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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7 /
마음의 가장 깊은 지향성이 그의 사후의 상태를 결정한다.
- 구원의 유일한 희망은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있다.
<구원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내면을 끝까지 분석하여 스스로를 확정하는 데 있지 않고,
모든 마음의 목적과 사랑을 아시는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있다.>
이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인간이 자신의 주도적 사랑을 알 수 있을까?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들여다보지 못해 혼란을 느끼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상태이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지배적 사랑'을 스스로 완벽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유는 인간의 자아가
수많은 겹의 위선과 무의식적인 변명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내면 전체를 볼 수 없으며,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도 오직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다.
주님만이 사람의 의도와 목적까지 완전히 보신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악을 거의 알지 못한다. 수천 가지가 숨겨져 있으며,
그 대부분은 전혀 알지 못한다.’ AC 5398
또 다른 곳에서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 AC 1909
반면에..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의도를 살피시며, 목적(ends)을 보신다.
사람은 외적인 것만 보지만, 주님은 가장 안쪽의 것들을 보신다.’ AC 1317
또는
‘인간은 겉모양만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의지가 향하는 가장 깊은 목적과
그 속에 숨겨진 미세한 경향성까지 살피신다.’ AC 2235
이 문구는 성경(삼상 16:7)을 해설하면서 반복되는 원리이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마음을 아신다.'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사랑하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주님만이 정확히 보신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스스로 판결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의 심판만이 참된 심판이 된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를 완벽히 심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아가 신의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의 정점이 된다.
우리가 스스로를 다 알 수 없기에 오히려 모든 마음의 동기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나는 나를 정확히 심판할 수 없지만,
주님은 나를 정확히 아신다는 데 있다.
이 점을 조금만 더 풀어 쓰면 스베덴보리의 사상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자신의 외적인 행동은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가장 깊은 목적과 애정은 거의 보지 못한다.
어떤 때는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도
사실은 명예나 이익을 위한 것일 수 있고,
반대로 반복해서 악에 넘어지는 사람도
그 악을 미워하며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수 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가장 깊은 생명의 사랑을 정확하게 분별할 능력이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최종적으로 심판하려 하면
두 가지 극단에 빠지기 쉽다.
하나는 ‘나는 끝났다.’라며 절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괜찮다.’라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판단 모두 사람의 제한된 시야에서 나온 것이지,
주님의 시야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주님은 사람의 한순간의 실패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기를 원하는지,
무엇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으려 하는지를 보신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사람은 그 악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즐기고 있으며,
또 다른 사람은 같은 악 때문에 울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다.
사람의 눈에는 둘 다 같은 죄인이지만,
주님은 그 마음의 방향과 의지의 흐름을 완전히 구별하여 보신다.
이것이 주님의 심판이 공의로운 이유이다.
그래서 주님의 공의는 단순히 죄를 처벌하는 엄격함이 아니라,
사람 안에 남아 있는 가장 작은 선을 끝까지 보존하시려는 ‘공의’이기도 하다.
주님은 사람이 아직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선한 애정과 진리에 대한 사랑까지 보시며, 그것을 보호하시고 자라게 하신다.
반대로 사람의 선한 겉모습 뒤에 숨은 위선과 자기 사랑도 정확히 보신다.
그러므로 주님의 심판은 결코 외모나 일시적인 행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람의 전 생명과 가장 깊은 목적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만일 구원이 인간 자신의 자기평가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절망하거나 교만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원이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아직 살아 있는 가장 작은 선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보시고 지키신다.
또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깊은 악까지도 드러내시고 치유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은 자신을 정확히 아는 인간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장 깊은 의도와 생명의 방향을 완전하게 아시는
주님의 공의와 자비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반복하여 말하는 신성한 섭리의 핵심이다.
사람은 자신의 전부를 알 수 없지만,
주님은 사람의 가장 깊은 목적과 사랑을 보시며
그 자유를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천국을 향해 이끄신다.
그러므로 자신의 상태를 다 알지 못한다고 낙심할 이유도,
스스로를 쉽게 의롭다고 여길 이유도 없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끝까지 사람의 참된 생명을 살피시고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구원을 확정 지으려 할 때,
영혼은 오히려 더 큰 불안과 교만에 빠지게 된다.
영계의 질서 상 구원은 스스로 쟁취하는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수용'에 있다.
자신의 악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 본질이 얼마나 깊은지 다 알지 못해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나조차 나를 모르니 주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내맡기는 겸손한 태도이다.
스스로 심판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인도에 자신을 맡기는
그 '가난한 마음'이 역설적으로 가장 어두운 악의 본질을
녹여내는 구원의 열쇠가 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러한 내맡김은 방종이 아니며,
인간이 자유의지로 주님의 통치를 수용하겠다는
자발적인 선택이 전제될 때에만 영적인 효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주님께 삶을 내맡기는 가난한 마음'과 '자발적인 수용'은
결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수동적 방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과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마치 스스로 행하는 것처럼 치열하게 악에 대항하고
마음의 문을 지키는 적극적인 실천을 동반한다.
즉, 주님의 통치를 수용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해 악을 거부하고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능동적 의지의 노력을 뜻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치료 역량이
비로소 영혼 내부에 온전하게 발휘되는 것이다.
영혼 내부에서 악이 드러나고 치료되는 영적 역학 과정을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인간의 영혼 안에는 유전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악에 대한 사랑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해력을 통하여 생각의 영역으로 떠오르며,
그때 인간은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자유 가운데 선택하게 된다.
이때 인간이 악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다면, 내면의 악은 암적인 고름처럼
영혼 깊은 곳에 숨어 구원의 여지를 완전히 파괴한다.
그러나 자유의 법칙에 따라 악이 생각의 빛 가운데로 올려질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악한 실체를 자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여기서 인간은 소극적으로 가만히 서서 주님의 조치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여하신 이성을 통해 영적 원리를 배우고 '스스로 하듯'
온 힘을 다해 그 악을 거부하고 억제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손을 움직여
악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거절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인간이 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거부를 바탕으로,
주님께서는 그 악이 의지와 의도 속으로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분리하신다.
즉, 인간이 스스로 하듯 악에 맞서 싸우는 범주만큼
주님의 치료 역량이 영혼 내부에 작용하여,
마침내 숨겨진 악의 독소가 제거되고 새로운 영적 상태가 형성되는 것이다.
- 인간 안에 내재하는 악의 깊이는
인간 스스로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안에 있는 가장 깊은 사랑과 목적조차 온전히 알지 못한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동시에 주님의 신성한 섭리라고 설명한다.
만일 사람이 자기 영혼의 모든 상태와 주님의 섭리의 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면,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지혜로 판단하려 하거나,
반대로 섭리를 부인하게 될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만 비추시고,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자신의 내면을 보게 하신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을 이루는 사랑이 숨어 있는 곳에서 나와
이해력의 빛 속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악을 알지 못할 것이며
그것을 금할 수도 없을 것이다.’ DP 281
이 부분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생각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목적은
마음대로 악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이루는 사랑(애정)이
이해력의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여,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악을 보고 그것을 버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악은 먼저 드러나야 하고, 드러난 악만이 비로소 회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사람이 볼 수 있는 악은
자신의 영혼 전체에 비하면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사랑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마치 땅 위에 드러난 줄기와 잎은 볼 수 있지만
땅속 깊은 뿌리는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이 자기 안의 수많은 악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 악들이 '자기사랑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첫째, 뿌리가 땅속에 숨어 눈에 보이지 않듯이,
자기사랑에 바탕을 둔 악은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은폐되어 있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둘째, 자기사랑은 인간의 본성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본능적으로 사랑하므로,
자기사랑의 뿌리에서 나오는 생각과 행동을 나쁜 것으로 느끼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기 자신으로 느낀다.
자신과 악이 완전히 붙어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감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셋째, 인간은 진리를 배워서 '이것이 악이다'라고
지식으로 아는 범위까지만 자신의 악을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지식으로 알지 못하고 마음 깊이 뿌리내린 자기사랑의 악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모든 악을 한꺼번에 보여 주지 않으시고,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만 드러내신다.
그것이 주님의 자비이며 동시에 중생의 질서이다.
이 때문에 사람의 구원은
자신의 모든 악을 스스로 찾아내는 데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악을 진리의 빛 아래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붙들지 않으려는 데 있다.
사람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영역까지 스스로 정화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가장 깊은 내면까지 모두 살피시며 질서 있게 다루신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영적 생명은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삶 속에서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HH 471 연산
그러므로 사람의 영적 상태는 지식의 양보다 마음의 방향에 의해 결정된다.
많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정당화의 도구로 삼는 사람보다,
비록 아는 것이 적더라도 자신에게 보여진 진리를 따라
살고자 애쓰는 사람이 주님께 훨씬 가까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할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로,
사람은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스스로 완전히 판별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을 최종적으로 심판하려는 순간,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나는 나 자신을 다 알지 못합니다.’라는
겸손한 고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만큼만 보고, 보여 주신 만큼만 회개하며,
그보다 깊은 곳은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영적인 질서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인간이 신성한 섭리를 명확하게 본다면,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혹은 스스로 하나님이 될 것이다.’ DP 175
이 말씀은 사람이 섭리의 전 과정을 알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시기 위해 감추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와 신앙을 보존하시기 위해 감추신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 전체를 보는 대신, 오늘 회개해야 할 한 걸음만 보게 된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을 충실히 걸어갈 때,
주님께서는 그 뒤에 있는 더 깊은 악들까지도 보여주시고 차례로 분리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모두 알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증거이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악을 알 수 없지만,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목적과 사랑까지 모두 아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드러난 작은 악 하나를 통하여
더 깊은 뿌리까지 조금씩 다루어 가신다.
이것이 중생의 실제 과정이며,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놀라운 방식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 내는 쟁취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수용이다.
그러나 이 수용은 결코 수동적인 방임이 아니다.
사람은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해야 하며,
동시에 모든 능력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바로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은 자유 안에서 주님과 협력하게 되고,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통하여 영혼 가장 깊은 곳까지 중생의 역사를 이루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사랑과 목적까지 아시며,
드러난 작은 악 하나를 통하여 더 깊은 악까지도 질서 있게 분리해 가신다.
이것이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중생을 이루시는
신성한 섭리의 경이로운 사랑이다.
- 우리 안의 가장 깊은 지향성이 주님을 향하고 있다면..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악의 목록이 아니라,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이다.
그 지향성이 주님께 열려 있다면,
우리가 스스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수많은 악의 매듭들까지도
주님께서는 사후에 당신의 빛 가운데 하나씩 풀어내시고
사람으로부터 분리하신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깨닫고 제어하는 악은
영혼의 전체 구조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처럼 아주 작은 영역이다.
또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영역에는 스스로 명확히 깨닫지 못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미세하게 빛을 갈망하는 마음의 방향성인
‘무의식적’ 지향성도 존재한다.
이때 의식적인 행위와 무의식적인 지향성(마음의 향방)이
하나로 모여 영혼의 기초를 이루더라도,
이것이 영적 생명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 수용성(그릇)이 반드시 거기 결합해야 한다.
만약 주님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스스로 행한 모든 노력과 지향은
아무런 영적 가치를 갖지 못하고 무(無)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자발적 행위는 수용성이 바탕이 될 때에만
비로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수용성이란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진리와 사랑을
자신의 고집이나 자기사랑으로 거부하지 않고,
겸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영적 준비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의식 속에 드러나는 악이
전부가 아님을 겸손히 인정하고, 손을 놓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듯 온 힘을 다해 생각과 행동에서 악을 멀리하여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용성의 그릇을 마련해야 한다.
이처럼 악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통해 수용성이 확보될 때,
비로소 인간의 내면과 외적 행위가 주님의 신성한 유입 결합하여
참된 영적 상태로 완성된다.
인간은 본성적인 어둠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악의 실체를 다 알아채지 못하고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기 쉽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한계와 미련함을 아시고,
수면 아래 숨겨진 은밀한 아픔과 미세하게 빛을 향하려는 마음까지도
무한한 자비로 살피신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하되
결코 자포자기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스스로 하듯 악을 멀리하고 싸울 때,
주님께서는 영혼의 그릇을 넓혀 주시어 천계의 진리와 생명을 채워주신다.
이 와중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도 분명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어렴풋이 느끼는 마음의 방향성이다.
비록 수많은 연약함과 실패 속에서 흔들릴지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며 주님을 향하려는
그 깊은 지향성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영혼의 가장 안쪽이
아직 주님의 빛을 거부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사람 안에는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악의 뿌리와 결박이 남아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드러내시고 사람으로부터 차례로 분리해 가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영혼의 최종적인 심판자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가장 깊은 목적과 생명의 사랑까지도
주님께서는 완전히 아시며, 신성한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을 가장 선한 질서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정확히 분석했는가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끝까지 주님의 빛을 거부하지 않고
그 인도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남아 있는가에 있다.
인간이 심판자가 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이미 그 복잡한 영적 수식을 완벽하게 풀어내어
우리를 가장 선한 자리로 배치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섭리의 결과치는
인간이 끝내 빛을 혐오하고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지옥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영원한 구원으로 확정된다.
자신을 다 알지 못한다는 불안함은 인간을 인간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라는 섭리의 초대장이다.
인간이 심판자가 되어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합리화할 때 영혼은 길을 잃지만,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긍휼을 구할 때
영혼은 가장 안전한 항구에 닻을 내리게 된다.
자신의 부족함보다 주님의 전능하심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에서
영혼은 가장 깊은 안식을 얻는다.
스스로를 확정 지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 불확실함 속에서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그 짧은 순간이 영혼을
영원한 빛의 자녀로 확정 짓는 가장 확실한 심판의 순간이 될 것이다.
지옥을 선택할 수 있는 무서운 자유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빛 앞에 엎드리는
인간의 그 작고도 위대한 진심을,
주님은 우주 전체의 무게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가장 완전한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
인간의 부족함보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전능하심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에서 영혼은 가장 깊은 안식을 얻는다.
- 가책을 동반한 악은 왜 영혼을 파멸시키지 못하는가..
인간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 가운데
'알면서 지키지 못하는 죄'에 대한 중압감은
스스로를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곤 한다.
모르고 지은 죄보다 진리의 지식을 명확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죄를 범하는 것이 영적으로 훨씬 더 지옥적이라는 주장을 접할 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로 인해 한숨짓고
사후의 형벌을 염려하는 괴로움에 빠진다.
더욱이 악을 끊어내지 못한 채 두려움과 탄식 속에서
같은 악에 다시 넘어질 때에는,
'혹시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영혼을 짓누르기도 한다.
그러나 영적 운명을 결정짓는 본질은 머리로 알고 있는
지식의 유무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진리를 대하는 '의지의 태도(방향성)'에 있다.
'알면서 짓는 죄가 더 무겁다'는 명제의 참된 의미는,
진리를 명확히 알면서도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악을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그 악을 정당화(confirm)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스베덴보리는 이와 같은 모독의 상태를 엄중하게 경고한다.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모독하는 것은 가장 중대한 영적 상태이다.' DP 231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연약하여 넘어지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인정한 뒤에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자신의 악을 확증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DP 231 연산
인간이 지성으로 진리를 알면서도 말씀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거나 조롱하고,
의지의 이기적 욕망을 버리지 않은 채 악을 옹호하며 정당화할 때
영혼 내부에는 치명적인 영적 역학이 작용한다.
지성의 진리와 의지의 악이 정반대로 충돌하면서,
악을 합리화하려는 의지가 지성의 진리에 직접적인 가해(violence)를 입히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 하듯 악을 멀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악 안에서 자기 자신을 확증할 때, 영혼 내부의 진리는 오염되고
결국 스스로 파괴되는 영적 몰락에 이르게 된다.
반면, 자신의 악을 인지하고 괴로워하며 사후를 걱정하는 영혼의 상태는
진리와 악이 정반대로 완전히 결합한 모독의 상태와 전혀 다르다.
이는 지성과 의지가 악한 쪽으로 합일된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기에 스스로를 꾸짖고 자책하지만,
의지가 아직 연약하여 습관적인 유혹 앞에서 번민하는 '영적 교전'의 상태이다.
이 교전의 상태는 AC 8959항 및 8961항에 기술된
영적 시험의 원리와 정확히 연결된다.
‘시험은 인간 안에 있는 영적 충돌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지옥으로부터 온 인간 안의 악들과 주님으로부터 온
인간 안의 선들 사이의 전투들이기 때문이다.’ AC 8959
‘시험 안에서 이기는 자는 진리들과 선들 안에 확립된다..
그러나 굴복하는 자는 거짓들과 악들 안에 남는다.. AC 8961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반대하고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스스로 파괴하는 자들이지만,
자신의 행동이 진리와 일치하지 않음을 슬퍼하며
자신을 꾸짖는 자들은 아직 진리를 버리지 않았으며,
그 진리는 계속해서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고
악과 화해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 싸움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 그 싸움의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 AC 8959, 8961 연산
주님께서는 스스로의 연약함에 대해 비통해하며
진리로 자신을 교정하려는 이들을 끊임없이 진리 안에서 보호하시며
악으로부터 분리해 주신다.
따라서 인간은 진리의 빛에 비추어 자신의 악이 드러났을 때,
단지 연약함을 슬퍼하거나 사후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소극적 탄식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소극적인 자책이나 상황을 고백하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은
영혼을 지탱해주지 못한다.
인간은 마치 자기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As if of oneself)
진리의 빛에 드러난 악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며 멀리하는 능동적인 의지적 투쟁을 개시해야 한다.
치열하게 악과 대적하여 싸우되 그 싸우는 무기와 동력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고 있음을 확고히 믿고 시인할 때,
영혼은 거짓과 악에 굴복하지 않고 진리와 선 안에 확립된다.
스스로 하듯 능동적으로 악에 맞서는 실천적 의무를 다할 때
비로소 천계적 고유속성이 영혼 내부에 할당되며,
구원의 빛 안에 안전하게 보존되는 영적 승리가 완성된다.
우리가 지식과 의지라는 두 기둥 사이에서 겪는
영적 갈등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본질이 단순히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불일치에 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단순히 머리로 진리를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진리를 대하는 마음의 태도, 즉 의지가 지니는 방향성이다.
우리는 종종 '알면서 짓는 죄'에 대해 깊은 절망을 느끼지만,
진정한 영적 위기는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마저 파괴하려 드는 태도에 있다.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하거나 비웃는 상태는 주님의 빛을 스스로 차단하는 행위이기에
구원의 통로가 닫히고 마는 치명적인 상태이다.
이 위험성이 알면서 짓는 죄의 진면목이다.
반면, 자신이 행하는 악이 진리와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앞에서 비통해하며 스스로를 꾸짖는 마음은
결코 진리를 더럽히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 탄식은 진리가 영혼 내부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우리의 악을 끊임없이 비추고 고발하는 교정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성으로는 무엇이 옳은지 알기에 자책하지만,
아직 가슴인 의지가 연약하여 습관적인 유혹에 굴복하고 마는
그 갈등의 시간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거룩한 교전의 현장이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 죄를 즐기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행위는
지식을 악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적발해 내는 날카로운 심판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진리를 붙들고 괴로워하는 한,
그 영혼은 진리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안에서
그분의 정화를 받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진리를 알면서도 넘어지는 그 괴로운 순간은,
지식과 의지가 아직 악한 쪽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어
굳어지지 않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이다.
주님께서는 지성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의 거울을 비추어 주시며,
의지가 그 거울을 외면하고 악으로 향할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 슬픔이라는 틈을 만드신다.
그 슬픔은 사람이 아직 진리를 버리지 않았으며, 주님께서
그의 양심을 통하여 계속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 주는 중요한 흔적이다.
진리를 알기에 더 아픈 것이며,
그 아픔은 사람이 아직 악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 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상태를 통하여 사람을 조금씩
악에서 분리하시고, 선과 진리 안에 더욱 굳게 세우신다.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진리의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꾸짖는
그 고통조차 구원의 한 과정으로 삼으신다.
비록 우리의 행위가 때로 넘어질지라도
진리에 대한 경외를 잃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지팡이 삼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자신의 악을 향한 합리화가 아닌,
주님을 향한 탄식이 되는 한 그분은 우리를
결코 악의 소유로 넘겨주지 않으시며 끊임없이 당신의 빛 안에서
우리를 씻어내고 계신다.
이토록 세심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섭리가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죄의 유혹 앞에서도 다시 한 번 진리라는 거울을 붙들고
그분께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 알면서 행하는 악, 연약함 속에 행하는 악에 대해
‘알면서도 행하는 악’이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이유는,
스스로 위선자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인 위험은
단순히 알고도 죄를 범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더 이상 죄로 인정하지 않고 끝내 정당화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면서도 행하는 악'이라는 표현은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단순히 지식으로 '이것이 죄다.'라는 사실을 알고도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스베덴보리가 경고하는 것은 훨씬 더 깊은 상태이다.
그는 사람이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자신의 악을 버리지 않기 위해
그 진리를 거부하거나 왜곡하고,
마침내 그 악을 죄로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당화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진리가 자신의 삶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악을 보호하기 위해 밀어내야 할 대상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알면서도 행하는 악'이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진리를 알고도 죄를 지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 앞에서 자신의 악을 끝내 죄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확정하는 데 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기 전에는
그것을 죄로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악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는 순간,
사람은 중생의 문을 스스로 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누구도 악을 죄로서 피할 수 없다.’ Life 76
악을 행하면서도 ‘이것은 내 권리다.’
혹은 ‘세상이 다 이런 것 아니냐.’라며 스스로를 정당화할 때,
그 악은 영혼의 본질과 단단히 달라붙어 떼어내기 힘든 상태가 된다.
하지만 행하면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한숨짓는 괴로움은
영혼이 그 악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이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마음까지도 붙드시며,
사람을 악으로부터 조금씩 분리해 가신다. AC 847, Life 76 연산
사실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자주 넘어진다.
그러면 그때마다 '나는 연약해서 그랬다.'라는 말은 과연 주님 앞에서
변명이 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마음 한편에 생긴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불편함에 매우 균형 잡힌 답을 제시한다.
그는 연약함을 결코 악의 면죄부로 삼지 않지만,
그렇다고 연약함 때문에 넘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악을 사랑하는 자로 판단하지도 않는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한 번의 실패가 아니라, 그 실패 이후에도
인간의 마음이 끝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혹 가운데 있는 사람은 넘어질 수도 있고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악 때문에 깊은 괴로움을 느끼며,
양심은 끊임없이 그를 흔든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은 양심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악한 영들은 그의 악과 거짓을 들추어내고,
천사들은 그를 선과 진리 안에 붙든다.’ AC 847, 741, 751 연산
이 말씀은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이 이미 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그의 안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는 뜻이다.
만일 사람이 악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면
더 이상 이러한 양심의 고통조차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음은,
그 자체가 아직 주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자리가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연약함은 결코 악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사람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며 악을 승인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점차 그 악을 자신의 의지와 결합시키게 된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을 버리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연약함 자체가 아니라, 그 연약함을 핑계로
악과 타협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확정하는 태도이다.
반대로 사람은 여러 번 넘어질지라도,
그 악을 끝내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이키려 한다면
아직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의 양심을 지키시고, 그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통하여
조금씩 중생의 길로 이끄신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그것들을 중생의 과정에서 사용하신다고 반복하여 설명한다.
AC 561, AC 661, AC 1050 연산
이러한 이유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과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이용하여 악을 정당화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전혀 다른 상태에 있다.
앞의 사람은 비록 넘어졌지만 아직 진리를 버리지 않았기에,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계속 역사하실 수 있다.
그러나 뒤의 사람은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감추는 일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그 빛을 차단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인정한 뒤 그것을 거슬러 살아가는 상태를
매우 엄중하게 경고한다. TCR 172, TCR 404
결국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실패의 횟수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다.
다시 말해 중생을 결정하는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께 돌이키려는 의지의 방향이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할 때, '알면서도 행하는 악'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영적으로 더욱 두려운 것은 단순히 악을 행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악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을 행한 뒤에 느끼는 괴로움과 탄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악을 아직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드러내며,
주님께서 여전히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귀한 징표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겪는 내면의 갈등을
함부로 낙심의 증거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악을 미워하면서도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은
아직 싸움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갈등은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지키시고
악으로부터 조금씩 분리해 가시는 살아 있는 현장이다.
-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실패의 횟수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 ‘마음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이다.
사후에 악이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시간이 흘러 지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사람의 마음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었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은 악을 행할 때
그 안에서 어떤 즐거움이나 습관의 힘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것이 주님께 반하는 일임을 깨닫고 괴로워한다면,
그는 아직 그 악을 자신의 삶으로 승인한 것이 아니다.
비록 여러 번 같은 악에 넘어질지라도,
그 악을 죄로 인정하고 정당화하지 않는 한,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보존된 선과 진리를 통하여
사람과 악을 조금씩 분리해 가신다.
이것이 중생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사람이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악을 자신의 권리로 여기거나 선이라고까지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점차 그 악을 자신의 의지와 결합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중요한 것은 넘어졌는가 하는 사실보다,
그 악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끝내 죄로 인정하며 거부하는가 하는 마음의 방향이다.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러한 내면의 방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상에서 악을 자신의 것으로 승인하지 않았던 사람은,
비록 연약함 때문에 수없이 넘어졌더라도
그 악이 그의 참된 생명이 아님이 드러난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부터 계속 이루어 오신 섭리를 따라
그 사람과 악을 더욱 온전히 분리하시고,
선과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이끄신다.
반면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한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실패의 횟수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 ‘마음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신의 연약함과 반복되는 실패를 바라보며
지나치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시선은 넘어짐의 횟수에만 머물기 쉽지만,
주님께서는 평생에 걸쳐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를 보신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보다 더 크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게 된다.
알면서도 넘어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사람은
종종 ‘나는 진리를 알고도 악을 행하니
더욱 위험한 것이 아닐까?’ 하고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 자체는 오히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만일 진리가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런 두려움도, 그런 탄식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악을 보고 괴로워하는 마음은 아직 양심이 살아 있으며,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자리가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귀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균형이 있다.
두려움과 괴로움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그대로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회개와 삶의 변화로 이끄는 통로로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을 슬퍼하는 사람은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주님의 진리를 의지하여 실제 생활 속에서
그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려는 새로운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삶의 회개이며,
중생은 바로 이러한 선택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슬퍼하는 감정이 아니다.
회개는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 생활에서 그 악을 버리기 위해 힘쓰는 삶이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자유 안에서 주님께 협력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사람과 악을 조금씩 분리해 가신다.
이것이 사람의 자유를 온전히 존중하시면서도
결코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성한 섭리의 놀라운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깨어 있으라는 부르심이다.
그 두려움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기도와 회개, 그리고 삶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악의 권세에서 점차 자유롭게 하신다.
비록 중생의 길은 더디고 수많은 넘어짐을 동반할지라도,
끝까지 악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돌이키는 사람을
그분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람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평생 동안 쉼 없이 역사하신
주님의 신성한 섭리에 의해 참된 자유와 평안으로 인도된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실패를 하나하나 세어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패 속에서도 끝내 악을 죄로 인정하며 당신께 향하려는 마음을 붙드시고,
그 마음을 통하여 평생에 걸쳐
우리를 악에서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중생은 우리의 완전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 안에서 완성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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