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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잃어버린 영토' 대마도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으나
왜인들이 거주하면서 일본땅이 되었다.
일본과 한국을 가르는 대한해협에 있다.
대마도 주요도시로는., 이즈하라 & 게치.
일본 신화에 따르면 창조 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역사상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지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이 열도는
다이묘[大名] 소씨[宗氏]의 봉토였다.
1274, 1281년에 몽골이
일본을 2차례 침공했을 때
주민들이 대량 학살 당했다.
1861년 러시아는 대마도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고 애썼지만 실패로 끝났으며,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를 당했던 격전지.
1905.5.27~29 '쓰시마 해전' 때.,
러시아 '발틱 함대'의 이동 경로.
1905년 러일 전쟁 중에서 쓰시마 섬 부근 바다에서
일본 연합함대 VS 러시아 발트 함대 간 벌어진 전투
러시아 해군의 참패로 끝났다.
러시아 해군이 뤼순 항[旅順港]과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 발진함에 따라
일본 측은 해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으며, 양측은 교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우산국(울릉도)이
유구국(오키나와)을
25대왕 670년 간 지배.
서기 513, 514년 우산국(울릉도) 주민 1000여명이
오키나와 정착 후, 670년 간 25대에 걸쳐 왕위를 유지.
마한과 백제, 고구려 계통으로 추정되는 천손씨(天孫氏)
류구국 점령, 지배했지만 1187년 왕이 살해된뒤.,멸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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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랑국(碧浪國)은 전남 완도군에 있었던 고대국.
탐라에 농경과 가축, 직조, 의상, 국가조직을 전했다.
신라 후기 경덕왕 때 탐진현 남쪽 벽랑도(현재 소랑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지도에 강진현에 속한 섬으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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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 ~846 :문성왕 8)는
서남해안 지방 토호 출신으로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그 실력을 인정 받은 뒤 신라에 귀국,
신라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을 건설.
장보고는 해적들을 소탕하여 서남해안 해상권을 장악,
당·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
그러나 신라 귀족들은 그의 세력팽창을 원하지 않았다.
신라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어
한때 장보고의 부하 염장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암살.
'동아시아 해상왕' 장보고의 청해진이 있었던 곳.,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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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耽羅國, BC2337~1402)은 제주도 왕국.
통일신라때까지 한반도의 나라들과 교류를 하고
후삼국 시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뒤 현으로 복속.
15세기 초반에 조선의 태종 시기에 완전 병합되었다.
대마도는 고려 1389년(창왕 1) 2월 박위(朴葳)가 정벌.
우왕 재위 14년간 378회나 침입한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
김종연·최칠석(崔七夕)·박자안(朴子安) 등과 함께 공격 감행,
그뒤로 공양왕 때 왜구가 많이 줄어들고 유구국(琉球國)에서
사신을 보내온 것도 모두 대마도 정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대마도정벌은 1396년(태조 5), 1419년(세종 1)에 있었다
...................쓰시마 후추 번(
"이즈하라 번", 일반적으로는 "쓰시마 번"으로 불리운다.
에도 시대 300번(藩)의 하나, 쓰시마 전역과 규슈 일부 통치.
덴쇼(天正)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때
쓰시마 소 씨는 사전에 도요토미 정권에 신하로 따르기를 결정.
그 결과, 대마국(對馬國) 영지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대마국(對馬國)은 삼한시대 마한(馬韓)과 마주보는 나라."
'두 말(馬)이 마주 바라보는 형태라 하여.,대마(對馬 : 쓰시마)'
덴쇼 18년(1590년)에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종4위하 시종 ・ 쓰시마노카미(対馬守)로 임명된 이래
'소 씨' 당주들은 대대로 이 관위를 관례적으로 이어받았다.
임진왜란 1년 전인 덴쇼 19년(1591년)에 쓰시마 중심지
이즈하라(厳原)에는 고대부터 거점 가네이시 성의 대부에
시미즈 산성(清水山城)이, 가미쓰시마(上対馬) 오오우라(大浦)에
우쓰카타 산성(撃方山城)이 세워져 일본군의 중계지대가 되었다.
쓰시마에서는 소 요시토시가 5,000명을 동원했고 이들은
1번대부터 9번대까지로 편성되어 일본군 안에서도 최선봉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번대에 배속되었다. 요시토시는
전투 뿐 아니라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측 외교를 맡으며 강화 모색.
30만 군대가 쓰시마를 중계지 삼아 바다를 건널 때
쓰시마에는 먹을 양식이 남아있지 않아 주둔하던 병사들이
민가 닭과 개, 고양이 등을 약탈도 하여 금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게이초(慶長) 5년(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요시토시는 장인을 따라
서군에 가담해 후시미 성 공격에도 참가했고, 오쓰 성(大津城) 공격이나
세키가하라에서의 분전에서 가신을 파견해 참전했으며, 서군이 패배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항복해 도쿠가와 씨의 신하가 되는데,
이에야스는 그를 용서해주는 대가로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명했다.
1609년 조선과의 화약인 기유약조가 체결되고,
부산진(釜山鎭) 초량에 왜관(倭館)이 재건되었다.
조선의 왜관은 나가사키 데지마의 25배에 달하는
약 10만 평이 넘는 부지에 50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쓰시마 번사(藩士) 및 섬 주민이 거주하며 교역을 행했다.
2대 번주 요시나리(義成)의 대인 겐나(元和) 원년(1615년)
벌어진 오사카 전투에 도쿠가와 측을 도와 참가했으며 그 뒤
요시나리와 쓰시마 번의 가로(家老)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와
소송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간에이(寛永) 12년(1635년)에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는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간에이 14년(1637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벌어진 시마바라의 난에 쓰시마 번은 막부를 도와 난을 진압.
사쓰(佐須)의 광산을 재건한 것도 요시나리의 대였다.
쓰시마 후추 번도 산킨코다이(参勤交代) 제도에 의해
3년에 한 번 에도(江戸)로 올라가 쇼군을 알현하고 곁에서
섬길 의무가 있었고, 에도에 쓰시마 후추 번의 번저(藩邸)를 두어
이즈하라와의 사이를 성대한 행차를 갖추어 오갔다고 한다.
에도 막부의 쓰시마에 대한 검지(토지 조사)는
간분(寛文) 원년(1661년)부터 4년(1664년)까지 실시.
이 무렵에는 4자 8치 되는 겐치자오(検地竿)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고바(木庭)라 불리는 화전을 포함한 농지들도
엄중조사되어 일체의 토지를 일단 수공(국유화)시켜서
농민들에게 균분했다고 하며, 1년 주기로 전답 수익자를
교체하는 균전할체(均田割替)가 쓰시마에서 시행되었다.
쇄국정책을 실시했던 막부 체제 아래서 쓰시마는
조선통신사 접대 등 조일교류의 중개 역할을 맡았다.
조선은 초량왜관에서 제한적으로
쓰시마의 대조선 무역을 허가했다.
야나가와 사건 이후 체제가 재정비되어
후추 번의 이테이안(以酊庵)이라는 암자에
교토 5산의 선승(禅僧)들이 번갈아 거처하며
외교문서 관장제도 확립 등 막부의 통제도 강화.
간분 3년(1663년)에 쓰시마 번에서
다섯 기의 선착장을 지었는데, 이는
오늘날 「오후나에(お船江) 터」라는
이름으로 당시 구조대로 보존되고 있다.
쓰시마 후추 번은 당초 히젠 국(肥前国)
국내의 1만 석을 합친 2만 석격이었으나,
막부는 조선과의 중요한 외교창구로써의
쓰시마를 중시했고 초대 번주 요시토시 이래
쓰시마 후추 번은 국주 10만 석으로 대우되었다.
그러나 산지가 많은 쓰시마에서 경작이 어려워
쌀 4,500석에 보리 15,000석 정도가 산출되었고
히젠 국의 비령(飛領)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는
봉록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번의 주요 수입은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쓰시마의 경작 면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화전이고, 검지에서는 화전도 백성 소유로 간주되었다.
또한 고쿠다카(石高) 대신 「겐다카(間高)」라는
특별 생산단위가 채용되었는데 농업생활이 궁핍한
쓰시마에서는 후술할 멧돼지 사냥 외에도 감저(고구마)
재배나 농지 개간 등의 농업정책이 적극적으로 실시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조선과의 교역과 은 광산의 융성으로
후추 번은 크게 번영을 누렸고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나
스야마 돈오, 마쓰우라 카쇼(松浦霞沼) 등의 인재도 배출되었다.
이 무렵 쓰시마 후추 번의 번영상은
소 씨의 보리사(菩提寺)였던 반쇼인이나
가이진 신사(海神神社), 와다쓰미 신사의
장려함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조쿄(貞享) 2년(1685년)에는 3대 번주 소 요시나오(宗義真)가
후추에 「소학교」라는 이름의 학교를 세워 가신 자제를 교육.
일본에서 「소학교」의 이름이 등장한 최초의 사례로 지적된다.
기노시타 순안(木下順庵)의
제자였던 아메노모리 호슈를
쓰시마에 불러들인 것도
소 요시나오였다.
18세기 초에는 5대 번주 요시카타(義方)의 군부교(郡奉行)였던
스야마 돈오의 노력으로 1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이지카오이쓰메
(猪鹿追詰)라 불리는 대대적인 멧돼지, 사슴 등 사냥이 이루어졌다.
호에이(宝永) 6년(1709년)에 이르러
화전경작에 해를 끼치던 멧돼지는
쓰시마에서 멸종되었다.
당시 5대 쇼군 쓰나요시(綱吉)가 제정했던
겐로쿠 살생금지령이 시행되던 와중이었는데
스야마 돈오는 죽음을 각오하고 멧돼지 사냥을 단행.
쓰시마 주민들은 그를 「성인」(聖人)이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한편 안에이(安永) 7년(1778년)에 가독 상속을 허락받은
11대 번주 요시카쓰(義功, 이사자부로猪三郎 요시카쓰)와
덴메이(天明) 5년(1785년) 12대 번주 요시카쓰(義功, 富寿)는
동명이인인데, 이는 11대 번주 이사자부로 요시카쓰가 쇼군을
알현하러 가기 전에 급서해 동생이 대신 번을 이어받게 된 때문.
에도 말기에는 목면 조선인삼의 일본화가 실현되고
조선과 교역 비중도 줄어 쓰시마 도민들의 생활은 곤궁.
극도의 재정 곤란읕 겪게 된 쓰시마 번은 막부에 호소해
조선통신사 접대비용, 무역 부진에 대한 지원금 대출요청
나아가 동아시아 바다에
이양선(구로후네)이라 불리는
유럽 선박들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쓰시마 방호의 필요성을 절감한 막부는
안세이(安政) 5년(1858년) 쓰시마가 담당한
조선 무역을 막부 직할로 돌리고 소 씨를
가와치 국(河内国) 10만 석으로 전봉시킬 계획.
그러나, 소 씨는 중세 이래 쓰시마의 영주를 맡아왔고
가신 대부분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음을 들어
막부에 호소해 소 씨에 대한 전봉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만엔(万延) 2년(1861년)에 제정 러시아 군함 포사드니크 호가
아소 만(浅茅湾)에 정박하고, 이에 맞서 영국 군함도 측량 명목으로
똑같이 후쿠자키(吹崎)에 정박해 해당 지역을 일시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
포사드니크 호는 이모자키(芋崎)를 점거하고
막사와 공장, 연병장 등을 건설해 반년간 이곳에 머무르며
제15대 번주 소 요시카즈(宗義和)에게 토지 대여를 요청했다.
5월에는 막부의 외국봉행(外国奉行) 오구리 다다마사(小栗忠順)가
쓰시마로 파견되었고 7월에 영국 공사 월콕의 간섭에 따라 포사드니크 호는
쓰시마에서 물러나야 했다. 일본 역사에서는 이를 "쓰시마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이모자키에는 현재 러시아인이 팠던 우물이 있다
1869년(메이지 2년), 번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가
판적(版籍)을 봉환함으로써 신번제(新藩制)에 따라
厳原藩으로 개칭, 이즈하라 번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이와 함께 "쓰시마 후추" 지명도 「이즈하라」로 바뀐다.
1871년(메이지 4년) 7월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이즈하라 번은 이즈하라 현(厳原県)이 되었다가,
9월에 이마리 현(伊万里県)에 편입되었다.
1872년(메이지 5년) 이마리 현이 사가 현(佐賀県)으로 개칭.
1876년(메이지 9년) 4월에 미즈마 현(三潴県)에 합병되면서
8월에는 나가사키 현(長崎県)의 관할에 놓이게 되었다.
소 씨 집안의 당주 요시아키라는 1884년(메이지 17년),
메이지 신정부로부터 백작(伯爵) 작위를 수여받았다.
기존의 작위 수여 기준에 따르면 소 씨의 고쿠다카는
자작(子爵)에 해당했지만, 쓰시마 소 씨 집안이 과거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었다
쓰시마 번의 번청은 당초 가네이시 성(金石城)에 있었고,
훗날 사지키하라 성(桟原城)에 있었다. 번주는 소 씨(宗氏)로써
초대 번주가 된 요시토시 이래로 위계는 종4위하가 주어졌고,
관직은 주로 쓰시마노카미 ・ 시종을 칭했다.
쓰시마 행정구역은 번주가 거주하는
성 아래의 후추(府中, 이즈하라) 안에
도요사키(豊崎), 사고(佐護), 이나(伊奈),
미네(三根), 요라(仁位), 니이(与良), 사쓰(佐須),
쓰쓰(豆酘)의 8개 사토(郷)로 나뉘어
사토마다 봉역(奉役)이 있었고,
그 아래에 무라(村)를 거느렸으며
무라마다 토착 규닌(給人) 출신의 가신
가운데서 게치야쿠(下知役)를 임명했다.
또한 무라마다 각 사토의
아시가루(足軽)로부터 발탁된
기모이리(肝煎), 겟판(血判) 등의
무라야쿠닌(村役人)도 있었다.
조선과의 관계에서는 번주의 교체 또는
번주의 에도 산킨을 마치고 귀국했을 시
쓰시마측에서 참판사(參判使)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알리고 사신을 청했는데, 쓰시마측 사신단의
정사(正使)를 참판사, 부사(副使)를 도선주(都船主)
라고 부르고 여기에 봉진(奉進)이라는 지위를 더해
조선측의 정사 · 부사 · 종사관과 같은
삼사(三使) 체계를 갖추었다.
쓰시마 측의 참판사에 대응해
조선측에서 쓰시마로 보내는 사신은
역관사(譯官使)라고 하여, 임무는 쓰시마 번주의
안부를 묻는 일 외에도 조선과 쓰시마 사이 외교문제 교섭
왜학역관을 각각 정사, 부사로 하여 쓰시마 후추 번까지 왔다.
조선측 역관사를 맞이하고 겸해
대조선 무역 업무의 최고책임을 맡은 자는
사이반(裁判)이라 불렀으며, 조선 왜관의 관수(館守)와는 달리
왜관에 상주 않고 쓰시마와 조선을 오가며 외교문제 절충 및 조정을 맡았다.
사이반의 주요 임무는 1) 통신사 및 역관사의 맞이
2) 공작미(公作米) 교섭으로, 1년(또는 2년)을 임기로 교체,
교체시에는 왜관 관수 뿐 아니라 쓰시마 도주의 서계(書契)도
함께 조선의 예조(禮曹)로 보내게 되어 있었다.
쓰시마 후추 번의 현지 지배는
근세 일본의 여러 번 가운데서도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병농분리는
다소 명확하지 않으나 많은 지방 큐닌(給人)이 있었고
큐닌 아래에 묘지(名子) ・ 히칸(被官)이 있어서
많은 부분에서 중세적 성격이 온존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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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부산 초량왜관
'부산에서 70분 소요거리' 히다카츠 항
'히다카츠항~미우다 해변' 버스
'히다카츠항~미우다 해변' 버스 창밖 풍경
미우다 해변
미우다 해수욕장
대마도(對馬島 : 쓰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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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해협에 위치한 '5개의 바위섬'으로 구성된 대마도
가미아가타[上縣], 시모아가타[下縣]가 가장 큰 섬이다.
주요도시는 행정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와 게치[鷄知].
일본 신화에 따르면 창조 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열도는 역사상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이 열도는
다이묘[大名] 소씨[宗氏]의 봉토였다.
1274, 1281년 2차에 걸쳐
'여몽연합군'이 일본 침공 때
섬 주민들이 대량 학살 당했다.
1861년 러시아는 대마도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갔으며,
1905년 쓰시마 해전 때 러시아 발틱 함대 참패.
쓰시마 시는 행정구역상 나가사키 현에 속해 있지만,
나가사키 시보다 거리상 후쿠오카 현이 더 가까우므로
경제·문화적으로는 후쿠오카 현과 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쓰시마 시의 주요 산업은 어업으로 오징어가 많이 잡힌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 환경 및 한국, 일본 양국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관광업 또한 활발하다. 섬 면적 80%이 산림.
임업도 이루어지고 있고
표고버섯이 많이 생산된다.
부산여객터미널 ~ 70분 ~히타카츠항~ 2시간~이즈하라항.
한국인 관광객은 주로 부산,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에서 방문.
아유도모시 자연공원, 아오시오노사토, 미우다 해변 캠핑장 등.
엔화 환율이 약세를 보일 때는 일본의 식음료 및
생필품을 사기 위해 쓰시마를 찾는 관광객도 많다.
쓰시마 공항은 1975년, 구 미쓰시마 정(美津島町)의
백련강산(白蓮江山)의 산정상을 깎아 내어 건설되었다.
전일본공수 후쿠오카/ 오리엔탈 에어 브릿지는 나가사키
쓰시마 공항식당 야마네코
대마도 이즈하라 시.,조선통신사 비
대마도는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유적지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조선 통신사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1429년 세종 때였다.
왜구가 조선에 출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통제를
요청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역할과 바쿠후 쇼군(나랏일을 맡고 있던 장군)이
즉위할 때 조선의 축하 사절로서의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과 역시 동인
허성을 서장관으로,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
1590년 3월 6일 출발하였는데 일본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서를 제출.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 고 하여 조정은 그의 의견을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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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나,
도요토미를 대신하여 들어선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쓰시마 번을 통해 국교 재개를 요청해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 포로쇄환을 위해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1607년(선조 40년)에 강화.
그에 따라 1607년부터 1624년까지 3회에 걸쳐
사명당 유정을 비롯한 사절을 회답 겸 쇄환사
(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 임무는 일본과 강화와 그 조건이행의 확인,
일본내정 탐색, 조선인 포로 및 유민 송환 등이었다.
그뒤 조·일 국교는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
4~500명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데 1,400척 배와
1만여 명 인원이 일본 측에서 동원되고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하였다.
1607년부터 부활, 11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1811년까지 13번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가 한 번 올 때
움직이는 인원이 약 300-500명 정도였고
대마도 번에서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들인 비용이 그 당시 돈으로 100만냥 정도였다.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맞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유산으로는 당인의 춤(唐人誦),
조선 가마, 필담창화(筆談唱和)의 시문(詩文)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일본으로부터 고구마, 고추, 토마토, 구리,
접부채, 양산, 벼루, 미농지(美濃紙) 등이 조선에 전래.
통신사는 국왕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啓)를 휴대하고,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등 예물을 가지고 갔다.
일본 전 국민축제 분위기 속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고,
향응을 베풀었으며, 통신사의 숙소에서 수행원으로부터
글, 글씨를 받기 위해 몰려든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본의 화가들은 다투어 통신사 일행의 활동을
대형 병풍, 판화, 두루마리 그림 등으로 그렸는데
그당시 수많은 작품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통신사 선물들이 지금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적지 않다.
통신사가 한 번 다녀오면 일본 내에 조선 붐이 일고,
일본 유행이 바뀔 만큼 일본문화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대마도(쓰시마 섬)...........................
규슈본토 사가 현 가라쓰 시 하도 곶에서 북서쪽으로 82km
남동쪽 이키 섬까지 47.5km, 한반도와의 거리는 약 49.5km.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8km. 섬 넓이 약 700km².
인구는 2010년 기준으로 34,610명
농경지는 3.4%이며, 대부분이 산지.
관광업이 번성하였고,
대한민국 이외에,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등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해협의 중간과 동해 남쪽에 놓여 있다.
부산에서 남동쪽으로 49.5km 떨어져 있으며,
나가사키 현 이키 섬에서 북서쪽으로 47.5km,
후쿠오카 시에서 북서쪽으로 138km 떨어진 곳.
쓰시마 섬은 미쓰시마 섬 우니 섬 등 포함.
시역 전체가 산이 많아 평지는 거의 없다.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여 총 길이는 915km.
6정이 통합한 도시라 시가지가 분산되어 있으며,
번화가는 남동부 이즈하라 지구(구 이즈하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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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필리(姜必履, 1713년 ~1767년)는 조선 문신.
영조 때 승지·대사헌을 지냈으며 그후 동래부사.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동래에 보급
이즈하라 항
오션 플라워 호 1박2일
"Japanese invaders"
'일본인 왜적' 왜구(倭寇)
13세기∼16세기에
우리 나라와 중국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일본인 해적의 총칭.
왜구(倭寇)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심했고,
고려 말 40년간 피해가 커서 고려멸망의 요인.
왜적 침입은 삼국시대에도 빈번 그 피해도 컸다.
왜구는 ‘왜가 도둑질한다’는 뜻이지만,
고려말 이래 그들의 약탈 행위가 잦아지면서
왜인들의 해적 행위를 표현하는 명사가 되었다.
왜구는 남북조 혼란기의 남조 세력권에 있던
규슈〔九州〕일대의 일본인들로서, 주요 근거지는
쓰시마(對馬)· 마쓰우라(松浦)·이키(壹岐) 등 지역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 중에는 왜구가 일본인과
고려인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시대 왜구....................
고려 말 조선 초에 한반도와 중국 연해에서
노략질을 행한 일본인을 총칭(總稱)하는 말.
고려사에 왜구(倭寇) · 왜적(倭賊) · 왜노(倭奴) ·
해적(海賊) · 해도(海盜) · 적(賊) · 구(寇) · 적선(賊船)
작구(作寇)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대개 바다를 통해
구적(寇賊) 행위를 행하는 무리를 의미한다.
왜구의 침입은 삼국시대에도 간헐적으로 발생,
1350년(충정왕 20) 이후 규모와 침구 빈도수 급증.
당시 일본은 남북조(南北朝) 쟁란기를 겪으며
정권이 양분되고 중앙의 통치권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한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구주(北九州) 일대의 섬들과 연안 지역에 거주한
영세 농어민과 경제적으로 몰락한 하급 무사 등은
사회적 혼란기에 해적이 되어 한반도 연안에 출몰.
공민왕 우왕대 발생한 왜구 규모가 수천을 상회
선단(船團)을 이루어 활동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은 소규모 해적이라기보다 조직화된 군단으로
배후에는 북구주 일대 유력한 토호(土豪)가 있었다.
왜구 약탈 대상은 조세를 운송하는 조선(漕船).
양곡을 저장한 조창(漕倉)이 주요공격 목표였다.
또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양민을 포로로 잡아갔다.
왜구의 활동 지역은 연해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내륙 지역까지 확대 개경 인근 지역인 강화의 교동과
예성강 어구 지역까지 왜구가 출몰하자 천도설(遷都說).
왜구 침입을 근절하기 위해 고려 조정은
수차례 외교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또한
군사 수단을 통해 적극적으로 왜구의 침입에 대응.
진수군(鎭戍軍)이 증설되면서 연해지역에 수(戍)가 설치되었고
읍성 축조, 능동적인 해방(海防)을 위해 공민왕 말년에 전함 건조.
선군(船軍)을 재건, 화약, 화기가 개발되면서 군사력이 증대되었다.
그 결과, 1376년(우왕 2) 최영의 홍산 전투,
1380년(우왕 6) 나세의 진포 전투, 이성계의 황산 전투,
1383년(우왕 9) 정지의 남해 전투로 왜구토벌을 본격화해 큰 승리.
1389년(창왕 1)에 박위가 병선 100척으로 대마도 정벌.
1419년(세종 1)에 이종무가 다시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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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엽 이후 왜구가 크게 세력을 키워 한반도는 물론
중국 연해안까지 침략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와
이와 관련된 일본 남북조 국내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14세기 중엽에 들어 원이 쇠퇴하게 되자,
원의 일본침입 이후 전제화되어 있던 일본은
남북조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남조 세력권
일부 지방세력들이 해적화, 한반도와 중국 연해 침략.
일본 사회 내부의 모순이
국내에서 통제되지 못하고
국외로 공격성을 띠게 된 것.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일본에서 해적이 크게
발생한 원인 중 하나는
동아시아 정세변화와 관련.
중국 대륙에서는 몽골족의 원이 쇠퇴하고
1367년에 한족왕조인 명이 건국하였으나,
북원과 패권경쟁으로 왜구에 신경을 못 썼다.
고려는 원 간섭기에 간섭과 감시로
자체의 군사력을 갖추기가 어려워서
고려 조정의 국방은 약화되어 있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개혁으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지만,
약화된 군사력을 속히 회복할 수 없었고 여기에 더하여 다시
고려에 압력을 가하려는 북원과 중국대륙의 신흥국인 명과의
외교관계 긴장으로 왜구 침입에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고려 때의 기록에서 왜구는 두 시기에 발생하였다.
1223년(고종 10)에 왜구가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에
침입 기록이 첫 번째 침입이며 이때는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가 몽골과 전쟁을 수행하던 기간이었다.
몽골이 일본을 침공하기 전인 1265년까지
왜구는 11회 고려를 침입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13세기 왜구’라고도 한다.
몽골의 2회에 걸친 일본 침공
이후 14세기 중엽까지 80여년
동안 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려시대 왜구가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충정왕 20)부터였고 이를 ‘후기 왜구’라는데,
동해· 서해· 남해의 연안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침범.
수도 개경 입구 강화의 교동과 예성강 어구에까지 출몰
개경의 치안을 위협하기도 하였으며, 고려는 왜구 때문에
천도를 고려했고 우왕 때는 재위 14년간 378회 침입을 받았다.
왜구의 규모, 빈도, 침입지역과 침입양식
등에 있어서 ‘13세기 왜구’와 차이가 크다.
또한 고려,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연해 지방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침략하여 명대를 통해 크게 문제
왜구는 1370년대∼1380년대
10여년 간 가장 치열하게 발생.
1223년 첫 침략 이래 해마다 왜구가 이어지자
고려는 1227년(고종 14) 박인(朴寅)을 일본에 파견
왜구의 금지를 일본에 공식 요구했는데 이때의 왜구는
여몽연합군의 2차례 일본을 공격한 이후에는 사라졌다.
1350년 이후 ‘후기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여 피해가 심해지자,
1366년(공민왕 15) 검교중랑장(檢校中郎將) 김일(金逸)을 아시카가막부
足利幕府의 쇼군에게 보내어 왜구 금지 요구, 근절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1375년(우왕 1)에는 판전객시사 나흥유(羅興儒)를,
1377년에는 전 대사성 정몽주(鄭夢周)를 파견하였다.
정몽주는 규슈단타이(九州探題)·이마카와 료순(今川了俊)
협조를 받아서 잡혀갔던 고려인 수백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한편, 왜구 소탕전을 보면 1376년 최영(崔瑩)이
홍산(충청남도 논산)에서 대승을 거둔 홍산대첩,
1380년 왜선 5백여 척이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나세· 최무선 등이 화포로 모두 불살랐던 진포싸움,
이 때 상륙한 왜구가 내륙 각지를 노략하고 황산에
이르렀을 때 이성계 등이 이를 물리쳤던.,'황산대첩'.
1383년(우왕 9) 정지(鄭地)의
남해대첩 등이 대표적인 사례.
특히 왜구를 격퇴하는데 공이 컸던 인물은 최무선.
그는 화약·화포·화전(火箭) 등의 화기를 만들어
진포 싸움과 남해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밖에도 성을 쌓고 방어 초소를
더 설치했으며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양반·백성·재인(才人)·화척(禾尺) 등으로 군인을 삼고,
공·사노(公私奴)로 연호군(煙戶軍)을 삼아 왜구에 대비.
한편, 회유책을 써서 경상도·전라도에 왜인만호부를 설치.
이때 투화 왜인들을 국내에 거주하게 하여
백성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들 중에서 일부는
본래 거주하던 일본으로 돌아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군사력을 강화하는 조치도 취하였다.
특히 해군력 강를 위해 1377년 전함 생산.
1380년 최영을 해도도통사로 임명해 적극 대처.
또, 해변 인민을 모집해 3정(丁)을 1호(戶)로 삼아
수군을 편성하고, 연해의 토지는 조세를 면제해
수군의 처와 자식을 부양하는 데 쓰도록 하였다.
왜구는 일본에서 유래한 해적이
일방적으로 고려와 명을 침략한 것이지만,
고려(조선)와 명 외교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명은 고려에게 왜구를 엄금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혹시라도 고려(조선)이 일본과 동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으로 군사적 위협도 하였다. 고려와 조선은
명의 의심과 협박을 잠재우려 왜구를 정벌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도 주변국인 고려(조선)와
명의 의심을 잠재우고, 남북조의 혼란기에
일본을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받을 필요성에서
왜구 문제가 해결될 필요성이 있었다.
고려말인 1389년(창왕 1)과
조선초인 1418년(세종 즉위년)에
단행된 쓰시마 정벌은 동아시아 3국의
이해가 맞아 이루어진 군사적 행동이었다.
왜구를 토벌하는데 고려에 협조한 측은
북조인 막부-쇼군측이었는데, 이들은
왜구 토벌에 협조함으로써 국외적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국왕’의 호칭을 받을 수
있었으며 남조에 대하여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다.
고려말의 첫 쓰시마 정벌은 1389년 2월에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인 박위(朴葳)를 파견
병선 1백척을 이끌고 공격 이때 적선 3백여 척을
불사르고 잡혀갔던 고려인 1백여 명을 데리고 왔다.
이 첫번째 정벌은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고려는 이 정벌로 왜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왜구는
고려 말과 같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어 '1393년(태조 2)~
1397년까지 무려' 53회나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나라의 근심이
왜구 만한 것이 없다(國家所患莫甚於倭)”라고 할 정도로
왜구의 피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왜구를 금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고, 조선 쪽으로 귀화해오는 향화왜인(向化倭人)과
평화적인 사절의 내왕을 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소탕과 변경 방어.
이러한 대외정책으로 조선 초에는
평화적 사절의 왕래와 향화왜인들이 증가
이들 중 부족한 물자를 교역하기 위해 오는 자들을
특별히 흥리왜인(興利倭人: 商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태종 때에는 부산포(富山浦)·내이포(乃而浦: 薺浦)·염포(鹽浦)·
가배량(加背梁)의 4포를 개항해 이들의 왕래를 허락하였다.
조선초에도 왜구가 계속되자 토벌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1396년 왜구가 120척으로 경상도 동래·기장 등지에 침입하자,
김사형(金士衡) 등을 시켜 쓰시마와 이키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쓰시마에서는 매년 사절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미두를 받아가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왜구가 계속되자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다시 쓰시마를 정벌하고, 규슈 등 일본의 다른
지방과는 계속 통교하였다. 또한 조선도 대마도를 영구히 점령할 의사가
없었고, 이들의 왕래를 엄금하면 왜구재발 위험이 있어 다시 통교를 허락.
세종은 삼포(三浦: 富山浦·乃而浦·鹽浦)를 개항하고
여기에 왜관을 설치하여 무역을 허용하는 회유책을 병용.
그 뒤에도 삼포왜란을 비롯해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달량왜변
(達梁倭變) 등이 있었으나, 조선의 회유정책은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
고려말 조선초 왜구는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연해안 지역은 빈번한 왜구로 피해를 많이 입어서
‘연해안 수십리에는 인가가 전혀 없다’고 할만큼 황폐화.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 개경의 계엄령에 따른
민심의 동요, 천도론의 대두로 인한 조정 상하의
불안감, 민가의 약탈 등은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피해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국고 수입의 원천인 조세를 운반하고 보관하던
조운선과 조창의 약탈로 국가 재정은 파탄의 지경.
이에 조세를 내륙으로 운반하려는
육지 운송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고,
국가재정 수입은 날로 줄어들어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거나 군량미의 부족까지
초래하는 등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
....................
오늘날, 쓰시마해협은 대마도에서 유래된 이름.
러시아, 중국 등 유사시 태평양 남진정책을 봉쇄.
대마도는 세계 평화를 위한 전략적 전술적 요충지.
쓰시마 공항
이즈하라 항
쓰시마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672년 21대 당주이자
쓰시마 후추 번 3대 번주인 소 요시자네(宗義眞)때 작은 배가
'아소만~대마도 동부' 왕래 운하를 만들어 2개 섬으로 나뉘었다.
1900년 일본 제국 해군이 러일 전쟁을 준비과정에서
아소만(浅茅湾)에 있는 군함을 쓰시마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만제키세토 대운하를 만들었다.
만제키세토는 쓰시마 섬을 위 아래로 나누는 경계,
쓰시마 북부.,가미시마(上島), 남부 시모시마(下島).
...............쓰시마 해전(Battle of Tsushima)...................
대마해전(對馬海戰)은 러일전쟁 때 주요해전(1905. 5. 27~29).
러시아 해군이 뤼순 항[旅順港]과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 발진함에 따라
일본측은 해상 주도권을 완전장악이 어려워 교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가운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정부는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지휘하는
발틱 함대를 극동지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여름 내내 준비작업을 해던 러시아 발틱 함대는
마침내, 1904년 10월 15일에 리에파야를 출항했다.
그런데 10월 21일 발틱 함대가 영국 북해의 도거 뱅크 연안에서
영국 저인망 어선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하여 발포한 사건이 발생.
이 사건으로 영국이 항의하자 러시아측은 신속하게 사과하고 보상 약속.
사태를 무마했는데 마다가스카르 노시베에서
일본군이 뤼순 항을 함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러시아로의 회항을 계획.
그러나
1905년 3월초 발트 해로부터 파견된 해군 증원부대와
합류할 것을 기대하면서 계속 항진해나가기로 결정했다.
수에즈 운하를 경유해온 이 증원부대는 뒤에
베트남의 캄란 만에서 로제스트벤스키 함대와 합류.
전력이 보강된 로제스트벤스키 함대는 가공할 함대지만,
그외 나머지 선박 가운데 다수는 낡고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5월초 러시아 해군의 이 함대는 중국해에 진입했으며,
쓰시마 해협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입항하기로 했다.
이때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이끄는 일본 함대는
부산항 인근 해안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5월 27일 발틱 함대가 나타나자 공격을 가했다. 일본의 전함들은
기동력과 장비면에서 러시아의 전함들을 압도했다.
2일간 전투에서 러시아 함대 2/3가 침몰하고 6척이 나포되었으며,
6척은 중립지역의 항구로 대피해 4척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
러시아측에게 이 해전은 극적이고 결정적인 패배였다.
7개월간 항해로 목적지 수백 ㎞ 앞둔 곳에서 발틱 함대 섬멸.
이로서 해상 주도권을 회복하겠다는 러시아의 희망은 좌절되었다.
........................................................................................
1905년 러일 전쟁 중 쓰시마 섬 부근 바다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트 함대 사이에 해전.
일본 해군이 승리했고, 러시아 발트해 함대는 전멸.
일본은 일본해 해전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동해 해전이라 부른다.
이후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포츠머스 조약...................................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 뉴햄프셔 주
에 있는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일 간에 맺은 강화조약.
1904년 2월 러일전쟁은 만주와 한국에 대한
일어난 제국주의 전쟁이었는데, 1905년 1월 뤼순항
[旅順港]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자 열강들의 조정·강화
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결국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 중재.
미국 뉴햄프셔 주의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8월부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열린 강화회의.
강화회담은 일본측이 제시한 12개 조항을 토대로 진행되어,
9월 5일 전권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와 러시아의
재무장관 사이에 전문 15조, 추가조약 2개조 강화조약 조인.
② 뤼순·다롄[大連]의 조차권 승인,
창춘[長春] 이남의 철도부설권 할양,
③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북위 50˚ 이남의 남사할린 섬 할양,
④ 동해, 오호츠크 해, 베링 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 등.
이 조약으로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패전국 러시아도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지배가
국제적으로 확인되어 한국은 일제식민지의 길로 들어섰다.
...............................................................................
1905년 9월 11일, 부산(釜山)~시모노세키(下關, 하관)
왕복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일기환(壹岐丸)’ 첫 취항.
.
일본 산요철도(주)가 일본철도와 경부선을 연결할 목적으로
취항한 일기환은 여객 정원 317명, 항해시간 11시간 30분이었고
이를 통해 '동경-서울' 간 60시간에 주파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1등 선실(운임 12원) 맨 위층에는 담화실, 레스토랑 등.
2등실은 그 밑층 다다미 큰방, 3등실(3원50전)은 맨 아래층,
돗자리 깔린 선반이 층층이 달려있는 형태여서.,"누에 치는 곳."
1등 선실은 일류호텔을 방불케 했고
3등 선실은 매우 열악한 조건이었다.
1천680톤급 일기환은 처음 격일운항을 하다가 같은 해
11월부터는 자매선인 대마환(對馬丸)을 추가해 매일 취항.
1906년 12월 야간운항으로 바꾸고, 주간항해는 격일로 했다.
그러다가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 12월 주간항해로
변경해 매일 주야로 부산과 시모노세키에서 출항했다.
취항 초기에는 하루 평균 승객 150여 명, 화물은 약 70톤.
1922년부터는 승객 1천600명, 화물은 약 600톤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승객과 화물이 크게 증가하자 1931년 3천 톤 급의
고려환(高麗丸)와 신라환(新羅丸)을 새로 건조해 취항시켰다.
이용자가 많을 때는 용선.
1932년 3천600톤 급 덕수환(德壽丸)과
경복환(慶福丸)을, 이듬해 창경환(昌慶丸) 추가.
4월 1일 경복환, 창경환, 덕수환을 여객 전용선으로 바꾸면서
부산∼시모노세키의 운항시간이 11시간에서 8시간으로 짧아졌다.
구선인 신라환과 고려환은 여객화물 혼용선으로 바꾸고,
최초 부관연락선 일기환과 대마환은 부관 항로에서 퇴역.
1936년 말 새로 건조한 7천 톤 급 금강환(金剛丸)을,
1937년 초에는 7천 톤 급 흥안환(興安丸)을 각각 취항.
이로써 7천 톤 급 2척과 3천600톤 급 3척 등 5척이
'시모노세키~부산' 주야 2회씩 출발, 하루 4회 운항.
1936년 일본의 침공으로 일어난 중일전쟁 때문에
관부항로의 수송량이 폭증하여 1942년 7천900톤 급의
천산환(天山丸), 1943년 9천700톤 급의 곤륜환(崑崙丸)을
새로 만들어 부관항로에 취항시켰다. 부관연락선은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정책에 힘입어 발전했다. 1943년 최대
호황기를 누리다가 일본 세력이 약해지며 항로도 종말을 맞이했다.
'1905.9.11 ~1931.5.11'
26년간 운행한.,연락선.
...................대한해협(大韓海峽)..........................
한반도 남동부와 일본 열도의 규슈 사이.,Korea Strait ,
영해 범위는 1978년부터 해안으로부터 12해리 거리 적용.
대한해협은 쓰시마 섬이 있어 가장 바깥쪽 섬에서 3해리까지.
.
삼국시대 이래 한·일 간의 교통로로 이용되어왔으며,
일제강점기 일본이 군사목적으로 해저터널 건설계획.
제2차 세계대전 후 맥아더 라인과 평화선이 설정되면서,
1965년 한일 어업협정 체결로 전관수역과 공동수역 설정.
해협 양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이 지형을 이용해
한국의 남해안에서는 김·어패류의 양식이 행해진다.
또한 난대성 어류가 풍부한 남해어장 일부를 이룬다.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 간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페리호 운항.
.............................................
'러일전쟁 격전지',만제키바시.,관광지
와타미즈 신사
와타즈미 신사.
대마해전 격전지
대마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 영토로
부산항여객터미널에서 배로 70분(히타카츠항)에서
2시간(이즈하라항)이면 도착하는 거리에 위치해있다.
미우다해수욕장은 와니우라에 위치해 있는데,
일본 100대 해수욕장으로 맑은 바닷물과 절경.
이즈하라에는 티아라몰이라는 쇼핑몰이 있다.
1층 대형마트에는 카레, 라면 등 한국 식료품들.
바로 옆에 위치한 '미도리 드러그스토어'에서는
한국 파스, 소화제 등을 면세 쇼핑으로 살 수 있다.
...........쓰시마(
'한반도와 규슈 사이' 대한해협 중간지점 일본 섬
삼국시대 초에는 쓰시마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고려에 조공하고 쌀 등 답례를 받아갔다.
6세기전반 아스카 시대에는 쓰시마 국주(對馬島主)가
일본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여 이런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 시에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의 소굴이 되자,
1389년(고려 창왕 2년) 박위가 쓰시마 토벌.
본래 쓰시마는 아비루 가문이 지배했으나,
12세기 고레무네노 시게히사(惟宗重尙)가
아비루 가문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한 이후,
시게히사의 후손인 소 가문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뒤로도 고려와 조선으로부터 관작을 받았다.
쇼군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는 등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외교창구로 중요한 역할.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때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
조선은 왜구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통상편의도 봐주고
조선 왕은 귀화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을 근거지로 한 왜구 행패가 여전하자
1419년 음력 6월 조선의 세종이 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군사 1만 7285명을 동원해 대마도 원정 등 강경책을 썼다.
그러나 쓰시마 국주의 간청으로
왜인의 통상을 위하여 3포를 개항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또한 조선의 국왕이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려 조선 영향력 아래 두었다.
그 후에도 조선에 근접한 왜구의 근거지로서,
이것을 무마하려는 한국의 해방정책(海防政策)
대마도는 조선으로부터 특수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후에도 조선은 쓰시마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
임진왜란 때 일본수군 근거지가 되며 차츰 영향력 약화.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쓰시마 후추 번(對馬府中藩) 설치.
쓰시마 국주 소(宗) 가문이
일본의 쇼군(將軍)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 받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인하여
쓰시마에 이즈하라 현(嚴原縣)이 설치되었다.
1876년 나가사키 현에 편입되며,
소 가문은 화족으로 편입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는
일본제국 강요로 소백작가와 정략결혼.
쓰시마(대마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672년 21대 당주 '쓰시마 후추 번 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때 작은 배가 아소만과
대마도 동부를 왕래할 수 있도록 오후나고시
大船越 운하를 만들어 두 개의 섬으로 나뉘었다.
1900년 일본 제국 해군이 러일 전쟁 준비과정에서
아소만(浅茅湾)에 있는 군함을 쓰시마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만제키세토 대운하를 만들었다.
만제키세토는 쓰시마 섬을 위 아래로 나누는 경계로,
쓰시마 북부는 "가미시마(上島)" 남부 "시모시마(下島)".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으며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 발표.
또한 1949년 1월 7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을 작성할때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
2013년 3월 22일에는 의정부시의회가
대마도 반환을 촉구하는 한편 대한민국
정부차원의 반환 촉구를 요청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의 한 언론에서 "한국이 쓰시마를 넘본다"
라는 기사를 써서 영토분쟁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산케이 신문은 "쓰시마가 위험하다" 쓰시마 위기론 기사화.
2008년 일본 정부가 중학 교과서에
독도 관련한 자국 영토 주장을 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한
쓰시마 섬의 영유권 주장을 언급했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 최고위원 허태열은
2008년 7월 16일 한나라당 지도부 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 영유권 주장 예와 B형간염유전자
유사성을 예로 들며 쓰시마 섬의 영유권 주장을 역설.
.
2010년 9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야 37명 의원들은 대마도 포럼 창립.
허태열 한나라당 의원은 이날 포럼 창립식에서
"대마도는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으로 우리 영토"
"대마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초대 제헌국회에서의
영유권 주장과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의 반환 요구
이후로 사실상 전무한 상태로 현재까지 이르러왔다" 지적.
여야 의원들은 일본이 불법으로 강점하고 있는
대마도를 조속히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실제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한국에 가깝고
대마도 주민의 혈통조사에서도 한국 혈통과
일치한다며 대마도 영유권 주장의 활성화에
이바지하겠다는 내용을 설립 목적에 밝혔다.
포럼 소속 의원들은 향후 활동과 관련,
매년 상반기(3월)와 하반기(11월)로 나눠
정책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결의안
채택과 국민운동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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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는 옛기록에 적지 않게 보인다.
조선 태종때 여변갑 이라는 사람이 쓴.,'정대마도교서.'
조선 세종때 변계량 이라는 사람이 쓴.,'유대마주서' 기록.
대마도는 본디 우리 땅이었음을 밝혀 놓고 있으며,
성종때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인데
언제 어떻게 왜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전(고려 원종 16년) 여-몽연합군.
"33,000명은 전함900여척으로 일본을 칠 때 먼저 대마도와
일기도 등을 쳐서 무찔렀다." 하니, 이때 왜인이 점유한 흔적.
지금으로부터 1100년전 신라 상인의 기록과
1400년전 백제의 비구니 법명이 대마도에.,'오음.'
그당시 불경을 전했다는 당시의 흔적을 더듬어 보면,
이 시기부터 왜인들이 우리 겨레와 섞여 살기 시작한듯.
대마도 원주민이었던 우리겨례가 지어 부른 지명은.,'두셤.'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증거는
영국 '에딘바라 지리학 연구소' 세계지도.
프랑스 ′라루스′ <세계정치경제지도 :1950년도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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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3세기 '위지' 왜인전의 기록처럼
산세가 험하여 깊은 숲이 많았고, 길은 거의 없어
새나 사슴이 겨우 다닐 정도라 전답이 드문 자연환경.
2015년 현재 인구., 약 3만 7천명 정도.
대마도는 우리나라 남단에서 약 53km 떨어진 위치,
일본 큐슈 본도에서 제일 가까운 나고야에서 147km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더 가까운 해상에 떠 있는 섬.
남북 72km,동서 16km, 면적 714km2
섬이라기 보다는 바다에 떠 있는.,산.
백악(518.2m),원견산(375.5m),홍엽산(328.6m) 등
높은 산들은 남쪽에 있고 전 섬이 무수한 산의 연속
그래서, 산과 계곡 일부 해안 지대에서만 농사가 가능.
그러므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자연환경
어떻게 삶을 꾸려갈 것인지가 대마도의 생존 역사.
조선 왕조의 비극을 떠오르게 하는 대마도.
1919년 10세 옹주는 대마 도주 아들과 결혼했다.
강제 정략결혼으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걸린 옹주.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는 낙선재에서 운명.
일제 강점기에는 창경궁의 후원이었던.,비원.
그곳 별궁이 일제 때, 조선왕실의 거처., 낙선재.
조선왕실 해체 후, 창경궁에서 낙선재로 쫓겨난 것.
1904년 '비원'으로 불리우며
낙선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황제에서 이왕으로 된 순종은
1926년 43세에 낙선재에서 운명.
순정효황후는 그후 43년간 홀로 비운을 달랜 낙선재
1910년 한일합방 때 옥새를 치마 속에 감췄던 비운의 왕비.
숙부 윤덕영에게 옥쇄를 뺏긴 울분을 삼켜야 했던.,순정효황후.
순종의 후계자 영친왕 이은도 1963년 귀국때 실어증에 기억 상실.
귀국 후, 7년 간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5월 1일 낙선재에서 운명.
1920년에는 일본의 4대 귀족의 명문가문19세 규수(개명 : 이방자)와 결혼.
낙선재는 조선왕실 최후의 왕손들이
기구한 운명을 마감해야했던 무대였다.
'조선은 어찌하다가 국권을 뺏앗긴 것일까?'
일본이 대륙 진출 발판으로 삼았던 대마도.
일본의 경제적인 지원으로 일본 영역이 된 섬.
미국이 극동 진출을 위하여 일본을 교두보 삼았듯.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삼국시대부터 요충지이자
전술 전략적인 요충지..대마도.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서 징검다리 외교술.
임진왜란 후 친일본 정책으로 돌아선 대마도.
지금은 일본 영역이 된.,옛 우리 영토인 대마도.
"우리나라 지형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 발로 삼는다"
- 영조 때 <해동지도(海東地圖> 기록-
대마도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부터 우리나라 땅,
'고려~조선' 왜구 정벌 이후부터 구한말까지 영토인식.
조선시대 역사 상에서 대마도에 관한 이런 기록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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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한국을 가르는 대한해협에 있는 열도.
현재, 일본 나가사키 현에 속한 5개의 바위섬
가미아가타[上縣]와 시모아가타[下縣]가 큰 섬.
행정 중심지는 이즈하라[嚴原]와 게치[鷄知]
일본 신화에 따르면 신들이 만든 최초의 섬 중 하나
대마도는 역사 상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서 중계지 역할.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다이묘(大名) 소씨(宗氏) 봉토였다.
1274, 1281년 몽골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주민들 대량 학살.
1861년 이 지역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다 실패로 끝난 러시아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전
러시아 발틱 함대는 이곳에서 참패.
총면적 705㎢, 인구 50,810(1980).
조선시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정벌.
대마도 원정은 고려 창왕 때와 조선 태조 때
1419년(세종 1) 6월에는 이종무(李從茂)의 정벌 등.
대마도는 토지가 좁고 척박하여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 콩 곡물 생필품을 받아갔다.
조선은 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통상 편의를 제공.
그러나, 기근이 들면 해적이 되어 해안을 약탈
조선시대에는 몇차례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다.
1418년(태종 18) 대마도에 흉년이 들자
왜구들은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명나라행.
도중에 조선의 비인(庇仁)·해주(海州)를 침입.
당시 대마도에서는 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이 그뒤를 계승한 직후였다.
조선은 왜구 창궐이 대마도 신도주 선동이라 하여,
1419년 6월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삼아
삼남의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으로 마산포를 출발.
대마도 두지포(豆知浦)에 상륙, 전도(全島)를 수색해
왜구의 배 127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왜구를 소탕했다.
그후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수색을 하던 중
좌군절제사 박실(朴實)이 복병을 만나 패했으나
우군절제사 이순몽의 활약으로 왜구를 무찔렀다.
당시 일본은 규슈[九州] 제후를 총동원하여 대마도를 방어
조선의 원정군은 전도를 토벌할 수는 없어 그해 7월 회군.
세종 1년이 기해동정(己亥東征) 또는
기해정왜역(己亥征倭役)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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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규슈와 한반도 사이에 위치하며,
후쿠오카에서 147Km, 부산에서 53Km인 위치.
옛부터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일본과 한반도 중개무역이 대마도 영주의 재정기반
한반도와 일본의 외교 관계가 곧 대마도의 사활문제
조선은 한때 대마도 영주 소씨에게 왜구 감시를 요청.
조선은 그 댓가로 대마도주에게
무역상 특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한일 양국 관계는 한때 단절되었으나,
대마도는 몇차례 사신을 파견해 국교 정상화를 도모했다.
양국관계가 정상화된 시기는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이후였다.
대마도 영주 소씨는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한일 협상을 위임받고 무역 독점권을 획득.
대마도 영주는 한일 간 외교문서를 변조한다.
이는 쌍방 타협점 모색 및 중개역할이 목적.
양국은 국서 변조가 드러나도 눈감아 주었다.
일본에게 중개자 대마도 영주는 중요한 존재
한반도에서도 대마도는 전략적인 요충지.
하여, 옛부터 대마도는 한일 간 징검다리.
한일 간 무역, 외교, 항로 등의 중개 역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전진기지였던 대마도.
대마도는 일본의 '대륙 진출 야욕의 교두보'.
임진왜란 전까지 한반도 영역이었던 대마도.
임진왜란 이후부터 일본에 가까워진 대마도.
조선의 여러 차례 대마도 정벌이 원인이 된듯
세종 때 대식국 상인 교역처를 대마도로 국한.
'사실상, 대식국(아랍) 상인 국외추방 정책.'
조선은 차츰 국제무역 외교 정세에서 고립.
대마도는 한반도보다 일본에 더 가까워진다.
그후, '조선의 영역' 대마도는 일본 영역화 된다.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까지
저녁 배를 타고 부산에서 술마시고
영화보고 놀다가 이튿날 돌아갔었다.
이후 오랫동안 끊겼던 부산∼대마도 간 뱃길
1999년 정기여객선 운행으로 대한해협은 활기
서울∼부산 고속철도(KTX) 개통으로 반나절 거리.
서울에서 오전 6시 KTX로 부산에 내려가
오전 10시반 여객선으로 정오 대마도 도착.
최북단 대마도 히다카스 항에 닿을 수 있다.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도에 없는 동물들
이 섬의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이나 이조 범종
대마도에는 쓰라린 민족 역사의 현장들이 도처에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
그를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한 역관 108명 역관사비,
“왜놈 음식은 먹을 수 없다”는 최익현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 가문에 출가한 덕혜옹주
덕해옹주 (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등
대마도는 원래 경상도 계림에 속한 우리나라 땅
땅이 비좁고 바다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섬
그런데 일본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
대마도로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세종실록 기록)
16세기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대마도는 언제 왜인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김정호 대동여지도 및 이조 지도 상 우리나라 영토.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
백두산이 머리, 태백산맥은 척추
영남 대마와 호남 탐라(耽羅)는 양발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하가 만든지도.
팔도총도라는 지도에 대마도는 조선 영역으로서 표기.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내린 구당관과 만호 관직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으로 대마도 정벌.
1436년 대마도 식량사정이 어렵자
도주 소우 사다모리는 이조에 상소.
대마도를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
대마도의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18세기 초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
그의 해유록(海游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일본의 대마도 편입은 19세기 후반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
대마번이 이조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백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
일본과 청(淸) 양쪽에 조공을 바친 오키나와 류큐왕국
대마도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예속된 ‘양속(兩屬)관계’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해금정책과 '공도정책’
그 때문에 대마도를 복속시킬 기회를 놓쳐버린.,조선.
조선 국운이 쇠퇴할수록 점점 더 강화되었던 해금정책.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중심'은 차츰 일본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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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 반환을 요구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이러한 배경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맥아더 장군에게 손을 내민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한국의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고 바다에 '이승만 라인’
어업구역을 설정해 영해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붙잡았다.
"일본은 대마도를 한국에 즉각 반환해야 한다.
대마도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섬긴 땅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무력강점 했지만
의병들이 일어나 이를 격퇴했고,
도처에 그 전적비가 남아있다.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경계선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구한말에 대마도를 강점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따라서, 지체 없이 한국에 돌려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 이승만 -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때 대마도 일본 주민들
‘한국이 미국의 힘을 업고 대마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제 곧 일본사람들은 쫓겨나게 생겼다’며 크게 불안감."
- 재일 조선인 거류민단 대마도본부 이신연 단장 -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하라” 60여 차례 요구했다.
대마도 반환을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했던.,이승만 대통령.
국보 248호- 조선방역지도.
'백두는 머리, 태백은 척추,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는 기록대로 그당시
조선의 국토관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