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돈의 가치에 대하여 너무나 몰랐던 것 같다. 오랫동안 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금융전문가들이 돈에 대해 연구한 결과 돈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자유’에 있다고 한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과 할 수 있는 자유, 원하지 않는 일을 원하지 않는 곳에서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돈이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나는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은 날, 그 자유를 잃었다. 나의 첫 봉급 봉투를 받아 든 어머니는 빚을 적어 놓은 치부책(置簿冊)을 주시며, 이 빚을 형과 누나와 상의하여 갚으라고 하셨다. 우리 오 남매 중 큰 누나는 결혼하였고 동생은 고등학생이었다. 직장에 다니는 건 형, 작은 누나 그리고 나까지 셋이었다. 빚은 모두 1,800만원인데 이율이 최하 2부5리(월 2.5%)에서 5부(월 5%)로 사채(私債)였다.
빚이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이렇게 많은지, 이율이 이 정도로 높은지는 몰랐다. 안동댐 수몰로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장사를 하시면서 조금씩 불어난 것이라 한다. 오 남매 학비에 생활비에 쓸 곳은 많은데, 아버지가 상시 일자리가 없고, 어머니의 구멍가게 운영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게 된 것이었다.
얼마 전 금융권에 문의해 보니 1979년 1800만원은 현재가로 약 4억원 정도 된다고 하였다. 그 당시 삼 남매 월급으로는 월 이자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차근차근 빚 정리 작업을 시작했는데, 첫 단계는 세 명의 월급을 전액 환수한 후 필요한 돈을 다시 보내주는 비상조치를 취하였다. 다음으로 이자 낮추기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당시에 금융권 이율은 사채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새마을 금고 2곳에서 돈을 빌려 금리가 높은 빚부터 갚아 나갔다. 나중에는 지역 농협에서도 추가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렇게 10여년 세월이 지나면서 결혼한 작은 누나 대신 직장인이 된 동생과 함께 삼 형제가 빚을 갚게 되었다. 그동안 월급도 많이 올랐고, 사채가 아닌 금융권 대출로 모두 전환하였지만 아직도 원금은 그대로였고, 형도 나도 결혼하여 집을 마련하고 아이들을 기르려니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삼 형제가 모든 빚을 갚는데 7∼8년이 더 걸렸다. 나는 아파트 분양금과 같이 갚느라 아내와 맞벌이를 해도 시간이 좀 걸렸다. 빚을 갚기까지 20여 년 걸린 셈이다. 그동안 마음속 깊은 곳을 짓누르던 압박감인지 무언가가 사라지면서 봄날의 따뜻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 정말 지긋지긋했던 빚! 빚! 빚!
빚이라는 차디찬 터널을 지나는 20여 년 동안 사채의 무서움을 알았고, 가까운 친척도 돈이 개입되면 어떻게 변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또한, 가까운 사람들과는 돈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빚 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금전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게 됐다.
우리 부부 둘 다 돈 욕심도 없고, 퇴직하고 연금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돈 욕심이 없어서 직장 생활은 큰 문제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재테크’ 까지 관심이 없어서 퇴직하고 보니 경제적으로 아무런 성과를 낸 것이 없다는 데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다. 한 명이라도 돈의 가치에 대하여 좀 알고, 재테크에도 관심이 있었으면 지금 조금 더 따뜻한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있지 않았을까?
빚은 돈이라는 자유를 나에게 빼앗아 갔지만, 돈이라는 자유를 갈망하게도 만들었다. 차디찬 겨울을 묵묵히 견디고 나면 봄날의 따뜻한 햇살이 더 강렬하듯, 어쩌면 차갑게만 느껴지던 빚은 나에게 뜨거운 봄을 맞이하게 해준 빚이 아니었을까?
첫댓글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돈의 고통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릅니다. 글을 조금 더 다듬어 보세요.
임선생님~~
빚 갚으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부친의 빚을 갚으려는 온가족의 따뜻한 마음이 오늘의 임박사를 만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