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문학박사 안동대학교 교수
1. 머리말
《금계집(錦溪集)》은 조선전기 문인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시문집이다.
황준량은 타고난 문학적 재능에다가 학덕(學德)까지 겸비하여 일찍이 장래가 촉망되었거니와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손서(孫壻)이자 이황(李滉, 1501~1570)의 고제(高弟)로서 영남사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퇴계학의 최대성과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심혈을 기울여 간행한 지 2년 만에 병을 얻어, 수를 누리지 못하고 47세 중년의 나이에 애석하게도 유명(幽明)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황의 말처럼 황준량의 죽음은 진실로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 빚은 비극이었다.
황준량이 죽자 스승 이황은 슬픔을 억누르고 손수 붓을 들어 그의 관 위에 명정(銘旌)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행장(行狀)〉을 지어 제자의 일생이 그리 녹록(碌碌)치 않았음을 증언하고, 〈제문(祭文)〉과 〈만사(挽詞)〉를 지어 저승에서 외로워하고 있을 제자의 영혼을 위로했다.
“아, 슬프다 금계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성주에서 풍기까지 몇 리나 되기에 길을 따라 들것으로 부축했는데 미처 집에 이르지 못했단 말인가?……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영결하는 말이 부고와 함께 이를 줄을! 실성하여 길게 부르짖으니 물이 쏟아지듯 눈물이 흘렀다네. 하늘이여! 어찌 이리도 빠르게 이 사람을 빼앗아 가시나이까? 진실인가 꿈결인가 너무 슬퍼 목이 멘다오.……아! 금계여, 한 번 떠나 돌아오기 어려우니, 끝났구나, 끝났구나! 슬프고, 슬프도다!”(이황의 〈제문〉)
황준량이 만년에 강학하는 공간으로 기획했던 금양정사(錦陽精舍)를 다 짓지 못하고 죽었기에, 이황은 1566년 〈금양정사완호기문(錦陽精舍完護記文)〉을 지어, 승려에게 역사(役使)를 면제해줌으로써 정성을 다해 정사를 수호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해 줄 것을 풍기 군수 조완벽(趙完璧)에게 청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취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제자의 여한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작정이었다. 제자를 향한 스승의 정의(情誼)가 얼마나 두터웠는지, 무릎을 칠 정도로 감동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황은 제자가 남긴 시문 저작을 수년 동안 일일이 검토하여 편차를 정하고, 서둘러 간행함으로써 자기 생전에 제자의 문학과 사상을 내외에 알리고자 했다.
이처럼 《금계집》 초판본은 이황의 제자 사랑에 힘입어 임진왜란 이전(1566년경)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금계집》은 서지사적인 맥락에서 뿐 아니라 사제 간의 의리와 온정을 확인해주는 하나의 아이콘으로서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문집 번역이 이루어진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없지 않지만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황준량은 일찍이 국문학계에서 한국 고전시가를 연구하는 이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관심과 조명을 받은 바 있다.첫째는 경기체가(景幾體歌)에 대한 인식태도 문제이다.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풍기 군수로 있던 시절(1541~1545)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대한 전말기(顚末記)인 《죽계지(竹溪誌)》를 편찬하면서, 고려 충숙왕 때 인물인 안축(安軸)이 지은 〈죽계별곡(竹溪別曲)〉과 같은 경기체가를 그 속에 수록한 바 있다. 이런 주세붕의 편찬태도에 대해 황준량은 이황과 함께 비판적 입장을 드러내 보였다. 왜냐하면 한때의 희학(戱謔)의 나머지에 나온 〈죽계별곡〉에서 〈한림별곡(翰林別曲)〉에서와 같은 ‘호협질탕(豪俠跌宕)’한 유흥적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세붕은 황준량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그대로 관철시킨 《죽계지》를 간행했다.
둘째는 개찬(改撰) 〈어부사〉의 원본 제공 문제이다. 이황이 〈서어부가후(書漁父歌後)〉에서‘황준량이좌랑벼슬에있던시절(1548~1550), 박준(朴浚)의 악서(樂書)에서 〈어부사장가〉를 취하고 또 〈어부단가(漁父短歌)〉 10수를 얻어서 이현보에게 바쳤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황의 언급을 통하여 이현보가 〈어부장가〉를 9수로 〈어부단가〉를 5수로 고쳐 만들 때, 그 대상이 되었던 원본이 바로 황준량이 구해준 그것이었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이는 황준량이 국문시가나 악서에 나름대로 일정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주는 동시에, 〈한림별곡〉과 같은 유흥적, 현시적, 자기만족적 경향이 짙은 경기체가에 부정적이었던 이황의 영향 아래, 그가 문학의 교육적, 사회적, 내면 수양적 기능을 중시하는 사림파의 절제된 미의식을 체현한 문인이었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그 후 황준량의 생애와 한시로 연구가 확대되었고, 황준량의 역사의식에 주목한 연구가 제출되어 흥미를 더하기도 했다. 황준량은 ‘사관의 재능에 대한 득실과 순박에 대하여 묻는다(問史才得失純駁)’는 〈대책(對策)〉에서 ‘사관(史官)의 임무를 띤 사람이 학식만 있고 재능이 없으면 진실로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없고, 재능만 있고 절개가 없으면 그 임무를 다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반드시 ‘학식, 재능, 절개가 완전하게 모두 갖추어져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뒤에야 비로소 함께 사관의 직분을 감당하고 사관의 임무를 다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일찍이 당나라 역사가 유지기(劉知幾)는 《사통(史通)》에서 역사가라면 재(才)ㆍ학(學)ㆍ식(識) 삼장(三長)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황준량은 이를 ‘학(學)ㆍ재(才)ㆍ절(節)’로 순서와 내용을 바꾸어 제시했으니 매우 흥미로운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식’ 대신 ‘절’을 제시한 것은 절의를 중시하는 사림파 성리학자의 입장이 강열하게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이 점에 유의하여 향후 황준량의 역사관과 역사의식에 대한 심화된 논의가 이어졌으면 한다.
풍기 지역의 퇴계 학맥을 다루면서 황준량의 생애와 사상을 언급한 논고가 보고된 바 있으나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문 감이 있다. 또한 최근에는 황준량의 지리산 ‘기행시’인 〈유두류산기행편(遊頭流山紀行篇)〉에 착목하여, 이를 28단락으로 나누어 상세히 논구한 작업도 있었다. 176운, 352구, 2,516자의 장단구로 이루어진 〈유두류산기행편〉은 지리산을 노래한 유산시(遊山詩) 중 가장 긴 장편 고시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유가 성리학자로서의 시각이 전편을 관류하면서도 탈속적 선취(仙趣)의 지향과 세밀한 자연경관의 묘사가 어우러진 수작이라는 평이다. 또한 협운(叶韻)은 하였지만 환운(換韻)을 하지 않고 격자압운(隔字押韻)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황준량의 뛰어난 시인 역량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는 것이다.
2. 금계 황준량의 생애
이황이 찬술한 〈행장〉과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참조하여, 저자 황준량의 생애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황준량의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1517년(중종12) 7월 현재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황치(黃觶), 어머니는 창원 황씨 교수(敎授) 황한필(黃漢弼)의 따님이다.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을 지낸 황유중(黃裕中)이 그의 원조(遠祖)이다. 황유중의 손자는 황근(黃瑾)이니 공민왕(恭愍王) 때 좌헌납(左獻納)을 지냈는데, 정언(正言) 김속명(金續命)과 상소(上疏)하여 지진(地震)의 변란을 극력 논란하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서 옥천 군수(沃川郡守)로 좌천되었다. 뒤에 벼슬이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황근의 아들 황유정(黃有定)은 조선에 벼슬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유정의 아들은 생원(生員) 황연(黃鋋)인데, 이분이 바로 황준량의 고조(高祖)이다.
황유정이 영천(榮川
현재의 경북 영주)에 우거(寓居)하다가 근이 또 풍기(豐基)로 옮겨 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황근 이래 평해 황씨 집안은 풍기 사람이 되었다. 황준량의 증조(曾祖)는 황말손(黃末孫)인데 사온 주부(司醞主簿)를 지냈지만, 조부 황효동(黃孝童), 아버지 황치(黃觶)는 모두 벼슬하지 않고 은거자적(隱居自適)하였다. 처부(妻父)는 예안의 영천이씨 이현보(李賢輔)의 아들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이다.
황준량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이황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해 ‘기동(奇童)’으로 불렸다고 한다. 18세 때인 1534년(중종29) 남성시(南省試)에서 책문(策問)을 잘 지어 글 잘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21세 때인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23세 때인 1539년 정시(庭試)에서 직부회시(直赴會試
초시를 면제받고 바로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하여, 24세 때인 1540년 문과에 을과(乙科) 2인(二人
33인 중 제5위)으로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동년 급제자로 성세장(成世章,1506~1583)ㆍ한기(韓琦)ㆍ채무일(蔡無逸,1496~1556)ㆍ박승간(朴承侃,1508~1588)ㆍ박승임(朴承任,1517~1586)ㆍ류중영(柳仲郢, 1515~1573) 등이 있다. 학유(學諭)를 거쳐 성주(星州)의 훈도가 되었다가, 27세 때인 1543년 학록(學錄) 겸 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가 되었다. 29세 때인 1545년(인종1) 승문원 전고(殿考)에서 상주(尙州)의 교수가 되어 나갔다. 이해 여름 파직되어 가족을 이끌고 배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 왔다. 이때 아우 황수량(黃秀良)과 처삼촌인 이숙량(李叔樑, 1519~1592)도 동행했던 듯하다. 4월 바로 함양으로 내려가 지리산을 유람하고, 그 감흥을 장편시 〈유두류기행편〉에 담았다. 이때 유자옥(兪子玉) 등 8~9인이 유람에 참여했다. 임훈(林薰, 1500~ 1584)이 지은 〈서유자옥유두류록후(書兪子玉遊頭流錄後)〉를 보면, 당시에 유자옥도 유람록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31세 때인 1547년(명종2) 가을, 조정으로 돌아와 홍문관 박사를 거쳐 겨울에 전적에 올랐다. 이듬해 공조 좌랑이 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해, 1550년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풍기에서 지낸 듯하다. 다시 조정에 돌아와 전적을 거쳐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찬수에 참여하였다. 겨울, 병조 좌랑으로 옮겨져 불교를 배척하는 〈벽불소(闢佛疏)〉를 지어 올렸다.
1551년 2월, 경상도 감군 어사(監軍御史)에 제수되어 경상도를 순행한 뒤, 그때의 경험을 〈남정록(南征錄)〉에 갈무리했다. 뒤이어 승문원 검교가 되었고 6월에는 임금이 비밀리에 민정 파악을 위해 파견하는 추생 어사(抽栍御史)가 되었다. 9월,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전에 그에게 청탁을 하였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이 ‘성질이 안정되지 못하고 또 물론(物論)이 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체직되었다. 결국 중앙 관인으로 남아 청요직(淸要職)으로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에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청하여 신녕 현감(新寧縣監)이 되었다. 부임하자 기민을 잘 진휼(賑恤)하여 소생하게 하였으며, 전임관(前任官)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는 등 재정을 잘 운용하여 부채문권(負債文券)을 태워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향교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고 40세 때인 1556년 겨울,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1557년 가을, 단양(丹陽) 군수가 되었다. 당시에 단양 고을은 매우 쇠잔하고 피폐했기에 선치(善治)할 수 있는 인물을 특별히 선발했던 바, 황준량이 적임자로 뽑힌 것이다. 그는 부임하여 고을을 둘러본 뒤 4,800여 자의 명문으로 엮은 이른바 ‘민폐십조소(民弊十條疏)’라 불리는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를 올려 경내의 피폐상을 극론하였다. 이 소의 내용은 고스란히 실록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신(史臣)은 이렇게 논했다. “황준량의 상ㆍ중ㆍ하의 계책과 10개 조항의 폐단은 가히 곡진하고 절실하다고 할 만하다. 백성들의 곤궁한 상황과 수령들의 각박한 정상을 상소 한 장에 극진히 진달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어진 마음이 있는 자라면 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목이 메게 될 것이다.”
당시 국왕 명종은 답하기를 “이제 상소 내용을 보건대 10개 조항의 폐단을 진달하여 논한 것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그 결과 단양은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해 주는 특별한 은전을 받게 된다.
이어서 황준량은 단양 향교를 중수하였다. 아울러 고려 말 이 지역 출신 인물 우탁(禹倬, 1262~1342)의 별묘(別廟)를 세워 그의 학문과 절의를 기렸다. 그 전말을 기록한 〈단양향교중창기(丹陽鄕校重創記)〉를 보면, 향교가 산속 개울가에 있어 강물이 범람하는 우려가 있어 동쪽으로 이건했으며, 또한 우탁을 추모하기 위한 별도의 공간으로 향교 문묘 서편에 작은 사당을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43세 때인 1559년 임기를 마치고 고향 집으로 돌아온 뒤 예조 및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60년 가을,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자 전임 목사 노경린(盧慶麟, 1516~1568)이 벽진(碧珍) 옛터에 세웠던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증수(增修)하고 문묘를 옛 규모로 넓혀 중수하였다. 황준량이 성주 목사로 부임했을 때, 오건(吳健, 1521~1574)이 향교에 학관으로 있었다. 이 둘은 서로 의기가 통했다. 만날수록 뜻이 맞고 도가 같은 벗이 되어갔다. 이들은 함께 주자서(朱子書)를 읽었다. 무엇보다 경(敬)을 위주로 하고 이치를 궁구하는데 맛을 들였다. 그 마음이 발동하기 이전에 함양하는 기상은 실로 옛 성현들이 서로 전수한 심오한 뜻과 같았다고 한다. 황준량과 오건은 후학을 뽑아 매달 강회를 열어 훈도하면서 성적에 따라 상벌을 공평히 했다.
또한 후학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고을 동편에는 공곡서당(孔谷書堂)을 세우고, 팔거현(八莒縣)에는 녹봉정사(鹿峯精舍)를 세워 강학의 터전을 넓혀주었다. 한편 이즈음 고향인 죽령 풍기에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지어 만년의 강학처로 삼으려 했다. 1561년 이황이 오랫동안 문생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공을 들여 완성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성주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황준량이 그 전말을 밝힌 〈회암서절요발(晦菴書節要跋)〉을 지었다. 황준량이 4년 동안 성주 목사로 재임하면서 퇴계학문의 핵심과제 가운데 하나를 해결해 낸 것은 그에게 여간 큰 보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서 2년 뒤인 1563년 봄, 병을 얻어 사직하고 귀향하던 도중 병이 더해져 3월 11일, 예천(醴泉)에 이르렀을 때 숨을 거두었다. 향년 47세, 한창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너무 아까운 나이였다. 황준량은 사후에 풍기의 욱양서원(郁陽書院) 및 신녕(新寧)의 백학서원(白鶴書院)에 퇴계와 함께 배향되었다.
3. 《금계집》의 간행 경위
이 번역본 《금계집》의 텍스트는 1755년에 간행된 중간본이다. 13권 5책으로 된 목판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晚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는데,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표점ㆍ영인하여 《한국문집총간》 37집에 수록한 바 있다.
형태를 보면, 권수와 판심에 모두 ‘금계선생문집(錦溪先生文集)’이라 나와 있고, 상하이엽(上下二葉) 화문어미(花紋魚尾)에 10행 20자로 판각되어 있으며, 크기는 20.3×16.3(㎝)이다.
두 편의 발문에 의하면, 《금계집》은 내집과 외집이 각각 다른 시기에 간행되었다. 내집은 본래 단양 군수 손여성(孫汝誠)이 저자의 아우 황수량(黃秀良)과 함께 초고를 수합하고‚ 이황의 편차(編次)를 거친 뒤,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발문을 받아 1566년경 단양에서 목판으로 초간했다. 《금계집》이 단양에서 최초 간행된 것은 저자가 단양 군수를 역임하면서 공부(貢賦)의 감면을 얻어 내 이 고을에 큰 은공을 끼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황의 〈행장〉에 따르면, 원래 저자가 남긴 시문은 4권(문집 2권과 시집 2권)으로 엮어져서 집안에 갈무리되어 있었다. 손여성이 황수량과 함께 이황에게 편차를 부탁할 때 저본으로 삼은 것도 아마 이 4권으로 된 가장본(家藏本)이었을 것이다. 이황은 가장본을 받아 들고 1564년부터 교열을 보기 시작하여 편차를 마친 뒤 이산해에게 발문을 청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단양 군수로 온 황응규(黃應奎, 1518~1598)가 1584년(선조17) 초고본과 초간본을 대조, 검토하여 잘못된 글자 13자를 정정하여 고이(考異)를 작성하여 추각(追刻)한 뒤 끝에 〈지(識)〉를 붙였다.
외집은 여러 단계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정구(鄭逑, 1543~1620)가 1607년(선조40) 1월, 안동 부사로 부임하여 단양 초간본에서 빠진 내용을 중심으로 유고를 외집 8권으로 편차, 교수하고 손수 깨끗이 써서 간행하려 했다. 그런데 그만 11월 사직하고 귀향하게 되자 정리된 유고를 저자의 후손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다. 그 뒤 후손들 형편이 여의치 못해 간행하는 일이 천연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단양의 초간본 판목이 화재로 상당수 타버리자 다시 간행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1738년(영조14) 저자를 배향한 풍기의 욱양서원 원장 이만화(李萬華)가 서원 유생들과 중간할 일을 논의하여 경비를 마련하기로 하고, 종손 황상화(黃尙鏵)를 중심으로 다시 간행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일을 마치지 못하고 황상화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김익경(金翼景)이 종손 황윤덕(黃潤德) 등 풍기지역 인사들과 함께 마무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우선 당시 안동을 대표하는 문인 이광정(李光庭, 1674~1756)에게 교정과 발문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755년(영조31) 이광정은 정구와 이황이 정한 편차를 존중해서 내집과 외집을 합편하지 않고 본래 체재대로 간행에 붙였다. 다만 황응규의 ‘고이’를 반영하고 문집 말미에 행장과 만사 등 저자를 추모하는 글을 부록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욱양서원에서 중간본이 나오게 된 경위이다. 그로 인해 내집과 외집 말미에 각각 이산해와 이광정의 발문이 붙게 된 것이다.
4. 《금계집》의 편차구성
《금계집》은 부록을 제외하면 목록(目錄), 내집(內集) 4권, 목록, 외집 9권, 합 13권 5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먼저 내집을 살펴보자. 권두에 내집 목록 6판(板)이 보이고, 권1~권3은 모두 시(詩)인데, 권1에는 92제(題) 117수(首), 권2에는 111제 123수‚ 권3에는 33제 37수가 각각 실려 있다.
권4에 잡저(雜著)로 기(記) 2편, 서(書) 10편, 제문(祭文) 1편, 소(疏) 1편, 변(辨) 1편, 발(跋) 1편, 상량문(上樑文) 1편 등 모두 17편이 들어 있다. 권5에는 찬술 연도가 나와 있지 않은 이산해의 내집 〈발문〉 1편이 붙어 있고, 끝 부분 마지막 쪽에 1584년 ‘고이(考異)’ 13자에 대해 설명한 황응규의 〈지(識)〉가 실려 있다. 그렇지만 권두의 내집 목록에는 권5가 없으니 아마도 뒤에 황응규가 추각(追刻)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어서 외집을 살펴보자. 권두에 외집 목록 17판이 보이고, 권1~권6은 모두 시인데, 권1에는 65제 110수, 권2에는 127제 142수, 권3에는 83제 89수, 권4에는 76제 96수, 권5에는 124제 136수‚ 권6에는 120제 134수가 각각 실려 있다.‚
권7에는 소(疏) 2편‚ 전(箋) 3편‚ 서(書) 18편이 실려 있다. 권8은 잡저(雜著)로 의(議) 2편‚ 변(辨) 1편‚ 논(論) 1편‚ 설(說) 1편‚ 후(後) 5편‚ 기(記) 1편‚ 조(詔) 1편‚ 격(檄) 1편‚ 서(書) 1편‚ 송(頌) 2편‚ 부(賦) 1편‚ 책문(策問) 1편‚ 명(銘) 4편‚ 잠(箴) 1편‚ 찬(贊) 1편‚ 상량문(上樑文) 1편‚ 제문(祭文) 2편‚ 묘지명(墓誌銘) 1편‚ 대책(對策) 2편이 차례로 실려 있으니, 모두 합하면 31편이 된다. 이상 내집과 외집 합 13권에 수록된 작품의 수효를 헤아려 보면, 대략 시가 830제 984수, 산문이 85편에 달한다.
권9는 부록으로, 이황이 찬술한 〈행장(行狀)〉 1편, 이황ㆍ박승임ㆍ오건ㆍ정구가 쓴 제문(祭文) 5편, 이황의 〈만사(挽詞)〉 2수, 이황이 지은 〈금양정사완호기문(錦陽精舍完護記文)〉 1편과 이에 대한 류운룡(柳雲龍)의 〈발문〉 1편이 부기되어 있다. 권말에는 1755년 중간본의 간행 전말을 기술한 이광정의 외집 〈발문〉이 붙어 있다.
5. 《금계집》의 내용특징
《금계집》에 수록된 한시는 천 수에 가깝다. 저자의 47년 생애에 비추어 결코 적은 수효가 아니다. 큰 전란을 겪지 않아서 비교적 작품의 유실이 거의 없었고 후인들이 원고를 수습하기 위해 애쓴 결과가 아닐까 한다. 문집에 실린 시는 체식을 고려하지 않고 저작 시기에 따라 안배한 듯하다. 몇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황준량의 시세계를 요약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로 한다. 이를 위해 의미 있는 선행연구를 적극적으로 참고했다.
우선 황준량의 시에서 환로(宦路)를 뒤로하고 선계(仙界)를 동경하는 청정지향이 두드러진다. 일종의 이은(吏隱)의식이 표출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이와 연계되어 나타나는 시세계는 산수풍류(山水風流)이다. 산과 물을 찾아 소요하며 솟아나는 멋스런 흥취를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 상당수에 이른다.
황준량의 산수풍류는 전반기엔 주로 풍기의 소백산과 백운동 죽계, 그리고 예안의 분강, 청량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초기에는 이현보와 주세붕, 이황 등이 주도하는 모임을 통해 추구되었다. 이현보의 〈취시가(醉時歌)〉를 차운한 〈점암석상(簟巖石上)〉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인데, 당시 강호풍류(江湖風流)의 현장을 잘 묘사하고 있다. 술, 노래, 풍악, 춤, 기녀 등이 어우러지는 〈한림별곡(翰林別曲)〉의 호탕한 문인풍류를 그대로 강호로 옮겨온 듯한 느낌을 준다. 훗날 이황이 강조한 절제된 사림의 미의식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보다 다양한 산수풍류는 1545년 이후, 지리산 유람을 시작으로 생애 후반기에 나타나는데 행공(行公)의 현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관료 생활 중 서울과 풍기를 자주 오가며 접한 풍물을 매개로 흥기된 감흥이나 감군어사로 지역을 순행하면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과 고적을 탐방하면서 느낀 생각을 빠짐없이 시편에 담았다. 또한 신녕 현감, 단양 군수, 성주 목사를 역임하면서 속리산, 구담, 가야산 등을 유람한 바 있는데, 이때 이지번(李之蕃, 1508~1575), 금응빈(琴應賓), 노경린(盧慶麟, 1516~1568), 권응인(權應仁, 1517~1588?), 오건(吳健, 1521~1574) 등이 그의 풍류를 풍부하게 만들어준 훌륭한 파트너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황준량은 민고(民苦)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덕현기행(德峴紀行)〉과 같은 장편고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앞의 산수풍류 시에서 낭만적 정조가 우세하다면 현실비판 시에서는 서사적(敍事的) 자아가 크게 움직이고 있다.
황준량의 시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은 역시 이황이다. 황준량은 평소에 이황을 정신적 지주와 같이 여겼기에 면강(面講)과 시문을 통해 끊임없는 소통을 시도하였다. 주세붕과 이현보가 세상을 떠난 뒤에 양인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졌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수창시(酬唱詩)가 생산되었다. 양인 사이의 내밀한 정감의 교류를 엿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여러 편 보인다. 그밖에 내직으로 들어가거나 외직으로 나가는 이들을 전별하며 지은 시도 적지 않다. 다만 별리의 아쉬움과 상대에 대한 격려가 주된 내용이어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황준량의 한시는 대부분 차운(次韻)이나 화운(和韻)을 통해 지어졌다. 이른바 수창시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주동적 계기에 따라 독립되고 자연스러운 서정이 바람직하지만 당시에는 상대를 의식하고 시를 짓는 일에 능숙해져야 했다. 수창시는 시가창작이 하나의 생활 교양으로 인식되던 시절에 있을 수 있는 문학적 대화의 한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시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 방식이라 생각하면 수창시도 나름 의미 있는 창작행위로 볼 수 있다. 황준량은 이황이나 동문들뿐 아니라 승려와 수창하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지웅(志雄), 신종(信宗), 신우(信牛), 도명(道明), 종수(宗粹), 옥준(玉峻), 보기(寶器), 희안(希安), 법행(法行) 등등 산승들을 우호적으로 대우하고 불교의 세계도 선의로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 작품에서 감지된다.
황준량은 장편 고시에 능했다. 그만큼 다양한 시어를 큰 고민 없이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평소 내장된 문학콘텐츠가 풍부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보면 장편시는 일면 서사(敍事)와 의론(議論)을 지향하는 경향이 강하다. 스토리 구성이 가능한 산문적 내용을 실어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앞으로 이 점에 유의해서 황준량 한시의 또 다른 특징과 매력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황준량은 논사(論事)가 명쾌해서 시보다 산문에 특장이 있다고 말한다. 문집에 수록된 85편의 산문 가운데는 잠(箴)이나 명(銘)처럼 운문에 가까운 글도 일부 있다. 또한 처조부인 이현보를 대신해 지은 글이 몇 편 보이기도 한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작품을 골라 간략히 소개함으로써 거칠게나마 저자의 산문 세계를 엿보기로 한다.
〈회암서절요발(晦菴書節要跋)〉은이황이《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한 뒤 성주 목사로 있던 저자에게 간행의 전말을 적도록 청해서 나온 글로 그를 퇴계학파의 중심에 서게 한 중요한 문건이다. 글 속에서 저자는 주자학의 적통으로 불리는 송나라 왕백(王柏)과 하기(何基), 명나라 오눌(吳訥)과 송렴(宋濂) 등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위업을 이황이 완수했다고 하면서 “장차 이 책이 간행되면 《근사록(近思錄)》과 함께 사서(四書)로 올라가는 계단이 될 것이고, 그 규모의 방대함과 심법(心法)의 엄정함은 곧 앞의 네 선생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점이 더 있을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간행 의의를 부여했다.
〈서송고종친정조후(書宋高宗親征詔後)〉는 송나라 고종(高宗)이 거듭된 금(金)나라의 침략에 맞서 친정(親征)하겠다고 조서를 내린 것을 두고 논평한 글이다. 그는 유약한 군주 고종의 행위가 현실을 미봉하기 위한 하나의 책략에 불과하여 거의 진정성이 없다고 본다. 이 대목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향한 복수설치(復讐雪恥)가 강조되던 시절, 효종과 송시열 등이 주장한 북벌론(北伐論)의 허구를 꼬집는 듯한 논조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연상하게 해준다. 〈서화당시고취후(書和唐詩鼓吹後)〉는 소식(蘇軾)이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차운한 일을 예로 들면서‚ 작시와 화운의 어려움을 토로한 글이다.
황준량은 향촌교육을 진흥한 인물로 기억될 만한 목민관이다. 1557년 단양 군수로 있으면서 단양 향교를 중건한 바 있다. 〈단양향교중창기(丹陽鄕校重創記)〉는 10여 년에 걸친 가뭄과 전염병으로 인해 생도들도 모두 흩어져서 향교가 없어질 지경에 놓였다고 단양 고을의 피폐상을 말하면서 그럴수록 향교 교육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자양서당기(紫陽書堂記)〉는 1552년 자양서당을 건립한 내력을 적은 글인데, 저자는 이익과 봉록만 찾으려는 학습 태도를 비판하면서 강학(講學)과 명도(明道)‚ 치용(致用)을 일치시켜야 한다고 했다. 〈여녹봉정사제생서(與鹿峯精舍諸生書)〉에서 저자는 문장의 구두나 의미를 풀이하는 학문이나 명성과 이익 추구에 집착하는 태도를 지양하라고 했고, 〈답기화질서(答寄澕姪書)〉에서는 성경(誠敬)과 쇄소응대(灑掃應對)를 중시하는 《소학(小學)》의 실천정신이 수양공부에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또한 〈답남몽별서(答南夢鼈書)〉에서는 도학에 뜻을 둔 학자는 의리(義利)의 경중을 잘 알아서 도덕을 확립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하면서 명성과 이익의 추구에 골몰하는 세태를 거듭 비판했으며, 〈여영봉서원제생서(與迎鳳書院諸生書)〉에서는 성인의 학문이 일상생활에서 내외교수(內外交修)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호유무변(四皓有無辨)〉은 한나라 때 상산(商山)에 은거했다고 전하는 수염이 흰 4명의 노인의 존재를 부정한 글이고, 〈도원변(桃源辨)〉은 동양의 유토피아, 무릉도원(武陵桃源)의 허구성에 대해 논파한 글이다. 무릉도원은 실재하지 않으며 호사가들이 꾸며낸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본다. 이 두 편의 글을 통해 우리는 황준량의 합리적 사유와 실증을 중시하는 역사의식을 읽을 수 있다.
〈균전의(均田議)〉는 저자의 사회경제 사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여기서 ‘균전’은 곧 ‘정전(井田)’의 다른 표현이다. 맹자가 왕도정치의 출발점을 정전제에서 찾았듯이, 극심한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농민의 토지로부터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대론자들의 저항을 밀어내고 반드시 정전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상은 그가 주장한 강학(講學), 명도(明道), 치용(致用) 일치론의 연장선에서 나왔다고 본다. 현실 속에 학문이 있다는 생각은 관념으로 흐르기 쉬운 성리학적 사유를 보정해주기에 충분하다.
〈석면반상복론(釋冕反喪服論)〉은 주나라 성왕(成王)이 죽었는데 장례를 치르지 않고 강왕(康王)이 면복(冕服)을 입고 신하를 조견했다는 사실을 놓고, 비례(非禮)라고 한 소식의 주장을 논박한 글이다. 황준량은 예를 획일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엔 권도를 발휘하여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편지 글은 스승 이황과 문답한 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자신의 근황을 소개하거나 이황의 안부를 묻는 글도 없지 않지만 편지의 주된 화제 거리는 아무래도 학문과 독서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이황이 발문을 쓴 《이정수언(二程粹言)》의 교정과 편집을 둘러싼 이야기라든지, 문열서원(文烈書院) 배향의 위차 문제라든지, 《소학》, 《근사록(近思錄)》, 《주자서》, 《심경》, 〈낙서(洛書)〉 등의 독법에 대한 논의라든지, ‘사칠논변(四七論辨)’에서 기대승의 견해를 비판한다든지 하는 내용이 주로 보인다.
〈상주신재논죽계지서(上周愼齋論竹溪志書)〉는 도학으로 유학을 진작시킨 안향의 유학사상의 위치를 논하고 이를 현창한 주세붕의 공적을 찬미하면서, 1544년 찬술한 《죽계지(竹溪志)》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다. 황준량은 《죽계지》의 편목을 보고, 안씨(安氏)들의 사적(事蹟)이 주로 실리는 가운데 주자의 글을 넣는 것은 온당치 못하며, 한 때의 희학(戲謔)에서 나와 후세인이 영송(詠誦)할만한 가치가 없는 〈죽계별곡〉 같은 경기체가는 삭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머리말에서도 언급했듯이, 고전시가를 연구하는 이들이 한두 번쯤 꼭 정독해야 할 만큼 문학적 비중이 있는 글이라 하겠다.
황준량의 대표적인 정론산문으로 앞서 언급한 〈단양진폐소〉와 함께 〈청혁양종소(請革兩宗疏)〉를 꼽을 수 있다. 저자는 “천민으로서 노역을 싫어하는 무리나 사대부 자손으로서 무식한 자들이 다투어 중이 되는 일을 영예롭게 여기고 부러워하고, 점차 그 흐름을 좇아 마침내 안락만 추구하고 고된 일은 회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어른이나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유행을 따라 숲으로 숨어들고 산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물고기처럼 모였다가 새처럼 흩어지는 무리들을 붙잡아 올 방법이 없어서 전하의 나라는 텅 비어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요역의 회피를 통한 군사력 결손의 문제를 직시했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신하가 임금을 배반하며 인간 도리를 끊고 하늘의 이치를 멸절(滅絶)시키는’ 불교의 문제점에서 군부(君父)의 부정을 통한 인륜의 파괴를 반문명적 사태로 규정했다. 이 때문에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부활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승과(僧科)를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우리 유학자는 숨을 죽이고 승려 무리는 소매를 떨치며 활보하고 있는’ 세태에 분개한다. 그렇지만 불교의 교리를 공격하기보다 사회 경제적인 폐해를 지적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논의를 이끌어가는 점이 인상적이다.
〈거관사잠(居官四箴)〉은 ‘청렴하게 처신할 것(持己以廉)’‚ ‘사랑으로 백성을 대할 것(臨民以仁)’‚ ‘공정하게 마음을 유지할 것(存心以公)’‚ ‘부지런히 일할 것(莅事以勤)’ 등 목민관이 지켜야 할 네 가지 복무 자세를 간결하게 제시한 글이다. 이는 훗날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주요 강령으로 강조되었던 내용과도 연결되는 면이 있다. 또한 실제로 황준량은 자신이 정한 복무 자세를 현장에서 실천하였다. 이황은 〈행장〉에서 황준량이 지방에서 고을살이를 할 때, 주어진 직무(職務)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공문서와 장부 처리에 몰두하여 고을 백성을 위한 일에 진력했다고 적었다.
그밖에 사관의 자질을 논한 〈문사재득실순박(問史才得失純駁)〉, 의리(義利)의 구분 문제를 논한 〈의리지분(義利之分)〉, 정치의 요체를 논한 〈문법구폐생(問法久弊生)〉, 형벌의 집행 문제를 논한 〈형(刑)〉, 역사적 인물의 장단점 평가기준을 논한 〈장량, 제갈량, 도잠, 두보, 악비,문천상지소우소처(張良諸葛亮陶潛杜甫岳飛文天祥之所遇所處)〉, ‘존덕성’과 ‘도문학’을 모두 온전하게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존덕성도문학(尊德性道問學)〉 등의 책문도 황준량의 사상적 흐름을 가늠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준다.
6. 맺음말
이산해는 28세 때 《금계집》 발문을 썼다. 대학자 이황의 간곡한 청에 부응한 것이다. 이황이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를 제치고 젊은 이산해에게 발문을 부탁한 이유가 필시 있었을 것이다. 황준량은 단양 군수로 있을 때 구담(龜潭)에 은거했던 이지번과 잦은 만남을 가졌다. 이황의 전언에 따르면, 황준량과 이지번은 얼음이 언 강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다고 한다. 썰매를 이용하여 서로 단양 관아와 이지번의 처소를 오갔던 것이다. 그로테스크한 취미가 마음의 장벽을 쉽게 허물어 버릴 수 있었다. 이처럼 황준량과 이지번은 무언가 속 깊은 이야기를 흉금을 털어 놓고 나눌 수 있던 지기였다. 이지번은 이산해의 아버지였다. 이황은 이지번의 아들이라면 황준량의 글을 꼼꼼히 읽고 반듯한 논평을 내놓으리라 믿었던 것이 아닐까.
이산해는 《금계집》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에 잠겼을지 궁금하다. 그는 황준량의 시문를 평하여 이렇게 말했다. 시는 “성정(性情)에 바탕을 두고 음률을 조화시켜 화려함과 실질을 겸비하였고 의미가 심원하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서 지필묵을 잡고 글을 지으면 처음에는 엉성하여 주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듯하지만, 읽어보면 봄 구름이 하늘을 떠가는 듯 하늘의 꽃잎이 햇살에 비치는 듯 원숙하고 혼후하여 그 끝을 다 엿볼 수가 없다.” “어찌 평범한 문인, 재사(才士)들이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대단한 극찬이 아닐 수 없다. 이산해의 평어가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상론을 피하고 향후 관련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기는 편이 좋겠다. 다만 당대 중앙의 관각(館閣)에서 활동한 관료출신 문인 가운데서 황준량의 글쓰기 수준을 능가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하고 자문해본다. 그만큼 그의 문예역량이 범상치 않았음이 분명하다.
황준량은 풍기 출신이었기에 자기 고장에 창설된 백운동서원과 인연이 깊었다.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후학으로서 상호 관심사를 논의했을 뿐 아니라, 백운동서원 원장으로 있던 김중문(金仲文)이 말썽을 일으켜 관청의 개입을 자초하는 등 서원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상황을 수습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백운동서원
(소수서원)과 관련한 황준량의 활동이 일부 밝혀지긴 했으나 아직도 세밀하게 검토할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본다. 사실 황준량은 ‘백운동 학풍’의 수혜자로서 이를 계승 발전시킬 책무가 있는 사람이다. 여기서 ‘백운동 학풍’이란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설하고 이황이 이를 이어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격상해 가는 과정에서 함께 추구한 도학 정신과 풍류 정신을 지적해 말한 것이다. 그 사이에 예안 분강에서 꽃을 피운 이현보의 강호풍류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다만 이현보의 강호 풍류는 주세붕의 유흥적 풍류 기미와 중첩되는 면이 있어, 후배인 이황에게는 수용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이 대목을 황준량은 유념했다. 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그는 이황의 교시에 따라 《심경》, 《근사록》, 《주자서》를 가까이 하면서 도학적 지향을 강화해나갔다. 그에 따라 황준량의 문예미학적 취향도 강호풍류인 〈어부사(漁父詞)〉에서 계산풍류(溪山風流)인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으로 선회하지 않았을까 한다.
지금까지는 황준량은 이현보, 주세붕, 이황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주변 인물로 심심치 않게 언급되어 온 줄로 안다. 영화 배역으로 치면 조연 아니면 엑스트라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의 번역서 출간을 계기로 앞으로는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서,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서 당당하게 그의 진면목이 논의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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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