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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82회. '삼국통일의 교두보,삼년산성' (2000.08.19.)
82회 : 삼국통일의 교두보,삼년산성
삼국통일의 교두보,삼년산성
방송일: 20000819 조회수 : 2354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신라 통일의 교두보, 삼년산성의 비밀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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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tr(7초)
성벽 나타나고(11초) 충북 보은에 세워진 신라의 산성, 삼년산성.
천오백년이 흘렀지만 그 웅장한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다.
성벽(10초) 산성의 이름에서,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
분명하게 기록돼 전해져오는 유일한 산성.
거대한 성벽 zo(7초) 신라는 왜 이 산성을 쌓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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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신라 통일의 교두보 , 삼년산성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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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1-오프닝
#서재에서 삼국사기 책 꺼내 들고 멘트 시작
제가 지금 들고 있는 책은 삼국사기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관한 기록중 가장 믿을 만하고 가장 방대한 내용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 삼국사기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한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삼국사기중 기록 2개 떠오르고------떠오른 기록 보면서 설명
470년 자비왕대에 신라가 삼년에 걸쳐 산성 하나 쌓았는데 그 뒤 486년이 되면 일선계, 그러니까 일선이라는
마을 부근에서 장정 삼천명을 동원해 성을 개축했다 이런 기록입니다.
공사가 삼년 걸렸다 해서 이름이 삼년산성이라고 합니다.
한 산성의 축조과정, 그러니까 성을 언제 쌓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해 성을 쌓았는 지 아주
상세하게 적어둔 것입니다.
보통 역사적인 기록들은 수많은 사건들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압축해 적어두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 산성의 축조과정을 이렇게 자세히 적어놓았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삼국사기 전체에 걸쳐 이런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돕니다.
#서재에 삼국사기 넣고/고려사 꺼내들고
이것만이 아닙니다. 여기 고려사에도 이 산성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고려사 기록 떠오르고 .
성이 만들어진 지 500년이 흐른 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공략하기 위해 이 성을 침공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궁금증은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470년이라면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군사력 경제력 사회전반에 걸쳐 100여년이상 뒤져있던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약하다고 판단되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그 과정에 이 산성이 어떤 중요한 역할을 담당
했던 것은 아닐까요?
천오백년전, 이 산성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분위기 바꿔주고
삼년산성, 우리에겐 낯설기만 한 산성입니다. 우선 이 산성은 어떤 산성인지, 그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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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항공-삼년산성으로 가는 길(17초) -5초보고
충북 보은군 어암리.
평야지대 한복판에 해발 325미터 오정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년산성은 저 오정산 정상에 세워져있다.
표지판(3초)
산으로 올라가고(8초) 오정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까지는 제법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성벽 나타나고(9초) 삼년산성.
신라가 3년에 걸쳐 쌓았다는 산성은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옆에서 본 성벽(12초) 크고 작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는데, 작은 틈도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성벽 pan(15초) 산 정상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세워져 있는 이 성벽만으로도 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높이(11초) 실제 성벽 높이는 최고 20미터에서 13미터까지 조금씩 다르다.
무너진 성벽(5초) 산의 능선을 따라 건설됐기 때문이다.
넒이재기(8초) 그러면 성벽의 폭은 어떤가. 대체로 7,8미터. 말 두필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
둘레(8초) 이처럼 일정한 폭을 유지하는 성벽이 1680미터나 이어진다.
성벽 아래로 난 절벽(11초) 게다가 성벽 바깥쪽으로는 바로 깊은 계곡이다.
정해진 길이 아니면 성벽까지 오르지도 못하는 구조다.
항공-성벽따라(15초)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산성.
-그대로 보고
전체 산성 항공(8초) 이 산성은 어떻게 천오백년동안 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
차교수와 걷고(7초) 20년전 최초 발굴조사를 맡았던 차용걸교수는 먼저 그 성벽의 견고함을 손꼽았다.
인터뷰/차용걸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성을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중 가장 좋은 것이 고로봉이라고 해서 마치 바구니처럼
생긴 지형에 쌓은 성을 우수한 성으로 평가.삼년산성은 바로 봉우리들이 죽 둘러서 서 있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돼서 마치 바구니모양으로 되어 있는 그런 지세에다 산의 능선을 타고 성벽이 축조돼있다. 이렇게 산의 능선을
타고 축조되기 때문에 밖으로는 기존의 경사면을 이용해서 훨신 높은 성벽 효과를 낼수 있고 또 봉우리마다
튼튼한 성벽을 만듬으로 해서 (51초)
성벽(3초) 조사 결과 성벽를 이루고 있는 돌은
돌 만져보고(7초) 보통의 자연석이 아니다.
손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는 판석형 석재다.
돌 쌓아논 모습(8초) 이런 돌이 대략 천만개이상 사용됐다.
그 많은 돌을 어디서 가져왔을까.
인터뷰/차용걸
이 성이 자리잡고 있는 산의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기반암이 바로 이런 돌이다.
그리고 이 주변에 있는 기반암도 많기 때문에 여기서 멀게는 탄부면까지 이런 돌이 분포하고 있어서 그 성을
쌓을 때에 보은에는 돌이 다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인근에 있는 돌이란 돌은 거의 다 여기로 날랐다고 봐야
겠다.(30초)
아래서 본 성벽(8초) 크고 작은 돌로 빈틈없이 쌓아진 성벽. 이 돌을 어떻게 쌓았을까.
돌 전문가 성벽 걷고(9초) 석재전문가와 함께 성벽을 조사해보기로 했다.
인터뷰/권오달 석공예명장
어느 한 부분이 깨졌다해도 어느 부분 걸려 있으니까 내려오지 않아 (6초)
돌-권오달씨 현장에서 보여주고(15초) 성벽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각각의 돌을
가로 세로 엇물려 쌓았다.전체로 보면 우물 정자 형태다.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픽/내외협축(16초) 축조방식에서 드러나는 또다른 특징은 외벽과 내벽 사이가 흙이 아닌 돌로 채워졌다는
점이다.성벽 전체가 그물처럼 얽혀진 거대한 하나의 돌과 같다.
수평맞춘 돌(10초) 따라서 어느 한쪽이 기울게 되면 전체가 완전히 허물어질 우려가 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인터뷰/권오달
수평이 가장 좋은 것.수평을 잡아놓으면 위에서부터 하중을 반드시 내리 받게 되어있다 이말이야...
삐뚤어지게 서면 힘이 한쪽으로 몰리면 떨어지게 되어있고
그러니까 이 돌을 그냥 보시면 삐뚤어지게 보이지만 이 산의 형체가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이지 사실은 이
자체가 전부는 수평이 잡혀있다 이말이야. (29초)
논과 밭(8초) 이렇듯 당대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 견고하게 지어진 삼년산성의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pan 연못(5초) 논과 밭은 물론 연못의 흔적까지 남아있다.
아미지(5초) 신라 최고의 서예가 김생 글씨로 전해지는 아미지.
pan 연못(6초) 이것이 이 연못의 이름이다.
우물 찾아가고(9초) 논밭과 연못이 있다면 그것은 식량과 물의 자급체계를 갖췄음을 의미한다.
우물가에서 문 만지고(10초)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다.조사팀은 우물도 찾아냈다.
-현장 오디오살리고
우물(8초) 현재 확인되는 이런 우물이 2개.
특별히 식수를 확보할 정도로 성안 시설은 체계적이었다.
인터뷰/차용걸
기록상으로 보면 성안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5개 내지 6개.
이것은 수많은 사람이 계속 거주해도 물 모자랄 걱정 없다 (23초)
평지 돌아보고(9초) 성 동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대단히 넓은 평지도 나타난다.
군사들의 훈련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돌 zi(8초) 그 평지 위쪽엔 주춧돌의 흔적도 보인다. 다른 돌(4초) 훈련을 지휘하던 본부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토기 파편줍고(17초) 이 건물터 주변에선 지금까지 많은 기와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파편중 삼국시대 것으론 유일하게 신라 것만이 출토되고 있다.
인터뷰/차용걸
삼년산성에서는 이제까지 백제나 고구려의 흔적 그 유물 이런 것이 발견된 적이 없는 그걸 통해 바로
삼년산성이 470년에 축조되어 통일을 완수할 때까지 한 번도 신라가 남의 나라에 삼년산성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을 말래주는 것. 그만큼 삼년산성은 신라가 다른 서쪽 북쪽의 성을 빼앗겨도 삼년산성만큼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가장 훌륭한 성을 구축했기 때문에 감히 백제나 고구려에서 삼년산성을 공략할 마음을 먹지 못했다
이렇게 생각된다.(50초)
노을-성벽(18초) 470년 만들어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까지 단 한번도 주인이 바뀐 적이 없는 산성.
삼년산성의 견고함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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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삼년산성 성곽 (*그래픽) 스튜디오 펼쳐지고
#유인촌씨 성곽 주변 돌다가 한곳에서 돌 하나 빼어들면 그것이 곧 판석(*그래픽에서 진짜 돌로 변환)
이 돌이 바로 삼년산성을 쌓았던 그 돌입니다.
상당히 무겁군요. 두 손으로 간신히 들 정도입니다.
요즘처럼 기계로 크기를 맞춰가며 잘라낸 것은 아니어서 모두 똑같은 크기는 아니지만 이 돌을 살펴보면
자연석을 그대로 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위 아래가 평평하고, 정교하게 잘라낸 흔적들도 보입니다.
크기를 맞추기 위해 사람 손을 거쳤다는 애깁니다.
이 성벽에 대체로 이런 돌 천만개 정도가 동원됐다고 하니, 대략 8톤 트럭 2만5천대분의 분량입니다.
돌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 성을 만드는 일은 대역사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돌 내려놓고 돌아서서 걸으며
성이 만들어 진 것이 5세기 후반.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이제 막 체제를 정비하고, 주변의 숱한 부족국가들을
통합해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그런 와중에 경주 부근도 아니고, 멀리 보은지역,즉 국경선이 있는 전방에 대
역사를 벌였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신라는 왜 보은지역에 이렇게 견고한 대형 산성을 건설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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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중원군 입석리(9초) 5세기 후반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중원고구려비에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짐작케하는 내용이 전각(3초) 담겨있다.
비석-자막(9초) 고구려군의 지휘관이 신라의 관리로 임명될 정도로 신라는 고구려의 복속국가 상태였다.
경주시 노서동 고분군(14초) 또한 경주에서 발굴된 호우총에는 광개토대왕을 추모하는 제기도 나왔다.
호우(11초) -5초 보다가
고구려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게해주는 증거들이다.
삼국사기(5초)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록/내물왕 복호 인질(9초) 당시 고구려는 신라 내물왕의 아들을 인질로 잡고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실시하고
있었다.
기록/실성이 왕위에 오르다(11초) 내물왕의 뒤를 이은 것은 실성왕.
그런데 실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는 다시 눌지에게 넘어간다.
왕관(13초)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에 왕위에 오른 눌지왕.
그러나 그는 서서히 고구려로부터 자립하려는 움직임을 전개해나간다.
실직성 사건(19초) -자막 나올때까지 보고
그 신호탄이 바로 실직성 사건이다.
신라인이 고구려군의 장수를 살해한 것이다.그것은 고구려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인터뷰/양기석 충북대 교수
신라는 고구려 제도 문화 받아들여 발전의 밑거름을 삼았다.김씨 세습체계를 확립한다는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구려 내정간섭이 발목 잡아 자립화운동 추진. 5세기 후반 일이다.(41초)
나제통문(10초) -5초보고
이때 신라가 택한 방법은 백제와 협력하는 일이었다.
간판(4초) 군사적 열세에 놓여있던 신라가 고구려에 대항하기
국경검문소(5초) 위해선 백제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사정은
안내판(5초) 백제도 다를 바가 없었다.
트럭 들어오고(17초)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을 빼앗기고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처해있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한강 유역 회복에 나서야 할 처지였다.
반대편에서 가고(9초) 이렇게 만들어진 신라와 백제의 군사적 협력관계는 눌지왕에서 진흥왕대까지 100여년
동안 계속된다.
지도/5세기말 3국의 국경(8초) 이때 삼국이 국경을 맞댄 곳이 보은 일대.삼년산성이 세워진 바로 그 지점이다.
인터뷰/서영일 경원대 교수
보은을 중심으로 삼국의 세력관계를 볼 때 고구려 전성시대에는 바로 북쪽으로는 고구려가 있었고,
그 다음에 서쪽으로는 백제 동쪽으로는 신라 남쪽으로는 가야지역이다. 일종의 이 지역이 모든 세력이 교차
하는 지점이 된다. 당연히 신라가 북진을 꿈꿨다 하게 되면 바로 그러한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고 난 다음
에서야 그 다음단계로 나갈수 있을 거다. 신라가 최종적으로 목표한 것은 물론 한강유역.한강유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보은 지역을 차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40초)
전쟁이미지(22초)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보은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백제에게 있어
보은은 한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신라가 이 싸움에 뛰어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 였다.
지도/경주에서 한강까지(15초) 경주를 기반으로 세워진 신라가 한반도의 중심부,
한강유역까지 진출하는데 결코 소흘이 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p' 인터뷰/양기석
따라서 신라는 북진 루트로 추풍령선택. 첫 번째로 보은 삼년산성 축조.고구려 전진기지로 삼아. 예상되는
백제와의 대립....백제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지점이 보은 삼년산성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축조한 것.(35초)
산정상에 선 두 사람(8초) 삼년산성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은 현장에서 바로 확인할수 있다.
주변 pan(14초) 속리산을 뒤로 하고 보은평야가 바라다보이는 이곳은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든 막힘없이
나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다.
상주 방면(5초) 산성의 동쪽은 상주방면. 상주를 거치면
도로 zi(6초) 바로 경주까지 닿는다.이 길은 당시 최대 교통로였다.
인터뷰/서영일
남쪽으로 가면 김천, 장군재 넘어 바로 김천.추풍령 방면. 신라가 두 가지 길 모두 사용.
서쪽으로 봤을 때는 지금 가려서 잘 안 보이지만 저 봉우리 넘어서 이어지는 길 저 산을 뚫고 이어지는 길이
옥천방향. 그럼 옥천으로 나가서 바로 대전이나 금산으로 갈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앞에 보이는 평야지대를 따라서 죽 협곡지대가 연결돼있다. 그래서 이게 바로 청주로
통하게 되는데 청주에서 ...한강유역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분)
한강유역+지도(27초) 동서남북의 중요도시가 불과 40킬로미터 안팎에 놓여있다.
이곳을 완전히 점령한다면 한강유역 진출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 절대절명의 과제가 부여된 포기할수 없는
지역. 그곳에 삼년산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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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대결하던 시대에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 하던 것은 바로 산성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전투가 성을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견고한 성을 확보하고 있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따라서 삼국은 모두 성 쌓는 일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삼년산성의 경우 그 규모나 성벽의 견고함만 놓고 보더라도 대충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닙니다.
여기를 주목해 주십시오.
#수구 실사 뜨고
성벽가운데 작은 구멍이 나있습니다. 이것은 돌이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 성을 쌓을 때부터 계획해서 만든
것입니다. 바로 성 안에서 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수구입니다.
#수구 실사 줌인
높이가 63센티미터, 폭이 43센티미터쯤 되고, 오각형으로 돌을 다듬어 만들었습니다.
이 수구는 성벽안쪽, 그러나가 외벽에서 내벽까지 관통하고 있는데 안으로 갈수록 정교한 계단형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수구 실사 줌 아웃 유인촌씨 그림과 함께 서 있고- 수구 그래픽으로 바뀌고
아직 발굴이 완성되지 않아 이 수구의 안쪽이 어디까지 이어져있는 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아마도 성 내부
에서 모아진 물을 이곳을 통해 밖으로 흘러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수구를 잘 만들었구나 싶은 대목은
수구의 맨 밑바닥 돌을 좀더 크게 만들어 물이 성벽을 타고 흐르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성벽을 철저히 보호하겠다는 것이지요.
삼년산성을 설계하고, 또 시공했던 신라인들은 대단히 많은 준비를 했던 모양입니다.
#걸으면서
우리는 삼년산성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수구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신라인들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결코 단순한 성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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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서문 zi 항공(8초) 산성의 역할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적의 침략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일이다.
서문터 (6초) 삼년산성의 정문은 바로 서문.
성벽위로-앞은 계곡(14초) -그림 5초 보다가
깊은 계곡 바로 위에 만들어져있었다.
성벽 끝으로 내려다보고(11초)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발생했다. 도대체 어떻게 서문까지 올라왔던 것일까.
할아버지 찾아가고(7초) 취재팀은 어암리 일대에서 3대까지 살고 있는 한 할아버지를 통해 그 비밀을 풀수
있었다.
산길 올라가고(8초) 칠순의 할아버지가 어릴 때만 해도 삼년산성으로 가는 길은 숲속의 작은 오솔길뿐이
었다고 한다.
성벽 앞 길(6초) 서문 진입로는 바로 성벽 옆으로 난 그 작은 길이었다.
인터뷰/할아버지
지금은 포장도로.30년전만해도 샛길.삼년성 비탈길로 어암리 일대 왕래.
유일한 길 (19초)
그래픽/서문앞 길 표시(10초) 성벽아래 바짝 붙은 도로. 한꺼번에 많은 군사가 진입할수 없는 구조다.
성문밖 옹성 표시(11초) 서문의 방어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문 바로 앞에 쌓여있는 허물어진 돌더미.
돌의 흔적(4초) 그것은 옹성의 흔적이다.
그래픽/옹성 내려오고 공격 화살(14초) 옹성은 기본 성벽과는 별도로 설치되는 보조 성벽이다.
성문을 보호하고, 적군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터뷰/차용걸
이 벽체 바깥쪽에 자연암반으로 된 암벽들이 있다. 그래서 적군이 오더라도 암벽사이에 숨었다가 성문으로
들어오려고 해도 높은 성벽을 기어올라와야 하고 기어올라오면 다시 성문이 가로막고 이런 구조로 되어있다.
또 문쪽에 계곡으로 다가온 적을 양쪽에서 측면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의 위쪽에 보면 양쪽에 커다란
반원통형으로 쌓아올린 곡성을 배치하고 있다.
이 곡성에서 성문이 있는 계곡쪽으로 활을 쏜다든지 돌을 던지면 아무도 이 계곡으로 접근할 수 없도록 몇 중
방어막을 구성하고 있다 (53초)
그래픽/서문(17초) 문 앞까지 진입하는 데만도 이중 삼중의 방어막이 설치된 서문.
만약 그 모든 방어막을 모두 뚫고 성문앞까지 도달했다고 해도 성안으로 진입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성벽 아래로 문틀(9초) 그런데 서문터에 남아있는 문틀이 이 성의 방어력과 관련된 또다른 의문을 던져준다.
문틀(6초) 이 네모진 구멍은 성문을 매단 기둥을 박았던 자리다.
긴 구조물(11초) 이 구멍을 중심으로 막대 형태의 돌 구조물이 직각으로 연결돼있다.그것은 문이 이 구조물
사이에서 움직이도록 돼 있음을 말해준다.
차교수와 설명(4초) 문이 바깥쪽으로 열리는 구조였다.
인터뷰/차용걸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 기둥 세우는 구덩이는 바깥쪽으로 열리는게 다른 성에서 찾아볼수 없다.
(15초)
문지두리홈(5초) 삼년산성만의 유일한 구조.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래픽/기둥 내려오고, 문(22초) 남아있는 흔적을 토대로 서문을 만들어보았다.
-잠시보고
이 구조물에 의해 문은 앞으로만 열리고 뒤로는 결코 밀리지 않도록 완벽하게 고정됐다.대단히 과학적으로
설계된 문이었던 것이다.
당차로 성문파괴(8초) 만약 문이 부서져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성문 부서지는 것 보고
안으로 연못(11초) 서문 안쪽은 바로 연못이다.이것을 모르고 들어왔을 땐 그대로 연못에 빠질 수밖에 없는
또다른 방어책이 마련돼있었다.
동문터(9초) 서문 공략이 쉽지 않다면 반대편 동문 사정은 어떨까.
동문 역시 문의 형태는 남아있지 않지만
pan 차교수(10초) 조사 결과 서문과는 또다른 특별한 구조로 이뤄져 있음을 발견했다.
인터뷰/차용걸
지금 무너져 묻혀있지만 들어와서 다시 한번 꺽였다 다시 서쪽으로 꺽여들어가는
이중 꺽임문 구조 (11초)
그래픽-동문구조(12초) 성벽 자체를 제트자 모양으로 꺽어놓은 동문. 성안으로 들어오기란 거의 불가능한
구조다.
절pan 사람들 오르고(8초) -3초보고
그렇다면 이 성에는 서문과 동문 2개의 문만 있었을까.
현장오디오/이 부분이 북문터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8초)
북문터(4초)
산 올라가고(11초) 성의 북쪽, 청주방면을 바라보는 지역엔 또다른 문이 세워져있었다.
성벽 pan 북문앞 석축(7초) 이 북문의 구조는 성밖에서 살펴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터뷰/차용걸
벽을 통해 직접 기어올라갈수 없도록 밖 안쪽 선택해 s자 형으로 성문 밖에 이중 차단벽을 두어서 (26초)
그래픽-북문 석축(17초) 북문은 문 앞에 두 개의 보조 석축을 쌓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석축이 마치 옹성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산 pan 남문(8초) 북문이 있다면 분명 남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문의 흔적을 찾기란 무척이나 힘들었다.
무너진 성벽(5초) 그것은 보통 문의 형태과 전혀 다른 구조였다.
그래픽-남문(25초) 지상에 만들어진 문이 아닌 성벽위에 창문처럼 매달린 문.
5미터가 넘는 사다리가 아니고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구조다.
성문 4개를 각각 다른 구조로 설계해낸 신라 기술력의 총집합체. 그것이 바로 삼년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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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스튜디오에서 삼년산성 펼쳐지고
정말 대단한 기술력입니다.
자연 지형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적의 동태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곡성에다가 성문앞에는
옹성까지 있습니다.
이중 삼중의 방어벽인 셈이지요.
그 벽을 모두 넘어 성문앞까지 도달한다고 해도 성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려면
또 한 번의 격전을 치러야했을 것입니다.
이거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지요.
이쯤되니 삼년산성을 공략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산성을 세운 지 100여년 뒤
삼년산성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니다.
그것은 신라의 통일전쟁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기록/삼년산성의 장수 도도가 백제 성왕 죽이다
그것은 바로 삼년산성 출신의 한 장수 도도가 백제 성왕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제동맹 관계에 있던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게 된 것도 그렇고, 백제의 왕을 역사상 크게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한 장수가 죽였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삼년산성의 역할과 삼년산성을 지키던 신라 장수들의 수준을 말해주는 진흥왕15년 554년.
사건이 일어났던 그때로 돌아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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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전쟁이미지(24초) 진흥왕대에 이르러 신라를 지켜보던 백제는 분노했다.
신라가 자신의 영토였던 한강 동북방면을 공격해,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그 군주로 삼은 것이다.
이로써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끝이 났다.
인터뷰/김건식 삼년산성 연구회 회장
저 멀리 보이는 것 한민산성. 백제동쪽 끝성이다. 이 산성에선 직선거리로 4킬로미터.
그 사이 넓은 들이 있는데 이곳이 신라와 백제의 전쟁터였다.(28초)
들판(22초) 이때부터 양국의 국경이 만나는 삼년산성 일대는 하루가 멀다하고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접전이
계속됐다.
말 무덤 찾아가고(4초)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하는 흔적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무덤 올라가고(12초) 바로 말무덤이다.
전쟁중에 죽어간 수많은 말들을 처리할 길이 없어 돌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삼년산성쪽 pan 말무덤(7초) 특이한 것은 이 말무덤이 삼년산성과 백제 산성 중간에 만들어져있다는
사실이다.
pan 백제쪽 (6초) 이곳이 두 나라 모두에게 최전방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 걷고(7초) 삼년산성 부근에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을 표시했다고 전해지는 비석도 남아있다.
인터뷰/김건식
신라와 백제 경계석이다.이곳 역시 전쟁터였다 (20초)
경계석(4초) 6세기 후반.접전을 계속하던 양국엔
두 사람(4초) 국가 운명이 달린 한판 승부가 예고되고 있었다.
밤-산길 헤매고(25초) 진흥왕 15년.
동맹을 깨뜨린 신라에 대해 분노한 백제 성왕은 총공격을 명령했다.성왕의 아들이 이끄는 백제 3만대군은 신라
관산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왔다.
전쟁 초기 신라군은 그런 백제를 당해낼수 없었다.
삼국사기(4초) 당시 전황을 기록한 삼국사기는
기록/전세 불리해 지원요청(7초) 다급해진 신라 군 사령관이 지원을 요청했다고 전한다.
장수 달려오고(19초) 이때 달려온 장수가 바로 삼년산군 출신 장수 도도였다.
당시 도도는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의 비장으로 한강유역 방위에 투입돼있는 상황이었다.
인터뷰/서영일
비장이란 것은 요즘 말하면 보좌관 정도로 할수 있는데 김무력의 비장으로서 삼년산군 출신의 도도가 있었다는
것은 삼년산군 지역 바로 보은 지역의 사람들이 신주의 방어에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당연히 나제 교통로상에 있는 보은 지역을 통과하려는 성왕을 비롯한 3만명의 백제군의 침입이 있을 때
삼년산군 출신의 도도가 이 전투가 참가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왜냐 도도가 이곳의 지리를 가장 잘 알겠죠.(40초)
말 달리는 이미지(17초) 한편, 성왕은 군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50여명의 친위부대만을 대동하고 전장으로
향한다.
산길 헤매고(11초) 이 첩보를 입수한 도도는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삼년산성 아래쪽 관산성 부근에서의 일이었다.
어둠속-말 쓰러지고(9초) 뜻밖의 기습을 당한 백제 성왕.
그는 이 전투에서 처참하게 전사하고 만다.
기록/29600명 전사, 필마무반자(12초) 성왕의 죽음으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기록은 살아서 돌아간 백제군은 아무도 없다고 전한다.
기록/삼년산군 출신 고간 도도(8초) 그리고 그 전과의 주인공이 바로 삼년산군 출신 장수였음을 분명히
언급해두고 있다.
지도/6세기말 신라영토 확장(10초) 이로써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은 본격적으로 진행됐고, 그 영토 또한
급속히 확장돼나간다.
인터뷰/주보돈 경북대 교수
중요한...군사물자를 보급해준다거나 병력진출하는 제2전선의 기능을 했던 것.
따라서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한강유역이 신라 영역으로 뿌리를 내릴수 있었던 것.(30초)
한강유역 진출+지도(14초) 신라의 한강 진출은 곧 서해안지역까지 연결됐다.
이것은 당나라와의 직접적인 교통로를 확보한다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 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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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삼년산군, 즉 삼년산성 출신의 장수가 성왕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는 사실은
당시 삼년산성 출신 장수들의 전투력이 얼마나 대단했는 지 짐작케 해줍니다.
그렇다면 이 성에는 얼마나 많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을까요.
#성 내부 시설 도면 그래픽 뜨고
성안에는 망을 보거나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적을 방어하는 곡성 주변으로 평지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병사들의 막사가 있었던 곳으로 예상됩니다.
성 안은 크고 작은 언덕들이 있어 그 안을 돌아다니다보면 산길을 걷는 것 같은데요.
성 한 가운데에는 천평은 족히 넘어보이는 넓은 평지가 나옵니다.군사들을 훈련시키던 연병장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됩니다.
그 연병장 위쪽, 성에서 가장 높은 이 지역엔 장군이 머물렀음직한 건물터도 보입니다.
현재 이 건물들의 크기나 형태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사단병력 정도의 대규모 병력이 주둔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고 여섯 개에 달하는 우물이라던가 논밭이 있다는 사실이 이런 추정을 뒷받침해줍니다.
적의 공격을 철저하게 막아내는 것은 물론, 어떤 공격이 가해지더라도 버틸 수 있도록 물과 식량의 자급자족
체계를 만들어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 두 사람의 기술자,일이백명의 노동력으론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3년이나 걸려 만들어진 성, 성을 보수할 때 장정 3천명을 동원했던 성.
신라는 어떻게 이런 대역사를 이뤄낼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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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삼국사기(4초) 486년 신라는
기록/일선계 삼천명 동원(11초) 삼년산성을 개축하면서 일선계에서 3천명을 동원했다.
3천명,당시 그것은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인터뷰/심정보
고구려가 최고 전성기에 동원한 군사력이 30만명,백제나 신라의 경우 10만명이 채 안됐음을 놓고 볼 때 보은의
삼년산성을 축조하면서 3천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공사였는지를 알수 있다. (34초)
차 달리고(9초) 그렇다면 신라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삼년산성의
공사를 맡았던 일선계, 즉 일선 지역이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선산표지(3초)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일선은 지금의 선산군.
선산군(19초) 보은에서 60킬로미터이상 떨어진 곳이다.
성을 보수하면서 왜 신라는 삼년산성 주변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대규모 인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인터뷰/서영일
근처에서 징발할수 있는데 그 멀리까지 징발해 왔던 건 여러 사정이 있었을텐데...
하나의 성을 쌓을 때 여러지역 굉장히 원거리에서 노동력이 동원됩니다. 근데 그 중에서도 일선군에서 많이
동원됐다는 것은 삼년산군지역에서 그렇게 신라가 철저하게 지배할 수 없었던 다시말해 군사적 거점은
설치할 수 있어도 행정적인 영역으로서 통치는 어려운 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해소된 게 삼년산성을 축조하고 얼마 시간이 지나면서 이 성을 배경으로 행정적 통치까지
가능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44초)
적성비 찾아가고(5초) 국경지대의 공사에 대규모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문 열고 (4초) 행정체계.그것은 어떤 수준이었을까.
적성비-자막 훼부 당주 (13초) 삼년산성보다 70여년뒤에 세워진 단양 적성비를 보면 공사책임자중 중앙관리와
지방관리가 명확히 구분돼있음을 알수 있다.
비석-자막 행정체계(15초) 또한 한 사람의 관리 이름을 적으면서 직명에서 관등까지 모두 표기했다.
관리들의 서열과 직책이 이미 세분화돼서 체계가 잡혀있음을 알게하는 대목이다.
비석(12초) 이뿐만이 아니다.신라는 협조하는 세력과 이탈하는 세력에 대해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었다.
인터뷰/주보돈
적성비에 나오듯이 적성 출신의 야이차라고 하는 인물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해서 포상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그보다 앞선 시기에 울진 봉평 ..이 이탈해가려는 세력에 대해 벌을 주는 그런 내용들이 보인다.
변방민에 대해서는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가능하면 주민들을 포섭하려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간 것이 아닐까. 적극적 협조세력에게는 세금 혜택, 이탈자에게는 군사적 지배하면서 수탈, 공물을
많이 바치게 하는 수탈정책을 통해 이탈세력을 막았다. (48초)
기록/실죽이 공사담당(10초) 그렇다면 삼년산성의 공사를 맡은 책임자는 누구였을까.
이찬 실죽.
실죽 이미지(14초) 이찬이라면 신라 중앙의 17관등중 서열 2,3위를 차지하는 최고위층을 말한다.이는 신라가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산성의 공사를 진행했음을 의미한다.
일선 순행 이미지(12초) 그리고,그 대대적인 삼년산성의 보수공사를 전후해 두 번에 걸쳐 신라 소지왕은
일선지역 순행길에 올랐다.
인터뷰/주보돈
순행목적중 중요한 것은 국경지대 주민을 자기 영토의 주민이라고 생각하고 관계 확인시켜 주려는 목적이 가장
강했다 (30초)
산+산성 축조지도(23초) 삼년산성을 완성하고 난 뒤 신라는 소백산맥 부근에
수십개의 또다른 산성을 쌓기 시작한다.
그것은 중앙과 지방을 잇는 행정체계가 완비되고,국가의
통치질서가 정비됐다는 하나의 증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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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
당시 변방지역에서 대규모 공사를 벌인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사업이었습니다.공사를 하려면 인력을 동원해야하는데,
때로 공사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곤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세기 후반 신라가 보은 지역에서 성공리에 3년에 달하는 대공사를 마무리 지었다는 것은
경주 중심의 신라 통치력이 여기까지 충분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신라가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왕을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해낸 것입니다.
결국 신라는 삼년산성을 통해 두 가지 목표를 이뤄냅니다.
그 하나는 지리적 요충지에 세운 견고한 산성을 교두보로 삼아 한강에 진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 건설사업을 통해 국력을 한 데 모으고, 국가의 인력동원 체제를 정비해낸
것입니다.
이 두가지 목표는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사항들이었습니다.
이제 삼년산성을 지은 지 200년후. 7세기에 접어들면 신라는 통일 전쟁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투로 예전처럼 백제나 신라에 대해
신경을 쓸 틈이 없었습니다.
또한 백제는 성왕이 죽은 뒤 다시금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나
이미 회복하기엔 늦은 상태였습니다.
200년을 앞서 통일을 준비한 신라의 행보는 이때 아주 공격적으로 급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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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말 달리는 군사이미지(16초) 삼년산성을 지은 200년후.
신라는 이제 한강이북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며 통일을
향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인터뷰/박래종 보은문화연구원장
김유신 장군이 품일 흠춘 두 장수와 함께 5만 정병의 무술 연마하던 곳이 이곳(20초)
공터(6초) 삼년산성의 진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4초)
기록/황산벌로 진군하라(16초) 660년.드디어 태종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와의
협상을 마무리짓고, 백제 사비성을 향해 진군명령을
내렸다.
말 달리고+진격로(19초) .협상을 위해 남천정까지 올라갔던 김유신이
5만 정병을 집결하고, 진군을 시작한 지점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쟁이미지(24초) 김유신의 신라군이 백제 계백장군이 이끄는 최후의
결사대와 만난 곳은 황산벌.
-5초 보고
나라의 사활이 걸린 처절한 전투가 이어졌으나 백제는
신라의 기세를 꺽을수 없었다.
패한 이미지(6초) 7월23일 전투는 끝났고 사비성은 함락됐다.
승리 진군(15초) 그로부터 5일뒤인 660년 7월28일.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은 축하행사가 한창이던
사비성을 뒤로하고 삼년산성으로 향했다.
성대한 행사(13초) 그곳에서 성대한 국제회담이 예정돼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왕문도 조서 삼년산성에서 받다(13초) 당나라 황제의 조서 전달식을 바로 이 삼년산성에서
거행한 것이다. 웅진 도독, 즉 지방장관인 왕문도는
당나라 황제를 대신하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성벽(11초) 삼국통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을 막 넘은 시점에서
무열왕은 왜 당나라 사신을 삼년산성으로 불러들였던
것일까.
점령지 사비도 아니고 신라수도 경주도 아닌 이곳이
선택된 이유는 무엇일까?
삼년산성(37초) 신라가 이미 200년전 축조한 거대한 산성.
완벽하고 치밀하게 설계하고 신라가 당대 최고의
기술을 한데모아 만들어낸 그 산성을 당나라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인터뷰/차용걸
신라가 왜 이 삼년산성에서 당나라 황제의 조서를 받으려했던가 이것은 당나라 황제가 보낸
사신단이 한두명이 아니고 대규모였을 것입니다. 신라로서는 장차 있을 지 모르는 당나라의
야욕, 이런 것을 생각해서 그 당시 신라로서 가장 웅장하고 가장 완벽한 성곽을 축조해놓은
이곳에서 삼년산성 조서 전달식을 거행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34초)
그래픽-삼년산성 회전(42초) -그래픽 잠시 보다가 성벽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면
168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성.
그 누구도 공략할수 없었던 철저한 방어시설들.
-왕궁으로 줌인 들어가면
성 한가운데엔 당나라 사신과 국제회담을 하기에
손색없는 왕의 행궁이 자리잡고 정예부대를 길러내는
각종 훈련시설을 갖춘 천혜의 요새,삼년산성.
현재 모습-항공(29초) 그 산성을 발판으로 통일을 준비한 신라의 손에 의해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는 탄생했다.
고구려의 마지막 항전도, 당나라의 야심도 신라의 힘을
꺽지 못했다.
신라 통일의 힘. 그 한 가운데 삼년산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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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7-클로징
한반도 첫 번째 통일국가를 세워낸 신라는 사실 삼국중 가장 뒤늦게 출발한 나라였습니다.
나라를 세운 지 300년이 넘도록 경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150년 가량 늦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돕니다.
그렇게 미약하던 신라가 모든 국력을 총동원해 세운 산성이 바로 삼년산성입니다.
한반도의 중심부, 한강으로 가는 길목에 배후 기지를 마련하고
백제와의 접경지역에 든든한 요새를 두어 공격의 전진 기지를 확보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통일전쟁의 교두보를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일러줍니다.
신라의 통일은 결코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5세기 후반, 그때부터 이미 신라는 삼국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고,
이를 이루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입니다.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원대한 숙원은 결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군사력 하나만으로 통일이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앞을 내다보는 지혜로 200년전부터 전략적 요충지에 거대하고 견고한 산성을 준비했던 신라.
그 건설사업을 통해 국력을 하나로 결집시켜냈던 신라의 손에 의해
통일의 숙원이 이뤄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릅니다.
삼년산성은 그 신라의 힘의 결집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