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께서 사람들에게 비유(씨뿌리는)로 말씀하신 것은 어떤 도리를 알기 쉽게 풀어 주시려고 한 것이기보다는 귀 있는 자는 듣고 또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는 크 원칙 아래 그러한 약식의 계시를 내리신 것입니다.
2. 부자청년과 영생의 길.
예수님은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네가 영생의 도리를 추구할진대 네게 있는 것들을 흩어서 너의 율법 행이 무엇인가를 생활로 분명히 증시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믿는다는 바 하나님의 말씀은 관념에 불과하지 생활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의 그 거룩한 역사는 그렇게 지적인 내용으로서 학문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하신 것입니다.
3.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에 붙어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온전히 단절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제자 되는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제게 있는 것을 다 바쳐 버리지 않고서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절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누가복음 14:33에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14:26-33에서 세 가지 조건을: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라는 것,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는 것, 그 다음에는 제게 있는 것을 다 포기해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4. 율법사에 대한 대답.
부자 청년에게는 그렇게 가르쳤지만 누가 복음 10:25에 나오는 이 교법사요 율법사요 법률가인 그에게는 그렇게 안 가르쳤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의 온정이라는 것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선행이 세상의 다른 누가 모방하기 어려운 고도의 선행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것은 사람일진대 기본적으로 누구나 다 이만한 온정을 가지고 그만한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지금 이 경우에 사람이 다른 의무를 소홀히 하더라도 그것만은 해야겠다 하고 강요하는 식의 문제를 설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최소한 이러한 인간애, 인간미, 인간의 온정을 가져야 하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베푸신 것입니다.
6. 결국 예수님께서 이 율법사에게 가르치신 것은 율법의 논리대로만 준행하고 나가거라 하신 것이고, 또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웃이라면 적어도 이러한 온정을 가졌다는 정도의 생활이다 하고 얘기를 하시고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끝까지 그것이 영생의 길인 것같이 생각하게 하고 얘기를 끝내신 것입니다.
7.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배워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경우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의 진수와 본도, 바른 도리를 반드시 다 가르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뭐냐 하면 지금 우리가 본 이것은 영생 얻는 도리의 서론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데 그렇게 영생 얻는 도리의 서론 정도만 그에게 일러주고 본론에 대해서는 말씀을 안 하셨다는 것입니다.
8. 예수님한테 그렇게 배웠어도 깨달음이 없고 항상 배우나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언젠가 한번은 포기하시는 날이 오는 것인데, 이스라엘도 그렇게 포기를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원칙입니다.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7 하는 말씀과 같이, 큰 원칙 아래에서 예수님이 행동하실 때 주로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생활과 심상을 늘 주목하시며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저 관념으로 이지적으로만 받아들여서 재미있으라고 자꾸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도리는 하나의 이치로, 하나의 이론으로, 학문으로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깨달았으면 그 깨달음에 상당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깨달음에 상당한 행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을 씨뿌리는 비유에서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9. 깨달음. (교회는 깨달음을 요구한다)
받은 말씀을 가지고 종교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자꾸 얘기하고 논리를 베풀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류의 철학적인 해석, 주관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항상 이지적으로 생각해서 지적으로 논리해 버릇하는 사람에게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유력한 역사적인 증거를 가지고 들어갈 때 거기에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나오면 이것이 왜 그럴까 하고 자꾸 이론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람이 그처럼 이론을 안 해서 길가에 뿌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습니다.
10. 길가에 떨어진 사람이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요컨대 주님께 대한 충성이 자기의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결국은 신앙을 자기의 복리를 위한 종교적 이용물로 항상 유지하고 사는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신앙이라는 것이 자기의 행복 수호나 행복 증진의 방편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거기서 눈을 떠서 일보 전진하여, 내가 혼자가 아니다, 내가 목숨을 드려서 충성을 다하고 섬겨야 할 주님이 저기 계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비로소 말씀이 성신으로 말미암은 쿰 베르보의 역사가 효과 있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11.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눅17:3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 12:24-26). 그의 종교가 진짜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행복 증진을 위해서 상보적인 교환의 조건으로 가지고 있는 인위적인 종교인가 하는 문제가 결정될 것입니다.
12. 예수님은 이 율법사 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정도로 가르치시지 덮어놓고 깊은 진리를 끝없이 다 가르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깊은 진리를 터득하려면 우리들 자신의 현실 생활에서 무슨 열매가 있는가를 살펴보아 가면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Micah 씀 (04.24.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