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이론
1. 책임의 의의
행위가 법질서와 궁극적으로 상치모순되면 '위법' 하다고 판단된다.
위법하다고 판단된 불법(구성요건해당성)은 행위자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형사제재는 궁극적으로(행위가 아니라) 행위자에게 부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자는 불법 귀속의 주체가 된다. 결과의 행위 귀속을 '객관적' 귀속이라고
함에 비하여, 불법의 행위자 귀속은 '주관적' 귀속이라고 하며, 이것이 바로
책임귀속(=귀책)이다. 책임귀속은 불법을 행한 행위자를 비난할 수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책임은 '비난가능성'이다..
[형법학상 정의된 책임개념 외에 '책임'은 일상언어에서 취한 개념이기 때문에
일상언어의 부착되어 있다. 일상언언에서 책임은 자신이 저지른 소행을 자신의
탓으로 인정하고 책임의 상대방에 대하여 그 비난과 부담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독일어의 책임에는 저지른 죄, 갚아야 할 죄과라는
의미까지도 담겨 있다.
①은 위에서 언급한 불법의 행위자 귀속을 의미하며, ②는 귀속 주체인 행위자의
정상성을 전제하며 이는 행위자의 지위인 '책임능력'의 절에서 다루어진다. ③은
책임 비난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일단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인
것이지만, 국가는 피해자의 한풀이와 복수를 대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하여
창설된 비난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책임의 상대방, 즉 비난자는 피해자가 아니라
인간의 공존조건인 '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책임에는 위에서 언급한 ① 범죄성립의 마지막 요건으로서 불법의 행위자에의 귀속(=
형벌부과의 토대)이라는 의미 외에 ② 양형의 준거로서의 책임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책임에는 ③ 국가형벌권의 토대와 정당화 근거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책임이 가진 이러한 의미들을 차별화하며 ①을 '범죄성립요건'의 하나로서의 책임이라고 한다면,
②는 '양형책임'이라고 할 수 있으며, ③은 '책임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형사사법의 원리의 하나의 책임원칙은 책임이념에서 비롯되는 원칙이다.
책임원칙의 인정은 그대 이전의 결과책임(결과가 발생하면 귀책여부를 떠나서
처벌하였다.)이나 책임과 비례하지 않는 형법(예컨대 상해에 대하여 사형)이 횡행하던
구시대 형사사법의 극복을 의미한다: "책임 없이 형벌 없다."
[책임원칙은 독일법상 헌법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고 형법상으로는 양형의 기초로
인정되고 있으나, 형법에는 이에 대응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의 내용으로서는
"책임 없으면 형벌 없다"는 대원칙하에 ① 형벌은 책임을 전제한다. 따라서 책임 없이
발생한 결과에 대하여는 책임지지 않는다. ② 형벌은 책임을, 책임은 불법을 전제한다.
형벌은 책임의 양과 부합하여야 한다. ③ 책임(능력)은 행위 시에 존재해야 한다는 세 가지
세부원칙을 둔다. 이 중 ②의 원칙은 책임원칙이 응보형주의로 귀착하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고 재혀석되고 있으며, ③의 원칙은 후술할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에서
논의되는 원칙이다.
따라서 행위자가 아닌 자에게 제재를 가하는 대벌이라든가 귀책사유 없이 행위 내지 결과만
있으면 제재를 가하는 엄격책임은 인정되지 않는다.]
종래 범죄성립단계로서의 책임의 핵심은 심리적 실재, 즉 '범행에 대한 행위자의 태도'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행위자에게 범행에 대한 일정한 실리적 실재(고의)가 있으면 큰 책임
(고의책임)을, 그러한 실재가 없으면(과실) 작은 책임(과실책임)을 묻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심리적 책임론은 극복되었다. 고의 또는 과실이 있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오늘날 책임은 규범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행위자를 비난할 수 있는가?(비난가능성)" 행위자를 비난할 수 있는 경우란,
행위자가 책임능력자이고, 행위자가 적법의 방향으로 행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법의 방향으로 행위함으로써 불법을 실현한 때이다. 이것이 책임비난의 요건(평가의 객체)
이며, 책임'비난' 자체는 이 요건에 대한 평가('객체에 대한 평가')이다. 책임비난은 행위자의
'의사형성'을 대상으로 한다.('의사형성의 비난가능성'). 따라서 책임은 귀책사유 없이 발생한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결과책임'이나 행위자의 내적 위험성만을 문제 삼는 '위험책임',
인격형성을 문제삼는 '인격책임(행상책임)'이 아니라, '의사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형법에 있어서 행위자의 책임은 위법성이 확정된 후에 비로소 주제화된다. 따라서 책임 없는
불법은 있을 수 있지만, 불법 없는 책임은 생각할 여지가 없다. 책임은 그 기초로서 불법을
필요로 한다.
책임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윤리적) 책임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형법상의 책임(=형사책임)은
법적 책임이다. 형법상의 규범적 요구(금지. 명령)는 도덕규범의 그것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양자는 독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형법규범은 도덕규범의 뒷받침을 받지 않는 경우에도
효력을 갖는다. 도덕적 책임의 준거가 되는 규범은 도덕률이다. 이에 비하여 형법적 책임의 준거가
되는 규범은 법률이다. 또 책임판단의 심급도 도덕은 양심이지만, 형법의 판단심급은 법원이다.
따라서 일반적 효력을 가지고 있는 법에 대립되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또는
정치적 소신 때문에 법에 반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행위를 해야 할 권리 또는 의무가 있다고 믿고
행위한 확신범에 대하여도 형사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
[형사책임은 법적 책임이면서도 민사책임과는 그 성질을 달리한다. 형사책임과 민사책임은 ① 민사책임이
사인(私人) 사이의 손해의 공평한 보상을 목적으로 함에 반하여 형사책임은 국자적 제재에 의하여 행위자를
벌함에 그 본질이 있고, ② 민사책임에는 위험책임의 원리와 무과실책임이 인정되지만 형사책임에는
책임주의의 관철이 요청되며, ③ 민사책임에서는 고의와 과실 간의 경중을 묻지 아니하나 형사책임은
원칙적으로 고의만을 벌하고 과실은 예외적으로 벌하며 벌하는 경우에도 가볍게 벌하고 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형사책임과 민사책임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책임개념의 충돌이
문제될 여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