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26성인기념성당의 순교 조선인들은 누구인가 |
니시자카 언덕의 승천 기도 일본 26성인 순교기념공간 |
입력시간 : 2016. 10.19. 00:00 |
| 1597년 2월5일 일본 첫 순교자를 기리는 니시자카 언덕에 세워진 \\\\\\\'26성인 순교자기념성당\\\\\\\'. 가우디 건축을 본 딴 두개의 탑을 세우고 정면에는 조선 도공 마을의 도자기 파편을 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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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는 두 얼굴의 도시다. 짬뽕과 카스텔라, 그 말랑함으로 기억한다. 그곳은 순교, 원자폭탄, 조선인 강제노역의 땅이기도 하다. 짬뽕과 카스텔라, 가톨릭 순교는 실상 개항과 유럽 문화의 이식이자,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포로들의 흔적이다. 원폭과 징용도 서로 맞닿아 있다. 군수도시에 끌려간 조선인 노무자 1만 명이 원폭에 희생당했다. 나가사키 슬픔은 한국인의 눈물이다. 인구 45만의 기도하는 도시에 스민 인간 존엄의 순교 현장을 기록한다. 신도(신사)의 나라 일본에서 종교적 장소를 어떻게 지역자산으로 활용하는지도 눈여겨본다.
나가사키 역 맞은편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니시자카, 서쪽 언덕이란다. 경차조차 서로 피하는 좁은 오르막길이다. 계단을 오르니 널따란 마당이 반긴다. 나가사키 시내가 훤하다. 마당 뒤편에 병풍처럼 기념비가 서 있다. 그 뒤로 도서관 같은 기념관, 오른편으로 가우디 건축물을 빼닮은 기념성당이 서로 잇대어 있다. 1597년 일본 첫 순교자 26명을 기리는 공간이다. 순교자들은 265년만인 1862년 가톨릭의 성인이 됐다. 다시 100년 후 1962년, 죽임의 터에 기념공간을 세웠다.
순교 기념비 앞에 섰다. 7계단을 오른 뒤 다시 몇 걸음 후 3계단을 올랐다. 기다린 가로 조형물을 마주한다. 별다른 치장 없이 화강석으로 테를 두르고, 부조로 26명을 새겼다. 모두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양새다. 그들은 땅을 딛지 않고 떠 있다. 아마 그들이 디딜 땅은 없었나 보다. 순교와 승천의 상징이다. 조각가 후나코시 야스타케(舟越保武) 작품 '승천의 기쁨'. 승천의 순간, 땅을 떠난 그들의 머리 위에 작은 글이 새겨져있다. '신께 마음을 드린다'
1597년 2월5일 오전 9시, 20명 일본인 신자와 6명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처형됐다. 그날은 수요일, 순교자들은 예수처럼 죽고 싶다고 했다.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는 예수처럼 손과 발에 못질을 해달라고 했다. 다른 이들은 예수와 같이 금요일에 처형해달라고 간구했다. 기념비 부조 중 유독 키 작은 3명이 눈길을 끈다. 12살 루드비고 이바라키, 13살 안토니오, 14살 토마스 고자키. 이바라키는 수도원에서 일을 하다가 신앙을 접했다. 신부가 체포당하자 자신도 끌고 가라고 소리쳤다. 소년들은 두려워 떨지 않았다.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로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전한다.
이들은 그해 1월 교토와 오사카에서 24명이 체포돼 33일 동안 630㎞를 걸어 죽음 땅 나가사키로 왔다. 오는 도중에 사람들 앞에서 본보기로 귀와 코가 잘려 나갔다. 처음에는 24명이었는데, 호송 중 2명이 늘었다. 베드로 시케시로는 체포된 이들의 수발을 들기 위해 따라 나섰다가 순교를 자원했다. 또 목수였던 프란치스코 기치는 이들과 동행하다가 신자임을 고백했다. 일부 기록에는 이들이 호송 감시원이었다고 한다.
시케시로와 기치는 묻고 또 물었다. "대체 저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런 모진 고문을 감내하는가" 신앙, 믿음은 무엇일까. 12살 어린 영혼이 기꺼이 십자가 창끝에 매달린 영적 에너지가 궁금했다. "그들은 육신보다 영혼이 더 중요했습니다. 당시 일본 절에는 영혼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죠. 몸이 아닌 영혼,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죽음 너머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확신, 그 확신을 증거하는 믿음이 생명보다 더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기념관장인 렌조 드 루카 신부와 기념관 해설사인 미야타 카즈오씨 설명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루카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학교 시절 제자다. 믿음, 그것은 영혼의 자유이자, 자유의 영혼이기도 하나보다. 그래서 믿음의 절대치인 순교는 인간 존엄의 성스런 표징 일게다.
순교 기념비 오른편에 26성인 순교자 기념성당이 니시자카 언덕을 빛내고 있다. 공식 이름은 성 필립보 성당. 필립보는 이 언덕에서 숨진 6명의 선교사 중 한명으로 일본에서 포교를 한 적이 없다. 그는(당시 24세) 멕시코 출신으로 필리핀에서 수도사로 활동하다가 멕시코로 귀국하던 중 고치 현 근해에서 난파한 바람에 붙잡혔다.
성당은 마치 종이배를 뒤집어 놓은 듯 한 모양에 돛대 마냥 높다란 기둥 2개를 세웠다.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 연구의 제 1인자로 알려진 건축가 이마이겐지(今井兼次ㆍ1895~1987) 작품. 힘차게 솟은 2개의 탑은 높이 16m이다. 좌측 탑은 기도와 찬미다. 우리의 기도를 하늘에 중개하는 성모 마리아를, 피뢰침에 매달린 왕관은 지상에서의 승리를 표현했다. 우측 탑은 천상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통로로, 성령의 은사를 나타낸다. 피뢰침에는 비둘기, 빛, 광채의 둥근 원형이 있다. 탑과 기념성당 정면에 도자기 파편들이 붙어있는데, 마치 자유로운 모자이크 같다. 이 파편들은 26성인들이 교토에서부터 나가사키까지 끌려오면서 지나왔던 도자기 마을에서 가져온 것이다. 순교자들은 야마구치현 하기, 사가현 아리타 등 조선 도공이 살던 마을을 지나왔다.
2층은 미사를 봉헌하는 공간이다. 그 곳 한쪽에 바오로 미키 등 3명 성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막부의 박해로 유해를 나가사키에 둘 수 없자 350년 동안 필리핀에 보관했다가 다시 나가사키로 모셨다. 천정은 서까래 마냥 나무로 장식돼 있고 군데군데 창을 내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었다. 아담하나 건축적 기교가 스며있다. 아침에는 동쪽 창문에서, 해질녘에는 서쪽 창에서 작은 장미 문양이 발한다. 성모의 상징, 장미의 향이 널리 퍼지기를….
26성인 순교기념관으로 향한다. 기념관은 1ㆍ2층과 특별한 방인 '영광의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전래와 박해, 순교, 잠복, 믿음의 재발견 등 일본 크리스천의 역사를 볼 수 있다.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의 전래와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금교령, 순교로 시작한다. 일본에서 천주교 신자는 기리시탄(切支丹)이라 불렀다. 기독교인의 포르투갈어 크리스타오에서 유래했다. 1587년부터 1867년까지 280년간 박해시절 기리시탄은 죽임의 다른 언어였다. 모진 고문의 도구들이 인간에 의해 발명돼 또 다른 신,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죽였다.
기념관을 안내하던 카즈오씨가 손짓한다. "자세히 보세요. 이름이 확인된 한국인 순교자 명단입니다. 1613년 8월16일에 하치칸 조아퀸이란 분이 에도, 지금의 도쿄에서 순교했습니다. 모두 26명입니다. 전시품 중 대형 양산에 그림을 그린 것이 있는데 거기에 조선의 남대문, 호랑이 잡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념관 여기저기에 조선의 흔적들이다. 26성인 순교 후 25년이 지나 1622년 '겐나 대순교'가 일어난다. 나가사키의 선교사와 신자 56명이 화형, 참수 당했다. 이탈리아 로마 성당에는 겐나 순교를 그린 회화가 소장돼 있다. 순교기념관 2층에 복사본이 있다. 그림 상단 오른편을 자세히 보면 상투 튼 조선 사람이 들어있다.
1594년 당시 일본에 2000여 명의 조선인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1610년 조선인 교인단체와 조선인 천주당이 나가사키에 세워졌다. 이들 조선인 기리시탄은 어디서 왔을까. 임진왜란ㆍ정유재란(1592~1598)의 포로들이었다. 예수회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가 작성한 연보를 보면 '1594년 이후 조선인 포로와 노예 2000명 이상이 세례를 받았다'고 적혀있다. 2층 기념관 중정에는 조선인 복자(가톨릭교회의 공적 공경자에게 주는 존칭)를 기리는 조각상이 지난 3월 세워졌다.
기념관 '영광의 공간'에 들어섰다. 순교자의 유해가 담긴 제단과 좌ㆍ우측에 마리아관음상이 있다. 박해시절 불교의 관음상을 마리아로 여겨 성물로 삼았다. '마리아 관음'이라 이름 붙였다. 그 중 한 관음상은 검게 그을렸다. 원폭 피해를 입은 마리아관음상이다.
정중앙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긴 글이 도드라진다. 神は 愛なり, 신은 사랑이라-. 칼날이 스치고, 뜨거운 불길이 몸을 지진다. 신은 어디에 계시는가….
나가사키에서 / 이건상 기획취재본부장 gs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