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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52살(1523) 부모님 무덤 이장과 현창사업의 지역경쟁
2019년 5월 5일
* 왕양명이 부모님의 묘소를 어디에 모셨는지는 궁금한 문제입니다.
현재 중국 각 지역의 지방행정단체에서 왕양명을 현창하면서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절강성 소흥시(紹興市)는 몇 년 전에 큰돈을 들여 왕양명 고택을 정비하고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크게 현창하고 있습니다. 왕양명의 아버지와 가족이 여요현에서 소흥부로 이사 왔고 더구나 왕양명이 수양공부하였던 양명동(陽明洞)과 무덤까지 있기 때문에 현창사업을 크게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절강성 여요시(餘姚市)에서도 왕양명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현창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요시 사람들은 지명 여요가 소흥보다 오래 되었고 지역문화에서도 여요시 문화가 소흥시 또는 영파시에 종속되지 않았고 독립성을 유지해왔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귀주성 귀양시(貴陽市)에서는 왕양명이 37살에 귀주시 용장역(龍場驛)에서 깨달은 성지라고 여기고 일찍부터 크게 현창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양명 일생의 학문과 교육을 보면, 왕양명이 귀주 용장역으로 좌천되기 이전에 많이 아팠기 때문에 북경에서 사직한 뒤 소흥에 머물면서 항주 등지에 가서 많은 스님과 도사를 만나 수양공부를 배웠고 병을 치료하였습니다. 치료를 마친 뒤에 복직하고 환관 유근을 탄핵하다가 붙잡힌 사람을 구하려고 글을 써서 올렸고 결국에 귀주 용장역으로 좌천되었습니다. 사실상 귀주 용장역에서 깨우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공력을 쌓았고 어느 정도 깨달음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용장역에서 수양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하여 깨달은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왕양명이 49살 8월쯤에 강서성 감주(贛州)에 있는 울고대(鬱孤臺)와 통천암(通天巖)에서 학생들과 치지(致知)에 관하여 끝장토론을 벌였고 이때 제시한 것이 양지(良知)입니다. 이듬해(50살)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뵈려고 소흥에 왔고 다시 태어난 여요현에도 찾아갔습니다. 여요현에 머물 때 전덕홍 등이 주도한 강연에서 양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고 소흥부에 돌아온 뒤부터 곧 이듬해(51살) 아버지 상중에는 소흥에서 강학을 자주 열었고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서 배웠습니다. 따라서 양지 관점에서 보면, 귀주 용장역보다도 강서성 감주가 중요한 것입니다. 강학과 전파에서 보면, 여요현과 소흥부 2곳도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왕양명이 세상을 떠난 뒤에 각 지역에서 서로 현창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쟁하였던 것 같습니다. 최근 여요시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곽자장(郭子章, 1543-1618, 강서성 泰和縣 출신)은 “명나라의 성학(聖學)은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절반은 주자학을 따르고 절반은 양명학을 따르기 때문에)이 왕양명을 종장(宗匠)으로 섬기는데, 왕양명 선생의 학술은 귀주성 용장역에서 이루어졌다.(海內談聖學,半宗餘姚。餘姚之學,成於龍場。)”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절강성 출신 양명학자들이 양명학을 절강성을 대표하는 학술이라고 지나치게 현창하는 것에 대하여 강서성 출신 양명학자들이 반박하려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또한 황종희(黃宗羲, 1610-1695, 紹興府 餘姚縣 출신)는 “여요현 사람들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왕양명 선생이 여요현 출신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이 왕양명 선생의 학술을 배우고 왕양명 선생의 뜻을 이어받도록 도와주어야한다.(陽明,非姚江所得而私也,天下皆學陽明之學,志陽明之志。)”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정작 여요현 출신의 황종희는 마음을 열고 양명학을 세상천하의 학술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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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문제와 경쟁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곡 정제두 선생께서 서울 반석동에서 태어나셨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사람들도 만나 학문과 수양공부를 배웠습니다. 30대에는 수양공부가 지나쳐서 죽을 고비를 맞았으나 잘 넘겼다고 합니다. 지방관에 나갔다가 사직한 뒤 40살부터 안산(현재 시흥시) 가래울(楸谷)으로 이사하여 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60살에 다시 강화도 진강산 아래 할아버지 무덤이 있는 곳으로 이사하셨고 부모님 묘소마저 이곳으로 이장하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고 합니다. 물론 학문과 수양공부는 서울에서 이루었고, 상당한 분량의 저서는 안산에서 지었고, 학술적 완성과 학생 전수는 강화도에서 이루어졌기에 문인들이 “하곡(霞谷)”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서울, 시흥, 강화도 3곳 가운데 어느 곳이 하곡 정제두 선생에게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만, 학술의 완성과 학생 전수 및 묘소 등을 따져보면 강화도에서 하곡학(霞谷學)을 현창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만 하곡학은 강화도의 지역학술을 넘어 한국의 학술이며 세계의 학술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합니다. 황종희 선생이 양명학을 소흥부 또는 여요현이라는 지방학술에 가두지 않고 천하의 학술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던 것처럼, 강화도 군민과 시흥시 시민을 비롯하여 하곡학 연구자들 모두 더욱 깊이 연구하고 널리 전파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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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아버지 왕화(王華)의 「묘지명」과 「행장」에 따르면, 왕양명의 어머니 정씨(鄭氏)는 41살(1484년, 왕양명 13살)에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고 절강성 여요현(餘姚縣) 선영이 있는 혈호산(穴湖山)에 묻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왕양명 아버지 왕화(王華)가 여요현에서 소흥부(紹興府)로 이사하면서 정씨 부인 묘소를 소흥부(紹興府) 남쪽 석천산(石泉山)으로 이장하였다고 합니다.
『왕양명 연보』에 따르면, 왕양명 아버지 왕화가 1522년(왕양명 51살)에 세상을 떠나자, 왕양명이 합장하려고 어머니 정씨 무덤을 팠는데 광중에 물이 고인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양명이 먼저 아버지 묘소를 소흥부 서남쪽 회계산(會稽山) 천주봉(天柱峰, 다른 이름 秦望山) 양지 바른 곳에 썼고, 이듬해(1523)에 어머니 묘소를 석천산에서 소흥부 22도(都)에 있는 서산(徐山)으로 이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월중잡지(越中雜識)』에 따르면, 왕화의 무덤이 소흥부 서남쪽 15리 밖의 행정구역 22도(都)에 있는 서산(徐山)에 있다고 합니다. 만약에 『월중잡지』가 왕양명의 어머니 묘소를 아버지 묘소로 오해한 것이 아니라면, 왕양명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천주봉 양지 바른 곳 서산에 합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화(王華)의 「묘지명」과 「행장」을 비롯하여 『왕양명 연보』에는, 왕양명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장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합장인지? 별장인지? 문제는 현재 여요시(餘姚市) 향토문화재를 잘 아는 사람이 고증해야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 무덤이 있는 서산(徐山)이 천주봉(天柱峰, 다른 이름 秦望山) 아래에 있는지를 밝혀야합니다.
아울러 왕양명은 세상을 떠나기 이전에 미리 소흥부 30리 밖의 홍계(洪溪)에 있는 왕희지 난정(蘭亭)에서 5리 떨어진 곳을 정해놓았다고 합니다. 왕양명 묘소는 현재 이 곳에 있습니다. 왕양명이 자신의 묘터를 미리 봐둔 까닭은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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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양명 부모님 무덤 자료:
楊一清,「海日先生墓志銘」:
어머니:여요현(餘姚縣) 혈호산(穴湖山) 선영→소흥부(紹興府) 남쪽 석천산(石泉山)→현재 묘지
陸深,「海日先生行狀」:
아버지:천주봉(天柱峰) 남쪽
어머니:소흥부 남쪽 석천산→소흥부 서산(徐山)
『왕양명 연보』,二年癸未,先生五十二歲,九月:
아버지 묘소:소흥부 천주봉
어머니:여요현 선영의 혈호산→소흥부 남쪽 석천산→소흥부 서남쪽 서산
『越中雜識』:
明吏部尚書王華墓,在府城西南十五里,二十二都徐山。
아버지 묘소:소흥부 서남쪽 22도 서산(徐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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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양명 무덤 자료:
黃綰,「陽明先生行狀」:
子正憲、正億,將以是年(1529)仲冬十一日,奉公柩,葬於洪溪之高村。
『왕양명 연보』,嘉靖八年(1529)己丑十一月,葬先生於洪溪。
是月十一日發引,門人會葬者千餘人,麻衣衰屨,扶柩而哭。四方來觀者莫不交涕。洪溪去越城(紹興府)三十里,入蘭亭五里,先生所親擇也。
* 현재 묘소 위치는 홍계(洪溪) 고촌(高村)에 있는 선하산(鮮蝦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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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一清,「海日先生墓志銘」:
왕화(王華) 선생의 첫째 부인 정씨(鄭氏)는 1품 부인(夫人) 봉호를 받았으며, 속이 깊고 얌전하며 부모님께 효성스럽고 자녀들에게 따듯하였습니다.(淵靜孝悲,淵靖孝慈) 부인과 남편 왕화 선생 모두 미천하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부인은 남편과 가난한 고통을 함께하였고 몸소 방적(紡績)하여 번 돈으로 시부모님을 모셨습니다. 남편이 높은 관직에 오른 뒤에도 부인은 공손하고 검약하는 태도가 줄지 않았습니다. 나이 41살에 세상을 떠났는데 남편 왕화보다 36년 먼저 죽었습니다. 왕화 선생의 계실 조씨(趙氏)도 1품 부인 봉호를 받았고, 측실 양씨(楊氏)도 있었습니다.
왕화 선생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백안(伯安)인데 이름이 수인(守仁)이고 별호가 양명자(陽明子)이고 학문은 천리와 본성을 깨달았고 국내외 지식인들이 스승으로 받들어 양명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둘째 아들이 수검(守儉)이고 태학생이며, 셋째 아들이 수문(守文)이고 소흥부(紹興府) 부학(府學) 학생이며, 넷째 아들이 수장(守章)입니다. 딸 1명은 남경 공부 도수 낭중이며 소흥부 출신의 서애(徐愛)에게 시집갔습니다.
처음에는 정씨 부인을 여요현(餘姚縣) 혈호산(穴湖山) 선영에 합장하였다가 나중에 소흥부(紹興府) 남쪽 석천산(石泉山)에 이장하였습니다. 왕양명이 석천산에 있는 어머니 무덤의 광중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현재 묘지에 이장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여요현(餘姚縣) 혈호산(穴湖山) 선영→소흥부(紹興府) 남쪽 석천산(石泉山)→현재 묘지
楊一清,「海日先生墓志銘」:
初配,贈夫人,鄭氏,淵靜孝悲(「海日先生行狀」:淵靖孝慈),與公起微寒,同貧苦,躬紡績以奉舅姑。既貴,恭儉不衰。壽四十一,先公三十六年卒。繼室趙氏,封夫人。側室楊氏。
子男四:長即伯安,守仁名,別號陽明子,其學邃於理性,中外士爭師之,稱陽明先生。次守儉,太學生。次守文,郡庠生。次守章。女一,適南京工部都水郎中同邑徐愛。
初,鄭夫人祔葬穴湖,已而改殯郡南石泉山。石泉近有水患,乃卜今地葬公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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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深,「海日先生行狀」:
왕화(王華) 선생의 첫째 배우자는 1품 부인 봉호를 받은 정씨(鄭氏)이며 속이 깊이 얌전하며 부모님께 효성스럽고 자녀들에게 따듯하였습니다. 부인은 왕화 선생과 가난한 고통을 함께하였습니다. 부인은 미천하고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며, 물 길어 빨래하고 방아질하여 밥을 짓는 살림살이를 몸소 하였고, 방직(紡織)하여 번 돈으로 시부모님을 모셨습니다. 남편 왕화 선생이 높은 관원이 된 뒤에도 공손하고 검약하는 습관을 더욱 잘 지켰습니다. 부인은 41살(49살은 잘못 기록)에 왕화 선생보다 36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화 선생의 계실 조씨(趙氏)도 1품 부인 봉호를 받았고, 측실 양씨(楊氏)도 있었습니다.
왕화 선생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큰아들 수인(守仁)은 정씨가 낳은 아들이며 남경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신건백에 봉해졌습니다. 둘째 아들 수검(守儉)은 측실 양씨가 낳았고 태학생이며, 셋째 아들 수문(守文)은 계실 조씨가 낳았고 소흥부(紹興府) 부학(府學) 학생이며, 넷째 아들 수장(守章)은 측실 양씨가 낳았습니다. 딸 1명은 계실 조씨가 낳았고 남경 공부 도수 낭중이며 소흥부 출신의 서애(徐愛)에게 시집갔습니다.
처음에는 정씨 부인을 소흥부 남쪽 석천산에 묻었는데 광중에 물이 고여 있기 때문에 합장하지 않고 왕화 선생을 천주봉(天柱峰) 남쪽에 묻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천주봉(天柱峰) 남쪽
어머니:소흥부 남쪽 석천산
* 적서를 구별하지 않고 낳는 순서대로 형제를 정하는 것이 명나라의 법률이고 풍속입니다.
정씨(鄭氏):맏아들 왕수인(王守仁, 왕양명)
계실 조씨(趙氏):셋째 아들 왕수문(王守文), 딸 1명
측실 양씨(楊氏):둘째 아들 왕수검(王守儉), 넷째 아들 왕수장(王守章)
陸深,「海日先生行狀」:
先生元配,夫人,鄭氏,淵靖孝慈,與先生共甘貧苦。起微寒,躬操井臼,勤紡織以奉舅姑。既貴而恭儉益至。壽四十九(四十一),先先生三十六年卒。繼室趙氏,封夫人。側室楊氏。
子四人:長守仁,鄭出,南京兵部尚書,封新建伯。次守儉,楊出,太學生。次守文,趙出,郡庠生。次守章,楊出。一女,趙出,適南京工部都水郎中同邑徐愛。
始,鄭夫人殯郡南之石泉山,已而有水患,乃卜地於天柱峰之陽而葬先生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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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연보』,二年癸未,先生五十二歲,九月:
1523년(왕양명 52살) 9월에 용산공(왕양명의 아버지 王華)를 천주봉 양지바른 곳에 이장하였고 친어머니 정씨 부인은 서산(徐山)에 이장하였습니다.
친어머니 정씨 부인은 여요현에 선영이 있는 혈호산(穴湖山)에 묻었으나 소흥부 남쪽 석천산에 이장하였습니다. 아버지 왕화 선생을 합장하려고 광중을 파보니 물이 나왔기 때문에 왕양명 선생이 꿈속에서도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서산(徐山)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아버지 묘소:소흥부 천주봉
어머니 묘소:여요현 선영의 혈호산→소흥부 남쪽 석천산→소흥부 서남쪽 서산
『왕양명 연보』,二年癸未,先生五十二歲,在越。
九月,改葬龍山公於天柱峰,鄭太夫人於徐山。
鄭太夫人嘗附葬餘姚穴湖,既改殯郡南石泉山。及合葬公,開壙有水患,先生夢寐不寧,遂改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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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중잡지(越中雜識)』:
명나라 이부상서 왕화(王華) 묘지가 소흥부 서남쪽 15리 밖에 있는 22도(都)의 서산(徐山)에 있다.
『越中雜識』:明吏部尚書王華墓,在府城西南十五里,二十二都徐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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