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 만리 시조 109 조경선
대구일보 2021년 2월 19일 금
묵밥
조경선
먹을 때라도 시원하게 더위 식혀 먹자던//묵밥집 간판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묵묵히 한 그릇 말아 모여든 밥그릇들//때를 놓친 사람들 한여름을 깁고 있을 때//청문회 화면 속에 잘 알려진 밥그릇 뜬다//누릴 것 다 누리고 산 이름 위에 밥 한 그릇//후루룩 챙긴 묵밥 돌아서면 꺼지는데//뒤집힌 짧은 희망이 내뿜는 글자처럼//묵자가 놈으로 읽혀 우리 앞에 서 있다
「정형시학」(2020, 봄호)
조경선 시인은 경기도 고양 출생으로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목력’이 있다.
‘묵밥’은 재미난 시다. 먹을 때라도 시원하게 더위 식혀 먹자던 묵밥집 간판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본다. 그 식당 상에는 묵묵히 한 그릇 말아 모여든 밥그릇들이 있다. 때를 놓친 사람들이 한여름을 깁고 있을 때 청문회 화면 속에 잘 알려진 밥그릇이 뜨고 있는 것을 직시한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산 이름 위에 밥 한 그릇이다. 그리고 후루룩 챙긴 묵밥은 돌아서면 꺼지는데 뒤집힌 짧은 희망이 내뿜는 글자처럼 묵자가 놈으로 읽혀 우리 앞에 서 있다, 라는 셋째 수 종장은 함의하는 뜻이 깊다. 놈으로 읽히는 이들은 그야말로 누릴 것 다 누린 이들이 아닌가. 이처럼 묵밥집 간판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에 착안하여 세태를 풍자한다. 목소리의 톤은 높지 않지만 공감을 획득하고 있다. 금방 배가 꺼지는 묵밥 한 그릇에 만족하며 사는 서민이 있는가 하면 권력과 부귀를 다 누리고 있는 이들의 못마땅한 작태도 있다. 뒤집힌 짧은 희망과는 너무나 비견된다.
그는 ‘흙, 흑흑’이라는 시조에서 흙을 통해 흑흑, 이라는 울음을 읽어낸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너에게 향해 있다, 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흙을 짓다 흙에 묻히는 묘비명의 고백처럼 끝없이 올라가 봐도 너에게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거듭 떠올리게 한다. 실로 그렇다. 모든 이들은 끝내 너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가진 것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한다. 미련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뒤돌아볼 틈도 없다. 그 무슨 비수와 같은 단죄의 길이나 다름없다. 흙은 또한 차가웠다 뜨거웠다 식었다 데워지는 어두운 바닥까지 다 받아내는 안식처다. 의미부여의 깊이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러면서 화자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모든 이의 의식주, 라고 다시금 상기시킨다. 너를 넘어서려고 한복판에 대못을 박고 꽃 필 때나 새가 울 때도 슬퍼하지 않았다, 라고 진술한다. 그 누구든지 넘어서려고 하지만 종내 넘어서지 못한다. 유한의 목숨이어서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남은 날들을 자꾸만 파헤치고 있다. 어쩌면 끊임없이 파헤치는 일이 인생이라는 듯이, 일생이라는 듯이.
제목이 왜 ‘흙, 흑흑’일까? 오래 전 팔순이 넘은 큰누님을 만났을 때 두 손을 자세히 살핀 적이 있었다. 누님의 손은 흡사 갈고리 같았다. 손마디가 매우 굵고 휘어져 있었다. 경북 군위군 고로면 낙전리 싸리밭골이라는 곳에 열일곱에 시집가서 한평생 밭을 일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담배농사까지 지었으니 고초가 적지 않았다. 흙을 밟으며 흙과 더불어 흙구덩이를 파헤치며 사는 동안 흑흑 혼자 속울음 울곤 하던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그래서 그때 두꺼비 같은 두 손이 무슨 보물인 듯 귀해 보였다.
시인 조경선은 날마다 흙과 더불어 산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흙의 생리를 잘 안다. 때로 묵밥을 먹으며 때로 흙의 울음을 들으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그런 사유와 탐색 중에 시와 맞닥뜨린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시에는 생기가 넘친다.
이정환(시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