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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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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06 05:13
-오르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 십자가는 걸림돌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주셨나이다.”
주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당신의 변모를 보여주신 것을
오늘 미사 감사송은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고,
머리인 주님의 영광이 지체인 우리 안에도 가득 찰 것임을 보여주려는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변모는 세 제자만을 위해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 제자는 뽑힌 증인들이고 십자가의 걸림돌에 넘어지지 않도록 주님의 변모를
다른 제자들과 전체 교회에 증언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뜯어보면 십자가는 걸림돌일 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걸림돌이란 말은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없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만나지 않고 걸림돌도 없습니다.
오직 가는 사람만이 가다가 누구를 만나고, 뭔가를 만나고, 걸림돌도 만납니다.
그런데 걸림돌이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거나
넘어지게 하지 않더라도 비틀거리게 하거나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길이 바로 그러합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십자가는 일단은 걸림돌입니다.
가다가 십자가 때문에 일단은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넘어진 다음엔 계속 갈 것인가 그만 갈 것인가를 고민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절망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가던 길을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게 되고 고민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은
그 길을 계속 갈 터인데 그는 걸림돌을 디딤돌 삼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다 걸림돌이고
오르려고 하는 사람에는 십자가가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또 십자가의 길은 하늘길이니 오르려는 자는 위를 봐야 하고,
그저 앞으로 내달릴 것이 아니라 딛고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앞이 아니라 위를 보는 것이 관상이고,
그렇게 하늘나라를 관상하면 걸림돌을 디딤돌 삼습니다.
오늘 뽑혀 주님의 변모를 본 세 제자는 오늘 본 것을
십자가에 걸려 넘어져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돌아보고,
십자가 길을 다 달리고 났을 때 받게 될 영광을 내다보며
아직 절망 중인 형제들에게 희망을 증언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러하도록 뽑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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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7,1-9
주님께서는 수난을 예고하신 ‘엿새 뒤’에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평소 사람의 모습 아래 감추어 두셨던
당신의 ‘하느님이신 영광’이
잠시 환히 비쳐 나온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 영광을 보여 주셨는가?’
그의 답은 분명합니다.
곧 닥칠 ‘십자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처참한 수난을 볼 때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미리 ‘영광’을 보여 주어
‘이분은 영광의 주님이시다’ 하는 믿음을
마음에 새겨 두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율법)와 엘리야(예언자)가 함께 나타난 것도
그분께서 온 성경의 ‘완성’이심을 증언합니다.
구름 속 음성은 단 하나를 명령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화려한 환시보다,
초막 셋을 짓는 일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아드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 ‘들음’이 바로 신앙의 성실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며
그 영광의 자리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청을 지나
기어이 산을 ‘내려’가십니다.
영광은 머물러 누릴 ‘끝’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위로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 ―
그것이 절제의 영성입니다.
두려워 엎드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다가가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마라.”
영광 중에도 그분의 손길은
이토록 부드럽고 다정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들었을 때,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빛과 환시가 걷힌 자리에,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남으십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화려한 체험보다 ‘그분의 말을 듣는’ 데 성실한가?
나는 위로의 자리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가?
나는 두려울 때 ‘손을 대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가?
모든 것이 걷힌 자리에 ‘예수님만’ 남아 계신가?
주님,
당신의 빛을 미리 보여 주시어 십자가를 견디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신 대로 성실히 듣게 하시고,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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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은 과연 전능하신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선한 이들에게도 고난은 닥치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욥과 고통의 신비
하느님은 과연 전능하신가?
2026년 8월 5일 수요일
랍비 해럴드 쿠슈너(1935–2023)는 『욥기』에 대한 고전적 탐구를 통해 흔히 받아들여지는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라는 믿음을 성찰합니다:
욥기의 저자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욥의 의로움을 굳게 믿으면서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신념은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선한 이들에게도 고난은 닥치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닙니다….
이 결론에 이르는 데에는 상실감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지혜롭게, 전능하게 다스리시며 공정한 결말과 행복한 결말을 보장해 주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은 어떤 면에서 위로가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이유가 있어 일어난다고 안심시켜 주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욥의 친구들의 신앙이 주는 위로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위로는 무고한 이들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에서만 작동하는 위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욥을 만났을 때, 우리가 곧 욥이 되었을 때, 더 이상 그런 방식의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느낄 권리—분노할 권리, 삶에 의해 부당하게 대우받았다고 느낄 권리—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는 데에 오히려 안도감이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권력의 하느님이 아니라 정의의 하느님이시라면,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 편에 서 계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선하고 성실한 사람임을 아시며, 더 나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아십니다. 우리의 불행은 그분의 뜻이 아니기에, 우리는 오히려 그분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질문은 욥의 질문, 곧 "주님, 왜 저에게 이렇게 하십니까?"가 아니라 "주님, 제게 닥친 일을 보시고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 심판이나 용서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상이나 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힘과 위로를 얻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쿠슈너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직접 일으키신다고 믿는 관념에서 벗어날 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신적 친밀함을 묘사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느님께 붙들고 있는 대신, 실제로 그분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단죄하신다고 느낄 필요 없이, 스스로의 존엄과 선함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일에 대해 분노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하느님께 대한 분노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삶의 불공정함에 대한 우리의 의로운 분노와,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본능적인 연민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불의에 분노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도록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로운 분노가 곧 하느님의 정의로운 분노가 우리 안에서 일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편에 서 있으며, 그분 또한 우리의 편에 서 계십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의 삶은 작고, 요동치며, 분주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저는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저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도우신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제가 걸어가도록 예정된 길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이 거룩한 깨달음에 대한 감사로 충만합니다!
— Bobby B.
References
Harold S. Kushner,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 (Schocken Books, 1981), 43, 44, 4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urelio Marcelino, untitled (detail), 2022, photo, Surabaya, Indones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고통과 슬픔 속에서 우리는 홀로 머물도록 부름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는 우리 곁에 모여, 함께 침묵 속에서 자리를 지켜 주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을 함께 증언합니다. 그저 곁에 머물러 주는 그 사랑의 현존이 곧 위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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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높은 곳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보여주는 장면은 그분의 공생활 시작을 되돌아보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시작과 끝이 하나의 빛나는 순간 안에 함께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 복음서 모두에서 이 변모 사건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직후에 나옵니다. 죽음,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 전체를 멈추게 하고 모든 것을 한 점으로 모읍니다. 그러나 그 점은 소멸이 아니라, 변모의 순간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고난과 시련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영성가들은 말합니다. 우리 육신의 죽음 이전에 이미 우리가 죽음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죽음 이전의 죽음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과 사람들의 평가 등에 집착하는 에고의 경향에서 벗어나 우리 존재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우리가 일상 안에서 볼 수 없었던 우리 삶의 진정한 현실을 깊이 체험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에고에 대해 죽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의 평화와 고요는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영혼의 평온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모의 체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은 잠시나마 "평화와 고요의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경향은 "익숙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같은 사람을 만나며, 단조로움이 스며듭니다. 이 단조로움은 열정을 빼앗아가고, 신앙생활에서도 위험이 생겨납니다.
이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패턴에 너무 많이 시선을 두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성찰을 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삶의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일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그 의미를 찾고자 하지 않는 한 성령께서 일하시는 상황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삶의 패턴이 우리를 그 심오한 깨달음에서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삶의 더 깊은 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들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셨는지 모릅니다. 높은 곳에서 세상의 깊은 곳을 볼 수 있듯이, 높은 곳에서 주님의 빛나는 모습을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주님과 자신들의 내면 깊숙한 본질을 볼 수 있게끔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요즘 극심한 무더위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쳐 있으면서 영적으로도 무기력해지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그리 큰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분명히 무더위가 육체를 게으르게 만들면서 오는 무력감이겠지요?! 그런데… 어쩌면 이런 경험은 지금까지의 제 영적인 삶의 태도를 뒤돌아보게 하는 자극제가 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내면 깊은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기보다는 어떤 일에 열심히 임하면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외적인 결과에 만족하며 그것을 영적인 결과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율법의 외적인 준수에만 치중하여 율법의 본질을 잃고 살아갔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인 것 아니겠습니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지 않았나 합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과 함께하며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았고, 반대와 논쟁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 습관처럼 단조로움이 스며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변모하십니다.
그 순간은 특별하고 독보적인 체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빛나고 옷은 눈부시게 희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스승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다만 그동안은 제자들의 눈이 가려져 있었고, 그래서 그분의 빛나는 모습, 즉 그분의 참된 존재성을 볼 수 없었지만, 이제는 잠시나마 그 영광을 깊이 체험한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 짧은 순간은 그들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같은 분이시지만, 그분의 영광스러운 빛을 맛본 것입니다. 변모의 순간은 상처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고통이 의미로 채워지는 순간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주님은 이 순간을 우리의 변모를 위해 활용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변모를 위해 첫 걸음을 떼기 위해서는 이런 주님의 초대에 영의 눈을 뜨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변모 축일만 되면 예전에 읽었던 충격적인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날이 바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8월 6일이었고, 신자들이 많이 모여 주일 미사를 봉헌하던 나가사키의 주교좌 성당 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그 빛이 너무 눈이 부셔 맨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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