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필화를 해독하다/ 김종연
모음 끝에 닿은 동백꽃이 부전나비 한 마리 부르고 있다
붓끝이 여백에게 색을 주고 꽃이 있는 힘껏 물관을 내리자
텅 빈 줄기를 타고 피어나는 향내, 할아비 이름이 화선지에 올라선다
오래된 가계에서 알 품고 먹이 물어주던 제비는 늙은 세입자였다
오래된 봄을 몰아 새로 쓴 이름인가, 顯祖考學生府君神位 제사상 지방인가
지붕 아래에 세 세대가 모여 사는 동안 문밖에 나는 소리는
할아비 호통이었다
묵은 식체처럼 가라앉던 가풍 곁으로 병풍을 두르고
낡은 목울대만큼 솟은 메에 은수저 꽂으면
부연 향내가 날이 새도록 가시지 않아 집안이 모두 제상祭床이었다
이름은 환쟁이 노파의 곧은 획순을 따라 번져간다
필체만으로 사람에 달관하는 일, 이름과 초충이 만나는 것만큼 벅찬 일이라
각양각색 이야기들이 여백에게 월세를 내고 있다
필생의 재담으로 자간을 띄워 석자 받침이 완성되는 순간
사별한 이야기들은 혁필화 족자 속에 암호처럼 갇힌다
죽은 이름에서도 벌목할 재목이 있던가
글자에 정각 한 채 세워놓고 버드나무 그늘 너머
놀빛 젖은 산새 무리가 서편으로 바람의 조각들을 물어간다
퍼런 용이 자음을 휘감고 올라간 옆구리마다
매달려 있던 두툼한 꽃망울들도 일시에 봉오리를 터트리고 간다
이놈! 이름 보고 뒤늦게 찾아온 할아비가 목청 쏟아내는 모습
족자를 말아들고 그 여음을 따라 돌아가는 길
봄이다, 봄이다 공명이 든다
* 혁필화(革筆畫) : 납작한 가죽으로 여러 빛깔의 글씨와 그림을 겹쳐서 그리는 그림.
- 2011년 <현대시> 신인상 당선작
《 심사평 》
이번 공모에는 약 250여 분들이 응모를 해왔다. 응모 편수는 예전의 평균 수준이었다. 이번에는 비교적 젊은 세대들의 응모가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 해 두 차례의 공모에서 모두 신인을 배출하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번 공모에서 당선자가 나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심사에 임했다. 예심을 거쳐 아홉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본심에 오른 분들은 강연형, 김도연, 김아제, 김은미, 김종연, 김혜숙, 서종현, 이어진, 한인준 씨였다. 본심위원들은 오랜 고심 끝에 네 분의 응모자를 다시 선정했다. 강연형, 김종연, 서종현, 이어진 씨가 그들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들은 모두 당선권에 들 만한 시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매트릭스」외 9편을 응모한 강연형 씨는 인문학적 주제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여행자의 수첩」외 9편을 응모한 이어진 씨의 시는 대부분 긴 호흡의 극적 구성을 취하면서도 시의 구조를 잘 만들어낼 줄 알았다. 하지만 강연형 씨는 이미지의 통일성이 없고 파편적이라는 점, 이어진 씨는 응모된 시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작품들이어서 시의 구조 외에 또 다른 특징이 없다는 점 등이 지적되어 먼저 선자의 손에서 제외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김종연 씨의 「혁필화를 해독하다」와 서종현 씨의 「우물 속에서, 살다」였다. 서종현 씨의 작품은 신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시적 역량을 두루 갖춘 작품이었다. 하지만 시를 지배하는 시적 수사가 일견 화려한 듯 보이지만, 개성적이거나 특별하지 못했다. 오랜 논의 끝에 아직 어리지만 김종연 씨의 가능성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서종현 씨는 다음 기회에 또다시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아쉬움을 달랬다.
김종연을 추천한다. 김종연의 시는 투고한 10 편이 고르게 성과를 얻고 있는 특장을 지니고 있다. 다른 투고자가 시적 유행을 추수하거나 고백적 어투의 낡은 감성에 기대어 우리 시의 새로움에 공헌해야 할 기대감을 일찍이 소거시키고 있는 데 반해 김종연의 시는 최근의 시적 경향에 수사적으로 잇대어 있으면서도 그 주제적 질량감이 나이답지 않은 육중함을 지니고 있어 신뢰할 만했다. 「혁필화를 해독하다」와 「쌍팔년도 새누이에 대한 진술」같은 시에서 보이고 있는 탄탄한 구조와, 기억을 해독하여 재현적 상상에 이르게 하는 솜씨는 우리 시를 찬찬히 살핀 결과일 것이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고난의 입사의식을 재생하여 악몽의 기록들을 보여주는 김종연의 이 현생은 아름답고 안쓰럽다. 내면에 난생卵生하고 있는 비명들을 각고하여 받아적고 있는 다음과 같은 표현. “필생의 필사로 자개에 새겨지는 누이가 뒷걸음으로 헛디딘 문장 그것은 난생卵生에 관한 이야기”, 혹은 「오동나무曲」에서 보이고 있는 “가지마다 지독한 밤들아, 음률 없는 날들아, 이따금씩 오색 현에 목을 매달고 죽은 이들이 노래가 된다던 오동나무의 이 마을”. 이들 시편에서 보이고 있는 소재적인 미와 주제적인 미는 김종연의 시를 주목해야 할 가장 큰 이유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더 정확히 말하면 최근 젊은 시가 잊고 있었던(잊고자 했던) 세계를 새로운 문법으로 각색해가는 것에 있어 「낭만적인 장례식」과 「대화의 형식」은 비록 화자가 은둔의 형식으로 발성하고 있지만 그곳에는 김종연 나름의 통증과 비결이 존재한다. 부정의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어 자칫 비극적일 수 있게 보이는 것을 엇나가기를 통해 빠져나가는 지혜에서도 그것은 자명하게 발견된다. 나이가 젊은 만큼 스스로 겸제하고 자중하여 한국 시를 이끌어 갈 시인으로 대성하길 기대한다.
본지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당선자에겐 축하의 말씀을 그렇지 못한 분들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원구식 박주택 오형엽 조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