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지식은 과연 객관적인가 (2)
논리적 비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귀납적 추론
영국의 철학자 러셀의 저서, 『철학의 제 문제』에는 칠면조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각색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주인집 아저씨는 저를 시장에서 사다 자신의 농장에서 길렀습니다. 그런데 주인아저씨는 매일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저희들에게 모이를 주기 전에 항상 종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혹시 주인이 바보가 아닐까. 왜 저런 쓸데없는 행동을 할까.' 하고 의심도 해 보았죠. 하지만 하루도 아니고 세 달 이상을 그렇게 하니까 저는 '주인아저씨는 우리에게 모이를 주기 전에 항상 종을 친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인아저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종을 쳤습니다. 저는 그 종소리를 듣고 '주인아저씨가 모이를 주는 구나.' 하고 생각하고는 부리나케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주인아저씨에게 저는 목이 잘려 식탁에 올려졌습니다. 알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이 유명한 칠면조의 예는 귀납추론의 문제를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칠면조가 내린 결론과 전제는 이렇다.
(결론) 주인아저씨는 오늘도 우리에게 모이를 줄 것이다.
(전제1) 왜냐하면 주인아저씨는 항상 종을 친 다음에 우리에게 모이를 주었다.
(전제2) 오늘도 주인아저씨는 종을 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면조의 귀납적 추론은 논리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연역적 추론법을 귀납적 추론에 적용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이다. 연역적 삼단논법을 보자. 대전제:"A이면 B이다." -> 소전제:"A이다" -> 결론:"B이다." 그러나 이를 귀납적 추론에 적용하면 칠면조의 결론과 같은 그릇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까지 관찰된 모든 백조가 희다. 이 새는 백조이다. 따라서 이 새는 희다'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즉 지금까지 이루어진 관찰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모든 백조는 희다.'라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흰 백조를 관찰한다 하더라도 '모든 백조는 희다.'는 추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검은 백조를 관찰하기만 하면 '모든 백조는 희다.'는 결론은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태양은 매일 뜬다'라는 명제도 항상 참일 수는 없다. 태양이 매일 뜬다는 것은 수천만 년 동안 태양이 뜬다는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례를 일반화한 귀납적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행성이 대폭발로 자취는 감추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천문학적 상식을 감안한다면 '태양은 매일 뜬다'라는 명제도 충분히 기각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례에서 참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론을 부정하는 사례가 한 번만이라도 나온다면 그 이론의 참은 기각되고 마는 운명에 놓인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뒤엎고 지동설을 주장했으며, 천문학자 브라헤는 천동설을 옹호하기 위해 행성을 관측했지만 그의 제자 케플러는 동일한 자료를 토대로 지동설을 주장했고 나아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근대 자연과학의 기반인 뉴턴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을 부정했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고전 물리학의 결정론적인 사고를 무너뜨렸다.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것도 평면기하학, 즉 유클리트 기하학에서는 성립하는 명제이지만 비유클리트 기하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구면기하학에서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크기 때문이다. 평행선은 <한직선 A와 A 위에 있지 않은 한 점 P가 주어질 때 P를 지나서 A와 평행인 직선 m이 유일하게 존재한다>라는 것이 이른바 '평행선의 공리'다. 이 공리는 평면기하학에서는 진리로 성립될지 몰라도 공과 같은 구면에서는 진리일 수가 없다. 공의 둘레를 지나는 원을 그리고 이 원과 만나지 않는 수많은 원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과학이 주장하는 모든 지식은 장차 언제나 기각될 수도 있는 운명을 가진 불완전한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천동설은 지동설로, 케플러는 뉴튼으로, 뉴튼은 아인슈타인으로, 상대성이론은 장차 또 다른 대체 이론으로 계속 변해 갈 운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명제들은 적어도 경험적 관찰에 의해 반증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이 ‘진짜 과학’이고 어떤 것이 ‘사이비 과학’인가를 학문적으로 규정하려고 했던 과학철학자 칼 포퍼(1902-1994)는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짓는 기준을 ‘반증가능성’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이 1916년 발표한 일반상대성 이론은 관찰결과로 참과 거짓이 판명될 수 있는 과학이다. 중력에 의해 시공간(時空間)이 휜다는 이론을 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은 개기일식 때 별빛이 태양의중력에 의해 휘는 것을 밝혀냈다.
칼 포퍼는 『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처럼 반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녀야 참과학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이나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명쾌한 설명력 때문에 새로운 진리에 눈이 뜨이는 효과를 주기는 하지만 반증의 여지가 없으므로 참된 과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칼 포퍼는 ‘과학은 객관적이며 합리적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아름답지만,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성시하고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과학의 발전은 기존 이론의 오류를 찾아 더 나은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칼 포퍼는 그의 과학철학을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시키려 하였다. 칼 포퍼는 과학이 반증을 통해 발전하듯이 사회도 비판과 성찰을 통해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회의 문제점은 반증과 비판과 토론을 통해서 개선해나가야 하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타인의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사회’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험은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가
실험을 할 때는 가급적이면 외부의 변수를 줄여가야 한다. 실험을 하는 용액에 불순물이 가라앉으면 곤란하다. 실험자들이 흰 가운을 입는 것은 이런 상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기침할 때의 미세한 침을 방지하기 위해 실험자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기도 한다. 고성능 먼지 집진기를 설치한 실험실도 있다. 습기가 실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제습기를 설치하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습기를 제거하게 되면 정전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 정전기가 실험의 변수가 되면 안 되니 정전기 방지 시설 또한 마련해야 한다. 실험실 창 밖에서 굴착기의 소음이라도 들려오면 곤란하다. 완벽한 방음시설을 갖춘다 할지라도 실험자의 숨소리는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실험실 위로 고압선이라도 지나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래저래 실험실은 외부의 변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외딴 곳에 설치될 수밖에 없다. 모든 변수들로부터 해방된 공간을 마련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실험실을 지었다고 해도 중력이란 변수가 또 문제가 된다. 이런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서 무중력 상태에서의 실험도 강행해보지만 외부적 변수를 제로로 만들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변수가 달라지면 실험의 결과도 달라진다. A에서 실험한 결과가 B라는 곳에서의 결과와 다르다면 A란 곳에서 타당한 것이 B라는 곳에서도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언제나 오차는 존재한다. 과학은 객관적인 지식이라는 견해는 사실 이런 오차를 모르는 데서 오는 헛된 믿음인지도 모른다. 모든 변수를 고려해서 이론을 만들었노라 자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무수한 변수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초대형 돌개바람 토네이도가 어느 쪽으로 진행될 것인가를 예측하고, 그 예측된 결과를 사람들에게 알려 토네이도의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것이 영화 <트위스터>에서의 주인공 과학자의 의도였다. 그러나 자연을 100퍼센트 이해하기란 역부족이다. 토네이도의 앞길에는 무수히 많은 변수가 있고, 아무리 엄청난 능력을 자랑하는 슈퍼컴퓨터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변수를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진리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잠정적이고 오류 가능성이 있는 일종의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최영준은 <과학은 객관적인가>라는 글에서 필자는 관찰과 실험의 객관성이 위협받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 과학적인 관찰과 실험 그 자체가 특정한 과학지식과 이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테면 어떤 세균의 특성을 알기 위해 배양실험을 한다고 할 때 실험자는 세균 배양용액의 성분, 온도, 습도, 시간 등은 자세히 기록하겠지만 배양용기의 크기나 모양, 재질 같은 것은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실험에 관계된 사항들 중 무엇이 세균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자료이고 무엇이 불필요한 것인지를 미리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실험의 구성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정해진 시간에 관찰자가 습득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찰자는 관찰에 앞서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관찰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관찰의 이론의존성'이라 부른다. 즉 과학적 관찰과 실험은 그에 앞서 특정한 지식과 이론적 가설을 전제로 하여서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과학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자 하는 방법으로,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본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 이유는 먼저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물의 실험에는 중요한 전제가 따른다. 동물의 경우에도 타탕한 것이 인간에게도 타당하다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동물 실험은 의미가 없어진다. 동물실험은 바로 이러한 전제가 참이라는 것을 가정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동물실험의 타당성을 의심하게 하는 사례가 자주 목격된다. 예를 들어 페니실린은 인간에게는 안전하지만 기니피그에는 독성을 나타낸다. 쥐(rats)에게는 비타민 C의 섭취가 필요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필요하다.
실험용 쥐와 인간은 유사할 수는 있어도 동일할 수는 없다. 실험용 쥐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타났다고 해서 반드시 쥐에게 나타났던 반응이 인간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고는 할 수 없다. 쥐에게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으니 인간에게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리라는 것이 유비적 추론이다. 바로 이 유비적 추론이 진실일 때만 과학은 절대적인 지식의 체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정에 불과한 것이지,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지식이 될 수는 없다.
과학의 역사를 통해서도 과학 지식은 불변의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계속 변화되고 발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관찰에 바탕을 두어 형성된 과학 지식은 새로운 증거가 나타난 즉시 새로운 내용과 체제로 바뀌었다. 이와 같이 과학은 절대적 지식의 체계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아 가지는 실천적 능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과학의 실천적 능력이 곧 과학기술이 가는 엄청난 효율성이다. 과학에 대한 신봉은 곧 이 효율성에 대한 신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막강한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환경오염과 산업재해, 대형기술사고 등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가 않다. 과학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 과학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있다는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