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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백제 전반기 중요한 역사 사건(2)
카론 추천 0 조회 81 25.08.13 02:34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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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5.08.17 20:33

    첫댓글 209년의 포상팔국과 가야+신라 연합의 전쟁은 포상팔국의 공격을 받은 김해의 가야가 위기에 빠지자 신라가 도와주어 포상팔국의 공격을 물리친 사건입니다. 신라가 구한 포로만 6천 명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양측이 수만 대군을 동원한 엄청난 전쟁이어서 신라도 국가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신라가 이런 국가의 명운을 건 대규모 전쟁에 끼어들어 가야를 도와주어야 했습니까?

  • 25.08.20 19:43

    "삼국사기를 보면 249년에 왜인이 석우로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삼국사기를 보면 249년 여름 4월에 왜인이 석우로를 죽였다고 하고, 253년 여름 4월에 중요한 인물이 죽을 때 사용하는 괴기 기록(용이 궁궐 동쪽 연못에서 나타나고 금성 남쪽의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을 적어놓았습니다. 거기에 열전 석우로편은 253년에 석우로가 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계는 249년이 아니라 253년 여름 4월에 석우로가 죽었고, 249년 기록은 실수로 253년 기록이 잘못 올라갔거나, 아니면 석우로가 정치적으로 사망(모든 실권을 상실)한 것을 표현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설령 석우로가 첨해이사금때 죽었다고만 하고 연도는 없어도 삼국사기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첨해이사금 재위기간이 253년을 경계로, 이전은 첨해이사금이 왕권을 행사하는 시기였고, 이후는 백제와의 전쟁 외에 왕의 행적이 없어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석우로 사후 신라를 누가 다스렸는지는 일본서기에 나오는데, 석우로가 죽은 후 한 명을 남겨 신라의 재상으로 했다고 하여, 갈나고가 신라를 통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작성자 25.08.21 10:31

    기록을 통해 국제 관계를 잘 살펴 봐야 하는데요.
    248년 이전에는 고구려와 관계가 좋지 않아 석우로가 북쪽 국경 지역을 책임졌습니다. 그런데 백제 연합군이 움직이자 남쪽 전선이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이찬 장훤을 북쪽 전선을 맡게 하고, 고구려와는 화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석우로를 이동시켜 백제 연합군을 막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석우로가 249년 사망합니다.
    어떤 계략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사건으로 신라의 대장군은 사망했고, 궁이 잡혔으니 장기판은 끝이 난 것입니다.

    석우로를 중심으로 사건들을 살펴보니 포상팔국의 난부터 일본 서기의 기록이 연결이 되어 정리를 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침미다례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서 대략 이런 뜻인가? 하는 정도입니다. .

    참고로 석우로 열전의 기록은 개인적으로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석우로는 249년에 실종됐다. 시신을 확보하지 못했다가 253년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지냈다.
    그리고 석우로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을 남겼고, 시신을 찾게 된 과정을 기록했다.

  • 작성자 25.08.21 10:43

    신라는 각 지역을 다스리는 세력이 있었고 이 세력 중에 유력자를 선발하여 왕으로 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금니가 가장 많은 사람은 지지 세력이 많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만장일치 제도는 어떤 사람이 왕으로 선출되면 불만이 있더라도 태클 걸지 말라는 제도입니다.
    첨해 이사금 247년에 왕으로 뽑혔고, 261년까지 왕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신라를 통치한 사람들은 각 세력의 수장들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누군가가 나서서 주장을 하면, 다른 세력의 수장들이 이에 동의해 주고 최종적으로 신라 왕이 승인하는 형식입니다.

    가라와 가야는 진짜 다른 곳이라는 거,,,
    그리고 삼국사기는 나라에 큰 사건이 발생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가야가 삼국사기에 안 나오는 이유는 가야에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야는 김수로왕의 내용과 신라에게 흡수 될 때 외에는 큰 사건이 없었습니다.
    평화롭고 외국과 교역을 했기에 잘 살았지요.
    그런데 부유한 상업국가들 한방에 무너지는 거... 세계 역사에 많이 등장합니다.

  • 25.08.21 14:09

    @카론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석우로가 죽은 연도에 관해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달은 모든 기록이 여름 4월로 같은데 이는 맞습니까? 만일 달 기록이 없으면 석우로 죽은 달이 여름 4월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까?

  • 25.08.21 14:10

    @카론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여러 가야 기록들 중에서 문무왕의 외가 혈통의 정통성을 위하여 거의 김해의 남가야(금관가야) 기록들만 모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이 1세기에 출현하여 3세기 초인 212년을 끝으로 사라집니다. 이후 260년이 지난 5세기 후반에 다시 출현하였다가 6세기 중반에 멸망하고 사라집니다.
    이 가야 기록이 없는 3세기 초~5세기 후반 사이의 가야지역을 기록한 권위있는 기록이 삼국지 동이전의 변진한조입니다. 거기를 보면 가야나 가라자 들어가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가야가 없는 것은 포상팔국의 공격을 받던 가야가 나중에 멸망하여 목지국의 변진한에 들어갔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가야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삼국지와 삼국사기가 일치합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보면 삼국사기에서 가야가 사라진 3세기 후반에서 4세기의 150년 동안 가야지역은 고고학적으로 전성기를 맞습니다. 김해 대성동과 부산 복천동 고분의 유목민족 기마군단 유물이 이때 나옵니다. 문화 수준으로 신라지역을 압도합니다. 문화적으로신라지역이 가야 지역과 대등해지는 것은 5세기 초이후이며, 5세기 후반에는 역전이 일어나 신라지역이 가야지역을 압도합니다

  • 작성자 25.08.23 00:34

    @과거와 미래 기록에 등장하는 달은 모두 음력입니다.
    관심있는 고구려 몇몇 기록은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 살펴보긴 했지만 모든 기록을 살펴보진 않아서...
    저는 보통 연도를 중심으로 각 나라의 사건들을 재구성해서 연결점을 찾습니다.

    목지국 (=月支國)은 달 구역에 있는 나뭇가지(枝) 입니다.
    그림에서 초를 표현한 지역이 달 구역이구요. 대동강을 따라 선으로 그리면 나뭇가지처럼 보일 것입니다.
    목지국은 마한왕의 후손 혹은 추종 세력입니다.
    원래 마한의 주인이었는데 백제의 온조왕에 의해 뒤집혀서 속국이 되었으니 기회만 생기면 일어나는데요

    역사 기록을 보면 분명 같은 지역인데 지명을 다르게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지국은 대략적으로 위치를 알려주는 반면, 가라는 대동강을 활동 역역으로 하는 세력을 알려주는 지명입니다.
    가라와 신라가 해상으로 연결이 되었으니 포상팔국과의 전쟁도 해전으로 벌어졌겠구나 짐작을 하는데요.
    그냥 한자를 분석해 보면 나오는 거라...





  • 작성자 25.08.22 03:46

    @과거와 미래 가야 기마 문명은 중국 신나라와 연관성이 있는 듯 보입니다.
    신나라 황제가 중용한 세력이 진시황이 호라고 불렀던 지역을 다스리던 김일제의 후손입니다.
    보통 흉노라고 하는데요. 흉노 역시 지역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당시 신나라는 고구려 (유리명왕)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하구려라고 비하하고 전쟁을 했는데 시작 초기 밀립니다.
    그래서 김일제 후손들이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와의 국경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신나라가 망하고 후한이 들어섭니다.
    김일제 후손들은 후한의 역적이다 보니 고구려 주변에 있었던 고조선 소국으로 도망을 갑니다.
    고구려와는 적대 세력이다 보니...
    그런데 고구려 대무신왕이 주변에 있었던 고조선 소국들을 집어 삼키자 김일제 후손들은 한반도로 이동하게 됩니다.
    한반도 북쪽으로 간 일파는 김알지,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간 일파는 김수로왕을 도와 신라로부터 가야를 독립 시키는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신라는 가야를 병합하고 그 힘으로 백제와 고구려와 대적하는데요.
    가야 세력이었던 김유신과 가야를 등에 업은 김춘추가 공을 세웠으니 그 후손들이 후대의 신라왕이 됩니다.
    문무왕이 김일제 후손 얘기는 이런 흐름에 있습니다.

  • 작성자 25.08.22 04:05

    @과거와 미래 변진한의 의미는 진한에게 볼모를 바친 한반도에 있는 세력이란 뜻입니다.

    가야는 4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엄청나게 발전하는데요.
    나라가 평화롭고 장사도 엄청 잘해서 호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무덤도 만들고, 금 장식품을 무덤에 묻고...
    그런데 신라는 허구헌날 전쟁통인데 그런 거대한 무덤 만들 여력이 있었을까요?
    6세기 초를 경계로 경주 무덤들 모두 가야 유물입니다.
    가야가 망하고 6세기 초에 무덤 양식이 바뀌잖아요.
    그래서 신라 금관 = 가야 유물!!!!
    금관의 의미는 흙으로 쌓은 언덕인데 김해와 경주에 있는 거대한 무덤이 바로 금관입니다.

    그런데 가야는 경상도보다는 다른 곳에 더 투자를 한 듯 보입니다.
    일본 교토 지역을 진출한 가야 분파가 그곳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혹시 야마토에 들어있는 뜻을 아십니까?
    피리란 뜻이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가야도 피리와 아주 밀접합니다.

  • 작성자 25.08.22 04:30

    @카론 고대 역사 이야기는 대부분 도읍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고조선은 신시 평양 아사달이 도읍입니다.
    그중 아사달은 한반도에 있는 고조선의 도읍입니다.
    대동강을 경계로 남쪽을 아라 북쪽을 사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단군이 제사를 드렸던 곳은 안악군에 있는 구월산이구요.
    이곳이 아(阿)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한자에 阝(좌부변 부)가 있으면 그곳에 제사를 올리는 산이 있었다고 표시한 듯 보입니다.
    경주 토함산도 제사를 올리던 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자 해석을 하면서 역사를 분석하면 같은 지역에 벌어진 사건이지만 시대별로 사건 진행이나 위치들이 다 다릅니다.
    그걸 한자 속에 다 표현을 하고 있었어요.
    왜 우리 역사서 속에 위치를 대해 설명한 기록이 없나 했는데...
    국명과 지명 속에 설명을 해 놨던 것입니다.

    참고로 한자 해석은 한자들을 최소 단위로 파자하여 어원 쪽을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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