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 33, 34대 총회장 이자익 목사
제22, 23, 24, 25대 경남노회장 역임
이자익(李自益, 1882~1959)목사는 경남 남해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생계를 이어 갔지만 11세 때 어머니마저 여의고 말았다. 친척집에 돌아다니면서 생활하며 끼니를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17세 때 그는 바다 건너 육지를 가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육지로 가는 배에 무조건 승선하여 경남 하동 근방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행상 차림을 하고 하동과 전북 남원을 지나 전주에서 김제군 금산까지 오게됐다. 이때 이자익에게는 말을 할 만한 기력도 없었다. 그는 금산면 금산리에서 제일 부자집에 무조건 들어갔다. “저는 경상도 남해도 섬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김제는 평야가 넓다는 말을 듣고 이곳까지 방문하게 됐습니다.” 조덕삼이라는 지주 집에서 짐을 풀고 그 집 머슴으로 생활을 하게 됐다. 머슴으로 사는 삶이 너무나 기뻤다. 먹을 양식이 많아서 그 동안 먹어보지도 못했던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집에서 머슴으로 성실하게 일했다.
때마침 전주 선교부에서 활동하던 데이트(최의덕) 선교사가 1900년 금산에 도착해 조덕삼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를 했다. 이미 조덕삼 부부는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음을 알았기에 선교사를 만나자 그 자리에서 이자익과 자신의 아들 조영호와 함께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했다. 매년 농한기가 되면 전주 서문교회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이 말을 몰고 참석했다.
조덕삼은 남자 사경반에서 성경을 배웠고 이자익은 한글을 모르기 때문에 한글반에 편성되어 그 곳에서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게됐다.
조덕삼은 사경회에서 배웠던 성경공부에 은혜를 받고 매 주일이 되면 전주 서문교회를 마부 이자익과 함께 출석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조덕삼 지주가 은혜를 받고 자신의 사랑채에 가족과 이자익 마부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 1900년 10월,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 등이 세례를 받고 금산교회를 설립했다. 금산교회는 최의덕 선교사가 예배를 인도했다.
또한 매년 실시하는 사경회에 참가했던 조덕삼과 이자익은 신앙이 성장해 이 교회의 첫 영수로 금산교회를 이끌고 갔다. 1908년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마부인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먼저 피택됐다. 장로가 된 이자익은 주일이 되면 강단에 올라가 설교를 담당했고 조덕삼 영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10년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고 그가 비어 있는 사이 조덕삼 영수가 이끌고 갔다.
조덕삼 영수도 1910년에 장로 장립을 받는다. 신학을 이수했던 이자익은 1915년 졸업을 하자 전라노회에서 목사를 받고 금산교회 2대 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1924년 9월, 제13회 총회장 선거에서 금산리교회에서 시무하는 이자익 목사가 선임됐다. 이때 총대원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총회장으로서 실수함이 없이 잘 회무를 잘 이끌고 갔으며, 이때 총회는 총회시 무단 조퇴자는 차기 총대에서 피선거권을 박탈하기로 결의했다.
총회장이 끝나자 잠시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교회를 시무하는 중에 호주 장로교 선교부 요청에 의해 1925년 이명서 없이 파견하는 형식으로 가족을 이끌고 경상남도 거창 선교부 선교사로 활동하게 됐다. 이자익 목사는 순회 목사로 활동하던 중 1927년 6월 제22회에 모이는 경남노회에서는 그를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됐다. 1927년 9월 함남 원산시 광석교회에서 모이는 제16회 총회 총대로 노회장 자격으로 이자익 목사와 서기인 최상림 목사, 총대 김길창 목사, 주기철 목사 이렇게 4명이 참석했다. 장로도 4명, 선교사는 2명이 참석했다.
이때 이자익 목사는 총회 신학교육부 부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총회에 적지 않는 영향을 행사했다. 당시 마산 문창교회 사건은 총회적으로 이름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는 이자익 목사밖에 없다하여 거창 선교부에서는 순회 목사라는 직책을 갖고 어려운 교회만 찾아다니는 일을 맡아 왔다. 그의 수고를 계속할 수 있도록 다음해에도 경남노회장을 연속적으로 맡았다.
이러한 관계로 경남노회 내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 둘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극심한 분규로 어지러웠던 마산 문창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총회장을 역임했던 함태영 목사가 부임해 잘 해결됐으며, 주기철 목사의 모 교회인 웅천교회는 6년 간이나 분규되어 따로 예배를 드렸던 사건이 이자익 목사의 중재로 잘 해결을 보게됐다. 이자익 목사는 함태영 목사의 지도력에 놀라 그를 1929년 6월 제26회 경남노회장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이자익 목사는 거창 선교부의 사역을 마감하고 1936년 9월에 전북노회로 원대 복귀를 하였다. 금산교회와 원평교회에서는 대 환영을 하였다. 그 동안 금산교회와 원평교회는 곽진근 목사가 시무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자익 목사를 사랑해 주시어 신사참배 하는 총대로 나가지 않도록 해 준 일에 대해서 몇 번이고 감사를 하였다.
1946년 4월 30일 제2회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정동제일교회에서 소집되었으며, 친일 행각에 앞장섰던 김관식 목사, 송창근 목사는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때 대회장에 배은희 목사가 선출되었다. 배은회 목사는 총회를 재건해야 한다면서 1946년 6월 1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재건 총회를 소집하였다.
제33회 총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총회장 배은희 목사의 사회로 개회되었다. 이때 임원을 선거하는 데 그동안 일본제국주의에 물들지 않고 참신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면서 모든 총대원들이 금산읍교회 동사 목사로 재작 중인 이자익 목사를 제33회 총회의 수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조선신학교 51명 재학생들이 진정서를 총대원들에게 배포한 일이 있었다. 내용은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평학이 문제였다. 이때 이 문제를 현장에서 처리하지 말고 7인위원회를 선임하여 진정서 내용을 알기 위해서 김재준 교수와의 면담을 요청하여 그 진상을 파악하기로 했다. 그동안 남부 재건 총회를 32회로 회수를 고치고 역시 남부 총회는 33회로 회수를 바꾸기로 했다.
1947년 제33회 총회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요청한 대전 선교부 개설을 허가하자 금산읍교회에서 동사 목사로 시무하고 있던 이자익 목사를 대전 선교부 기초를 잡기 위해서 부르게 된다. 이미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대전이 교통의 중심지이고 충남을 복음의 전초기지로 만들려면 대전에 선교부가 절대적으로 요청되자 미군정 청 충남 도청 관제과에 교섭을 하여 대전시 삼성동 387번지에 있는 일본인 가옥 30평을 적산 가옥으로 인수를 받고 이곳에 이자익 목사가 자리를 잡았다. 이 일을 위해서 전주 선교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보이열 선교사와 인돈 선교사가 이곳에 파송을 받고 삼성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전주를 오고가면서 대전 선교부 신설에 온갖 힘을 쏟았다.
충남노회에서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이자익 목사 사택에서 충남고등성경학교를 출발시켰다. 교장은 보이열 선교사였지만 여수 애양원 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이자익 목사를 부교장으로 선출하고 학사업무를 맡겼다. 개학한지 얼마 안되어 6. 25 전쟁이 일어나 이자익 목사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전북 완주에 대흥사로 피난을 하였다. 때마침 인민군들이 이를 알고 이자익 목사를 체포하여 김제 내무서로 이첩을 시켰다.
이후에 다시 고등성경학교를 개강한 후 졸업생이 생겨나자 이들의 진로가 걱정이었다. 졸업할 무렵 이미 이자익 목사는 대전노회에서 지방신학교를 통해 교역자를 양성해야 한다면서 야간 대전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1954년 8월 25일 이사회에서 교장으로 임명된 이자익 목사는 즉시 교무처장, 사무처장, 여기에 강사를 각기 임명하고 역사적인 개교를 하게 됐다. 그렇다고 교사(校舍)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전중앙교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고 개교를 했다.
이자익 목사의 요리문답시간은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비단 이자익 목사만 잘 가르쳤던 것이 아니라 모든 강사 목사들이 정성껏 강의했다. 그후 1954년 12월 7일자로 취임한지 얼마 안돼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낙향하여 김제 원평에 있는 셋째 아들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국에서 그것도 제일 교단에서 총회장을 3번 했다면 그분의 인격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늦게 알았던 대전신학대학교 문성모 총장은 구관 건물 3층을 ‘이자익 기념관’으로 현판식을 거행했다. 2층은 이자익 목사가 사용했던 유품 특히 그가 소유했던 신학교 시절에 각종 교과서를 비롯해서 희귀본의 고서와 함께 진열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
특별히 이자익 목사의 장손 이완규 장로는 할아버지의 그 활동을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대전신학대학교 문성모 총장과 함께 그 전기를 김수진 목사에게 집필을 의뢰하여 2005년 1월에는 책으로 내려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지금까지 묻혀져 있던 이자익 목사의 모습이 활자화되면 그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공을 남겼는가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2004. 10. 23.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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