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 이말정 묘(금채낙지형, 살아 있는 아버지가 발복처가 되는가?)
1. 간산 포인트
* 연안이씨(延安李氏) 이말정(李末丁, 1395~1461)은 5남1녀를 두었는데 다섯아들이 모두 급제하고 후손들이 번창하여 8판서 12목사가 배출되었다. 그의 묘는 경북 김천 구성면 상원리 산6의 가족묘지에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후손들의 발복처는 이말정의 묘라고 하며 금채낙지형(金彩落地形)이라 한다. 조선8대혈에 든다는 견해도 있다.
* 부인 곡산한씨(谷山韓氏, 1446死)묘와 이말정의 묘가 上下로 쓰여 있는데 비석이 윗쪽묘에는 없고 아래 묘 앞에 세워져 있다. 어느 묘가 이말정의 묘인가? 여러 기의 묘가운데 어느 묘가 진혈인가? 금채낙지형인가? 진혈의 역량은 어떤 등급이가? 또 다른 후손의 발복처가 있는가?
2. 이말정의 가계
* 연안이씨 시조 이무(李茂)는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싸울 때 부장으로 따라왔다가 귀화한 사람이다. 이후 계대를 실전하여 고려때 연안(황해도 연안)이씨들은 각기 다른 기세조(起世祖)를 둔 10개 대파가 형성되어 있다. 인구는 16만명(2015년)이다.
* 이말정은 통례문부사공파(기세조 이지 李漬)의 5세손인데 그의 증조부는 이양, 조부는 감정 이백겸, 아버지는 예조판서 이보정으로 서울에서 세거하였다. 이말정은 예빈시소윤을 역임하고 연성부원군을 추증받았는데 1400년경 김천 구성면 지품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고(김천입향조 또는 지례입향조) 후손들이 번성하여 인근 상원리등지로 퍼져나갔다.
3. 어느 묘가 진혈인가
* 상원리 가족묘지에는 이말정부부와 후손등 10여기가 있다. 부인 한씨의 묘는 지나던 스님이 잡아주면서 3년 뒤 큰 인물이 나기 시작할 것이라 예언했는데 3년뒤부터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스님이 잡아준 묘소에 관하여 이말정 묘라는 간산기도 있으나 부인 한씨 묘를 이장해왔다는 말이 없으니 한씨 묘가 맞다) 이말정은 부인 死後 15년이 지나서 사망하여 부인 뒤에 안장하였고 30미터 뒤에 후손들 묘가 있다.
문제는 이말정 묘를 부인 묘와 가깝게 쓰는 바람에 비석을 아래에 있는 부인 묘에 세웠고 비문에 考上妣下(아버지는 위에 있고 어머니는 아래에 있다)라고 기재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비석에 큰 글자로 쓰여있는 이말정이란 기재에 홀려서 고상비하라는 작은 글씨를 못 보는 탓에 비석있는 묘가 이말정의 묘라고 오인하고 있다.(종손의 말이다)
* 가족묘의 분포도---
* 금채낙지의 구조도---
* 금채낙지의 大局---금환낙지 또는 금채낙지는 옥녀가 단장을 하기 위하여 금가락지 또는 금비녀를 내려놓은 곳의 모습이다. 옥녀, 거울, 빗이 있어야 제격이다. 옥녀가 단장하는 것은 낭군을 만나기 위함이므로 멀리서 옥녀를 만나러 오는 선인이 있어야 금상첨화가 된다.
* 금채 몸통---
* 금비녀에 쓴 묘---이석조, 한씨, 이말정,
이말정부부묘는 당판이 좁고 강기가 뭉처 있는 두뇌(氣탱크)이며 바람을 염려해야 된다. 그 아래에 있는 이석조 묘는 두뇌로부터 기운을 내려받아 순화되고 당판도 풍후하여 안정적이다. 그러므로 이곳 중국(中局)에서 진혈은 이석조 묘이고 한씨부인 묘는 차혈이며 이말정 묘는 평범하고 그 뒤에 있는 후손들 묘 역시 모두 평범하다.
* 선인 모습---
* 옥녀와 금채---
4. 발복에 관하여
* 이말정 가계는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모두 고위직에 오르면서 그 자식들이 번창하였다. 그러므로 五子등극이 폭풍성장의 시발점이라 하겠는데 그 발복처를 이말정부부에서 찾는 것은 무리라 생각된다. 우선 한씨부인 묘는 지나가던 스님이 잡아준 것이고 3년내 발복한다고 예언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재물발복은 속발이 가능하지만 인물이 배출되는 것은 손자이후로 본다. 실제 사례도 그러할뿐만 아니라 인물로 성장할 인재를 먼저 출산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씨장후 3년만에 다섯 자식이 과거에 급제하였다면 죽기전에 인재 다섯명을 이미 출산해두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인재를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발복이므로 조부쯤에서 발복처를 찾아야 될 것이다.
이말정 묘는 부인 묘의 上下 어디에 있든 발복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말정은 한씨부인 사후15년 뒤에 죽었으니 다섯 아들이 모두 출세한 것을 보고 죽은 것이다. 4남 이숙기가 무과에 급제한 것은 24세인 1453년임에 대하여 이말정이 사망한 시기는 8년뒤인 1461년이다. 물론 생시에 자식들 교육을 잘 시킨 것을 발복원인으로 볼 수 있겠으나(연안이씨들은 다른 성씨보다 자식교육열이 높은 것을 자랑한다) 풍수논리는 아니다.
* 이말정의 다섯 아들(성균관직장 이숙황, 지평 이숙형, 감찰 이숙국, 정양공 이숙기, 이조참판 이숙감 ) 중 가장 고위직에 오른 이는 4남 정양공 이숙기 (1429~1489, 형조 호조판서)이다. 다른 형제들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는 무과에 급제하고 이시애난을 평정할 때의 공헌으로 연안군에 봉해졌고 용인 완장천로 288-11에 있는 그의 묘가 명묘라고 한다. 다만 그의 장남 이세범은 아들이 없어 삼촌 이형례의 아들 이국주가 양자로 들어가서 번창하였다. 양자발복에 관하여 종래의 동기감응설은 부정한다.
* 정양공의 2남 이세칙은 상원리 원터 마을을 개척하여 상원리 입향조가 되었는데 그의 묘는 실전하고 이곳 집장지에 초혼장이 있다. 이말정의 장남 이숙황은 군위로 이주하는데 그의 2남 교수 이형례계(系)가 번창함에 따라는 이형례가 군위입향조가 되었고 그의 묘는 군위읍 외량리 오지산에 있는데 명묘라고 한다.
* 결론을 말하자면 이말정의 선조 중에 발복처가 있을 것이고 이말종 묘역중에는 이석조 묘가 진혈이며 후손들이 번져가면서 각기 명혈을 씀에 따라 선조 묘와 협력하여 발복역량을 발휘하였다고 본다.
5. 설화
임란때 이여송이 조선에서 인물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압록강 교량을 명당 묘의 곽으로 건설하도록 요구했는데 이말종 묘는 상부에 후손 묘를 섰으므로 명당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파묘를 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이 설화는 거짓이다. 임란때 왜적이 전국을 휩쓸고 다녔으므로 명당묘의 곽을 수집할 행정력이 없었다. 이말정 묘는 130년이 경과하여 곽이 썩어 교량건설에 쓸 재목을 얻을 수 없으므로 파묘대상이 될 수 없다. 이여송의 풍수참모 두사충은 전국의 명당을 찾아 비결을 남겼을 뿐 명혈을 훼손하지 않았다. (2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