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지도 않는 옷을 산 걸 후회했고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옷이 쏟아지다니, 이게 뭐니 창고에 갇힌 미싱은 소리 없이 울면서 혼자 돌아갔겠다
기성복이 판을 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너무 쉬워지고 편해졌다는 겁니다. 수많은 옷들이 매일 찍혀 나옵니다. 그러자 그만 미싱은 외로워졌습니다. 소용이 없어진 거지요. '미싱'은 할머니죠. 다음 연에 잘 나옵니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소리처럼 소리 없이 할머니를 입는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소리'란 어떤 소리일까요? 한숨이 늘고 걱정이 늘고 아쉬움이 느는 소리일까요? 할머니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할머니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할머니를 불러옵니다.
미싱을 배울 때가 좋았어 할머니는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서 엉킨 실을 풀며 매듭을 새기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들었겠다 미끈하고 곧게 선 재봉틀 위를 걸어가던 할머니는
할머니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젊은 시절이었다, 미싱을 만지는 사람이 최고였지, 아마, 실을 풀고 매듭을 새기며 옷을 만들면 글쎄, 옷뿐이겠니, 거기서 쌀이 나오고 네 어미, 아비, 삼촌들 학교 보낼 돈이 다 나왔지, 그럼." 할머니의 자부심이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죽 뻗은 길을 걸어오시던 할머니는...
두 발을 가지런히 하고 누워 계신다 열여덟 살 소녀가 누운 나무 관, 삐걱거린다 새 옷에서는 차가운 냄새가 난다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 치수를 재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며 할머니는 오래된 치마처럼 낡아가며, 얇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만 세상을 떠나셨어요. 열여덟 나이적 고운 자태로 누운 신 할머니 수의는 차가운 냄새가 나요. 저세상은 차가운 것일까요? 이 생의 몸은 헌것이지만 따뜻했을까요? 내가 살찌는 동안 할머니는 얇아지고 있었어요.
할머니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나를 한 벌의 옷으로 만들었다는 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할머니의 미싱은 잘도 돌아서 나를 이 세상의 버젓한 인간으로 만들었어요. 까마득해요. 할머니가 계셨다는 것이 믿기질 않아요.
할머니의 미싱을 이젠 한쪽으로 옮겨요. 얼마나 오랫동안 재봉틀을 만지셨으면 오래도록 팔꿈치가 접혀 있었을까요?
여기 앉아보세요 눈발이 창에 드문드문 박음질을 하고 있어요 하늘에서 내려온 눈발이 미싱처럼 박음질을 하고 있어요.
평생 재봉틀에 앉아 일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알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걸치시고 동글 의자에 앉아 종일 미싱을 드르륵드르륵 돌리시던 할머니였죠. 어머니일 수도 있겠어요. 이젠 지워진 기술이지만 할머니의 솜씨 좋은 재봉질로 한 세대가 든든한 옷을 입고 세상에 나설 수 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그런 것들이 한 둘이 아니에요. 오래된 연탄 화덕이라던가 툴툴거리며 굴러다니던 오래된 짐 자전거가 새삼 달리 보입니다. 한 생을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사신 부모님을 잘 그려낸 시입니다. 조물주가 눈을 내려 세상을 박음질하는 마지막 연은 할머니를 창조자로 승화시키는군요. 창고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온 미싱이 빛나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