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편에서 계속>
미 8군으로서는 긴급 상황이었다. 중공군 공세는 일정한 패턴 속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당시 미군 최고 지휘부의 판단이었다. 보급의 문제가 심각해 1주일 이상의 공세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국군 3군단의 와해 상황은 그런 판단과 믿음을 흔들 만큼 심각했다.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3군단이 무너져 예하의 각 장병들이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와 창촌리로 마구 쫓기면서 커다란 혼란의 양상을 보일 무렵 특별 브리핑을 받았다고 한다. <6.25전쟁사>는 당시 참모들로부터 특별 브리핑을 받은 밴 플리트 사령관이 “중공군의 공격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반격을 개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미 8군으로서도 한국군 3군단의 붕괴 상황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밴 플리트 사령관의 우려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우선 중공군의 공세가 곧 한계를 보일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아군의 최후 저지선까지 뚫릴 경우에는 상황이 더 심각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미 8군
곧 소개하겠지만, 밴 플리트는 그런 우려 때문에 경비행기에 올라타 지금의 용평까지 온다. 그곳에서 특별한 작전을 명령한다. 중공군의 공세 확대를 막기 위한 방책(方策)이었다. 그럼에도 3군단이 방태산을 넘어 이곳저곳으로 중공군에게 쫓기던 무렵에는 그로서도 달리 손을 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전사(戰史) 기록의 여러 내용을 따지면 당시의 밴 플리트 사령관은 두 가지 점에 주목했던 듯하다. 우선은 중공군이 정확하게 어디까지를 노릴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는 중공군의 위치 정보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기존의 중공군 공세에 관한 믿음이 맞느냐를 지켜본 셈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군의 능력이었다. <6.25전쟁사>에 따르면 밴 플리트는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을 직접 호출해 “하진부리 일대에서 더 이상 철수하지 말고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모든 전선을 이끌고 있는 미 8군 사령관으로서 설정한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그는 이 저지선이 지켜지느냐를 유심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황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항이 없는 국군의 퇴각과 도주만이 이어졌다. 중공군은 쫓기는 한국군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작전을 펼쳤다. 광원리에서 창촌리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했고, 주변의 주요 고지를 선점해 한국군의 섬멸을 기도했다.
미 8군으로서는 긴급 상황이었다. 중공군 공세는 일정한 패턴 속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당시 미군 최고 지휘부의 판단이었다. 보급의 문제가 심각해 1주일 이상의 공세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국군 3군단의 와해 상황은 그런 판단과 믿음을 흔들 만큼 심각했다.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3군단이 무너져 예하의 각 장병들이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와 창촌리로 마구 쫓기면서 커다란 혼란의 양상을 보일 무렵 특별 브리핑을 받았다고 한다. <6.25전쟁사>는 당시 참모들로부터 특별 브리핑을 받은 밴 플리트 사령관이 “중공군의 공격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반격을 개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미 8군으로서도 한국군 3군단의 붕괴 상황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밴 플리트 사령관의 우려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우선 중공군의 공세가 곧 한계를 보일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아군의 최후 저지선까지 뚫릴 경우에는 상황이 더 심각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미 8군
곧 소개하겠지만, 밴 플리트는 그런 우려 때문에 경비행기에 올라타 지금의 용평까지 온다. 그곳에서 특별한 작전을 명령한다. 중공군의 공세 확대를 막기 위한 방책(方策)이었다. 그럼에도 3군단이 방태산을 넘어 이곳저곳으로 중공군에게 쫓기던 무렵에는 그로서도 달리 손을 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전사(戰史) 기록의 여러 내용을 따지면 당시의 밴 플리트 사령관은 두 가지 점에 주목했던 듯하다. 우선은 중공군이 정확하게 어디까지를 노릴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는 중공군의 위치 정보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기존의 중공군 공세에 관한 믿음이 맞느냐를 지켜본 셈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군의 능력이었다. <6.25전쟁사>에 따르면 밴 플리트는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을 직접 호출해 “하진부리 일대에서 더 이상 철수하지 말고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모든 전선을 이끌고 있는 미 8군 사령관으로서 설정한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그는 이 저지선이 지켜지느냐를 유심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황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항이 없는 국군의 퇴각과 도주만이 이어졌다. 중공군은 쫓기는 한국군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작전을 펼쳤다. 광원리에서 창촌리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했고, 주변의 주요 고지를 선점해 한국군의 섬멸을 기도했다.
- 중공군 제5차 2단계 공세가 벌어지던 무렵 홍천에서 미군 부대에게 붙잡힌 중공군 포로들 모습이다. 중공군은 현리를 제외한 다른 지역 전투에서는 유엔군에 막혀 공세가 꺾였다.
5월 20일 밤 중공군의 많은 병력이 평창과 홍천의 경계에 서있는 높은 고개 운두령(雲頭嶺)을 넘어 속사리 북쪽으로 진출했다. 3군단 지휘소가 있는 하진부리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전날인 19일 흩어져 내려오던 3군단 주력은 이곳 운두령에서 중공군 1개 연대와 교전을 벌인 뒤였다. 그러나 어두운 밤을 이용해 중공군은 그 운두령을 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중공군을 피하기 위해 3군단은 오전 4시 30분쯤 하진부리로부터 다시 퇴각해 동쪽에 있는 횡계로 이동했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더 이상 물러나지 말라”는 선을 넘고 말았던 것이다. 3군단의 퇴각 소식을 받은 밴 플리트는 매우 화가 났을 것이다. 용납할 수 없는 지경의 전투력을 보인 3군단에게 밴 플리트가 취한 조치는 무엇일까. 그러나 그런 조치만을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아주 다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