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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공부
조 정 래
22년 만의 고향 행차. 이거야말로 감개가 무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유식한 문자 싹 집어치우고, 한마디로 말해서 기분이 이렇게 알딸딸하고 가슴이 이처럼 뻐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과거 급제하고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이 찾아 떠나는 이 도령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어림없었을 것이다. 암행어사니까 거지 차림을 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몽룡이는 먼지 나는 돌투성이 길을 짚신발로 천 리나 걸어가는 신세 아니었겠는가
이몽룡이는 내 앞에 명함 내밀려고 긴 도포 자락 걷어올리는 수고를 아예 할 필요도 없다. 이 몸은 그 이름도 포근포근한 포니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자가용을 몰고 22년 만에 고향 행차.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아무데서나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좀 보라고, 이 박점돌이의 폼이 어떤지 보라고 말이다. 가진 것이라곤 불알 두 쪽밖에 없이 서울에 굴러 들어와 22년만에 자가용을 몰고 고향 행차를 떠나는 이 박점돌이가 과연 어떠냐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22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이거 봐라, 꼭 맞춘 것처럼 2땡이 아닌가 섰다판 끝발로 2땡이면 그저 안심하고 잡숫는 정도지만, 내 인생 역정에서 이 2땡이야말로 어찌 섰다판 광땡에 기울까 보냐.
22년, 참 기막힌 세월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열네 살짜리 깡촌 놈이 겁도 없이 서울로 기어들어 22년 만에 자가용을 굴리게 되었으니 그동안을 얼마나 맵고 짜고 피나게 살았는지는 두말이 필요 없을 것이 아닌가 도둑질하지 않고, 사기치지 않고, 큰 거짓말 하지 않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왜 하필이면 삼복더위에 고향 행차냐고 직원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려 했다. 그것들이 다 무식해서 저지르는 소치라서 나는 점잖게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 애들의 산 쿄육을 위해서야.”
직원들은 이런 내 말뜻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내 말 잘들 들어봐. 우리 애들은 순 서울놈들 아니냔 말아. 그러니 메뚜기를 아나 반딧불을 아나, 개구리를 아나 모깃불을 아나, 자연 공부가 엉망진창이란 말씀야 입으로 아무리 씨부려도 눈만 멀뚱멸뚱 뜨고 영 알아들어야 말이지. 그래 이번 방학에 산 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이 말씀이야. 이제 알아들어?”
그제야 직원들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내 뜻에 감탄하는 것이었다.
“사장님은 역시 멋져요.”
눈치 빠른 미스 박이 냉큼 말했고,
“그때 우린 어떡해요?”
언제나 무뚝뚝한 기계 보조원 허 군이 역시 무뚝뚝하게 물었다.
“임마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난 고향 가며 느 놈들만 기계 돌리랄까 봐 겁나니? 몽땅 휴가야. 나흘 간 몽땅 휴가.”
“어머머 사장님, 제가 사이다 살게요.”
미스 박이 좋아 못 견디겠다는 듯 소리치며 발딱 일어섰다.
내가 고향 행차를 작심하게 된 것은 에누리 없이 두 아들 공부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로서는 이번 고향 행차가 더욱 가슴 뿌듯하고 살맛이 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내 가슴속 깊이 박혀 있는 한(恨)을 푸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 학벌이라곤 싹싹 쓸어 모아보았자 중학교 2학년 중퇴가 전부인 것이다. 나는 무식한 게 틀림없고, 남들처럼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가슴 깊이 한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를 쏙 빼박은 두 아들은 저희들이 공부를 원하기만 하면 외국 유학 아니라 달나라까지라도 보내줄 결심이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연년생인 두 아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못자리도 모르고, 벼도 모르고, 쌀이라는 것이 흡사 사과나 배처럼 나무에 주령주렁 열리는 것으로 이해하려 들었다.
“이놈 새끼야, 못자리도 몰라, 못자리!”
나는 치미는 울화를 참지 못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작년에 했던 것처럼 둘째 놈의 머리통을 쥐어 갈겼다.
“왜 때려요. 그딴 그림만 보고 어떻게 알아요. 아빤 그림만 보고 사우디에서 석유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기나 해요?”
성질이 칼칼한 둘째 놈은 억울하다는 듯 이렇게 대들었고,
“허……”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녀석을 멍청하게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다른 애들도 다 몰라요. 그래서 선생님이 이번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서 보랬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무릎을 쳤다. 그리고 무식한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문 한 구절을 붙들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이라.
해석하여 가로되,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좋았다. 이번 방학 때 가족 단체 입장으로 아빠 고향 행차다.”
나는 느닷없이 이렇게 외쳤고, 두 아들은 흡사 신바람 난 토인들처럼 환호성을 올렸고, 아내도 주책없이 싱글벙글이었다.
“사람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유. 눈을 뜨나 감으나 일밖에 모르는 당신이 가족 동반 여행을 다 떠나겠다니.”
주책 떨지 말어. 애들 공부시키자는 건데 여행은 무슨 놈의 여행이야.
목구멍까지 치받쳐 오른 이 말을 나는 얼른 삼키고 말았다.
여행― 이 얼마나 호사스럽고 사치스런 말이냐. 그래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꽤는 아니꼽고 껄끄럽게 들리곤 했었다. 그런데 아내가 선뜻 이 말을 쓴 것이다.
그래, 공부는 애들한톄나 해당되는 것이고, 아내한테는 분명한 여행이지 뭔가. 여행이라는 것이 뭐 별나고 뾰족한 것이겠는가. 사원이래야 고작 네 명밖에 안 되지만 나도 어엿한 ‘사장님’인 데다가 자가용까지 지녔으니 이제 여행 정도의 말에 그렇게 아니꼬움을 느끼거나 껄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형편이 아니겠는가 하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사실 나는 그동안 자가용만 지니게 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먼저 나보다 학벌이 높은 고졸(高卒)의 얼굴 반반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물론 내 학벌은 아내보다 높게, 야간 대학 2년 중퇴로 둔갑되어 있었다. 아니, 중학 2학년 중퇴의 학력이 고등학교 2학년 중틔도 아니고 갑자기 대학 2학년 중퇴로 뛰어오르면 언행이 걸맞지 않아 탄로가 나고 말 것이 아니냐고 염려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붙들어 매셔도 좋다. 차츰 알게 되었지만 나는 학력에 어울리지 않게 꽤는 아는 것이 많은 편이다 한자 실력은 어지간한 대학 졸업자 뺨치고, 읽은 책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 수백 종에 이른다. 결론부터 말해서 나는 인쇄소 ‘시다’부터 시작해서 1급 조판공이 되기까지 납덩이를 만지며 법을 먹은 세월이 자그마치 13년이나 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업학교 졸업한 아내 앞에서 야간 대학 2학년 중퇴의 위조된 내 학력은 들통 날 염려가 전혀 없는 것이다. 중퇴를 했으니 중퇴 증명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내가 아내한테 뒤지는 것이 있다면 딱 한 가지, 애 못 낳는 기술이 아니고 주산 실력이다. 주산이 2단이라는 아내는 신기하고 신통하게 계산 하나는 기발나게 해치우는 것이다. 계산에 있어서만은 나는 아내 앞에서 ‘멍청이’가 되고 만다.
나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 하나 딸 하나만 낳으려고 했는데 연속 홈런을 날려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넓지는 않지만 네 식구 살기에 흡족한 25평 스팀 아파트의 호주가 되었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월급 또박또박 주는 사장도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독종’이라 부르기도 하고 ‘차돌멩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이 별명을 결코 싫어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살아온 과정을 보고 붙인 별명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다 재산이라곤 돌투성이의 산밭 몇 뙈기가 전부였고, 아버지는 동네의 자유로운 머슴 노릇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형편이었다. 도시로 말하면 날품팔이였던 것이다. 그런데다 아버지는 술이 과했다. 언제나 썩은 막걸리 냄새를 풍겼다 그러니 집안 형편이 펼 날이 없었다. 따라서 어머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동네의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정신 좀 차리시오. 저 하나뿐인 새끼는 이렇타께 공부를 시켜얄 것 아니겄소.”
어머니는 술 취한 아버지를 붙들고 수시로 이렇게 애원하곤 했다.
“아 시끄러. 자식 교육은 남정네가 다 알아서 해. 여편네가 멀 안다고 입방아 찧고 이려 이거.”
아버지는 언제나 터무니없이 당당했다.
중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도 순전히 어머니의 노력과 고집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대학 못 다닐 바에는 한글은 깨쳤으니 일찌감치 농사일이나 뼈에 익히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어머니는 전보다 더 고되게 일을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2학년이 되고 나서 이내 어머니는 앓아누웠다. 병원에 가보지도 못한 채 한 달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우리 점수를…… 내 새끼 점수를…….”
어머니는 내 손을 으스러져라 잡고 부들부들 떨며 이렇게 되풀이 하다가 눈을 감았다. 숨이 넘어가고 나서도 관자놀이께로 줄지어 흘러내리던 눈물.
나는 두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아버지는 그동안 형편없는 주정뱅이가 되어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으니 사람의 꼴이 아니었다.
학교를 그만둔 나는 이내 머슴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농사일을 배우려면 논마지기라도 지닌 집에 들어가서 머슴살이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압 때문이었다.
나는 지게질부터 배우며 수없이 어머니를 불렀다. 매일매일 속울음을 울며 보냈다. 밤마다 꿈속에서 어머니가 울었다. 퍼뜩 잠을 깨고 나면 어머니를 따라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렇게 살다가 나는 어떻게 될까. 아버지 같은 가난한 농사꾼 술주정뱅이…….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공부를 많이 배워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진종일 힘겨운 일에 시달리면서도 이런 생각을 수없이 되풀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논에 거름을 지고 나가다가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내 눈앞에는 긴 꼬리를 단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 서울로 가자!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이었다.
죽든 살든 서울로 가자 머슴살이를 하느니 서울 구경이나 한번 하고 죽자 서울은 애들 일자리도 많다는데 머슴살이하는 만큼 일을 하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악착같이 일하다 보면 배울 길이 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자 눈앞이 환하게 열리는 것 같았고,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서울로 내빼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잠시 막연해졌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막힌 생각이 번뜩 스쳤다. 닭장이 생각난 것이다. 주인집은 3백 마리가 넘는 닭을 치고 있었고, 닭들은 그동안 나와 아주 친해져 있었다. 닭 열 마리쯤 훔쳐내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밤이 어둡기를 기다려 닭장으로 기어들었다. 구구구구……, 닭들을 어르며 암탉으로만 열 마리를 골랐다.
닭을 다섯 마리씩 묶어 어깨에 메고 어둠을 헤쳤다 다음 기차역이 있는 읍네에 당도한 것은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음식점에다 닭을 팔아넘기고, 서울행 기차표를 끊었다.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는 누가 곧 덜미를 잡는 것 같아 자꾸만 오줌이 마려웠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비로소 한숨을 돌렸고, 그제야 고향을 떠난다는 울적한 기분이 콧등을 맵게 했다. 어머니가 생각났고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까지 흔들어 아버지의 모습을 떼치려 했다. 미안하다거나 안됐다는 생각은 조급도 없었다. 다만 나는 어른이 되어서 절대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생각만이 돌기둥처럼 내 가슴에 박혀 있었다.
서울은 넓었다. 그리고 폭풍이 몰아칠 때 고향의 포구로 밀려들던 성난 파도와 같이 무서운 곳이었다.
서울의 골목을 무작정 헤매다가 ‘사람 구함’이란 글씨를 보고 들어간 곳이 인쇄소였고, 나는 거기서 ‘시다’로 내 이름 대신 ‘약물’이란 괴상한 이름으로 불리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약물’이란 다른 게 아니라 조판을 하는 데 필요한 잡다한 물건들을 날라다 주는 허드레 일꾼이었다.
월급이라야 세 끼 밥 얻어먹고 팬티 하나 사 입을 수 있을까 싶은 시장스런 액수였다 그러나 나는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했다. 돈을 내고 배워야 하는 기술을 밥 먹여주며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내 꿈은 그저 하루빨리 조판공의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나를 “야, 이 새끼야, 약물” 하며 맘껏 부릴 수 있는 조판공은 높직한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일하면서 월급은 엄청나게 받는 것이었다. 그들도 대개 나 같은 잡일을 거쳐 거기까지 올라갔다고 했다.
나는 ‘약물’을 거쳐 ‘스리’ 내는 일로 자리가 바뀌었고, 얼마 되지 않아 채자공으로 승격되었다. 중학교 2학년 중퇴 학력으로 인쇄소 밥 먹기 1년 반 만에 채자공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출세였다. 채자공은 무식해서는 안 되는 게 첫째 조건이다. 거의 한글인 소설 원고 같은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한자투성이의 원고는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천자문을 혼자 다 익혔고 영어도 중 3 책까지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장 청소 같은 것도 알아서 하곤 했다. 이런 내 노력을 딸기코 공장장이 잘 알아주었다.
“니 놈은 부모만 잘 만났다면 한가락 크게 할 놈이었어. 참 아까운 놈 하나 망쳐놨어.”
공장장은 곧잘 이런 말을 하며 술안주 오징어 다리를 쭉 찢어 건네주고는 했다.
그러니까 내가 남달리 빨리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 딸기코 공장장의 덕분이었다. 나는 공장장을 아버지거니 생각하고 깍듯하게 받들었다.
나는 1년 동안 채자를 하다가 드디어 조판공이 되었다. 글자 하나 하나를 뽑아내야 하는 채자공에 비하면 뽑아진 글자를 가지고 판을 짜기만 하는 조판공의 일은 너무나 수월했다. 나는 다른 조판공들에 비해 나이도 제일 어렸지만 ‘약물’들에게 내가 당한 것처럼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않았다.
나는 조판공 자리에 3년을 앉아 있었다. 그동안 나는 공장 안에서 제일가는 조판공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즈음에 남모르는 욕심을 속마음에 가지게 되었다. 언제까지 남의. 밥을 먹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인쇄소를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이 인쇄소 안의 모든 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다.
이렇게 작정하고 보니 남은 건 두 가지, 활판 인쇄 기술과 오프셋 인쇄 기술이었다. 좀더 신기해 보인 탓이었을까 활판보다는 오프셋 기술을 더 익히고 싶었다. 그래서 공장장에게 자리를 옮겨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너 미쳤냐? 오프셋으로 가면 넌 백지 아니냐. 천상 시다 노릇밖에 더 하겠어?”
공장장은 딸기코를 씰룩이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당연하지요, 시다부터 시작하지요.”
“너 정말 해까닥했구나?”
나는 공장장에게 내 계획을 차근차근 말했다.
“넌 참 물건은 물건이구나 야. 네가 내 아들이었으몬…… 아니, 딸이 있었으믄 제까닥 사윌 삼는 긴데.”
공장장은 내 어깨를 힘껏 치며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공장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당하며 다음날로 오프셋 기계의 시다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동안 나는 아무도 모르는 상당한 금액을 저금해 놓고 있었다. 남들처럼 담배나 소주를 가까이하지도 않았고, 명절 때라고 고향엘 내려가지도 않았다. 며칠씩 노는 명절 휴가의 적막이 견디기 어렵고, 아버지의 안부가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애써서 떼쳐냈다. 성공하기 전에는 가지 않으리라 했던 결심을 깨뜨리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오프셋기에 매달린 지 1년 만에 기장(機長)이 될 수 있었다. 그저 미친놈처럼 일과 싸운 결과였다.
고향을 떠나온 지 7년 만에 나는 처음으로 크게 울었다. 이 넓디나 넓은 서울 거리에서 참으로 우연하게 국민학교 동창을 만났고, 그 친구는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없어진 후로 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끝도 없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읍내를 쏘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그 후로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비로소 감당하기 어려운 죄책감에 사로잡혀 며칠을 울었다. 정말 가볼 필요가 없는 고향이 된 셈이었다.
오프셋 일이 조판보다 적은 인원으로 알찬 수입을 올린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고, 나는 일차적으로 오프셋 기계를 사는 데까지 목표를 정하고 하루 두 끼니는 라면으로 때워나가는 식으로 살았다
나는 인쇄소 밥을 먹은 지 13년 만에 중고이긴 했지만 오프셋 기계를 사들이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사장이 된 것이다. 내 나이 스물여덟, 그 바닥에서는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고 ‘독종’이니 ‘차돌멩이’니 하는 별명도 그때 붙여진 것이었다.
사업은 비교적 순조로운 편이었다. 오래 낯익힌 거래처에서 밀어주었고, 나는 사장이 아니라 ‘시다’라는 기분으로 일을 해냈다. 내가 믿는 건 나 하나뿐이었고, 오프셋 일은 여자로 치면 책에다 화장을 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저 색깔 효과를 좋게 인쇄하고 시간 제때제때 지키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남편이, 아버지가, 자가용 차주가 된 것은 다 그 다음 차례였다.
뭐 자가용도 폼 잡고 싶어 산 것이 아니었다. 그 바닥에서 일 괜찮게 한다고 소문이 나다 보니 단가 좋고 지불 좋은 큰 기업체의 상표 같은 하청이 오게 마련이었다. 사교도 할 겸 배달도 할 겸 두루두루 좋다고 손수 차를 몰게 된 것일 뿐이다.
아이들 기분도 있고 해서 방학을 한 다음날로 떠나기로 했다
“아빠 왔따다!”
“아빤 항상 화끈해!”
두 아들은 이렇게 환호했고 아내도 연신 벙글거렸다. 그러나 내 마음엔 축축한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있었다. 나에게는 자연 공부도 여행도 아닌 성묘(省墓) 길인 셈이었다. 어머니의 무덤은 그동안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어찌 되었을까 새삼스러운 적막감이 생활의 분주한 삭막함을 떠밀어내고 내 가슴을 적셨다.
고속도로를 다섯 시간 남짓 달려 고향 어귀에 이르렀다. 그 사이 아이들은 노래도 부르고 콜라도 마시고 우김질도 하고 그러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나는 별로 입을 열지 않았다. 고속도로 운전 때문만이 아니었다.
줄곧 고향의 모습이 기묘한 냄새를 풍기며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루에 두 차례씩 바닷물이 드나들던 포구, 발가벗고 멱을 감다가 갯벌의 꽃게를 쫓던 일, 소낙비가 내리던 밤이면 홀랑 벗고 참외밭을 습격하던 일, 골짜기가 가까운 산비탈 보리밭을 골라 서리를 해먹다가 붙들려 두들겨 맞던 일, 항시 배가 고프고, 초상집에서 콩나물만 두 사발을 얻어먹고 잘 빠지지 않는 콩나물 똥을 누느라고 낑낑대던 일, 닭을 훔쳐 내빼던 밤의 그 뜨거운 가슴의 고동 소리, 어머니의 임종…….
나는 고속도로를 벗어나면서부터 서너 차례 차를 세우고 길을 물어야 했다. 사방은 너무나 변해 있었고, 나의 옛 기억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 당황은 고향 읍내에 들어서며 한층 심해졌다.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옛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여기가 고향이라는 것은 멀리 보이는 포구와 뒤편으로 솟은 산에서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산은 옛모습 그대로 꼭대기에 기둥 같은 돌을 이고 서 있었다. 그래서 애들은 거리낌 없이 ‘말좆바위’라고 부르곤 했었다.
나는 큰길 가에 차를 세우고 애들에게 목을 축이게 했다. 그사이 나는 열심히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살폈다. 행여 아는 얼굴이라도 만날까 해서였다. 사업상 뒤늦게 배운 담배를 두 대나 태웠지만 아는 얼굴은 없었다.
내 기억에 이름과 얼굴이 함께 남아 있는 건 길중이뿐이었다. 그는 한 동네에서 큰 친구였고, 그가 가져오는 누룽지를 얻어먹는 대신 시험지 답을 보여주곤 했던 사이였다. 우선 그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덜컥 겁이 났다. 만약 그가 고향을 떠나버렸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뒤따랐던 것이다.
나는 잘못 온 것 같은 서먹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느끼며 차에 올랐다.
나는 읍내를 벗어나 옛 동네 가시리로 차를 몰면서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사진 박혀 있는 옛 동네는 불도저에 밀리는 모래 더미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참 신기할 지경으로 옛모습은 간 데가 없었다
“시골인데 왜 초가집이 없지?”
“엄만 참 새마을 운동도 몰라요?”
큰아들의 핀잔에 나는 ‘아 그랬었구나’ 하고 비로소 깨달았다. 울긋불긋한 집들은 바로 그 운동의 소산인 것이었다.
옛 동네의 모습도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뒤바뀌어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구멍가게로 갔다
“혹시 최길중이란 사람이 여기 사시나요?”
“살다마다요. 우리 동네 이장님이시거든요.”
나는 우선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집을 자세히 묻고, 과자를 이것저것 한 아름 사들었다
이장 최길중을 찾자 한 중년 사내가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나왔다.
“지가 최길중인디, 누구신지요?”
전혀 모르는 사내였다.
나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워디서 오신 누구신디요?”
상대방도 내가 누군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22년의 세월, 그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네 살의 얼굴 위에 너무나 제멋대로의 그림을 그려놓고 만 것이었다.
“나·… ¨ 박점돌인디…… 날 몰라보겄는가?”
“… … 아니 뉘여……?”
길중이는 대중없이 눈을 깜박이며 내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그의 기억은 22년 전으로 치닫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구먼, 바로 자네가 점돌이여.”
길중이는 이렇게 소리치며 내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숙소를 읍내 여관으로 정하겠다고 했을 때 길중이는 버럭 화를 냈다.
“그럴라면 머하러 고향 찾아왔는가 나는 또 머하러 찾았고.”
그래서 숙소는 길중이네가 되었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곤 바로 이 길중이의 마음씀뿐이었다.
아이들은 이른 저녁상을 받았고, 나는 길중이와 술상을 마주했다. 술상에는 맥주가 서너 병 올라앉아 있었다.
“이거 맥주 말고…….”
“염려 말게, 얼마나 귀한 손님인디.”
길중이는 기분 좋게 맥주병을 들었다. 그는 내 뜻을 모르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맥주는 아무데나 있는 거고, 거 왜 틉틉한 진짜 막걸리가 좋을 텐데…….”
길중이는 잠시 머뭇하더니 내 뜻을 알았다는 듯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렁 거 웂네. 단속도 심한 디다가 술 담글 줄 아는 여자도 웂네.”
그래서 맥주는 잔에 따라졌다.
나는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대충 했고, 고향을 찾게 된 이유도 간략하게 설명 했다.
“허허허……, 야단났구먼 그랴. 좀더 어두워지먼 알겄지만 반딧불 같은 거 진작 웂어졌네. 메뚜기, 개구리 귀경 못헌 지가 우리도 오래여. 다 농약 때문이여. 그게 원체 독해놔서 다 멸종이네. 개울창에 붕어 웂어진 지 오래고, 그 독헌 미꾸라지도 견뎌내질 못헌단 말이시. 웂어, 웂어졌어.”
길중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날 밤 아이들은 반딧불 대신 서울에서처럼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
“아빤 순 공갈쟁이야.”
둘째 놈이 째지게 눈을 흘기며 쏘아붙인 말이었다.
나는 자정이 넘어 자리에 누우며, 일찍 어머니 산소나 살펴보고 내일 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산소는 생각했던 대로 말이 아니었다. 사람을 사서 잡초를 베어내고, 아이들과 아내를 줄지어 세워 술을 따랐다.
아이들에게는 포구와 갯벌을 보여주었다. 검푸른 논과 논길을 걷게 했다. 그리고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를 보여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두 녀석은 이미 실망하고 맥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후 5시쯤에 차머리를 서울로 돌렸다.
차가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그때까지 창밖만 내다보고 뿌루퉁해 있던 둘째 놈이 불쑥 말했다.
“김샜다, 자연 공부 다 망쳤어.”
“이눔아, 할머니 산소에 성묘한 것만도 훌륭한 자연 공부였어.”
나는 괜히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아빠, 그게 어디 자연 공부예요, 사회 공부죠.”
큰놈이 대들듯 쏘아붙였다.
나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고, 그 무안을 지우려는 듯 자동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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