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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ㆍ영해지역 유적답사 - 송천세려(松川世廬) 고택과 송천자(松川子) 2013. 5. 4 대진리 도해단에서 칠보산(七寶山) 휴게소를 가는데, 시원하게 뚫린 부산 강릉간 동해고속화도로(東海高速化道路-동해대로)를 달렸다. 3km의 백사장(白沙場)을 자랑하는 병곡(柄谷) 해수욕장, 그 유명한 명사(明沙) 20리(8km)의 백사장을 가진 고래불해수욕장을 눈요기로 스쳐지나갔다. 칠보산 휴게소에서 갔던 길을 역행해서 송천리(松川里)로 돌아오는 길에 시야에 펼쳐진 광활(廣闊)한 해안평야(海岸平野)에 감탄했다. 영덕에 이렇게 넓은 평야가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논밭에 녹색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보리밭이 눈이 모자라게 전개되고 있다. 이곳은 1년에 보리와 벼를 2기작을 하니 농업생산이 다른 고장에 비해 활발하고 부촌임을 암시하고 있다.
송천리 송천세려 고택 위치도
주변에 보이는 논밭은 보리가 심어져 있다 봄쌀보리
우리가 목적한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慶尙北道 盈德郡 柄谷面 松川里)에 도착했다. 송천(松川)은 소백산(小白山) 지맥(支脈)이 동해로 뻗어 칠보산(七寶山)과 형제봉(兄弟峰)을 형성하여 그사이 한 지맥(支脈)이 야지(野地)로 흘러내려서 점점(點點)이 봉(峰)을 이룬 곳에 송천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농경지(農耕地)로 전환되어 작은 봉(峰)들은 자취를 감추고 광활(廣闊)하고 비옥(肥沃)한 동해안굴지(東海岸屈指)의 평야(平野)를 이루고 있다. 원래 구릉(丘陵)으로 이루어진 이곳 주위(周圍)에 수백호의 촌락(村落)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리(五里)밖에 망망(茫茫)한 동해(東海)를 바라보며 송천(松川)의 맑은 시냇물이 마을을 호위(護衛)하듯 동해로 이르고 있다. 송천은 전형적인 취락 구조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를 벗어난 평야지대의 취락(聚落)형태인 저대지(底臺地) 위에 형성된 취락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송천세려고택 -1
송천세려고택 - 2
송천자 권득여(權得輿, 1636~1716) 선생이 영해 관어대(觀魚臺)에서 송천리로 이거하였는데, 이 고택은 선생의 아들 칠우정(七友亭) 권대림(權大林)선생의 주택으로 1700년대에 건립된 ‘日’자형의 가옥이다. 송천세려고택(松川世廬古宅)은 내부구조와 배치에 다소의 변형은 있으나, 경상북도에서 몇 안 되는 ‘日’자형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는 건물구조이다. 건축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이중대문채 및 초가 방앗간채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철거되어 현재는 한쪽이 틔어 있는 상태이다.
송천세려(권득여선생이 건립) 건축 구성은 4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침의 중문 좌측에는 외양간과 곳간을 두었는데 곳간의 뒤에는 통래간과 부엌이 연접되어 좌익사를 이루면서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중문의 우측에는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책방과 사랑윗방이 연접되어 있으며, 사랑윗방 뒤에는 사랑아랫방을 두어 우익사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윗방의 전면 쪽으로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랑마루를 두었는데 사랑마루는 전면으로 돌출되어 날개를 이루고 있다. 사랑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종량(宗樑) 위에 제형판대공(梯形板臺工: 사다리꼴의 판재로 된 대공)을 세운 5량가이며, 사랑방 윗벽에는 칠우정이란 현판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3칸 규모의 대청이 있고 안방은 대청의 좌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안방 윗머리에는 도장방이, 도장방 위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마루에서 벽에 붙은 통나무 사다리로 오르게 하였다. 대청 우측에는 상방을 두었으며 상방 전면에는 영덕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래 툇간을 두었다. 대량(大樑)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운 3량가의 건실한 구조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간
안채의 일부
송천자 권득여(松川子 權得輿, 1636~1716)는 대은(臺隱)선생의 세 아들 중 2자로 인조 병자(1636)에 관어대(觀魚臺)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적부터 재예(才藝)가 뛰어나 8세에 글을 지어 어른들을 감탄케 하더니 식견(識見)이 점차 넓어지고 조예(造詣)가 깊어지니 사림(士林)에서 종장(宗匠)으로 추대하였다. 숙종 임술(1682)에 사마(司馬)하고 계유(1693)에는 행의(行誼)로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천거된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은 송천(松川)에서 독오헌(獨娛軒-松川精舍)을 건립하여 사우(士友)와 시서(詩書)를 강론(講論)하고 후학들을 훈육(訓育)했다. 또 제방(堤防)을 보수하고 송천보(松川洑)를 창설함으로써 수백 정의 비옥한 평야를 조성하여 농경문화발전(農耕文化發展)에 공헌하는 등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향(鄕) 중의 대소(大小)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를 결연(結緣), 연계소(蓮桂所)를 창립하여 수시로 시주(詩酒)를 즐기며 효친경장(孝親敬長)과 후진양성을 장려(獎勵)하는 중추역할(中樞役割)을 하였다. 슬하에 일곱 아들을 두어 그중 세 아들이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3대(臺隱, 松川子, 七友亭)에 걸쳐 나라에 부름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부사가 내임하여 “형제가 재능이 함께 뛰어난 경우는 세상에 흔히 있으나 양친이 모두 살아 계신데 삼 형제가 급제하는 경우는 고금경향(古今京鄕)에 드문 영광”이라며 감탄하였다. 1716년(숙종42)에 향년(享年) 81세로 졸하니, 모든 선비가 애도(哀悼)하고 유고(遺稿)로 독오록(獨娛錄) 2권이 있다. 10여 대에 걸쳐 문한(文翰)이 끊이지 않았으며, 송천정사(松川精舍)는 영해 3ㆍ1의거의 발원지 이기도다.
사랑채와 안채를 차단하는 담
사당
수령 560여 년의 회화나무(학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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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네....여러가지로 많이 배웠구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