로 조사도 이루
어지지 않았고, 보존되지도 못한 채 무단으로 옮겨져 그 소재지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제주도 전체 돌하르방의 개수는 48기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도 정확하지 않다.
정의현과 대정현의 돌하르방은 동, 서, 남문 밖에 4기씩 세워 한 현에 12기씩 전체 24기 모두가 남아 있다.
그러나 제주목은 동, 서, 남문 밖의 2곳에 4기씩 나눠서 한 성문 밖에 8기씩 세워 전체 24기에다 북수구문에
4기가 더 있었다는 자료가 있다.
「벅수와 장승(1990년, 김두하 저)」의 내용을 보면 일정초기에 동, 서, 남문 밖에 24기와 북수구문에 4기를
더해 전체 28기의 돌하르방이 있었다고 되어있다.
1963년 현용준의 보고에서는 전체 25기의 위치가 적혀있어 3기가 소재 불명이다.
1968년 이후의 여러 보고에는 23기의 위치만 밝혀 놓아 결국 지금과 같은 5기가 소재 불명이다.
제주도청 문화정책담당자는 초기에 제주시에 세워진 것은 24기가 맞고 후에 증설되거나 다른 곳의 돌하르
방이 이동 된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2012년 1월 12일 확인) 아직까지도 제주도 돌하르방의 전체 개수는 몇 기였는지 오리무중이다.
48기인가 아니면 52기인가?
Ⅰ. 제주목 돌하르방
제주시에는 제주대학교 4기, 관덕정 4기와 제주목관아 내 화단 2기(근래 제주공항에서 이전), 삼성혈 4기,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 2기, 제주시청 2기, 제주 KBS방송국 2기, 제주 돌문화공원 1기(탐라목석원에서
이전) 등 21기가 남아있고 서울 경북궁 국립민속박물관 앞에 제주시에서 이전된 2기가 있다.
제주 돌문화공원 돌하르방과 짝을 이룬 것으로 추정되는 1기는 분실되었다. 전체 23기가 남아있다.
대체로 제주시의 돌하르방들은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 몸집이 크고 근엄한 표정으로 권위를 앞세운 것이
특징이다.
제주시의 돌하르방의 평균 높이는 181.6cm으로 가장 크고 돌하르방에 20~30cm의 기대석이 있다.
(돌하르방 평균 키 높이: 제주 181.6㎝, 성읍 141.4㎝, 대정 136.2㎝)
우리가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돌하르방이나 제주도 기념품으로 만들어진 돌하르방은 제주시의 것을 모델로
만든 것이다.
1963년에 이루어진 현용준의 조사에 의하면, 원 위치인 구 제주성 동문 앞의 돌하르방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용준의 조사에 따라 당시의 위치를 보면 성문이 있었던 자리 바깥으로 길이 S자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고부라진 두 개의 굽이에 각각 2조씩 8기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문의 위치에서 약 35m 떨어진 곳에서 길이 한 번 굽이돌고, 그 길 굽이의 좌우에
2기씩 돌하르방이 마주 세워져 있고, 다시 약 50m 거리에서 길이 굽이도는데, 이 굽이의 좌우에 2기씩
마주 세워져 있다.
또한 남문 자리인 만수당약방 앞 우물통 골목은 S자형의 좁은 골목길로, 석상이 하나 남아 있는데 이것이
원래 위치의 것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보면 제주성의 각 문 앞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돌하르방을 세워놓았
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후 1968년에 남아있던 23기 중 제주성 동문 밖의 2기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아래의 분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제주시문화전자대전, 돌하르방 항목(2007년)에 따랐다.
▲제주시 돌하르방 위치 이동 상황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제주시 돌하르방의 소재지와 문화재 지정번호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1. 제주읍성 서문 밖 돌하르방: 6기 현존
1)관덕정 앞 돌하르방 2기
남(좌):제주 민속자료 제2-1호 높이 216cm, 북(우):제주 민속자료 제2-2호 높이 213cm
2)관덕정 뒤뜰 2기
남(좌):제주 민속자료 제2-5호 높이 171cm, 북(우):제주 민속자료 제2-6호 높이 14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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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의 돌하루방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제주읍성 서문 밖에 있었던 돌하르방이 옮겨
진 것이다.
관덕정 앞쪽의 돌하르방은 굳은 표정을 하고 있어 경계심을 갖게 하는데 반해, 뒤뜰에 있는 돌하르방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어 한결 부드러운 인상이고 크기도 작다.
관덕정 뒤뜰 남(좌)쪽에 서있는 돌하르방은 가슴이 젖무덤처럼 볼록하다.
그런데도 ‘돌할멍’이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볼록한 가슴을 용맹스러운 남자의 발달된 가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돌하르방에 수염이 없고 볼록한 가슴 때문에 건장한 청년의 상이라는 설이 나오고 있다.
맞는 말이다. 돌하르방은 성문을 지키는 수호신상이다. 당연히 건장한 청년이어야 한다.
여기다 한 가지 덧붙이면, 돌하르방 기원설의 기원이 되는 곳의 석상에도 수염은 표현되어 있지 않았다.
즉 남방기원설의 인도네시아 발리섬 베네키사원의 석상과 몽고기원설의 몽골 ‘훈출로’라는 석상에도 수염은
없다. 기원이 되는 곳 석상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기원설은 뒤에 다루겠다.
3)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 입구 2기
동(우):제주 민속자료 제2-3호 서(좌):제주 민속자료 제2-4호
돌하르방 기대석에 ‘o', 'ㄱ’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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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박물관 앞에 있는 제주민속자료 2-13호 동(좌)은 표지석에 서문에서 옮겨 왔다고 되어있다.
그러면 서문 밖 돌하르방은 7기가 현존하는 셈이다. 1기가 분실이다.
2. 제주읍성 남문 밖 돌하르방: 7기 현존
1)삼성혈 입구 2기
동(좌):제주 민속자료 제2-7호 232cm, 서(우):제주 민속자료 제2-8호 216cm
구부정한 자세로 팔꿈치를 직각으로 꺾고 있으며 눈 위에 ㅡ자형 주름이 잡혀있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다.
동(좌):오른쪽으로 비스듬한 얼굴, 똑바른 모자와 몸통, 얼굴과 몸통, 세밀다듬, 매우 큰 매부리코
서(우):왼쪽으로 비스듬한 얼굴, 다른 돌하르방에 비해 팔 부위가 강하게 표현되지 못 함.
2)삼성혈 건시문 앞 2기
동(좌):제주 민속자료 제2-9호 174cm, 서(우):제주 민속자료 제2-10호 193cm
1963년 현재의 자리로 이사 왔으며 입구의 것과 거의 같은 생김새인데 다만 팔등과 등 부분이 좀 더 평평
하다.
동(좌): 왼쪽으로 비스듬한 얼굴, 원통형 신체, 팔 부위가 강하게 표현되지 못함.
서(우): 왼쪽으로 비스듬한 계란형 얼굴
3)제주목관아 내 화단 2기(제주공항에서 이전)
북(좌): 제주 민속자료 제2-19호, 남(우): 제주 민속자료 제2-20호
왼쪽에 있는 것이 코가 더 뭉퉁하고 몸통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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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제주 돌문화공원 1기(탐라목석원에서 이전) 제주민속자료 제2-21호
분실된 1기와 짝을 이루던 것으로 추정한다고 공원 안내문에 적혀있다.
:어떤 근거에서 분실된 한 기와 짝인지 의문이다.
단지 홀로 있다는 것 때문에 짝이 분실되었다고 막연히 추정하는 것은 아닌지....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 제주 민속자료 2-14호 서(우)는 표지석에 남문에서 옮겨 왔다고 되어있다.
그러면 남문 밖 8기는 모두 존재하는 것이 된다.
박물관 앞 다른 돌하르방은 표지석에 서문에 옮겨 왔다고 되어있다.
그러면 서문은 7기가 현존하는 것이 된다. 1기 분실이다. 오히려 서문 밖의 어떤 한기가 짝이 없는 것은
아닐까?
참고로 제주시의 돌하르방 가운데 원 위치를 밝힌 표지석이 있는 돌하르방은 제주대학교의 4기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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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주읍성 동문 밖 돌하르방:
8기 모두 현존(6기 제주시내, 2기 서울 경복궁 국립 민속박물관 앞)
1)제주대학교 정문 2기
동(좌):제주 민속자료 제2-11호 210m, 서(우):제주 민속자료 제2-12호 244m
동(좌):오른쪽으로 약간 돌린 계란형 얼굴, 원통형 몸체, 받침돌에 ‘ㄱ’형태의 홈이 있음.
서(우):왼쪽으로 약간 돌린 계란형 얼굴, 긴 원통형 몸체, 받침돌에 ‘O'형태의 홈이 있음.
※제주대학교 정문 앞 돌하르방의 표지석에는 2-11호 동(좌)와 2-12호 서(우)는 모두 동문에서 옮겨
왔다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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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제주시청 현관 2기
동(좌):제주 민속자료 제2-15호 207m, 서(우):제주 민속자료 제2-16호 180m
동(좌):얼굴과 몸 정면을 향함, 긴 게란형 얼굴, 코 끝 마모, 오른손 가슴, 배아래 하단부 생략
서(좌):동쪽 돌하르방보다 작은 체격,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세워진 얼굴, 배아래 하단부 생략
3)제주KBS 방송국 현관 2기
남(좌):제주 민속자료 제2-17호 233m, 북(우):제주 민속자료 제2-18호 230m
남(좌):오른쪽으로 약간 돌린 계란형 얼굴, 이마에 일자형 선
북(우):오른쪽으로 약간 돌린 계란형 얼굴, 이마에 물결선
4)서울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앞 2기
동(좌): 받침돌에 저명한 ‘ㄱ’형 홈이 있음, 서(우):받침돌에 저명한 ‘O'형 홈이 있음
'ㄱ'자와 'O'형 홈에 정낭을 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주읍성 동문 밖에 있었던 2기가 이전된 것이다.
4. 제주읍성 북수구문 밖 돌하르방: 2기 현존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 2기
동(좌):제주 민속자료 제2-13호, 서(우):제주 민속자료 제2-14호
동(좌)에 있는 돌하르방은 관덕정 뒤뜰 남쪽(좌)에 있는 것과 같이 가슴이 젖무덤처럼 볼록하고 모자
위쪽에 도드라지게 조각된 테두리가 있다.
※제주대학교 표지석에는 2-13동(좌)은 서문, 2-14서(우)는 남문에서 옮겨 왔다고 되어있다.
Ⅱ.정의현(성읍) 돌하르방 12기
정의현의 동, 서, 남문 밖에 있는 돌하르방 12기는 모두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성문 밖에 4기씩 배열되었고 성문의 바깥쪽 돌하르방이 안쪽보다 크기가 큰 편이다.
정의의 돌하르방은 대정의 돌하르방보다는 크고 제주시 것들보다 작은데 둥글넓적하고 단순하며 갸름
하게 내리뻗은 코는 대정 것과 비슷하지만, 게슴츠레한 눈과 선 하나로 그어져 있는 입 모양은 덤덤하거나
무뚝뚝해 보여 표정만은 제주목 돌하르방에 가깝다.
1. 동문 밖 4기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965-1, 971-2
제주 민속자료 제2-22호(동문 북우), 제주 민속자료 제2-23호(동문 북좌)
제주 민속자료 제2-24호(동문 남우), 제주 민속자료 제2-25호(동문 남좌)
2.서문 밖 4기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729-3, 768-1
제주 민속자료 제2-26호(서문 북우), 제주 민속자료 제2-27호(서문 북좌)
제주 민속자료 제2-28호(서문 남우), 제주 민속자료 제2-29호(서문 남좌)
3. 남문 밖 4기
제주 민속자료 제2-30호(남문 동우), 제주 민속자료 제2-31호(남문 동좌)
제주 민속자료 제2-32호(남문 서우), 제주 민속자료 제2-33호(남문 서좌)
Ⅲ.대정현 돌하르방 12기
대정의 돌하르방은 원래의 개수인 12기 모두 현존하나 위치는 원래의 자리를 떠나 전부 옮겨져 있다.
다른 지역의 것보다 키가 작고 온순한 인상이다.
2기의 돌하르방(민속자료 제2-41호, 제2-43호)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은 목도리 같은 것을
두르고 있고 2기의 돌하르방(민속자료 제2-35호, 제2-41호)에서는 양손을 마주하고 있다.
12기 모두 받침돌이 없다.
1.제주 민속자료 제2-34호: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1246-1, 서문에서 신평리간 도로변 받침돌 위에 맷돌과 같이 올려져 있다.
2.제주 민속자료 제2-35~36호:
대정읍 보성리 1584-2, 1584-4. 서문 밖 보성리사무소 입구 좌(남), 우(북)
2-35(좌, 남) 양손을 마주하고 있다.
2-36(우, 북)
3.제주 민속자료 제2-37호:
대정읍 보성리 2139, 대정현 서문 옹성 내, 도로변 돌담 아래
5.제주 민속자료 제2-41~42호:
대정읍 보성리 1752 대정현성 내 남문 입구 주위, 보성초등학교에서 보성농협 가는 도로변, 좌(동, 2-41),
우(서, 2-42)
2-41(좌, 동) 양손을 마주하고 있다. 목도리 같은 것은 목에 감고 있다.
2-42(우, 서)
6.제주 민속자료 제2-43호(동), 44호(서):
대정읍 안성리 1661-1, 추사관 앞, 동문 성곽 밖도로변
2-43(좌, 동) 동쪽 돌하르방에는 목도리 같은 것을 감아 끝은 내리고 있다.
2-44(우, 서)
7.제주 민속자료 제2-45호:
대정읍 인성리 728-9 대정현성 동문 옹성 내, 추사관 앞 도로변
돌하루방 손의 위치에 따른 해석?
어떤 자료에는 나란히 포갠 손의 위치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른손이 위로 가 있으면 문신, 즉 학식을 의미했고, 왼손이 위로 가 있는 것은 무사, 즉 힘을 의미했다고
한다.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오른손, 왼손 위인 경우가 대칭이 되지 않고 숫자가 다른 대정과 정의 돌하르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 양손을 마주한 대정 돌하르방 2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정 돌하루방 12기--오른손 위:8기, 왼손 위:2기, 양손을 마주한 경우:2기
정의 돌하르방 12기--오른손 위:3기, 왼손 위:9기
남문 오른손 위:3기, 왼손 위:1기, 동문 왼손 위:4기, 서문 왼손 위;4기
제주 돌하르방 전체 28기 현존 23기-- 오른손 위:11기, 왼손 위:12기
서문(6기 현존, 2기 분실) 오른손 위;3기, 왼손 위:3기
※서문에서 이전하였다는 표지석이 있는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 좌측 1기는 오른손이 위쪽이다.
그러면 현존하는 서문 전체 돌하르방 개수는 7기가 되고 오른손이 위에 있는 것은 4기가 된다.
남문(7기 현존, 1기 분실) 오른손 위:2기, 왼손 위:5기
※남문에서 이전하였다는 표지석이 있는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 우측 1기는 오른손이 위쪽이다.
그러면 남문 전체 돌하르방 개수는 8기가 되고 오른손이 위에 있는 것은 3기가 된다.
동문(8기 현존) 오른손 위:4기, 왼손 위:4기
북수구문(2기 현존, 2기 분실) 오른손 위:2기
:북수구문에서 이전된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 2기를 표지석에 나타난 것처럼 각각 서, 남문에 산입하여 계산
하면 오른 위 11기, 왼손 위 12기가 된다.
제주목의 돌하르방을 서로 손의 균형을 맞춰 세웠다면 오른손이 위에 있는 1기가 분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손의 위치에 따라 문신과 무사를 나타낸다는 가설은 제주시의 돌하르방에 한해서 성립할 가능성은 있다.
참고로 문인석, 무인석이 나란히 세워진 강진 병영성 홍교 앞 벅수 무인석의 경우는 도난당한 무인석 원작은
오른손이 위로 가고 칼을 쥐고 있다.
무인석 복원작도 오른손이 위에 있다.
병영성 홍교앞 석상(벅수)는 1700년 중반 이전 또는 1806년 이동선 병마절도사 재임 때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제주도 돌하르방의 기원설
돌하르방의 다양한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석상이 어떤 연유로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유래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제주도 자생설’, ‘육지설(한반도 남부 기원설)’, ‘몽골 기원설’, ‘남방 기원설
(인도네시아 기원설)’ 등 4 가지 설이 거론되고 있으나,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고 논쟁 중이어서 여전히
정확한 정설은 없다. 근래에는 랴오허문명(발해연안문명) 관련설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Ⅰ. 제주도 자생설
제주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신앙을 바탕으로 독창적으로 나타난 조형물로 보는 견해이다.
전편에 제주도의 석상들을 거의 다 기술하였다.
특히 고려시대 작으로 여기지는 제주의 복신미륵(동자복, 서자복)과는 상당히 관련이 있어 보인다.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관리(목사 김몽규)의 명령에 의해 돌하르방이 제작되었다면 반드시 본이 되는 석상이
존재했을 것이다.
만일 성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세워졌다고 하면 도민과 전혀 관계가 없는 석상을 세워봤자 아무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제주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우상을 본받아서 제작한 것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제주의 돌하르방이 김몽규의 명에 의하여 만들어졌어도 그것을 만든 석공은 육지사람이 아닌 제주 사람들
이었을 것이고 그 제주 석공들이 나름대로 제주 정서와 전통을 표현했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 돌하르방에는 오랜 역사 안에서 축적된 제주의 다양성과 독창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가종수의 「한국 석상의 원류를 찾아서」를 인용하였다.)
Ⅱ. 육지영향설(한반도 남부기원설)
석장승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주 운흥사 장승이 1719년, 남원 실상사 장승이 1725년과 1731년에
만들어졌으니, 돌하르방이 만들어진 1754년은 현존하는 석장승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품들이 만들어진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돌하르방은 조선 후기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석장승 문화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것으로 추정해볼
수도 있다.
특히 석장승이 가장 많은 지리산 자락의 남원 주천면 호기리의 주천석장승은 돌하르방과 매우 닮아있다.
주천석장승은 벙거지와 팔과 손이 조각 되어 있다.
남원 주천면 호기리 주천석장승--벙거지와 팔과 손
※제주 돌하르방과 한국의 석장승과 형태적 비교
1.유사점
1)신체의 높이가 본토의 석장승과 비슷하다.
2)머리에 쓴 벙거지가 석장승의 벙거지와 같다.
(머리에 벙거지를 쓴 석장승:
* 남원 실상사 석장승 3기, *호기리 주천 석장승 1기, *운봉면 서천리 당산 2기,
*강진 병영성 홍교 앞 석장승1기(무인상), *무안 해제면 발산리 장승 1기,
*부안 동문안 당산 상원주장군, *영암 금정면 쌍계사지 석장승 2기 등이 있다.)
남원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 석장승--벙거지
남원 운봉면 서천리 당산 석장승--벙거지
3)체형이 머리는 구비되어 있으나 몸통은 주형이고 다리와 발은 조각되지 않았다.
4)눈을 비현실적으로 크게 조각하였다.
5)표정이 노상(怒相)이다.
2.특이한 점
1)돌하르방은 전부 수염이 없고 입을 다물어서 치아가 보이지 않는다.
:육지에서도 수염이 없거나 치아가 보이지 않는 장승은 많다.
2)두 팔이 있고, 두 손은 손가락까지 부조되어 있다.
:두 팔이 있고 손이 새겨진 장승도 제주 고유의 형태는 아니다.
*순창 남계리 석장승, *곡성 가곡리 석장승, *강진 병영성 석장승, *광주 학운초등학교 원 위치
불명의 장승 등은 팔과 손이 조각되어 있다.
순창 순창읍 남계리 석장승-팔과 손
곡성 오산면 가곡리 석장승--팔과 손
광주 동구 운림동 학운초등학교 원 소재지 불명 석장승--팔과 손
대구 신당동 석장승(대구 달서구 계명대학교 캠퍼스 내)--팔과 손
3)제주읍성 돌하르방의 기단석에 ‘o’, 'ㄱ’ 홈이 있어 정낭을 끼워서 걸쳐 놓게 되어 있다.
:고려시대 작으로 보이는 남원 만복사지 석인상의 경우에는 받침돌은 아니지만 몸통에 2개의 'ㅇ' 구
멍이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을 당간지주의 한 형태로 보거나 우리나라 장승의 초기작으로 보는 견
해도 있다.
남원 왕정동 만복사지 석인상
돌하르방의 받침돌에는 정낭을 끼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ㄱ’, ‘ㅇ’ 홈이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에도 2개의 ‘ㅇ’홈이 몸통에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은 당간지주의 한 형태 또는 사람의 모습을 한 사찰장승의 시원으로도 추정한다.
4)전부가 동 시기에 건립 설치되었고, 단 한번 만들었고, 당시 3개 성에 국한하여 성문 밖에 세웠다.
:성문 앞에 세워진 한국의 장승(석상)으로는
*부안 부안읍성 당산의 장승, *강진 병영성 서문 홍교 앞 석상(벅수), *광주 동문 앞 장승,
*장흥 관산 석장승(장흥 고읍이 관산 방촌리), *서산 해미읍성 미륵 등이 있다.
부안 부안읍 동중리 동문안 당산, 서외리 서문안 당산 석장승
무안 무안읍 성남리 석장승--무안읍성 남문
광주 북구 용봉동 전남대학교 박물관 앞 광주읍성 동문 석장승
장흥 관산읍 방촌리 석장승--방촌리는 조선시대 장흥의 치소, 읍성의 서북쪽 북문 밖
여수 연등동, 봉산동 벅수(도난)--전라 좌수영 서문, 남문 길목(약 10리)
강진 병영면 하고리 병영성 서문 홍교 앞 벅수(무인상)--벙거지
서산 해미면 해미읍성 해미 미륵불
해미읍성의 4방에서 읍락 비보 장승의 역활을 한다. 미륵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석장승과 미륵불의
습합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잘못된 명칭이다. 형태와 기능에서도 미륵불과 석장승의 중간이다.
제주 돌하르방은 한국 남부의 석상과 외견상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기능면에 있어서도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 따라서 제주도 석상과 한국 석상과의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제주도문화와 석상의 다양성과 독창성 또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 남부 지방의 석장승으로
*남원 주천석장승 외에 *영암 금정면 남송리 쌍계사지 석장승 2기.
*남원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 입구 석장승 3기. *남원 운봉읍 서천마을 당산의 석장승 2기,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의 1기가 있다.
이들 석장승은 돌하르방과 매우 흡사하여 이들 간의 관련성이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이들 석상의 얼굴 부분은 돌하르방과 매우 닮았지만 또한 많은 차이점도 있다.
제주의 돌하르방은 매시브(massive-괴상. 육중한, 웅크린 자세)석상과 유사점이 많고 이들 장승은 멘히르
(menhir-입석)형 석상이라는 현저한 양식적인 차이가 있다.
영암 금정면 남송리 쌍계사지 석장승--벙거지
무안 해제면 광산리 발산마을 미륵당산 석장승--벙거지
창녕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 석장승--벙거지
「한국 석상의 원류를 찾아서」(가종수, 기무라 시게노부 저)에서 제주도 동자석은 육지의 무인석, 문인석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인정하면서도 동자석에 생식기를 표현한 것은 한국 남부지방에서 볼 수 없는
제주도 동자석만의 특징적인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장승이나 석상뿐만 아니라 제주도 동자석을 포함한 제주도의 어떠한 석상에서도 직접적으로
성기를 표현한 석상은 발견 할 수 없었다.
다만 남성 성기를 암시하는 송이를 들고 있는 동자석이나 석상의 형태가 성기를 암시하는 것은 존재했다.
제주 돌문화공원과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에 문의해도 전시된 석상 가운데 성기를 표현한 석상은 한 점도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남근석이나 여근석을 제외한 제주도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석상에 직접 생식기를 조각한 예는 없다고 단언
할 수 있다.
반면에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남방문화권의 석상은 거의 대부분 성기를 표현하고 있고 몽골의 석상들도
성기를 표현 것이 많다.
Ⅲ.몽고기원설
임동권이 몽고 만체스 마을에 남아 있는 1기의 석상을 근거로 하여 장승이나 돌하르방이 고려시대에 몽고의
영향으로 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한국의 몽골 연구자들에 의해 몽골 기원설이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1990년대는 한국인 연구자가 몽골의 현지조사를 행했던 초기로 세상의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몽골의 지배하에 있었던 고려시대(13~14세기)에 한국문화가 몽골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제주도는 1273년부터 1374년까지 약 100년간 원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다.
1273년(원종 14) 삼별초의 항쟁이 좌절된 뒤 제주에 설치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에 다루가치(達魯花赤;
달로화적)가 배치되어 일본 침략의 전진기지 겸 황실 목장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에도 몽고 말(馬)의 산지로서 몽고인 목자(牧子)의 이주가 고려 말까지 계속되었다.
돌하르방은 몽골에 남아 있는 훈출로라는 석인상과 닮은 것으로 보아 몽고의 유풍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가설은 거의 부정된 것으로 보인다.
1.같은 원의 지배하에 있었던 중국과 한반도 북부에 몽골과 유사한 석상이 눈에 띄지 않는다. 14세기
몽고의 영향을 받았다면 같은 지배하에 있었던 다른 지역에도 당연히 그 영향이 보여야 할 것이다.
2.몽골 석상 연구의 권위자인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의 바야르 박사도 돌하르방의 몽골 기원설
에 부정적이다.
3.몽골의 석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특징인 13~14세기 몽골제국시대 석상과 입석형 석상인 7세
기 돌궐제국시대 석상으로 구분된다. 이 두 양식 모두에서 오른손이 가슴 앞에서 잔과 같은 식기를 들
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의 장승이나 돌하르방에서 의자에 앉은 의상은 전혀 없고 또 식기 같은
것을 들고 있는 경우도 전혀 없다.
다만 돌궐제국시대 석상은 한국의 장승과는 조각적으로 매우 흡사하다.
다시 말해 입석형 석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경주 괘릉(원성왕릉 추정)과 흥덕왕릉의 무인석은 중앙아시아의 돌궐제국시대 석상과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다.
6~7세기 돌궐제국시대 석상과 13~14세기 몽고제국시대 석상비교
경주 괘릉(원성왕릉 추정)과 흥덕왕릉 무인상--중앙아시아 위구루인?
13~14세기 몽골제국시대 석상은 제주도 돌하르방과 관련성은 없지만 그 이전의 석상 혹은 청동기시대의
몽골 사슴돌과 한국 장승과의 관련성은 배제할 수 없다.
Ⅳ. 남방기원설(인도네시아 기원설)
김병모교수는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에서 돌하르방이나 장승은 남방적인 색체가 농후하여 그 기원을
적도해류와 쿠르시오해류에 의한 문화의 전파라고 논하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베사키 사원의 석상을 예로 들어 돌하르방과의 관련성을 지적하면서 돌하르방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또 이스터 섬의 모아이 상과 유사성을 지적하며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석상문화는 환태평양에서 동지나해에
연결되는 해양문화가 한국에 전파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대략 이야기하면 아래와 같다.
페루(잉카문명)→이스터섬 모아이 석상→인도네시아 발리섬(베사키사원 석상)→필리핀→제주도 돌하르방
발리 베사키사원의 석상은 높이가 50~70cm 정도로 작지만 남성상과 여성상을 성기로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두건 형을 한 모자, 울퉁불퉁한 눈, 양손을 배위에 둔 점 등 제주도 석상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돌하르방과 모아이 석상의 유사성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1.석상의 손 모양 : 한손은 가슴 약간 아래쪽, 다른 한손은 아랫배에 위치.
2.귀의 모양 : 소위 부처귀의 모양이 일치
3.눈과 코의 연결선 : 눈썹과 콧날이 연결되고 있는 모양
4.모자의 형태 : 凸자 모양 일치. 한국의 다른 석상들에서 볼 수 없는 특징(?)
:대륙문화가 아닌 해양문화의 특성 가능성을 내포한 부분
5.석상 밑 기단의 모습 : 돌하르방-석상과 일체형, 모아이-석상과 분리형 모습.
:형태적으로 돌하르방이 모아이 석상이 만들어진 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시사, 모아이 석상 기단
의 형태를 단순화시켜 표현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종수, 기무라 시게노부 공저 「한국 석상의 원류를 찾아서」에서 제주 돌하르방의 기원을
기원전 400년에서 기원전 100년까지 지속된 북부베트남의 선사 청동기시대문화인 동손문화에서 시작되어
전파된 인도네시아 중부 술라웨시섬의 석상군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술라웨시섬의 석상은 환태평양의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석상의 수수께끼를 규명하는 유산으로 보고 있다.
가종수, 기무라 시게노부교수도 제주 돌하르방의 기원을 김병모교수와는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인도네시아를
기원으로 하는 남뱡해양설에 중점을 두고 있다.
1.김병모교수--적도, 쿠르시오(흑조)해류에 의한 문화전파
: 인도네시아 발리섬 베사키사원 석상이 기원
특히 김병모교수의 적도해류에 의한 페루(잉카문명)→이스터섬 모아이 석상→인도네시아 발리섬
(베사키사원 석상)의 연결고리는 부정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대부분 민족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은 동쪽은 이스터섬, 서쪽은 인도양 서부의 마다가스카르 섬, 남쪽은 뉴질랜드,
북쪽은 대만과 하와이 제도를 범위로 하는 500개 이상의 언어와 민족을 포함한다.
문화인류학적조사에 의하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고향은 중국 남부(운남성)나 북베트남에서 약 6,000년
전 동남아시아의 도서부나 태평양의 많은 섬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최근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선조는 중국 남부 근처에서 기원전 4000~3500년에 대만으로 이동하고 그 후
필리핀을 경유하여 인도네시아, 오세아니아로 확산되었다는 설이 구미 연구자들에 의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태평양의 면적은 약 1억 6000만㎢로 육지의 면적보다 크고 전 해양 면적의 1/2에 해당한다.
지구의 둘레는 4만km로 발리 섬과 남미 페루 해안을 동서 일직선으로 연결하면 약 1만 9000km인데 발리
섬에서 제주도까지는 약 6,000km 정도이다.
따라서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슬라웨시에서 단발적 혹은 우발적인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동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태평양을 이동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항해용 (더블)아우트리거 카누를 주목하고 있다.
폴리네시안들은 1,000km를 10일 안에 갈 수 있는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다.
또 가종수, 노무라 시게노부는 이스터섬 모아이 석상의 기원은 동남아시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노르웨이 출신 디오 헤이어달(Thor Heyerdhal)은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고구마를 부르는 말이 남미 인디오
들의 말과 같은 것에 의문을 품고 잉카제국이 1592년 스페인에 의해 멸망했을 때 적도해류를 타고
폴리네시아에 도착한 사람이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이스터섬은 폴리네시아의 동쪽 끝이다.)
가종수, 기무라 시게노부교수--청동기시대 북베트남 동손문명에서 시작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확산에 의한 문화전파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석상이 기원
이스터 섬 모아이석상
그는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페루에서 자생하는 발사나무로 만든 뗏목-잉카 신의 이름을 딴 ‘콘티키
(Kon Tiki)호'-을 타고 페루 카카오 항구를 떠나 6명의 선원과 함께 100일간의 사투 끝에 폴리네시아에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그래서 이스터섬 모아이의 남미(페루)기원설이 한 때 유행했으나 현재는 완전히 부정되어 동남아시아
기원설이 유력시 되고 있다. 이스터섬 모아이 석상의 루트는 아시아이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헤이어달이 강조한 고구마는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이스터 섬 주민들의 주식은 맞다. 그러나 고
구마와 두세 가지 재배 식물을 제외하면 이스터 섬의 거의 모든 재배 식물과 가축은 모두 아시아가
원산지이다. 태평양 제도의 모든 재배 식물은 과거에 폴리네시아에 온 사람들이 동남아시아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고구마는 아마도 남미와 일시적으로 접촉한 마르키즈인에 의해 폴리네시아에 도래
해 그것이 이스터 섬에 전해진 것이다.
2. 이스터섬에는 남미 프레 잉카인이 주식으로 한 옥수수나 감자가 없고, 또 그들이 일상에 이용한 토기
나 직물도 없다. 만약 헤이어달이 주장했듯이 남미로부터 이민에 의해 이스터섬 문화가 만들어진 것
이라면 왜 그들은 주식이나 생활필수품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 일까?
3.폴리네시아어가 인도네시아어와 강한 친연성을 가지는 반면 남미의 인디언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4.헤이어달은 모아이를 만든 남미 기원의 장이족(長耳族--귀가 긴 민족)이 폴리네시아인인 단이족(短
耳族)에 멸망했다고 하는데 이스터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래 현재까지 민족이 바뀐 사실이 없
고 문화의 단절도 없었다.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