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남경문 베드로(1796〜1846)
◦ 회장이요 복사. 중인 출신으로,한때 금위 영 군인으로 생활함
o 1796년 서울에서 출생. 훗날 남대문 밖에서 거주함
0 1846년 좌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
남경문(南景文) 베드로는 천주교에 입교한 뒤 냉담한 상태로 그릇된 일들을 범하였으나,훗날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다 가 순교하였다. 본래 그의 부친은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하여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나, 베드로가 어렸을 때 사망한 탓에 아들에게 천 주 교리를 가르칠 시 간을 갖지는 못하였다.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베드로는 21세 때 교우 처녀 허 바르바 라와 혼인하였고,이후 박 베드로라는 교우를 만나 그로부터 입교 권유 를 받고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사채를 이용한 고리대금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아직 신심이 깊지 않은 데다가 교리에도 밝지 못 하였다.87 88>
1834년 초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严 신부가 입국하자, 베드로는 신부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 동안 받았던 이자들을 돌려주고 고리대금업도 중단하였다. 그런 다음 금위영(禁衛營)의 포수도 하고, 장사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신부의 명에 따라 회장 소임을 맡았으며,신부가 지방 교우들을 순방하러 다닐 때면 복사로 활
-------------------------------------------------------------------------------
87)『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57, 남 테레사의 증언. 증언자 테레사는 베드로 의 딸이었다.
88)유방제 신부의 본명은 여항덕(余E德)이었으나, 조선에 입국하면서 유방 제로개명하였다.
-------------------------------------------------------------------------------
동하기도 하였다.89)
1839년의 기해 박해가 일어난뒤 베드로는 체포되었으나 비신자였던 동생의 도움으로 석방될수 있었다.89) 그리고 이후로는 냉담하여 교회를 멀리하였으며, 2-3년 동안 여교우 2명과 관계하 여
자식까지 낳았다.
이러던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다시 신앙 생활을 하게된 것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를 만나면서였다. 이때 신부의 권면으로 크게 통회한 그는 열심히 일해서 얻은품 삯으로 자식들을 부양하였고, 새벽마다 일어나 열심히 기도 했으며,한해 겨울 동안 냉방에 서 평상 하나를 놓고 지낸 탓에 치질에 걸려 고생하기도 하였다. 이제 그는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순교함으로써 이전의 잘못을 보속하겠다.’는 결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교우들도 점차
그의 행실에 탄복 하게 되었다.92〉
남경문 베드로가 체포 된것은 남대문밖에 살고 있던 1846년의 병오 박해 때였다. 이때 그는체 포 될것을 예상하고도 피신하지 않았는데, 윤 5월(음력)어느날 그의 집으로 들이닥친 포교들에 의해 좌포도청93) 으로
-------------------------------------------------------------------------------
89)남 테레사의 증언 및『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84, 박성철 베드로의 증언: 회차 86,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 한편 박성철 베드로는 남경문 베드로가 금위영이 아니라 용호영 군인이었다고 증언했으며, 김 프란치스코는 남경 문 베드로가 조기 장사를 했다고 증언하였다(『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75,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90)『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95, 서 야고보의 증언. 베드로가 체포된 것은 아 니고, 체포될 뻔하였으나 동생의 도움으로 피신했다는 증언도 있다(『기 해 • 병오 재판록』, 남 테레사의 증언).
91)『기해 • 병오 재판록』, 남 테레사의 증언 및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기 해 • 병오 재판록』회차 45, 정 아가타의 증언.
92)『기해 • 병오 재판록』, 남 테레사의 증언.
93)『일성록』(1846년 8월 1일)에 남경문의 처형 사실을 좌포도청에서 보고한 것으로 나온다. 또 좌포도청 옥에 갇혀 있던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베드
-------------------------------------------------------------------------------
압송되었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해주감영에서 문초를 받던 선주 임성룡 (林成龍)에 의해 밀고된 탓이었다〜 이어 포교들은 그 이튿날 베드로의 아내와 모친까지 체포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체포될 때 베드로는 가족들을 향해 "나는 이제 세상에서 삶을 도모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생 한 명이 옥으로 옷과 음식을 들 여보내자 “옥에서 얻어먹는 음식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나에게는 과한 것이니 보내지 말라.”고 하면서 받기를 거절했으며, 찾아오지 말라는 당 부까지 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해주감영에서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어 온 김대건 신부를 옥에서 만나는 은총을 얻었다.
베드로는 포도대장 앞에서 문초를 받게 되자, 허리에 차고 있던 금위 영 군인의 신분증인 요패(腰牌)를 끌러 던지며 “이제는 죽을 것이니 이 요패도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94 95> 포도대장이 "네가 배교하겠다면, 네 목숨만이 아니라 관직까지도 잃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하였지만, 그의 굳은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여러 개의 곤장이 부러 져나갈 정도로 남들보다 더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포도대장은 형벌로는 베드로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에 그는 예전의 군인 동료들을 불러오도록 한 뒤 솔깃한 유혹과 애정 어린 말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베드로에게 배교를 이끌 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 이 말하였다. 저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 뒤 제 생각
-------------------------------------------------------------------------------
로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기록하였다(〈김대건 신부의 1846년 8월 26일자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동 연구소, 1996, 377쪽).
94)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해서문첩록』(海西文牒錄),병오 (1846) 5월 20일.
95)『기해 • 병오 재판록』, 남 테레사의 증언.
-------------------------------------------------------------------------------
을 말씀드린 것이오니, 제발 더 이상 유혹하거나 묻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죽기를 각오했습니다.96 97>
이후에도 베드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순교의 용덕만 은 한결같았다. 결국 포도대장은 그의 생각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는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그는 다시 치도곤 80대를 맞아야만 하 였다. 그럼에도 그가 죽지 않자 포도대장은 다른 교우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교수형을 언도했으니, 이때가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 일)로,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97
-------------------------------------------------------------------------------
96)『순교자 증언록』, 19〜20쪽.
97)『순교자 증언록』(20쪽)에는 순교 당시의 나이가 ‘40세’ 라고 되어 있으나, 남 테레사의 증언에 ‘베드로는 1796년생’ 이라고 나오므로 여기에서는 후 자의 증언에 따라 ‘50세’ 로 기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