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전반기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온조왕의 개국 스토리
2. 초고왕부터 고이왕까지 있었던 백제 내분 사건
3. 근초고왕의 확장 (고구려 고국원왕)
4. 아신왕의 패전사 (고구려 광개토대왕)
5. 개로왕의 죽음 (고구려 장수왕)
이중 2번째인 초고왕부터 고이왕까지 있었던 백제의 내분 사건에 대해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1) 포상팔국의 난
백제 초고왕(166년~214년)이 집권하던 209년, 포상팔국의 난이 발생합니다.
포상팔국의 난은 백제에 속해 있었던 마한연합국들 사이에서 전쟁이 발생한 것입니다.
전해지고 있는 포상팔국의 이름은 아래과 같습니다.
* 삼국사기 - 고사포국(古史浦國), 사물국(史勿國), 칠포국(柒浦國), 골포국(骨浦國)
* 삼국유사 - 사물국(史勿國), 고자국(古自國), 보라국(保羅國)
먼저 초고왕의 의미를 통해 포상팔국의 위치를 갸늠할 수 있습니다.
肖는 小와 月이 결합된 글자이다.
* 小의 의미는 쪼개지다
* 月은 달처럼 생긴 지역.
즉, 초고왕은 백제의 영역이었던 月지역이 쪼개졌다는 뜻을 내포하다고 있다.
그래서 해당 지역에서 포상팔국의 위치를 파악해 보았습니다.
고자국의 自의 한자의 뜻은 코를 의미한다. (해안선의 모양이 코처럼 생겼다)
사물국의 勿은 옹진반도의 해안선의 형태와 비슷하다.
칠포국 - 옻칠로 유명한 곳이다. (북한 태천 지역이 옻으로 NO1이다)
포상팔국의 난은 8국이 가라를 공격하였고, 가라가 열세에 놓이자 가라 왕자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신라는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 석우로 등을 보내 8국을 물리치고 가라를 구원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역사 학계에서는 가라와 가야를 같다고 인식하고 있는데요.
가라와 가야는 완전히 다른 지역입니다.
加羅는 대동강 남쪽 지역, 가야는 경상도 지역입니다.
참고로 한반도 서쪽지역을 羅라고 합니다.
탐라(제주) 전라(전남, 전북), 안라(경기 북부), 가라(황해남도), 다라(황헤북도), 사라(평안남 평안북), 어라(중국 다렌)
羅의 의미는 집집마다 날지 못하는 닭(가금류)을 키우는 지역을 말합니다.
그래서 한반도 동쪽은 羅 가 될 수 없습니다.
이유는 한반도 동쪽은 산악 지역으로 범을 비롯한 산짐승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닭과 오리를 키우면 산 짐승들이 꼬이기 때문에 집집마다라는 의미가 붙을 수 없습니다.
일부 안전한 장소에서만 키울 수 있기에 보편적인 지역명으로는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산 짐승이 많이 나오는 지역은 개가 유명합니다.
가라가 신라에게 붙으면서 백제는 난리가 납니다.
가라 지역이 신라에 속하게 되면서 국경 관계가 복잡하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라를 되찾기 위해 백제는 계속 전쟁을 벌였지만 구수왕은 연전 연패를 하게 됩니다.
사반왕은 치세가 얼마되지 않기에 그냥 넘어가고...
백제가 가라 지역을 퇴찾은 것은 고이왕때입니다.
(2) 기리영 전투
238년에 위나라의 사마의가 4만의 군대로 공손연을 정벌합니다.
242년에 고구려가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자 위나라는 오환족과 선비족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관구검에게 비류수에서 고구려군 3천을 잃었고, 양맥곡에서는 1만 8천을 잃습니다.
고구려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은 옥저로 도망갑니다.
현도 태수 왕기(王頎)가 부여의 위거왕으로부터 군량을 받았고, 동천왕을 북옥저까지 추격합니다.
동천왕은 평양성에서 방어진을 설치합니다.
246년 백제의 고이왕이 대방 기리영에서 위나라와 전쟁을 벌입니다.
전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부종사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팔국(八國)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했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잘못 통역하면서 신지(臣智)가 격하고 한(韓)이 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켰고, 준은 전사한 이후에 두 군에서 한이 사라졌다.
부종사 오림(吳林)의 말을 이해하려면 어떤 논리가 배경에 깔려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한반도 지역은 원래 고조선에 속해 있었다. (신시 = 대릉하 유역, 낙랑 = 평양 , 한반도 = 아사달)
그러므로 지금 낙랑을 차지하고 있는 위나라에게 포상팔국(=진한8국)도 속해야 한다.
여기서 포상팔국을 진한팔국으로 말한 이유는 신라에게 패배한 것을 비꼬는 의미도 있음.
이 말에 백제가 분개하여 대방의 기리영을 공격한 것입니다.
帶方太守 弓遵에서 弓은 실제 사람 성씨가 아니라 한반도 서해안 해안선이 弓처럼 생긴 것을 빗댄 것입니다.
포상팔국을 다스리는 준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궁준의 실제 이름은 왕준으로 대방태수와 동일인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대방 태수가 아닌 삭방 태수(朔方大守)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朔은 月을 나타내는 한자로 포상팔국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왕준이 죽자 백제는 전쟁을 끝내고 대방과 낙랑에서 군대를 퇴각시키게 됩니다.
* 二郡遂滅韓 한이 멸망했다가 아니라 군대를 퇴각시켜 사라졌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3) 고이왕의 가나 지역 회복 (임나 일본부와 연관)
삼국사기를 보면 249년에 왜인이 석우로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석우로는 신라의 대장군으로 포상팔국 전쟁의 영웅입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진구왕후(170년~ 269년) 시절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ㆍ南加羅ㆍ喙國ㆍ安羅ㆍ多羅ㆍ卓淳ㆍ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爰津, 屠南蠻枕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고이왕은 가라를 되찾기 위해 왜를 신라와의 전쟁에 끌어들인 것 같습니다.
백제와 왜 연합군은 탁순에 모여 신라와 전투를 벌였고, 왜인이 신라군을 이끌고 있던 석우로를 죽이게 됩니다.
당시 탁순은 가라와 신라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는데 신라가 패배하면서 가라가 고립됩니다.
결국 가라는 신라를 버리고, 다시 백제에 속하게 되면서 포상팔국의 난 이후 혼란했던 백제의 지역들이 안정을 찾았다는 내용입니다.
*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ㆍ南加羅ㆍ喙國ㆍ安羅ㆍ多羅ㆍ卓淳ㆍ加羅七國.
신라를 격파하면서 비자*, 탁순, 다라, 훼국, 안라, 남가라 지역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위 문장은 백제와 왜 연합군이 비자 탁순 다라 훼국 안라 남가라등을 공격하여 땅을 점령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라편이었던 가라 지역이 백제에 속하게 되어 가라와 국경관계 였던 백제 지역들이 모두 안정을 찾았다는 내용입니다.
* 仍移兵西廻至古爰津
탁순에서 승리한 후 군사를 돌려 신라가 아닌 가라의 고해진으로 갔다는 의미이다.
* 屠南蠻枕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백제의 왕 초고와 그의 왕자 귀수의 영정 앞에 원수 석우로(=남만)의 목을 바쳐 제사를 올리며(=침미다례) 넑을 위로했다.
참고로, 249년은 초고왕과 구수왕이 모두 사망한 상태이므로 영정이라고 의역을 하였습니다.
진구왕후의 연대는 2세기 ~ 3세기 경입니다.
삼국사기 일본서기를 보면 이 시기에 왜가 신라와의 전투에 참여한 것은 맞습니다.
신라와 벌인 전투는 탁순에서 벌어진 것이 전부입니다.
왜는 많은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7국을 각개 격파할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7국은 칠포국 지역을 제외하고 위치가 포상팔국과 거의 비슷합니다.
왜가 한반도 땅을 지배했다는 근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왜는 참전하여 어떤 댓가를 백제로부터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제와 왜의 국교 수교는 근초고왕 때입니다.
첫댓글 209년의 포상팔국과 가야+신라 연합의 전쟁은 포상팔국의 공격을 받은 김해의 가야가 위기에 빠지자 신라가 도와주어 포상팔국의 공격을 물리친 사건입니다. 신라가 구한 포로만 6천 명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양측이 수만 대군을 동원한 엄청난 전쟁이어서 신라도 국가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신라가 이런 국가의 명운을 건 대규모 전쟁에 끼어들어 가야를 도와주어야 했습니까?
"삼국사기를 보면 249년에 왜인이 석우로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삼국사기를 보면 249년 여름 4월에 왜인이 석우로를 죽였다고 하고, 253년 여름 4월에 중요한 인물이 죽을 때 사용하는 괴기 기록(용이 궁궐 동쪽 연못에서 나타나고 금성 남쪽의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을 적어놓았습니다. 거기에 열전 석우로편은 253년에 석우로가 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계는 249년이 아니라 253년 여름 4월에 석우로가 죽었고, 249년 기록은 실수로 253년 기록이 잘못 올라갔거나, 아니면 석우로가 정치적으로 사망(모든 실권을 상실)한 것을 표현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설령 석우로가 첨해이사금때 죽었다고만 하고 연도는 없어도 삼국사기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첨해이사금 재위기간이 253년을 경계로, 이전은 첨해이사금이 왕권을 행사하는 시기였고, 이후는 백제와의 전쟁 외에 왕의 행적이 없어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석우로 사후 신라를 누가 다스렸는지는 일본서기에 나오는데, 석우로가 죽은 후 한 명을 남겨 신라의 재상으로 했다고 하여, 갈나고가 신라를 통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을 통해 국제 관계를 잘 살펴 봐야 하는데요.
248년 이전에는 고구려와 관계가 좋지 않아 석우로가 북쪽 국경 지역을 책임졌습니다. 그런데 백제 연합군이 움직이자 남쪽 전선이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이찬 장훤을 북쪽 전선을 맡게 하고, 고구려와는 화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석우로를 이동시켜 백제 연합군을 막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석우로가 249년 사망합니다.
어떤 계략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사건으로 신라의 대장군은 사망했고, 궁이 잡혔으니 장기판은 끝이 난 것입니다.
석우로를 중심으로 사건들을 살펴보니 포상팔국의 난부터 일본 서기의 기록이 연결이 되어 정리를 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침미다례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서 대략 이런 뜻인가? 하는 정도입니다. .
참고로 석우로 열전의 기록은 개인적으로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석우로는 249년에 실종됐다. 시신을 확보하지 못했다가 253년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지냈다.
그리고 석우로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을 남겼고, 시신을 찾게 된 과정을 기록했다.
신라는 각 지역을 다스리는 세력이 있었고 이 세력 중에 유력자를 선발하여 왕으로 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금니가 가장 많은 사람은 지지 세력이 많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만장일치 제도는 어떤 사람이 왕으로 선출되면 불만이 있더라도 태클 걸지 말라는 제도입니다.
첨해 이사금 247년에 왕으로 뽑혔고, 261년까지 왕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신라를 통치한 사람들은 각 세력의 수장들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누군가가 나서서 주장을 하면, 다른 세력의 수장들이 이에 동의해 주고 최종적으로 신라 왕이 승인하는 형식입니다.
가라와 가야는 진짜 다른 곳이라는 거,,,
그리고 삼국사기는 나라에 큰 사건이 발생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가야가 삼국사기에 안 나오는 이유는 가야에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야는 김수로왕의 내용과 신라에게 흡수 될 때 외에는 큰 사건이 없었습니다.
평화롭고 외국과 교역을 했기에 잘 살았지요.
그런데 부유한 상업국가들 한방에 무너지는 거... 세계 역사에 많이 등장합니다.
@카론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석우로가 죽은 연도에 관해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달은 모든 기록이 여름 4월로 같은데 이는 맞습니까? 만일 달 기록이 없으면 석우로 죽은 달이 여름 4월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까?
@카론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여러 가야 기록들 중에서 문무왕의 외가 혈통의 정통성을 위하여 거의 김해의 남가야(금관가야) 기록들만 모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이 1세기에 출현하여 3세기 초인 212년을 끝으로 사라집니다. 이후 260년이 지난 5세기 후반에 다시 출현하였다가 6세기 중반에 멸망하고 사라집니다.
이 가야 기록이 없는 3세기 초~5세기 후반 사이의 가야지역을 기록한 권위있는 기록이 삼국지 동이전의 변진한조입니다. 거기를 보면 가야나 가라자 들어가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가야가 없는 것은 포상팔국의 공격을 받던 가야가 나중에 멸망하여 목지국의 변진한에 들어갔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가야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삼국지와 삼국사기가 일치합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보면 삼국사기에서 가야가 사라진 3세기 후반에서 4세기의 150년 동안 가야지역은 고고학적으로 전성기를 맞습니다. 김해 대성동과 부산 복천동 고분의 유목민족 기마군단 유물이 이때 나옵니다. 문화 수준으로 신라지역을 압도합니다. 문화적으로신라지역이 가야 지역과 대등해지는 것은 5세기 초이후이며, 5세기 후반에는 역전이 일어나 신라지역이 가야지역을 압도합니다
@과거와 미래 기록에 등장하는 달은 모두 음력입니다.
관심있는 고구려 몇몇 기록은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 살펴보긴 했지만 모든 기록을 살펴보진 않아서...
저는 보통 연도를 중심으로 각 나라의 사건들을 재구성해서 연결점을 찾습니다.
목지국 (=月支國)은 달 구역에 있는 나뭇가지(枝) 입니다.
그림에서 초를 표현한 지역이 달 구역이구요. 대동강을 따라 선으로 그리면 나뭇가지처럼 보일 것입니다.
목지국은 마한왕의 후손 혹은 추종 세력입니다.
원래 마한의 주인이었는데 백제의 온조왕에 의해 뒤집혀서 속국이 되었으니 기회만 생기면 일어나는데요
역사 기록을 보면 분명 같은 지역인데 지명을 다르게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지국은 대략적으로 위치를 알려주는 반면, 가라는 대동강을 활동 역역으로 하는 세력을 알려주는 지명입니다.
가라와 신라가 해상으로 연결이 되었으니 포상팔국과의 전쟁도 해전으로 벌어졌겠구나 짐작을 하는데요.
그냥 한자를 분석해 보면 나오는 거라...
@과거와 미래 가야 기마 문명은 중국 신나라와 연관성이 있는 듯 보입니다.
신나라 황제가 중용한 세력이 진시황이 호라고 불렀던 지역을 다스리던 김일제의 후손입니다.
보통 흉노라고 하는데요. 흉노 역시 지역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당시 신나라는 고구려 (유리명왕)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하구려라고 비하하고 전쟁을 했는데 시작 초기 밀립니다.
그래서 김일제 후손들이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와의 국경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신나라가 망하고 후한이 들어섭니다.
김일제 후손들은 후한의 역적이다 보니 고구려 주변에 있었던 고조선 소국으로 도망을 갑니다.
고구려와는 적대 세력이다 보니...
그런데 고구려 대무신왕이 주변에 있었던 고조선 소국들을 집어 삼키자 김일제 후손들은 한반도로 이동하게 됩니다.
한반도 북쪽으로 간 일파는 김알지,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간 일파는 김수로왕을 도와 신라로부터 가야를 독립 시키는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신라는 가야를 병합하고 그 힘으로 백제와 고구려와 대적하는데요.
가야 세력이었던 김유신과 가야를 등에 업은 김춘추가 공을 세웠으니 그 후손들이 후대의 신라왕이 됩니다.
문무왕이 김일제 후손 얘기는 이런 흐름에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 변진한의 의미는 진한에게 볼모를 바친 한반도에 있는 세력이란 뜻입니다.
가야는 4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엄청나게 발전하는데요.
나라가 평화롭고 장사도 엄청 잘해서 호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무덤도 만들고, 금 장식품을 무덤에 묻고...
그런데 신라는 허구헌날 전쟁통인데 그런 거대한 무덤 만들 여력이 있었을까요?
6세기 초를 경계로 경주 무덤들 모두 가야 유물입니다.
가야가 망하고 6세기 초에 무덤 양식이 바뀌잖아요.
그래서 신라 금관 = 가야 유물!!!!
금관의 의미는 흙으로 쌓은 언덕인데 김해와 경주에 있는 거대한 무덤이 바로 금관입니다.
그런데 가야는 경상도보다는 다른 곳에 더 투자를 한 듯 보입니다.
일본 교토 지역을 진출한 가야 분파가 그곳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혹시 야마토에 들어있는 뜻을 아십니까?
피리란 뜻이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가야도 피리와 아주 밀접합니다.
@카론 고대 역사 이야기는 대부분 도읍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고조선은 신시 평양 아사달이 도읍입니다.
그중 아사달은 한반도에 있는 고조선의 도읍입니다.
대동강을 경계로 남쪽을 아라 북쪽을 사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단군이 제사를 드렸던 곳은 안악군에 있는 구월산이구요.
이곳이 아(阿)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한자에 阝(좌부변 부)가 있으면 그곳에 제사를 올리는 산이 있었다고 표시한 듯 보입니다.
경주 토함산도 제사를 올리던 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자 해석을 하면서 역사를 분석하면 같은 지역에 벌어진 사건이지만 시대별로 사건 진행이나 위치들이 다 다릅니다.
그걸 한자 속에 다 표현을 하고 있었어요.
왜 우리 역사서 속에 위치를 대해 설명한 기록이 없나 했는데...
국명과 지명 속에 설명을 해 놨던 것입니다.
참고로 한자 해석은 한자들을 최소 단위로 파자하여 어원 쪽을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