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존경하는 황용현목사님의 설교를 제 시각으로 수정해봤습니다
[황용현 목사] 베드로의 유대교 옷을 벗겨야 하셨던 예수님
베드로를 훈련시키시는 주님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처음부터 완성된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놀라운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여기에 베드로 훈련의 핵심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아직 예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형성된 유대인의 세계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약 3년 동안 베드로에게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유대관적 생각과 가치관 자체를 바꾸는 훈련을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고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여전히 벗어야 할 옛 옷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벗어야 했던 일곱 가지 옷
첫째는 복에 대한 옷입니다.
유대인들은 건강, 재물, 자녀의 성공, 국가의 번영 등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겼습니다. 그것도 복이지만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복을 가르치셨습니다.
참된 복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닮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관의 옷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었지만,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성자 하나님과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워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단지 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복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삼위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것으로 바꿔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가야 로 바뀌어야 합니다."
셋째는 메시아관의 옷입니다.
베드로에게 메시아는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다윗 왕국을 회복할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만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내 뜻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넷째는 구원관의 옷입니다.
사람은 율법이나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구원을 복받고 기도응답 받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제자로 훈련받고, 성품이 변화되고, 충성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다섯째는 민족관의 옷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강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민족을 낮추는 우월의식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도 오순절 성령을 경험한 뒤에도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사건을 통해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깨달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성령을 체험했다고 해서 오래된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내 교단, 내 신학, 내 교회, 내 민족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섯째는 애국관의 옷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행 1:6).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지상의 특정 국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적 이념이나 내가 지지하는 세력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라를 사랑하면서도 그보다 높은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일곱째는 이방인관의 옷입니다.
베드로는 오랫동안 이방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유대인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넬료 사건을 통해 그의 생각을 깨뜨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베드로가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제자훈련입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렇게 강하게 훈련시키셨을까요?
베드로에게는 맡기실 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큰 일을 맡길 사람일수록 옛사람의 세계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욕망, 세속적 복관, 민족적 우월감, 정치적 편견,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큰 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과 훈련을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국 시민이 되는 문제와 하나님 나라에서 더 큰 책임과 사명을 맡을 사람으로 준비되는 문제는 동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이기는 자”에게 특별한 약속을 주셨고, 충성된 종에게는 더 큰 권세를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 19:17).
그러므로 나는 신부, 이긴 자, 남은 자, 통치 파트너라는 표현을 이러한 충성되고 훈련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남을 보며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묻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신앙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큰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받을 것인가?”
베드로의 실패도 훈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실패를 통해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나는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다.”
이러한 자기 확신의 옷까지 벗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깨어진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는 먼저 자기 자신이 깨어져야 합니다.
통치는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며,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보다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조차 예수님과 약 3년을 함께 지내며 집중적으로 훈련받았지만 생각과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보며
“신앙생활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 아직도 그 모양이냐?”
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변화 속도가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오랜 세월 예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뀌어 왔는가?”
그리고 또 하나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큰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되고 있는가?”
현대교회는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시작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후 말씀과 성령, 환경과 실패를 통해 계속 훈련하십니다.
베드로에게서 옛 옷을 벗기셨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서도 옛 생각의 옷을 벗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예수님의 생각으로 변화되었느냐입니다.
나는 이 말씀 앞에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엉뚱이야, 너는 지금도 그 옛 옷을 벗어 가고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