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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에 대학은 아름답다. 화사한 봄꽃들과 잘 정돈된 교정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봄의 에너지에 캠퍼스를 누비는 대학생들의 젊은 활기가 더해져서 아름다운 것이다. 코로나로 오래 비어있었던 교정에 신입생들의 들뜬 목소리가 돌아오니 더 그런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이 4월은 새 생명이 태어나고, 한겨울의 고난을 뚫고 다시 살아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반가운 마음은 곧 어두워진다. 올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선거에서 젊은이들이 남성과 여성으로 편을 갈라 서로 심하게 다투는 모습이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에서도 균열은 정확히 반영되었다. 이른바 ‘이대남’과 ‘이대녀’의 젠더 대결이었다. 큰 쟁점이 없었던 선거에서 주요 정당이 내놓고 선거 전략으로 추진한 터여서 갈등은 더 두드러졌다. 젊은이들과 한국 사회를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는 처지에서 매우 당혹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였다.
사실 노동사회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금 우리 20대 젊은이들의 고뇌와 갈등은 단순히 가부장제 성차별 문제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대학에서 남녀 학생들이 심각하게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00년대 초반 군가산점제 폐지 논란 때였다. 외환위기 직후의 고용 대란 속에서 갑자기 폐지된 군가산점제도가 대학생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 시위’와 최근의 미투 운동, ‘여혐’과 ‘남혐’ 논란에 이르기까지 젠더 갈등(gender conflict)은 끝을 모르고 확산하였다.
오랜 가부장제 성차별 외에 갈등을 부추긴 구조적 요인에는 무엇보다 취업 등 경제적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주지하듯이 청년들의 고용 사정은 지난 30년 가까이 악화 일변도의 길을 걸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구조 변동과 정부의 시장주의 정책으로 안정된 일자리는 자동화되거나 아웃소싱(outsourcing, 외주화)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를 대신한 것이 ‘위험하고 힘들고 불결한’(dangerous difficult dirty) 3D, 비정규직 일자리들이었다. 젊은이의 시야에서 보면 앞선 세대와 달리 갑자기 취업절벽과 고용 대란, 비정규직 천지의 지옥, ‘헬조선’이 펼쳐진 셈이었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고 미래와 심지어 삶을 포기하는 삼포세대, N포세대가 사회적 일상이 된 것도 이런 변화 때문이었다. 청년과 노인 자살률은 단기간 급상승하였고 거의 20여 년 가까이 압도적인 세계 최고를 기록하였다.
젊은 남성 청년들은 자신이 성차별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로 느낀다. 그들은 성장 과정에서 핵가족 제도에서 가해자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징병제 군 복무나 여성가족부, 그리고 여성할당제 등으로 인해 취업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강요받고 있다고 본다. 대학을 나온 고학력 남성이 취업에 거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고 성차별에서 가해자였던 이전 부모 세대와는 세상이 바뀐 것이다. 지금 이대남은 여성과의 경쟁에서 밀려 비정규직 이류인생의 나락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집단적 공포에 떨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공포는 최근 유행으로 번진 젊은 세대의 ‘영끌’과 ‘빚투’의 주식투자, 부동산투기 열풍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대학생이 밤을 지새워 알바 노동해서 돈을 벌고 그것을 모아 주식투기(투자)에 나서는 모습은 대학가에서 이제 더는 낯설지 않다.
젊은 남성의 두려움 반대편에는 젊은 여성의 더 큰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핵가족에서 남성 형제와 함께 자라고 남성과 대등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은 지금 젊은 세대가 역사상 처음이다. 이들에게 여전히 심각한 가부장제 여성 차별, 특히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과 ‘N번 방’ 사건으로 대표되는 각종 성범죄가 만연하는 이 사회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거의 차별받지 않고 자라 대등한 능력을 보유한 여성들이 졸업 후 만난 직업생활, 사회적 일상은 유리 천장 정도가 아니었다. 같은 학벌과 업무 능력에도 훨씬 높은 비정규직 취업 확률,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넘을 수 없는 강철 천장이었다. 동일 능력, 동일노동에도 심각한 차별 임금과 차별 고용, 차별 대우는 견딜 수 없었다. 페미니즘이 갑자기 확산한 데에는 변화한 사회적 환경, 특히 여성들에 여전히 가혹한 노동조건이 결정적이었다.
지금 심각한 세대 간 갈등도 이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최근 유튜브에서 논란이 많았던 ‘지하철 9호선 폭행녀’ 사건은 젊은 세대(여성)의 이전 세대(남성)에 대한 반감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86세대론’은 1980년대 고도 성장기를 살았던 86세대가 사회의 모든 부와 권력, 특히 안정된 일자리를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결과 자녀 세대인 젊은이는 능력이 있어도 자기 몫을 ‘공정’하게 받을 수 없다는 세대 책임론이 이어진다.
86세대론은 그 실체가 모호하고 논리적 비약이 매우 심하다는 점에서 매우 수준 낮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절망적 상황의 젊은이들에게 매우 호소력이 있는 것으로 다가가고 있다. 젊은 세대는 퇴직 후 빈곤에 시달리다 비정규직 일자리로 내몰리는 노령노동자들을 적으로 보고 그들의 정년연장이나 처우개선을 반대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1930년대 대공황기에 일자리를 잃은 독일 젊은이들에게 나치의 인종차별 선동이 먹혀든 것과 본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 심각한 일은 ‘공정’을 내세운 일부 정치세력과 사회 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세대론을 조직적으로 유포하고 부추긴 사실이다. 세대론을 상품으로 내다 판 우리사회 보수 언론과 일부 지식 상인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그러나 이렇게 암담한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과 불평등 현실 중에서도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는 따로 있다. 2020년 갑자기 불거진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갈등(이른바 ‘인국공’사태)이었다. 문재인정부가 추진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정책이 인천공항에서 실시되자 청년 노동자나 예비 노동자 청년들이 크게 반발한 사건이었다.
주지하듯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헬조선’을 외치며 광장으로 나왔던 촛불 시민들의 핵심 요구였다.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확대된 불평등과 빈곤, 그리고 사회적 갈등에서 핵심 문제가 바로 비정규직 문제라는 사실은 거의 모든 사회과학자는 물론 다수 시민이 동의했던 사안이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세계 최고 공항을 운영하는 한국 대표급 공기업이었으나 동시에 대표적 비정규직 기업이었다. 고용 노동자의 90%(약 1만 명)가 비정규노동자였다. 그러므로 실질적 운영 주체인 정부가 이를 개혁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당연한 정책 실행이었다. 그런데 당사자 청년 노동자 다수가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비정규직 증가에 따른 고용불안과 사회적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인 청년이 비정규직 축소에 반대한 것이다. 이 현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사회적 비극이자 아픈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대학의 우리 젊은이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그 어떤 선배들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가는 세대이다. 대학에서 40년 이상 산 필자의 나름대로 진지한 판단이다. 출석과 학점은 물론 각종 스펙을 쌓기 위해 동분서주 누구보다 바쁘다. 그들 간의 치열한 (성적과 취업)경쟁이 악순환을 불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많은 대학생은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늘 일하는 비정규 알바 노동자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생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 공부와 노동은 강제된 노동이고 그 이면에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절반을 넘는 한국사회의 심각한 노동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노동자로 일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먼저 늘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지금 정치권에서 다시 쟁점이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이른바 ‘김용균법’이라고 불린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한밤중에 홀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청년 비정규노동자 김용균 사건을 계기로 입법되었기 때문이다. 한해 2천 명에 이르는 산업재해 사망자의 대부분은 비정규노동자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비슷한 수준의 국가와 비교하면 중대 재해율이 매우 높은 편인데 특히 비정규노동자에게 집중된다. 세월호 비극의 몇 배나 되는 사회적 살인이 매년 전쟁처럼 되풀이되는 셈이다.
다음으로 임금 노동조건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예컨대 자동차 조립공장에서 같은 라인에서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이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높은 서구사회를 우리 비정규노동자 상상할 수 있을까? 또 노동조건 측면에서도 노동시간과 휴일 휴가, 가산임금 등 근로기준법의 여러 보호장치가 비정규직에는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법적 노동보호 제도인 산재보험 등 4대 보험 적용률도 비정규직이 크게 낮다. 제반 기업복지 혜택에서도 제외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모든 차별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은 일자리가 불안정하다는 고용 차별에 있다. 비정규직의 개념 규정이 정규직과 달리 안정된 고용, 곧 정년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로부터 모든 차별의 가능성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동법 권리에 기초해서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조건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이란 점에서 비정규직은 커다란 제약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노조를 조직하면 사용자들은 합법적인 계약 해지나 해고로 쉽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규직의 노조 조직률이 20%에 가까운 것에 반해 비정규직은 2%에도 미치지 못한다. 단식, 굴뚝이나 송전탑 농성, 각종 불법파업과 시위 등 비정규노동자가 극한투쟁을 벌이는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젠더 갈등이나 세대 갈등, 그리고 각종 불평등을 모두 노동문제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정규노동 등 먹고 사는 일자리 문제가 갈등과 불평등의 여러 차원에 깊이 관련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좀 더 중요한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왜 모두가 피해자인 젊은 남성과 여성 청년, 그리고 청년 노동자와 노령노동자가 서로 갈등하는 것인가? 지난번 최저임금 문제처럼 두 약자인 영세자영업자와 저임금노동자가 서로를 비난하고 싸우는 일이 왜 되풀이되는가? 특히 왜 사용자 자본과 갈등하지 않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립, 갈등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왜 노사갈등이 아니라 노노갈등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번 대선에서 청년들이 남녀로 갈라져 서로 싸운 배경에는 직접적으로는 이들을 선동한 정치세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본질에서 여성과 남성 노동자의 치열한 일자리 경쟁이었다. 또 세대 간 노동자 갈등도 실제로는 밥그릇 경쟁이란 점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쟁과 갈등이나 노동조합에 대한 노동자의 비난도 모두 노노갈등 현상으로 볼 수 있었다.
관련해서 살펴보아야 할 점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이상한 적대감이다.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중요한 현상 중 하나는 이른바 ‘강성 귀족노조론’이 득세하였다는 점이다. 선거에서 이긴 후보는 노동 공약은 제시하지 않고 강성 귀족노조를 비난하는 모습으로 일관하였다. 진 후보도 노동조합에 우호적이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노동운동, 특히 민주노총은 시민들의 공적(公敵) 1호가 되어 있다. 대부분 시민이 노동자인 것을 고려하면 노동자가 자신을 대표하는 가장 큰 노조 조직을 비난하는 일이 우리의 일상이 된 셈이다. 노동조합이 그나마 비정규노동자를 조직하고 국가와 자본에 대항해 싸웠던 주요 사회 세력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현실은 너무도 기이하다.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노동자 제도를 도입하고 비정규 고용을 크게 늘린 것은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 대선에서 이기고 진 두 거대정당이야말로 일관되게 비정규직 고용을 확대한 세력들이었다. 더불어 재벌 대기업자본도 노동유연성이 있어야 기업이 살아야 선진국이 되고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노동자 간의 시장 경쟁이 효율성을 가져오며 비정규직 중심의 유연한 고용상태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금도 목소리를 높인다.
30년이 지나 이른바 선진국이 된 지금, 왜 우리는 우리끼리 갈등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자문할 필요가 있다. 10대 경제 대국 한국에서 젊은이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데 그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답해야만 한다. 이제는 우리 노동자, 시민끼리 하는 ‘바닥을 향한 경쟁(race to bottom)’을 진정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는가를 성찰해야 한다.
다시 4월을 맞았다. 그런데 여전히 불평등에 찌든 우리 사회에, 그리고 특히 한겨울의 매서운 공포 앞에 떨고 있는 우리 젊은이에게 봄은 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봄이 온다는 굳은 믿음도 있다. 8년이 지나도 매년 살아오는 4월 젊은 영혼의 목소리, 또 부활의 기쁜 소식은 고난 중에서도 다시 힘을 내자고 말하는 듯하다. 청년 노동자와 소외된 약자를 향한 한국 교회의 진지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실천이 그 무엇보다 절실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