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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30
국가원로회 서신 141호- 戰士와 戀人(1) -
<만포행 열차>
1982년 7월 중순 우리가 속한 공병국 산하 27건설여단은 소위 평양 501호 공사라고 명명된 인민무력부 지하갱도 확장공사를 마치고 자강도 전천군 고인구에 위치해 있는 산골짜기에 미사일 발사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전 여단병력이 이동하였다.
조총련을 통해 일본에서 사들여온 비싼 건설 장비들은 화물열차편을 이용해서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인원들은 대대, 중대별로 나뉘어서 일반열차를 이용하여 현장으로 갔다.
자강도 전천군 고인구에 있는 그 골짜기에는 원래 한 개의 협동농장이 있었는데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는 바람에 그곳에 있던 백여 가구의 농장 사람들은 하룻밤 새에 모두 타지방으로 이주되고 농장원들이 살던 주택은 모두 부대의 막사가 된 것이다.
우리 소대는 평양에서 501호 공사가 끝난 후에도 뒷정리를 하느라고 남아 있다가 여단이 철수한지 3개월 뒤인 1982년 10월 말에 평양에서 만포행 열차에 올라 미사일 건설기지로 향했다.
유리가 비싼값에 팔림으로 도적질 해가는 것이 비일비재하여 사람을 실어나르는 열차들이라고 해봐야 창문에 유리창이 온전히 끼워져 있는 열차를 별로 볼 수가 없다.
매 열차마다 상급차 칸이 하나씩 붙어 있는데 거기 또한 일반 칸과 별로 다를 바 없고 자리가 좀 편하다고 할 뿐이지 승객들이 비닐로 창문을 가리고 다니는 형편은 똑같았다.
상급차 칸은 영웅들이나 공로자, 남한의 영관급에 해당하는 좌급 이상의 고급 군관들과 보위부, 안전부계통의 사람들을 비롯하여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만 이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정해진 이러한 공간도 폭력을 행사하는 단체 군인들 앞에서는 때로는 무용지물이 되고 신분의 차이나 격 같은 것이 따로 없이 무조건 같이 공유해야 될 대상이다.
평양을 출발하면서 우리 소대가 올랐던 열차는 당연히 일반열차였는데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빼곡히 들어차서 한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간이 없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게 되자 소대장은 열차가 서는 다음 정거장에 모두가 내려서 상급차 칸으로 오르라고 명령하였다.
우리 소대는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멈춰 서자 모두 창문으로 뛰어 내려서 앞쪽에 있는 상급차 칸으로 달려갔다. 문이 닫혀 있어 열라고 소리쳤지만 안에서 안내원들이 문을 안으로 닫아걸고 열어주지를 않았다.
기차가 떠나겠다고 빽빽 대며 신호를 울리자 다급해진 소대장은 출입문을 포기하고 모두 창문을 오르라고 지시하였다. 우리는 일시에 창문 쪽으로 달려가서 창문을 가리고 있던 비닐들과 군데군데 몇 장씩 남아 있는 유리창들을 모조리 부수고 창문을 넘어서 들어갔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 타고 있어서 비교적 조용하던 상급차 칸안에 1개 소대의 인원들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가자 열차 안은 금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대장은 열차가 출발하자 누가 문을 닫아걸고 열지 않았느냐고 승객들에게 소리쳤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소대장은 소대원들에게 열차 안에 타고 있는 여성 열차 안내원들을 모조리 끌고 오라고 큰 소리로 지시했다.
"소대원들이 여성 안내원 세 명의 머리채를 잡아서 소대장 앞에다가 끌어다 놓자 소대장은 그 자리에서 한 여성동무의 옷깃을 힘껏 잡아 당겼다. 안내원이 입고 있던 옷은 단추가 우두둑 떨어져나갔고 속옷까지 함께 찢어지면서 그녀의 몸은 숱한 승객들이 보는 앞에서 홀딱 벗겨져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로 알몸이 그대로 환하게 드러났다.
"이 쌍놈의 기집애들 옷도 모조리 벗기고 밟아 버려!''
평소에 작업 지시를 할 때도 워낙 성질이 지랄같이 고약했는데 약이 오르고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그 소대장이 소대원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것이다.
소대원들은 승객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안내원들의 속옷을 팬티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벗겨 놓고 짐승 다루듯이 이리 저리 굴리고 희희덕거리면서 조롱하고 장난감 취급을 하였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북한세상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 백주 대낮에 펼쳐진 것이다.
옷이 홀딱 벗겨진 여성안내원들은 수치심과 모멸감에 울고불고 눈물을 떨구면서도 제발 잘못 했노라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소대장의 발 앞에 엎드려서 빌고 또 빌었다.
바로 그때 대좌(대령)의 군사 칭호를 달고 있는 한 군관동무가 그 광경을 지켜 보다가 참지 못하겠던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나이는 어림짐작으로 50대 중반 이상은 되어보였다. 그는 오자마자 계급이 높은 지휘관답게 위엄있는 자세를 취하더니 소대장에게 어느 부대냐고 증명서를 내 놓으라고 하였다.
북한에서 공병국이라고하면 인민군대 중에서도 제일 수준이 낮은 부대로 취급되고 일 년에 총 한방도 제대로 쏴보지 못하는 부대라고 정평이 나있다.
부대원들 또한 대부분 계급적으로 토대가 안 좋거나 부모가 과오가 있고 사회적으로 별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대상들이 걸러져서 오는 부대라고 인식되어 있다.
그도 아마 우리가 공병국 산하 날라리 부대라는 것을 짐작하고 온 느낌이었다. 소대장은 대좌를 쏘아보다가 상급자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은 아예 무시해 버린 채 적반하장격으로 그에게 도리어 시비를 걸었다.
"아무 부대면 어때서? 이건 어디서 굴러 들어온 개뼈다귀 같은 영감태기야? 너도 여기서 옷을 좀 벗구 싶어?
우리가 공병국이라고 얕보는 모양인데 대좌를 달고 다니면 우리 중 누군가가 엎드려서 구두라도 닦아 줄줄 알았어?''
대좌라면 까마득한 하늘과도 같은 상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옆에서 듣기에도 소대장이 하는 말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의 상관이 아니면 상대가 어떤 직책이나 계급을 달고 있던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 북한 군인들의 막돼먹은 행동이라고 하지만 일반 군관이 아니고 대좌라는 사람 앞에서 소위를 달고 있는 사람이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레도 도가 넘는 짓이었다.
상하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다른 부대의 상급지휘관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놀려대다가 잘못 걸려들어서 공개처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 순간에 소대장은 아마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소대장을 바라보는 대좌의 인상이 한순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소위 너, 공병국 어디 소속이야, 이 놈의 자식 너한테는 상급자도 없어? 너 콩밥 좀 제대로 먹어볼래?''
일반적으로 맞닥뜨린 상대한테 자기가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직급에 관계없이 거의가 다 대충 얼버무리고 피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는데 그 장소에서 대좌는 비록 혼자였지만 계급이 있는지라 그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대좌가 자기 앞에서 공손하게 수그러들 줄 알고 위협을 했는데 잘 먹혀들지 않자 소대장이 주먹으로 그의 턱을 일시에 가격했다.
순간적으로 날아온 주먹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대좌에게 주위에 있던 소대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참으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패륜적이고 군법을 무시하는 일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발생했다.
<평양사내>
그 순간에 좌중을 놀라게 하는 또 하나의 광경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 불한당 같은 새끼들 당장 멈추지 못해?''
벼락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탄탄하고 다부지게 생긴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싸움판의 한 가운데로 날렵하게 뛰어 들었다.
그는 험악한 기세로 대좌를 구타하는 소대원들을 쓱 한번 둘러보더니 가벼운 동작으로 주위에 있는 열 댓 명의 군인들을 손쉽게 제압해 버렸다.
그 사람이 소대 병사들을 때리는 동작이 얼마나 민첩하게 빠르고 정확하였던지 나는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도 그의 손발이 움직이는 것을 도저히 눈으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기세등등해서 대좌를 짓밟던 소대 병사들이 순식간에 신분도 알 수 없는 사람한테 얻어 맞고 열차바닥에 모두 쓰러지자 소대장의 몸이 일시에 굳어졌다.
혼자서 열댓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제압한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본 일이었지 현실에서는 소대장으로서도 처음 보는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옆에 서있던 나에게 여자안내원들의 옷을 입혀주라고 말하더니 쓰러져서 매를 맞던 대좌를 자기가 직접 일으켜 세우고 밟혀서 피가 나오는 그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그런다음 소대장을 대좌의 앞에 불러다 세워놓고 무섭게 호령하였다.
"너한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주고 싶지만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지휘관을 망신시키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만은 용서해 준다.
그 대신 대좌 동지와 안내원들에게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라!''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소대장이 우물쭈물하자 그는 순식간에 소대장의 종아리 아래 복사뼈 부위를 발로 가격해서 대좌앞에 주저 앉혔다.
소대장은 상대방의 위엄 앞에 파랗게 질려가지고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조금 전까지만해도 자기가 짐승 다루듯 하던 대좌와 안내원들에게 제발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고 자기보다 강한 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요행수가 돼서 늘 망종처럼 놀면서 나쁜 일에 대원들을 부추키고 내몰던 소대장이었는데 이길 수 없는 상대 앞에서 양과 같이 얌전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니 비굴한 것이 아니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순식간에 나타나서 사태를 제압하는 광경을 보면서 저 사람은 사복차림을 하고 다니지만 대남연락소 공작원이 아니면 어느 특수부대에 소속된 사람이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소대장이 빌고 난 후에 그는 자기한테 맞아서 쓰러진 소대 병사들을 한 사람씩 일으켜 세우더니 몇 마디 훈시 겸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였다.
싸움을 할 때는 호랑이 보다 더 사납고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정작 나중에 행동이나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자상하고 사내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여과담배를 한 갑 꺼내서 매 사람들에게 일일이 한 대씩 나누어 주면서 자기도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고 오랜만에 부모님들이 계시는 고향에 가는 길이라고 소개를 하였다.
우리의 일행 중에서 금방 입대한 어린 대원 덕영이 그의 집이 어딘가고 묻자 그는 자강도 희천시 인근에 있는 농촌이라고 대답하였다.
서로 이런 말 저런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내력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피했지만 나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자강도 희천은 우리가 가는 목적지인 자강도 전천군 고인구 보다 조금 가깝기 때문에 그는 어차피 우리보다 먼저 열차에서 내리게 되어 있었다.
열차에서 내리기 전에 그는 우리에게 3일 후에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의 진갑 잔치가 있다며 시간이 있으면 다같이 놀러오라고 고향집 주소를 적어서 집이 어디냐고 묻던 어린 대원 덕영이에게 넘겨 주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불미스럽게 잘못 시작되었지만 그와 헤어지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나는 참으로 그가 인정이 많고 사내다운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열차 안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인연이 되었던 우리의 만남은 3일 뒤에 엄청난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그때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희천마을>
평양사내와 헤어진 뒤 우리는 그 유명한 개고개를 넘어서 한 30분 가량을 더 달려 저녁 무렵에야 목적지인 자강도 전천군 고인역에 도착하였다.
자강도는 평지가 없고 돌이 많은 산골짜기라고 해서 무슨 말인가 했었는데 막상 와보니 정말 앞뒤가 높은 산들로 꽉 막힌 오지 중의 오지였다.
우리는 기차역에서 내린 후에 도보로 반시간 정도를 걸어서야 대대가 위치해 있는 장소에 도착했고 소대장은 소대를 정렬시킨 후 바로 대대 지휘부에 들어가서 대대장에게 소대의 도착 보고를 하였다.
보고를 받고 인원 점검차 내려왔던 대대장은 소대원의 절반 정도가 얼굴이 맞아서 터지고 찢어져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보더니 단번에 눈살을 찌뿌리고 소대장을 쏘아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 소대장 네 얼굴은 반반한데 대원들은 어떻게 돼서 저렇게 피투성이야?''
소대장이 잠깐 머뭇거리자,
"야 이새끼야,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 귀때기가 갑자기 막혀 버렸어?''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절반이 넘는 소대원 얼굴이 그 모양이니 지휘관인 대대장으로서는 화가 날만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대대장은 성격이 괴팍하고 맞고는 절대로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전 여단에서 소문이 난 사람인데 보통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대장은 열차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그냥 모든 게 자기의 불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간단하게 보고하였다.
말없이 듣고 있던 대대장은 한참동안 소대장을 노려보더니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소대원들은 휴식을 취하라"하고 말을 하고나서 소대장만 지휘부로 오라고 지시했다.
대대장실에서 한 시간 가량 곤욕을 치루고 돌아온 소대장은 주눅이 들었는지 소대 막사에 와서도 말 한마디 없었다.
아직은 미사일 발사대 갱도 공사가 시작되기 전이고 추위가 지금 막 시작되는 계절이어서 여단 참모부는 각 대대별로 열흘 동안 월동준비를 끝내라고 지시하여 평양사람의 일은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다.
3일 후 중대는 기상해서 새벽부터 도끼와 톱을 준비하는 등 겨울 동안 난방용으로 사용할 땔나무를 하러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여단이 위치해 있는 주변에는 미사일 발사 시설이 들어서기 때문에 은폐용 차원에서 절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고 만약에 나무를 베면 엄격하게 처벌한다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대대 병력은 20여리나 떨어져 있는 개고개 지역의 정해진 산림구역에 가서 벌목을 해야 했다.
아침 식사 이후 정치상학이 끝나고 오전 10시 30분 경에 우리 중대는 대대장의 직접 지휘 아래 백여 명이 우와즈라는 소련제 트럭에 나뉘어 타고 벌목 장소로 향했다.
2~30분 정도면 벌목장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인데 중대 병력을 태운 두대의 트럭은 벌목장을 그냥 지나치고 개고개를 넘어서 남쪽 방향인 희천 쪽으로 계속 질주해 내려갔다.
맨 앞 트럭의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대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벌목을 하기 전에 다른 곳에서 무슨 할 일이 있는가보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개고개를 넘어서 한참 달리던 두 대의 트럭은 산기슭에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있는 작은 마을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트럭이 마을 입구에 들어설 무렵에 열차 안에서 평양사람으로부터 집주소를 넘겨 받았던 덕영이가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하사 동지, 우리가 지금 그 사람한테 가는 게 아닐까요? ''
''누구말이야?''
''저번 날 평양에서 올 때 열차 안에서 우릴 때렸던 사람 말이에요. 그 대남공작원 같아 보였던 그 사람 말입니다.''
''우리가 왜 그 사람을 찾아가는데? 그 사람집이 여기라고 했던가?''
"우리가 오던 날 저녁에 소대장 동지가 나한테 와서 그 사람이 열차 칸에서 나에게 준 집주소를 달라고 해서 줬습니다. 대대장 동지가 가져오라고 시켰나 봅니다.''
덕영이의 말을 듣고서야 나도 대대장이 왜 벌목장으로 가지 앉고 이 마을로 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트럭이 마을 한복판에 도착하자 대대장은 중대장 이하 80명 전체 대원들을 집합시키고 기세등등 하게 명령조의 훈시를 했다.
"잘들어라! 1중대 2소대가 3일 전에 열차 안에서 한 놈한테 당한 수모를 오늘 반드시 갚는다.
그 새끼가 아무리 날고 겨도 걔는 혼자고 우리는 80명이야.
죽이지는 말고 다시는 까불지 못하게 완전히 병신을 만들어 버려. 모두들 알았지?''
대대장의 살벌한 명령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일이 무섭게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열차 안에서 잘못을 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우리 쪽이고 빌어도 용서를 받을까 말까 한 일인데, 대원들이 매를 조금 맞은 것을 복수한다고 중대 병력을 인솔하여 싸움을 거는 것은 사실상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1개 대대를 책임진 대대장이라면 그 사람을 탓할 게 아니라 소대원들을 추궁하고 소대장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정상적일 텐데 경우에 맞지 않게 정 반대의 돌발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는 군대였다. 대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여기저기서 ''죽이자, 죽이자!'' 하는 구호가 연발로 터져나왔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 1개 중대가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쳐서 도끼와 톱을 들고 흔들어 대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자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먼 발치에서 겁먹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자기들끼리 수근거렸다.
주민들의 눈에는 그런 중대의 분위기가 그야 말로 전장에 임하는 전투원들이 결사의 각오를 다지는 듯한 비장한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러나 대대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이나 중대 병사들은 당사자와의 일면식도 없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행동이 경솔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전혀 몰랐다.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머릿수만 많으면 어떤 싸움이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날의 비극을 불러온 요인이라 할 수 있었다.
대대장은 이미 희천마을의 잔칫집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는지 중대장과 소대장들을 거느리고 먼발치에 앞장서서 중대 병력을 인솔해 가고 있었다.
중대가 우르르 몰려가는 속에서도 우리 소대장은 다른 지휘관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우리들에게 싸움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지 말라는 눈짓을 하였다.
열차에서 그 평양 사람을 접촉한 우리 소대 병사들은 소대장의 암시를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는 그의 집 앞에 이르는 동안 중대의 맨 뒤에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따라가면서 죄인과도 같은 무거운 마음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북한 농촌 어디나 다 그러하듯이 그의 집 또한 평범하고 아담한 농촌의 문화주택이었다.
우리가 집 앞에 도착해서 보니 집안과 마당에서는 그가 열차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던 것처럼 정말로 진갑잔치가 한창이었다.
북한의 농촌마을에서는 식량난이 터지기 전까지는 어느 집에 잔치가 생기면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동네사람들 모두가 몰려가서 밤늦도록 같이 마시고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고향집의 풍경과도 같은 소박한 진갑잔치가 무뢰한들에 의해서 싸움마당으로 변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떨렸다.
잔치를 한창 즐기던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이 떼거리로 들이닥치자 모두가 영문을 몰라서 당황해 하는 기색들이었다.
대대장은 중대 병력을 집 앞에 멈춰 세우고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좋은 말로 할 때 잘 들어라! 우리가 미리 알고 왔으니까 숨을 생각하지 말고, 3일 전에 평양에서 온 새끼는 당장 나와라!''
떠들썩하던 잔칫집의 분위기가 대대장의 고함소리 한 번에 순식간에 얼어 붙었다.
밖에서 술을 마시던 몇 사람들이 집 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에 한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늙은 할머니 한 분이 집안에서 나오더니 공손한 말투로 대대장에게 "무슨 일입니까"하고 물었다.
대대장은 어머니뻘 나이의 할머니에게 인사도 없이 첫 마디부터 마구잡이로 반말을 쏟아냈다.
"당신의 아들인가 하는 사람, 3일 전에 평양에서 왔지? 집안 박살 나지 않으려면 그 새끼 당장 나오라고 해!'
할머니는 평소 인민군대에 대해 예의가 없는 무뢰한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대대장의 말투와 행실을 별로 신경쓰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내 아들이 어렸을 적에 집을 나가 27년만에 돌아온 셈입니다. 무슨 일인지 나한테 먼저 알려주면 안 되겠어요?''
할머니의 공손한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옆에서 듣고 있던 중대장이 나서서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다 죽어가는 송장같은 노친은 필요 없으니까 방안에 숨어 있는 아들새끼를 뒈지기 전에 빨리 밖으로 나오게 하란 말이야!''
이때 60이 넘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대대장 앞으로 오더니 머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할머니를 가리키면서, 자기의 누님이고 오늘이 누님의 진갑잔치날이라 지금 한창 상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하자 중대장이 그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 상을 받던 똥을 받던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평양에서 온 그 새끼를 당장 내보내란 말이야! 안으로 들어가서 다 박살을 내야 정신을 차리겠어?''
중대장한테 멱살을 잡힌 분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면서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조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대신 사과를 할테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라며 애걸하였다.
중대장의 오른쪽 주먹이 한순간에 그의 얼굴에 날아들었고 정면을 얻어맞은 그 사람은 코피가 터지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를 지켜보던 할머니가 참지 못하고 중대장의 따귀를 후려갈기고 일갈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네놈들이 인민군대가 맞긴맞아? 차라리 날 죽여라! 이 개만도 못한 놈들아!''
육순의 늙은 할머니는 독이 올라 중대장의 한쪽 귀를 잡고 매달리듯 달려들면서 사정없이 비틀었다.
중대장이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면서 가슴을 힘껏 밀치자 할머니는 애처러운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저만치 나가 쓰러졌다.
바로 그 순간에 열차 칸에서 보았던 평양 사내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허공으로 날아와 전광석화 같은 발차기로 중대장의 목젓 부위를 사정없이 올려 찼다.
중대장은 숨도 제대로 못쉬고 저만치 나가 떨어져 버렸다.
- 2020년 10월 노동당 창건기념일에 -
국가원로회 서신 142호- 戰士와 戀人(2) -
<잘못된 싸움>
중대장을 단 한번의 발 타격으로 가볍게 쓰러뜨린 '평양사람'은 감히 마주보기 힘들 정도의 매서운 눈길로 대대장을 쏘아 보았다.
"내가 평양에서 3일 전에 내려온 사람이고 27년 만에 고향을 찾은 아들입니다. 나한테 볼일이 있습니까?''
당사자가 나타나서 순식간에 한방으로 중대장을 기절시켜 버리자 대대장도 그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렸던지 조금 전에 소리치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게 순간적으로 자세가 굳어지는 듯한 눈치였다.
그러나 곧 대대장은 1개 중대라는 수적 우세를 믿었는지 거드름을 피우면서 도발적으로 나왔다.
"내가 대대장이다. 네가 열차 안에서 우리 병사들을 때린 놈이냐?''
"때린 것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 앞에서 행동을 너무 무례하게 하는 것 같아서 버릇을 가르쳐 줬을 뿐입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잘못한 정도가 아니라 인민군대를 때렸잖아 이 새끼야!''
대대장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그의 얼굴에 삿대질을 해댔다.
"그럼 대대장은 인민군대가 백주대낮에 열차 안에서 상관을 구타하고 여성안내원을 발가벗기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양사람의 행동이나 말투는 비교적 겸손하고 양보할 줄 아는 성품이었고 누가 봐도 한눈에 품위나 예의가 돋보일 정도로 단정해 보였다.
이때 소대장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그들 두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대대장한테 열차 칸에서 있었던 일은 소대장인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자, 대대장이 단박에 그의 면상을 후려갈기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병신 같은 새끼, 대원들을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터지게 만들어 놓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끼어 들어. 저리 비켜 이 새끼야!"
화해를 시키려다가 생각지 않게 한방 얻어 맞은 소대장은 두번 다시 말을 붙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대대장 동무, 자초지종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열차 안에서 잠깐 동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 화해하고 다 풀었습니다.
대원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도 이해합니다.
서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좋게 해결하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화를 푸시고 들어가서 술이나 한 잔 하십시다.''
평양사람은 유연한 말로 대대장에게 깍듯이 양해를 구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 두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평양사람'이 수그러드는 행동을 보이자 대대장은 오히려 기승을 더 부리면서 지휘관의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거칠게 나왔다.
"야, 평양, 너 금방 몸을 놀리는 거 보니까 어디서 몇 동작 좀 배운 것같던데 한번 움직여 보지? 우리 얼마든지 받아줄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나? 이 거지같은 새끼야!''
"대대장 동무 내가 양해를 구했습니다. 병사들한테 손을 댄 것은 제 실수였습니다. 잘못은 무조건 내가 했으니까 여기서 그만하고 서로 화해를 합시다.''
대대장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투를 던졌지만 '평양사람'은 이번에도 얼굴 모습 하나 달리지지 않고 진정으로 화해를 요청하는 인내심을 보였다.
'평양사람'이 매번 겸손한 자세로 나오자 병사들 속에서도 웅성거리면서 그를 동정하는 눈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평양사람'이 자기보다 한수 위의 태도로 나오는데다가 병사들까지 수군거리며 한풀 죽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자 대대장의 태도가 돌발적으로 변하였다. 일이 자기의 의도대로 쉽게 되어가지 않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것이었다.
"이 평양새끼 죽여버려!''
대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끼와 톱을 든 병사들이 순식간에 '평양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일이 그쯤 벌어지자 '평양사람'도 더는 양보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는지 대대장을 향해서 단호하게 마지막 경고를 하였다.
"대대장, 병사들이 다치는데 대해서 나중에 후회를 하지 마시오, 책임은 반드시 당신이 진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바로 그때 집이 함흥 쪽인 나이 먹은 고참대원 한명이 나무를 하려고 시퍼렇게 날을 세운 낫을 들고 '평양사람' 뒤로 달려 들어 등짝을 찍었다.
시퍼런 낫은 그대로 등에 박혔고 등가죽을 한 뼘 정도나 끔찍하게 찢어 놓았다. 섣불리 달려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순간 방심했던 '평양사람'이 어처구니없게 먼저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평양사람'은 자신에게 낫을 휘두른 고참대원을 한순간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낫을 들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채면서 팔굽을 완전히 뒤로 꺾어 버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일이었을뿐 21명의 병사들이 '평양사람'의 공격에 의해 떼죽음 당하는 상상할 수도 없는 대형 사건이 터질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팔굽이 완전히 부러진 함흥 출신의 고참대원이 기절해서 나가자빠지자 흥분한 70여 명의 중대원이 한사람을 향해서 일시에 도끼하며 낫과 톱을 살벌하게 휘두르는 속에서 '평양사람'은 적당히 힘 조절을 해가면서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를 위주로 상대방을 견제하였다.
중대장이 첫 타격에 쓰러지고 고참대원의 팔이 부러져 나간것을 본 중대 병사들은 무기는 들고 있었지만 겁이나서 먼발치에서 위협만 할 뿐 섣불리 덤벼들지는 못했다.
진갑 잔치에 놀러왔던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은 잔칫집이 싸움판으로 번지자 아우성을 쳤고 농장 간부들은 대책을 세우려는지 어디론가 급히 사방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이었다.
중대장에게 맞아서 쓰러졌던 '평양사람'의 어머니는 눈물범벅이 되어서 이 사람 저 사람 바짓가랑이를 잡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잘못하면 육순의 노인이 싸움판 한가운데서 다칠 것같아 소대장과 내가 대대장의 눈길을 피해서 어머니를 집안으로 모셔 들어갔다.
어머니는 우리 손을 꼭 잡고 "내 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불쌍한 사람 입니다"며 제발 싸움을 말려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소대장과 내가 어머니께 "싸움을 꼭 말리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밖에 나왔을때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누가 도끼를 던졌는지 '평양사람'이 주저 앉아서 피범벅이 된 종아리를 두 손으로 조이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도끼가 떨어져 있었다.
이때 3소대장이 달려들면서 숙이고 있던 그의 머리를 내리 밟았다.
순간 '평양사람'의 입에서 괴성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그의 주먹이 3소대장의 턱 아래 부위에 강하게 들어가 박혔다.
부질없이 달려들어가 발길질 하던 3소대장은 끽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뼈가 부러져서 단번에 즉사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평양사람'은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이성을 잃어버렸고 성난 한 마리의 사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정없이 날뛰었다.
그의 발과 주먹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의 손발을 거쳐간 병사들은 사방으로 나가 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30명이 넘게 쓰러지자 다급해진 대대장이 ''더 달려들지 말고 피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성난 '평양사람'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의 시작과는 대조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게 순식간에 싸움판의 상황이 반전되었다.
겁을 먹은 군인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자 '평양사람'은 소외양간 쪽으로 피해 달아나는 대대장에게 달려가서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병사들이 쓰러져 있는 마당 한 가운데로 잡아다가 꿇어 앉혔다.
얼굴이 까맣게 죽어서 부들부들 떨고있는 대대장에게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도끼와 낫으로 등과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평양사람'의 몸도 벌써 피범벅이 되어 옷이 다 피에 물들어 있었다. 30분도 채 안 걸리는 싸움이었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심각하였다.
그래도 '평양사람'이 나서서 흥분한 마을 사람들을 말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대대장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대대장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먼 발치에 서있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듯 눈웃음을 지으면서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였다.
미안한 모습으로 우리가 그에게 다가가자 '평양사람'은 피를 닦아 주던 손수건을 말없이 나의 손에 넘겨 주면서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대대장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고 옆에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도와주려고 하자 그는 그러지 말라고 손짓을 하며 말하였다.
"그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내가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할 싸움이었는데 실수로 한 것 같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어.''
급소 부위를 가격당해서 잠시 동안 기절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대장은 풍을 맞은 사람처럼 온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용기를 내서 '평양사람'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다 죽었으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 잘못이 큽니다. 죽어도 우리가 죽겠습니다.''
'평양사람'은 우리 일행들을 얼마동안 측은하게 바라보더니 대대장에게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대대장, 이번 싸움은 잘못된 싸움이야. 내가 누군지 처음부터 당신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 실수였어. 내가 누구라고 신분을 정확히 밝히면 자네들은 아마 놀라게 됐을거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숨기고 있었는데... 대대장 당신이 판단을 잘못 했어.
숱한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제는 우리 둘 중에 한사람이 책임을 져야 될 일이야.''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들리면서도 안타까움이 그대로 베어 있었다.
'평양사람'과 우리가 죽은 사람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한 마음으로 있는 사이 불시에 인근에 있는 교도지도국 산하 특수부대 요원 수 십명이 싸움 현장에 들이 닥쳤다.
아마도 처음 싸움이 시작될 때 농장 간부들이 달려가서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들에게 구원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때 예견치 못했던 돌발적인 일이 순식간에 발생하고 말았다.
싸움판을 피해 숨어 있던 중대의 하사관인 부분대장 한 사람이 특수부대 사람들이 오는 것을 우리를 도와주려고 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긴장을 풀고 방심하고 있는 '평양사람'에게 달려 들어 그의 등허리 척추를 도끼로 내리 찍었다.
말릴 새도 없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부분대장은 척추에 박힌 도끼를 뽑더니 다시 한 번 그 자리를 내리 찍었다.
도끼날에 척추가 잘린 평양사람은 괴롭게 신음소리를 내더니 덩어리 같은 피를 토하면서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소대장과 내가 달려들어서 도끼를 빼앗고 '평양사람'을 품에 안았을 때 그는 벌써 마지막 숨을 힘들게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울면서 죽지 말라고 소리치자 그가 간신히 눈을 뜨더니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억울해"라는 말을 비교적 또렷이 남기더니 머리를 맥없이 떨구었다.
아들이 숨을 거두자 맨발로 달려 나온 어머니는 굳어져 가는 아들의 시신에 얼굴을 파묻고 기절하고 말았다.
< 戀人>
싸움이 끝난 바로 다음날, '평양사람'과의 80대1의 싸움에서 21명의 목숨을 잃은 대대에서는 아침부터 긴장감이 나돌았다.
공병국의 검찰에서 검사들이 내려와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고, 오전 11시 경에는 직승기 (헬리콥터)의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농장에서 무우를 심던 대대 앞의 공터에 먼지를 일으키며 천천히 착륙하였다.
직승기의 문이 열리자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까만 정복차림의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먼저 내리고 그 뒤로 역시 검은 양복 정장을 하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7~8명의 남자들이 뒤따라 내렸다.
그들은 부대 지휘관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여단장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대대지휘부 안으로 들어갔다.
약 15분쯤 후 갑자기 전 여단의 폭풍명령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었다. 각 대대, 중대들은 전투 장구류들을 착용하고 여단지휘부가 자리 잡고 있는 연병장에 집결하였다.
싸움 도중에 중상을 입고 치료중인 대대장과 다른 사람들까지 열외없이 전부 모이라는 여단장 명령이 별도로 떨어졌다.
잠시 뒤에 집결해 있는 여단 대열 앞으로 조금 전에 평양에서 직승기를 타고 내려온 사람들과 함께 공병국에서 내려온 간부들, 검사들, 여단본부 지휘관들이 나타났다.
무장한 보위중대 소속의 1개 소대도 여단 대열 앞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도열했다.
전 여단이 지켜보는 앞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낀 여인이 맨 앞에 나서서 정렬해 있는 여단 대열을 한 번 휘둘러보더니 뒤에 서있는 같이 온 일행에게 무슨 말을 몇 마디 지시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뒤에 그 여인의 지시를 받은 일행 중 한명이 여단장에게 다가가더니 귀속말로 무엇인가를 전달했다.
여단장은 그의 말을 듣고 꽂꽂하게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여단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싸움에 참가하였던 대대만 남고 다른 대대는 좌우로 백보씩 이동케 한 것이다.
선글라스의 여인이 여단장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고갯짓을 하더니 대대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어제 마을에서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로 오십보 물러나라"고 했다.
대오가 갈라지자 그녀는 대대 정치지도원과 보위지도원을 불러 그들에게 양쪽의 인원을 정확히 확인하라고 말하였다.
곧이어 공병국에서 내려온 검사에게 싸움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게 했다.
대좌 계급을 달고 있는 공병국 검사는 딸과 같은 젊은 여성에게 차렷자세를 하고 깍듯이 거수경례를 붙이더니 "이제부터 호명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곧 대대장을 포함해서 15명이 대열 앞으로 불려나가 일렬횡대로 나란히 정렬하였다.
도끼로 '평양사람'의 허리척추를 찍은 부분대장을 비롯해서 싸움에 주동적으로 참가한 사람들 위주로 불려나갔다.
선글라스의 여인은 검사가 넘겨주는 자료를 받아서 한참 동안 한장 한장 넘기면서 천천히 읽어보더니 우리 소대장을 비롯해서 세 명의 이름을 호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했다.
선글라스여인은 그들에게 "잘못은 크지만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경고하고 중대의 대열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여인이 검사에게 다시 눈짓을 하자 검사가 무장한 보위 소대원들에게 대대장을 비롯한 나머지 열두 명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열두 명은 서있는 자리에서 포승줄에 온 몸을 결박당했고 여단지휘부 측면쪽에 있는 아찔한 높이의 벼랑쪽을 향해서 나란히 세워졌다.
잠시 후 선글라스 여인의 커다랗게 격앙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을 직접 받고 내려온 사람이다. 네놈들이 어제 도끼로 살해한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여기있는 너희들 여단 전체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수십 번을 적의 후방에 드나들면서도 머리털 한 올도 다치지 않았던 사람이야.
남조선의 광주에서 적들과 힘들게 싸우면서도 조국이 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돌아온 인민의 영웅이란 말이야.
네놈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크고 그 후과가 심대한지 너희 부모들과 친척들이 평생 살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 알게될 것이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명에 의하여,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너희들 12명을 모조리 처단한다!''
모두가 설마 하고 있는데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단박에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 들더니 맨 우측에 서있는 대대장과 중대장을 향해서 분노를 폭발하듯 탄창 하나를 다 발사하였다.
뒤이어 무장한 보위소대원들 20명이 나서서 나머지 열 명에게 귀가 멍하도록 기관총을 발사하여 순식간에 12명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68년산 자동소총의 요란한 소리는 골짜기를 메웠고 포승줄에 결박당했던 12명은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모조리 처형 되었다.
통상적인 사형집행 시에 '남기고싶은 마지막 말을 하라' 든지 하는 모든 걸 생략하고 가차없이 공개처형 해버렸다.
사형 집행이 끝나자마자 평양에서 내려온 선글라스의 여인과 그의 일행들은 즉시 부대를 떠나는 차비를 했다.
그 여인은 직승기에 오르기 전에 선글라스롤 잠깐 벗고 눈자위를 훔쳤다.
그리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직승기로 돌아선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흐느끼고 있음을 알아챘을 만큼 약간 특이했다.
그들이 한바탕 피바람을 몰아치고 간 다음에도 얼마 동안 부대에서의 소동은 끝나지 않았다.
대대장이 주동적으로 나섰다가 총살당한 우리 대대는 일주일 뒤에 해산되고 새로운 대대가 만들어졌으며 우리 중대 전원은 모조리 노동교양소에 가서 1년 동안 단련을 받다가 처벌제대 되어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단장을 비롯한 여단지휘부의 주요 핵심 간부들도 연대 책임을 지고 우리처럼 고향으로 낙향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년 후에 확인된 내용이지만 전 여단이 지켜보는 앞에서 권총을 빼들어 대대장과 중대장을 직접 총살하고 평양으로 올라간 매력적인 검은 선글라스의 여인이 처연한 심정으로 밝힌 '장중한'의 장례는 가족의 요청에 의해 평양으로 유해가 옮겨지지 않았고, 5일장을 치룬 후 희천마을 부친의 묘소 아랫쪽에 일반사람들의 묘소와는 완전히 구별되게 웅장한 모습으로 조성되었으며 1.5미터 높이의 묘비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 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 있으라!'
<재회>
1983년 11월 24일 노동교화소를 나온 후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같이 처벌 제대된 소대장이 1분대장과 함께 찾아와 희천마을의 장중한 동지 어머니에게 사죄하러 가자고 했다.
그들이 준비해온 음식에 몇가지를 더 보태어 밤시간에 출발하는 기차를 무임승차하여 자강도 희천으로 갔다.
1년 전보다 머리가 더 하얗게 희신 어머니가 우리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 풀석 주저앉으면서 서럽게 통곡을 하시었다.
우리는 속죄를 받으려고 왔으니 죽여 달라고 하자 어머니는 눈물을 그치고 오히려 치마폭으로 우리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다. 우리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다음날 '평양사람'의 묘앞에 준비해간 음식들을 소박하게 차려놓고 절을 하였다.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사죄와 회한의 절이었다.
묵은지 3일째 되던 날 홀로 계신 어머니께 도움을 드리려고 겨울에 땔 장작을 하루 종일 패서 크게 단을 쌓아 놓고 저녁을 먹는데, 어머니께서 장롱 문을 여시더니 두툼한 책 한권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으시면서 아들이 진갑잔치 때 평양에서 가져온 공책인데, 아들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서 들여다 보긴 하지만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도무지 내용을 알 수가 없다며 한번 읽어봐달라고 하셨다.
첫 머리의 내용은 필자가 어릴 때 집을 나가 어느 무인도와 같은 섬에서 생활한 것부터 시작하여 희천마을에 오기전까지 모든 상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자서전 격이었다.
15년 동안 특수훈련을 받던 일들과 남조선에 나가서 공작하던 내용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국군 출신으로 포로가 되었던 아버지에 관한 내용과 공작 대상자인 남조선에 남아있던 부친의 친척들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접촉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특수임무를 띤 남파공작 시에 북한에서는 누구나 친히 알고 있는 문익환을 만나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였고, 그 친서를 받아든 문익환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기록돼 있었으며, 특히 1980년 5월에 있은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내용이 포함돼 아었다.
80년 5월21일 08시, 장중한은 계엄군인 20사단의 지휘용 차량부대가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통신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300명의 전사들을 진두지휘 했다. 물론, 그 찝차들을 운용하게될 간부들은 열차편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도 얼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총기를 사용하면 안 되었다.
대학생 등 시민군으로 위장하기 때문이었다.
막대기 하나로도 얼마든지 십 여명은 제압할 수 있는 특수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짚짜 14대를 탈취하는 건 식은죽 먹기였다.
탈취한 사단장용 1호차를 선두로 하여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가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넘겨받았고, 곧바로 이 차량들을 이용해 전라남도 도내 44개 무기고를 털었다.
장중한이 이중 영웅칭호를 받기에 충분한 전과를 거둔 것이다.
당시 대학생들은 광주 전남지역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5월 18일 고려대 선배인 동아일보 기자의 권유로 함께 광주에 내려간 고대신문 기자 학생이었던 이병완은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고향 장성에서 소식을 들은 부모들이 아들이 계엄군에 잡혀 갈까봐 데리고 가버렸다.
장중한의 기술은 계속된다.
'남조선의 전라남도 광주는 해방 전부터 인민들의 애국심과 혁명적인 열기가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했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5.18이 시작되기 전부터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은 5.18사건이 시작될 수 있는 충분한 원천이었고 원동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남조선의 재야인사들은 이미 북조선의 지령을 충실히 집행할 수 있는 정신적인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고 그들 주위에 결집되어 그들을 추종하고 있는 많은 친북한적인 세력들도 남조선에서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있는 집단으로 충분히 장성되어 있었다.
5.18 광주인민봉기가 차질없이 무장폭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전적인 배경은 북조선에서 파견된 대남공작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먼저 있었고 남조선 지하조직들의 꾸준한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조선에 내집처럼 수없이 드나들면서 정보 수집과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광주인민항쟁 처럼 남조선정권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준 대형 공작에 공개적으로 참가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새벽 첫 닭이 울 때까지 어머니는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죽은 아들의 목소리라도 들으시는듯 주름잡힌 눈매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셨다.
戰士는 가버리고 戀人은 이후 정략결혼을 했지만 그 남편 또한 정쟁의 희생물로 동생에 의해 무참히 처형되었다.
2020년 10월 11일
탈북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재 구성한 '戰士와 戀人'은 실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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