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은 시절인연(時節因緣)
사람과의 만남도, 일과의 만남도, 소유물과의 만남도,
깨달음과의 만남도, 유형 무형의 일체 모든 만남은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정확한 법계의 이치에 따라 꼭 만나야 할 바로 그 때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시절인연이 무르익지 않으면
지천에 두고도 못 만날 수 있고, 아무리 만나기 싫다고 발버둥을 쳐도
시절의 때를 만나면 기어코 만날 수밖에 없다.
모든 마주침은 다 제 인연의 때가 있는 법이다.
그 인연의 흐름을 거스르려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우주적인 질서다.
만날 사람은 꼭 다시 만나게 된다.
다만 아직 인연이 성숙하지 않았을 뿐,
만나야 할 일도, 만나야 할 깨달음도, 인연이 성숙되면 만나게 된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는데, 분명 능력은 다 갖추고 있는데
아직 직장을 가지지 못했다고?
무엇 하나 그리 부족한 것도 없는데 제 짝을 찾지 못했다고?
열심히 참선하고 정진했는데 깨달음은 찾아 올 생각을 안 한다고?
아직 시절 인연을 만나지 못한 탓이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거의 다 올라왔는지, 중간만치도 못 올라왔는지,
아직 시작도 못 했는지 상대편에서는 볼 수 없지만
분명 그 사람은 꾸준히 계단을 오르고 있고,
언젠가는 계단 위의 사람들에게 불쑥 얼굴을 보일 때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시절 인연은 겉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안으로 속으로 전체적인 질서에 의해 여무는 것이다.
아무리 만나고 싶고, 만나길 원해도 인연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아직은 차분한 마음으로 더 기다려야 할 때다.
안으로 인연의 씨앗이 잘 싹 틀 수 있도록 잘 가꾸어야 할 때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 너무 보고 싶어 안달하지도 말라.
성급하게 생각지 말라.
시절 인연이 되어 만남을 이룰 때,
그때 더 성숙된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다만 자신을 가꾸라.
사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인연은 내 밖의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일 뿐이다.
모든 만남은 내 안의 나와의 마주침이다.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도 그 사람과의 만남은
내 안의 바로 그 싫은 부분을 만나는 것이며,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도 내 안의 이기의 일부분이
상대로써 투영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것은 내 안의 놓치고 있던 나를 만나는 숭고한
'나를 깨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이어가지만
그 만남을 아무 일도 아닌 양 그저 쉽게 소홀히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그 모든 사람은,
설사 그것이 아주 잠깐 스치는 인연일지라도
진지하고도 분명한 우주적인 메시지를 담고 온다.
다만 우리가 그 만남의 의미를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모든 만남은 우리에게 삶의 성숙과 진화를 가져온다.
다만 그 만남에 담긴 의미를 올바로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는 인연일 뿐이지만 그 메시지를 볼 수 있고
소중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에게 모든 만남은 영적인 성숙의 과정이요,
나아가 내 안의 나를 찾는 깨달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아직 존재의 본질에 어두워 만남 속에 담긴 의미를 찾지 못할지라도
그 만남을 온 존재로써 소중히 받아들일 수는 있다.
하루에도 수 십, 수 백 번이나 펼쳐지는
'만남'의 진리를 진리로써 온전히 받아들이고
소중히 가꾸어 갈 수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부처'요,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다.
좋은 사람이든, 싫은 사람이든, 적이든, 내 편이든,
이익을 주는 사람이든, 손해를 주는 사람이든,
그 모든 사람이 내게 진리의 메시지를 전해 주기 위해
이 법계에서 보낸 부처요 관세음의 화신인 것이다.
결코 만남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그 어떤 만남도., 내게 어떤 소중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음을 알라.
이를테면 첫 만남에서부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내 과거의 탁한 업을 녹여주기 위한,
또 내 안의 미움을 생생하게 비춰주기 위한 법계의 배려로써
내 앞에 나타난 인연일 수 있다.
그러니 모든 종류의 만남은 다 좋은 것이다.
좋고 싫은 것 가운데 좋은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좋음이 아닌,
좋고 싫음이 없는 전적인 좋은 그런 것이다.
당장에는 나쁜 만남인 것 같아도 전체적인 관점,
전 우주적인 관점, 내 전 생애에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만남은 내게 좋은 만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실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모든 만남을 맑고 향기롭게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 내면이 성숙하면 만남도 성숙하지만
내 내면이 미숙하면 만남도 미숙할 수밖에 없다.
미숙한 사람에게 만남은 울림이 없고 향기가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이 빛을 보면 시절 인연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온 우주와 만날 수 있다.
그 누구와도 이미 청정한 만남은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일과 직업이,
바로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소유물들과의 만남이
바로 지금 내 주위에서 매일같이 부딪치는 사람이며
친지, 친구, 가족들이 그렇게 내가 꿈에도 그리며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사람’이요, ‘바로 그 만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만남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모든 만남은 붓다의 선물이요,
신의 사랑이다. 아니 우린 항상 부처를 만나며,
신과 함께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남의 눈을 뜨고 내 주위를 살펴야 한다.
(달마넷, 법상 스님 칼럼)
출처 : 지리산 천년 3암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