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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임협 상수봉 조카-중국 인도미술교류
常任侠 常秀峰 叔侄与中印美术交流史上的绘画遗存
상임협과 상수봉은 신중국 성립 전후 인도 문화와예술 교류 행사에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있다.
2019년 11월 23일, "평화의 고장"의 중국인도문화예술 교류인 상임협과 상수봉 전시 및 학술공작방이 베이징대 사우디 국왕도서관에서 개막됐다.전시는 두 명의 예술가 "인도 예술"로 되어 있다.문화교류 생애'를 단서로 대량 통과진귀한 작품의 전시는, 그 학술 연구, 작품의 텍스트, 그래픽의 내포를 깊이 있게 발굴하여, 대중에게 20세기 예술적 변화를 보여 준다.혁로의 독특한 모습.
"비홍씨는 선을 중시하면서, 아시아의 예술은 선이 없는 것만을 말한다.다른 것이 있어. 그는 수업을 개선해서 학생들에게 석고상과 모델을 그리도록 요구하지 않고 자연 속의 풍광과 생활 속의 사람들을 직접 그려내도록 했다.그는 나중에 나에게 인도에 가서 예술의 경을 찾아보라고 조언했다.'상수봉은 생전에 회상했다.
상임협(19041996), 안후이성 颍 태생상현은, 유명한 예술 고고학자이자 동양 예술사가, 시인, 중국 예술사학회 설립자 중 한 명이다.상임협은 북경대학과 학술적인 인연이 깊다원, 베이징대학과 중국사회과학을 역임했다연구소원이 공동으로 설립한 지도 교수는 남 아시아 여러명이 대학원생 중국과 인도, 일본의 문예 작품. 연구 분야 교류사개척적 기여를 통해 중인도 예술과 문화 분야의 뛰어난 인재를 다수 배출했다.
1979년 11월 3일 상임협은 인민대회당에서 전국 문예계 대표대회를 열었다
70년대 초 상수봉은 벼루를 만들고 있었다
상수봉(1915-2010))...1945년 충칭 국립예술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상수봉은 숙부상임협과 예술가 서비홍의 영향을 받아 1947년 인도 국제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인도의 벵골파 대표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국제 대학 졸업 후 상수봉이 잇따랐다인도 캘커다, 噶렌부르크 등에 있는 화교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저우언라이 총리의 방인, 장대천 여인 등 중요 중인 문화 교류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중인도 관계가 긴장된 시기에도 그는 파급을 당했지만 예술 창작을 고집했다.수봉 선생은 1961년 귀국해 안후이예술학원 교무장, 안후이성박물관 부관장 등을 거쳐 전국교포련 위원, 안후이성 정협 위원, 성인대 상무위원을 지냈다.1983년 홍콩에 정착했다가 2006년 선전(수,천))에 은거했다가 2010년 사망했다.
1946년 상임협과 상수봉은 인도국제대학에서
상수봉 한밤매작도 常秀峰 寒夜梅雀图
근현대 중인도 미술 교류사진귀한 회화가 남아 있다
청소년 시대, 상수봉 주저멈칫멈칫하며 중학교에 다닐 때 이미 그림 공부를 즐겼다.이상과 구색, 현실 사이에서 상수봉은 사회에 처음 진출해 일련의 좌절을 겪은 후 가릉강에서 충칭으로 유랑한다.상수봉은 드디어 숙부상임협을 만났고 숙부는 '중앙대'에서 동양예술학 교수로 일했다.상근협은 멀리서 온 조카 상수봉에 대한 아침저녁 관심에서 수봉이 영이, 호문학예술을 발견하자 서비홍을 안내했다.서 씨는 상수봉이 중소 국경에 있는 건물 사생(和生)과 그리는 모습이 각기 다른 비행기를 보며 '국제 간 갇혀버린 철새'를 극찬했다.그러자 비홍 씨는 "그림을 배워야지, 장래성이 있다"고 말했다.
서비홍의 도움으로 늘수봉이 '중앙대' 예술학과 방청생이 되어 접촉하게 되었다많은 문화 명사들까지.풍자恺, 반천수, 부포석, 진지불, 장대천, 곽말약, 화군무, 문일다, 하연, 오작인이 하나하나 눈앞에 나타나 그의 삶의 길과 예술추구에 영향을 주었다
상수봉 청엽설화 常秀峰 翠叶雪花
1942년, 상수봉은 국립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이때부터 상수봉은 예술과 인연을 맺었다.숙부상임협은 상수봉이 예술의 전당에 발을 들여놓은 계몽자이자 인맥 자원이다.일본 도쿄 제국 대학으로 유학을 상임으로 의협심이 강하다 귀국한 뒤 충칭과 친분이 두텁다. 예술계당시 충칭 미술계에선 장수봉이 물 만난 고기처럼 천혜의 덕을 봤다.상수봉은 "잊지 못할 날이었다.
상수봉 유당설로 1947년 常秀峰 柳塘雪鹭 1947年
1945년 상수봉 국립예전필업, '성적이 우수하다', '전각금석, 벼루, 대나무 조각도 잘하고 전서 예서에도 능하다.여러 예능인이 모여 대성을 얻었다"고 말했다.1946년 남경국화련전에 참가하여 상수봉의 작품은 호평을 받았다.이어 화조 사녀 위주로 '화고화금화'라는 개인전을 열었다.부포석은 문필에서 "수봉연학치예가 가장 부지런하고 군공시사가 수년 동안 읊조리기 때문에 그 작품에 시적(诗的)이 많으며, 그 구도를 보고 글을 쓸 수 있다"고 칭찬했다.첫 단추를 끼우고 나서 모두의 칭찬을 받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다.
중국 고전 회화의 독특한 공간은 크다체와 독특한 도식은, 이미 상수봉심에서 법도를 중립적으로 정하고, 그가 훗날 인도로 유학하여 이역 사생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상수봉 압유도 1948년 常秀峰 挤乳图 1948年
상수봉 노작 1947년 常秀峰 《劳作》 1947年
중국과 서양의 융합 이론은 서양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선진화'의 충격과 압박에 중국 회화는 일종의 수동적 대응을 했다.미술 유학생들이 청, 일본, 유럽에 가고 있다.당시 예술계 젊은이들은 구미에서 공부하는 것을 동경했지만 상수봉은 인도국제대학에 갔다.상수봉은 "이것은 서비홍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인데, 그는 인도의 사생습화를 가 본 적이 있는데, 그곳이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와 중국 문화의 합류지라고 말했는데, 예술상의 혈연 관계를 보고 싶다. 서비홍 하면 상수봉은 감동이 많다.그는 " 큰 인재를 매우 중시하고 교육자가 발견해 그가 푸바 오스에 유학한 일본 자금 조달이다.그는 한문 학자를 매우 아끼고, 목각을 공부하는 고원을 연안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그는 전력을 다하여 그를 성행하게 하였다.예술에서 비홍은 선을 중시한다.그는 수업을 개선하여 학생들에게 석고상과 모델을 그리도록 요구하지 않고 자연 속의 풍광과 생활 속의 사람들을 직접 그려냈다.이것은 인도의 회화 방식인데, 그는 그곳에 가 본 적이 있고, 나중에 저에게 예술의 경을 찾아달라고 조언했습니다.'상수봉씨는 "행할 때 난징 정부가 여권을 주지 않는 것은 부포석과 진수인 두 선생님의 '뒷문으로 간다'는 말을 통해 이뤄졌다"고 말했다.
1946년에, 상수봉은 남경국을 얻었다.민정부는 심사에 합격하여 인도 국제대학에 유학하였다.1949년 전만 해도 미술류의 인도 유학은 상수봉이 유일했다.상수봉은 인도 국제대학에 유학하면 미술계 유학생 중 3세대다.
常秀峰 《印度舞蹈》 상수봉 인도무용'
상수봉 인도고화 모사 1947년 常秀峰 摹印度古画 1947年
인도의 근세 미술은 서양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인도 예술의 절충법에서 서양화법을 받아들여 인도화를 옅은 번짐으로 표현하면서도 인물, 동물적 표현에 생명감, 현실감을 중시한다"고 설명했다.상수봉 잠심예원, 고현 추적, 1947년, 상수봉에서 국제대학예술대학에 등록하여 '인도의 치바이스'라는 별명을 얻은 예술의 대가 사우스드라 보스(NAD)상수봉은 인도의 현대민족부흥파 및 고전적 포켓북파에 관심이 많고 인도의 예술수업에 신선하다.상수봉은 중국에서는 석고상과 모델을 놓고 그림을 그리는데, 인도 예술가는 모델이 현실의 인간과 풍경이라고 말한다고 기술했다.상수봉은 "아무래도 우리 회화 수업은 읍에서, 들판에서, 이론 수업도 숲에서, 흙냄새를 맡는다"고 했다.
상수봉은 "1947년 늦여름,국제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스승인 남드라 보스가 처음으로 인도의 옛 그림 한 폭을 모사하도록 명했는데, 그 기법을 보면 우리나라 송화의 유의도 있고, 이집트 페르시아 풍미도 인도의 보물이다."
상수봉 왕사성지추'常秀峰 王舍城之秋
상수봉 현대예술의 운명 1947년 常秀峰 现代艺术之命运 1947年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서비홍응타이고그의 초청으로 인도에 가서 전시를 열어 항일을 선전하였다.1945년 상근협은 타고르의 초청으로 인도국제대학에서 중국문화사를 강의했다.소수봉이 인도의 각 파 예술을 연구하러 간 덕에 아이오와 조카가 차례로 인도에 들어가 인도 문화와 교류하는 안건은 중인도 회화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1948년 봄에, 장대천은 인도로 가서 서화를 열었다.쇼와 상수봉은 통역을 하며 힘을 보탰다.아울러 장대천과는 국화연전을 연다.서예회화조각작품에 대한 평가는 중국 전통예술의 정수를 보존하면서도 인도 예술의 정수를 담고 있다.
상수봉은 중국의 사의 회화를 대체로 통섭하여 창건하였다.'백묘이훼' '천축이운' '이역도진'의 현대 화가 개체도식은 근현대 중인미술교류사(中。中印)에 귀중한 그림으로 남아 중인문화 및 세계문화의 교류에 기여한다.
1948년 상수봉은 타고르의 저택 앞에 있었다
상임협 상수봉 왕래 편지
"이국에서 멀리 떠나, 옛사람은 슬퍼했다", 조카와함께 40년 동안 고별 생활을 하였는데,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겠다...감히 여기지 않을 수..
-숙임석 1981.3.5 야등
1981년 상임협 선생은 다리 통증을 참았다먼 길을 떠나는 조카에게 등불 아래에서 답장을 보내면위의 글을 쓰시오. 휴척이라는 단어 '사해'의 의미는 '희락과 근심, 행복과 화환'입니다.편지에서 '조카'는 상수봉, 즉 상수봉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이 몇 십 년 동안 사귄 거의 백 통편지는 대부분 상임협복 상수봉의 편지이다상수봉이 상임협에 보낸 편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상수봉이 편지를 쓸 때의 초고와 등사본만 남아 있었다.근 백통의 편지 중에서, 최초의 편지는 1942년으로, 가장늦은 것은 1993년으로,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보냈다.편지 내용이 풍부하고, 정보가 풍부하며, 상달국가 대사, 화교 근무, 가정생활, 개인감정을 담고 있어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상임협은 그동안 상수봉 문예 학습의 길에 있었다지도와 추천; 2.두 사람의 시화예술 창작과 나눔은 그동안 상근협 예술의 관점과 주장 3가지를 많이 보여 왔다.생활상 상호보조, 정신적 상호위적과 격려, 특히 어려운 시기에의 상호부조, 양처녀의 상호보조 등등.서로 피를 나눈 가족뿐만 아니라 사제, 친구, 지음, 난우, 시우, 시우... 생활 속에서 서로를 돕고
상임협 선생 인도 시절 자작시
자세한 독서 편지 내용은 알 수 있고, 연구는 늘 뛰어나다.봉의 종예도로는 숙부상임협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상수봉은 예도로, 나아가 인생도로의 중요한 절점에서 숙부상임협이 관심과 도움, 조언과 격려를 받는다.현존하는 최초의 이 편지는 1942년에 쓰여졌지만, '이상' 상호 통신 삿갓은 또한 틀림없이 이곳에 일찍 있을 것이다.1936년은 이미 쇼는 자주 먼 중학교 졸업 정상을 품에 돌아온 일본 유학 당시 “둘 다 과학과 국가 보위”며 독려한 뒤 숙부 우수한 성적으로 중앙에 합격했다 항공기를 취득한 기계과 학교 갑종.상수봉이 펴낸 '문심당'의 시집에는 '종군병서'라는 책이 있다.
1936년 여름 중학교의 수료가 끝났다.남경에 가서 항공 기교 시험을 보고, 협숙이 알게 된 후에 나를 만나러 왔다.
조상의 뜻을 받들어 붓을 들어 종군할 때.위험과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1937년 가을 학교로 전입하였다도.1940년에 그는 청두로 풀려나 공군 폭격 총대 현지 근기계사에 있었다.1941년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중병으로 입원했다.그동안 숙부상임협이 중앙대 교수로 재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서 청두를 탈출해 유명 화가 심일천의 도움을 받아 낙산오유사에 도착했다.국민당 공군이 발표한 지명수배를 피하기 위해 '소매 바람'을 뜻하는 수봉으로 이름을 바꿨다.이때 불문에 귀의하려던 상수봉은 우유사의 방장 과겸법사의 권유로 충칭의 목선으로 보내졌다.《문심당》 시집에는 《강상야박》이라는 곡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40년 여의 난중과 그림집안의 심일천이 서로 알고 지내면서, 먼이가 서로 도우니, 마침내 청두에서 목주를 타고 충칭으로 가서 협숙을 찾아, 배차가는 비를 만나 밤에 강에 정박하게 되었다.
비바람이 늦게 몰아쳐 구악이 갑자기 어지럽고 파도가 涛소리가 해안을 따라 돌고, 어화가 선명하다.
오늘 밤은 조수가 막 불어나고, 명나라의 버드나무가 새로워지면, 누가강에 가는 손님을 알고, 바람과 먼지로 고생하다.
상임협, 상수봉에게 편지 常任侠 致 常秀峰 信札
상임협, 상수봉에게 편지
"그림을 열심히 익히고,장차 신중국을 위해 건설하겠다"고 말했다.상근협이 귀국할 때 조카에 대한 격려와 기대다.스승인 난드라 보스를 따라 인도문화를 배우고, 인도 벽화를 베끼고, 세밀화를 베끼고, 중국 전통 회화에 대한 이해를 결합해 사생과 창작을 관통한다는 점을 명심한다.상협은 상수봉 개인전 전언에서 상수봉의 예술적 길을 상세히 소개했을 뿐 아니라 그의 창작에 대해 "성취를 잘 알고 있으며, 공력이 깊고, 박학하고, 출중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황기화조화, 너모범을 보이자면, 당신의 위치를 볼 수 있다."(1973.7.1)
"너가 량카이의 이백을 쓰는 걸 본 적이 있어처럼,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서투르고 사람답지 않아서 나는 정말 싫다.그가 유명인이 그렸던 간에.이한림집 권두의 한 장을 참고해 정면을 그려라.(1980년)
상임협, 상수봉에게 편지
상임 협객 선생이 일반에게 쓰다수봉 선생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의 조언이 많은데, 이는 상임협 선생의 조카 지도뿐만 아니라 협공의 예술적 주장과 관점도 담겨 있다.
"나는 예술사와 인에 대해도사지문화의 연구도 포기하기 싫으니 나중에 만날 때 다시 너와 이야기하자.인도 예술의 이 부분을 연구하는 재료는 장차 당신이 사용할 수 있고, 이 책들은 얻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운반되어야 합니다.'(1970년)
이 가장 힘든 시기에· 협공은 가장 중요한 인도 예술에 관한 연구 재료, 그리고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각 종류, S: 2; WIDOWS: 2; MARGIN: 0px 0px 20px; LETTER-SPACING: normal; LINE-HEIGHT: 32px; PADDING-RIGHT: 0px; BACKGROUND(255,255,255) OR : rgb ; TEXT-INDENT : 0px ; font-variant-ligatures : normal ; font-variant-caps : normal ; - webkit-text-stroke-width : 0px ; text-decoration-style : initial ; text-decoration-color : initial ; text -100%이 가장 어려운 size-adjust : ' > 때 가장 중요한 공천이 협객에 대한 인도 예술, 그리고 연구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자신이 소중한 문화재에 맡겨서 다양한 가장 신뢰하는 쇼도, 늘 어진 조카 봉. 온갖숙부의 일을 가능한 그야말로 열심히 이곳저곳의 진면목이다.
상임협은 《홍》을 출판한 적이 있다.백합' 시집에는 '옥적증수봉' '수봉 조카를 위해 벼루를 쓰다' 등 현조카를 위해 쓴 시, 상수봉 선생의 '문심당' 시집도 많이 보인다.조카와 주고받은 편지와 맞물릴 수 있고, 그중 출간된 시와 원고가 함께 들어 있어 시와 조카의 친밀한 교감을 엿볼 수 있다.1996년 상임협 선생이 북경에서 세상을 떠나자, 상수봉은 눈물을 머금고 오언장시를 지었다.'임협숙부비명'은 묘비에 새겨져 영원히 숙부와 함께할 정도로 조카의 애정이 각별하다.
1957년, 상임협은 인도 뉴델리 국제불교예술 전시회에서 펑유란, 거찬, 조박초 등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전시 현장
(본문 '근현대 중인미술교류사상 귀중한 회화유존' 단락은 안후이성 문예평론가협회 부주석인 류즈차오(刘) 전 안휘대 교수가 쓴 '전통 회화의 체와 이역 사생의 융합'에서 발췌한 것이다.
가장 믿었던 현조카에게 소중한 문화재를 맡기고, 상수봉도 가능한 한 숙부님의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다녔으니, 그야말로 환난의 정이다.
상임협은 《홍백리》 시집을 출판했는데, 그 중에는 《옥적증수봉(玉)》《수봉조카를 위한 시제연명(铭)》 등 현조카를 위해 쓴 시(。)도 적지 않다.1996년 상임협 선생이 북경에서 세상을 떠나자, 상수봉은 눈물을 머금고 오언장시 '임협숙부비명'으로 각시하였다.묘비 위에 영원히 숙부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정이 각별하다.
1957년, 상임협은 인도 뉴델리 국제불교예술 전시회에서 펑유란, 거찬, 조박초 등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전시 현장
(본문 '근현대 중인미술교류사상 귀중한 회화유존' 단락은 안후이성 문예평론가협회 부주석인 류즈차오(刘) 전 안휘대 교수가 쓴 '전통 회화의 체와 이역 사생의 융합'에서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