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蛙以求命(와이구명)
蛙:개구리 와, 以:써 이, 求:구할 구, 命:목숨 명.
어의: 개구리로 사람의 생명을 구하다. 즉 적은 것으로써 큰 일을 해결하는 지혜로운 행동을 말한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22대 정조(正祖) 때의 좌의정 김종수(金鍾秀.1728~1799)는 본관이 청풍(淸風)이고, 호가 몽오(夢梧),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가 당폐(黨弊)를 일으킨 죄로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의 이방(吏房) 집에서 한 해 여름을 나게 되었다.
그가 하루는 낮잠을 자는데 난데없이 독사 한 마리가 배 위로 기어올라 왔다. 사람들은 기겁을 했다. 본인을 깨우면 필경 몸을 움직일 테고, 그리되면 놀란 독사가 물게 될 것이 뻔했다.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데 이방의 어린 아들이 잽싸게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왔다. 그러고는 살금살금 뱀 곁으로 다가가 개구리를 던졌다.
개구리는 폴싹폴싹 뛰어 달아났다.
그것을 본 독사는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재빨리 김종수의 배 위에서 내려왔다. 어린 아이의 지혜가 어른의 생명을 구해낸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王缺如蝕(왕결여식)
王:임금 왕, 缺:이지러질 결, 如:같을 여, 蝕:일식 식.
어의: 왕의 결함은 일식과 같아서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즉 제왕에게도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옥에
도 티가 있다는 속담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인물고(韓國人物考)
성종(成宗. 1457~1494)은 조선 제9대 왕으로 아랫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언로(言路)를 터줌으로써 리더십을 발휘한 성군이었다.
당시 궁중에서는 날짐승들을 사냥하여 수라상에 올리기 위하여 송골매를 기르고 있었다.
신종호(申從濩. 1456~1497)가 그 송골매를 두고 성종에게 아뢰었다.
“가뭄이 계속되어서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그 대책에 고심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내응방(內鷹房)에서는 송골매를 기르고 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오락과 놀이에 마음을 스시는 것으로 하늘을 공경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종은 당장에 송골매를 놓아 주라고 했다.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과 같다고 하는데 내가 어찌 허물을 숨기겠느냐, 잘못이 있으면 당연히 고쳐야 하느니라.”
성종은 그 자리에서 명령을 내려 허물이 있다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면서 다시 말했다.
“비록 임금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행하고 있을 때에는 과감하게 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가 바른 신하이고, 옳지 않은 일인데도 잘한다고 칭찬하는 자는 아첨하는 신하일 뿐이다.”
대학(大學)에서 말하기를 참다운 정치가란 백성이 좋아하면 함께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면 자기도 함께 싫어한다. 이런 사람을 일러 백성의 어버이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종은 신종호의 간언을 듣고 즉각 자신의 잘못을 고친 훌륭한 제왕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王命只一(왕명지일)
王:임금 왕, 命:목숨 명, 只:다만 지, 一:한 일.
어의: 왕의 명령은 오로지 하나다. 즉 왕의 명령은 번복되거나 두 개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1694~1776) 때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스무 살 전에 이미 학자로서 촉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벼슬에는 전혀 뜻이 없어 왕이 몇 번을 불러도 사양하고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 무렵, 사도세자(思悼世子) 사건이 일어났다.
영조는 세자를 참형키로 작정하고, 대신들은 물론 초야의 명현(明賢)들을 불러 그 문제를 의논하게 했다. 송명흠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왕의 뜻이 이미 확고함을 눈치 챈 참석자들은 거스르는 소리를 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므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송명흠이 홀로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동서고금을 두고 폭군으로 반대의 지탄을 받고 있는 제왕들도 자식을 죽이는 악행만은 저지르지 않았나이다. 어찌 차마 전하께서 선례를 남기려고 하시나이까?”
영조는 크게 노하여 즉시 송명흠을 내쫓았다. 그러고는 선전관에게 칼을 내리며 명령했다.
“저 자의 뒤를 밟다가 그가 곧장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도중에 다른 집에 들르거든 그와 그 집 주인의 목을 베어 오너라. 만일 곧장 집으로 가거든 그대 또한 따라 들어가 왕명으로 형을 집행하러 왔다고 말해라. 그래서 그가 원망(怨望)하는 기색 없이 형을 받으려고 하거든 살려주고, 조금이라도 변명을 늘어놓거든 목을 자르도록 하라.”
왕이 송명흠의 행동을 알아보라고 한 것은 그가 어느 당파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송명흠은 쫓겨나는 순간부터 자기가 무사하지 못 할 것임을 직감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왕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선전관이 들이닥치더니 왕을 비방한 죄로 참형을 내린다고 했다. 이미 각오하고 잇던 송명흠은 순순히 죽을 준비를 했다.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
“전하의 명령인데 신하된 자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어명에 따르고자 할 뿐이외다.”
선전관은 칼을 거두며 비로소 왕의 듯을 이야기했다.
송명흠은 듣고 나더니 몸을 바로 세우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것은 왕이 신하를 농락(籠絡)하는 일이오. 아무리 군왕이라도 신하를 농락해서는 안 되며, 왕명은 지엄한 것이므로 한번 말이 떨어지면 돌이켜서는 아니 되오. 어서 내 목을 쳐 왕명을 바르게 세우시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王不食言(왕불식언)
王:임금 왕, 不아닐 불, 食:먹을 식, 言:밀씀 언.
어의; 왕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책임 있는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한 번 말한 것은 꼭 실천해야 한
다는 말이다.
문헌: 삼국유사
고구려 제25대 평원왕(平原王) 때 온달(溫達. ?~590)은 용모나 겉모습은 대단치 않게 보였으나 마음은 착하고 순박했다. 그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동냥을 해다가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는 평소 해진 적삼에 헌 신발 차림으로 다니면서도 항상 웃고 있어 사람들은 바보라고 놀렸다.
한편, 평원왕의 어린 딸 평강공주(平岡公主)는 울기를 잘해서 그때마다 왕이 농담으로 말했다.
“네가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도 분명 사대부의 아내 노릇은 못하겠구나, 그러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공주는 울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이라 그 말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의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자 공주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저를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셨는데, 오늘 무슨 까닭으로 말씀을 번복하십니까? 필부도 식언하면 아니 되는데 하물며 대왕께서 그러하시다뇨?”
왕이 딸의 말을 듣고 노(怒)하여 말했다.
“네가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내 딸로 인정하지 않겠으니 네 맘대로 갈 곳을 찾아가거라!”
그리하여 공주는 얼마간의 패물을 챙겨 온달의 집을 찾아갔다.
온달의 어머니는 장님이었다. 공주가 아들 있는 곳을 물으니 노모가 대답했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남루하여 귀인이 가까이 할 사람이 못되오, 지금 당신의 향수 냄새를 맡아 보니 꽃같은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손을 잡아 보니 부드럽기가 솜 같으니 천하의 귀인임에 틀림없소,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산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는 산으로 가서 온달을 만나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온달이 성을 내며 피해버렸다.
“이는 분명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공주는 다시 모자를 찾아가 자기가 찾아오게 된 사정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온달이 머무적거리고 있자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이 부족하고, 내 집 또한 몹시 가난해서 귀인께서 살기에 적당치 않으니 그냥 돌아가시오.”
공주가 대답했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했는데, 진실로 마음이 있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먹고 사는 것은 제가 가지고 온 패물로 마련하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곧 금팔찌를 팔아 집과 우마, 가재도구들을 사들여 살림을 갖추었다. 그리고 온달에게 일렀다.
“무릇 남아라면 반드시 말을 잘 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저잣거리에 나가 말을 사는데, 병들고 여위었더라도 반드시 국마(國馬)를 사 오십시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자 공주는 열심히 거두어 말이 날로 살이 찌고 건강해졌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으로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신(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서게 되니 여러 신하와 군사들도 출동했다.
온달도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가했는데 말이 워낙 날쌔어서 그가 잡은 노획물이 제일 많았다. 그래서 왕 앞에 나아가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상을 받았다. 그러나 왕은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치니, 왕은 군사를 이끌고 배산(拜山)에 나아가 전투를 벌였다. 이때 온달이 선봉이 되어 단번에 적군 수십여 명을 베니, 아군의 사기가 올라 크게 이겼다.
전공을 논할 때 모두들 온달의 공로가 제일이라고 하니 왕은 그제야 사위로 맞아들이고, 대형(大兄)이라는 작위를 주었다.
평원왕이 죽고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지금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갈라 자기네의 군과 현으로 만들었는바 백성이 원통히 여겨 분노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신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왕이 기뻐하며 허락했다.
온달은 계립현(雞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모두 회복시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떠났다. 그러나 아단성(阿旦城. 지금의 서울 워커힐 뒷산) 아래에서 신라 군사와 싸우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래서 그를 장사지내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장군! 이제 큰일을 마치셨으니 돌아가 편히 쉬십시오.”
그제야 관이 들려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지휘가 높을수록 정직하여 모범이 되어야 하고,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이 말은 혼탁한 요즈음의 세대에 더욱 요구되는 말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王耳驢耳(왕이려이)
王:임금 왕, 耳:귀 이, 驢:당나귀 려.
어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로, 신라 경문왕에 얽힌 고사에서 유래했다. 세상에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우쳐주는 말이다.
문헌: 삼국유사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861~875)은 이름이 응렴(膺廉)이며, 나이 18세에 국선(國仙) 화랑이 되었다. 아찬 계명(啓明)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화(光和)부인이었다.
응렴은 18세에 국선이 되어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물정을 파악했다.
그에게 헌강왕(憲康王)이 물었다.
“응렴은 전국을 돌아보면서 무슨 좋은 일을 보았는가?”
“예. 행실이 바른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래? 어디 자세히 이야기해보아라!”
“지위가 높은 사람이 겸손하여 백성의 밑에 있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이 그 첫째요, 세력이 있고 부자이면서 옷차림이 검소한 이가 둘째였으며, 귀하고 세력이 있는데도 위세를 보이지 않는 이가 그 셋째였습니다.”
그 말에 왕은 그의 어진 품성을 알아보고 말했다.
“내게 두 딸이 있는데 너의 시중을 들게 해도 되겠는가?”
“네. 그 일은 중대사(重大事)이니 집에 가서 부모와 상의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응렴이 물러나와 가족과 상의했다.
가족들은 맏 공주는 얼굴이 초라하고 못 생겼으니 예쁘고 아름다운 둘째 공주를 맞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때 흥륜사(흥륜사)의 한 스님이 응렴을 찾아와 물었다.
“왕께서 공주를 아내로 주고자 한다는데 사실이오?”
“예. 그렇습니다.”
“그럼 어느 공주를 선택하려 하시오?”
“부모님께서 둘째 공주에게 장가들라 해서 그렇게 하려 합니다.”
“아니오. 맏 공주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응렴은 맏 공주에게 장가를 가게 되었다.
얼마 후 왕이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신하를 불러놓고 말했다.
“내게 왕자가 없으니 맏딸의 남편 응렴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왕위의 승계식이 끝나자 그 스님이 경문왕이 된 응렴을 찾아와 아뢰었다.
“이제 제가 전에 아뢰었던 세 가지 좋은 일을 다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맏 공주에게 장가듦으로써 왕위에 오른 것이고, 둘째는 전에 흠모했던 둘째 공주에게도 장가들 수 있게 되었으며, 셋째는 못생긴 맏 공주에게 장가듦으로써 왕과 왕비에게 기쁨을 드렸으니 그 또한 좋은 일 아닙니까?”
왕은 그 자리에서 스님에게 대덕(大德)이라는 벼슬과 함께 금 130냥을 내렸다.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놀라운 일이 거듭 생겼다.
그 하나는 밤마다 왕이 기거하는 방에 뱀들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내인들이 놀라 쫓아내자 왕이 말했다.
“뱀은 나의 친구이니 쫓아내지 말라.”
그러고는 뱀처럼 혀를 널름거리며 잤다.
또 하나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의 귀처럼 된 사건이었다. 왕후와 궁인들은 이를 알지 못했으나 복두장(幞頭匠. 관을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다.
복두장은 비밀을 발설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생토록 자기만 간직하고 있다가 죽음이 다가오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도림사(道林寺)의 대숲 속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외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 뒤로 바람이 불면 도림사의 대숲에서는 그 목소리가 그대로 울려나왔다.
놀란 왕은 대나무들을 베어내고 대신 산수유를 심게 했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바람이 불면 이런 소리가 났다.
“임금님 귀는 기다랗다! 임금님 귀는 기다랗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龍夢壓券(용몽압권)
龍:용 용, 夢:꿈 몽, 壓:누를 압, 券:문서 권.
어의: 용꿈이 압권이다. 즉 용꿈이 제일 좋아 과거시험에 합격한다는 말로, 어떤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믿
으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문헌: 매산집(梅山集)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이진형(李鎭衡. 1723~1781)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남곡(南谷)이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753년, 이진형이 정시(庭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에서 보던 과거시험)를 보게 되었다. 그는 꿈에 용(龍)을 보면 장원 급제한다는 말을 믿고 용꿈을 꾸고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나깨나 오로지 용만을 상상했다. 사흘째 되던 날 밤, 마침내 황룡이 나타나 자기의 허리를 감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과거장에 나가니 출제된 문제가 평소에 자기가 열심히 공부했던 내용이었다. 그래서 쉽게 합격해 꿈에도 그리던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과거는 경쟁률이 높은 만큼 채점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응시자들의 글을 직접 놓고 채점하지 않고 시험관 서리를 시켜 답안지를 붉은 글씨로 다시 옮겨 베끼게 한 후 그것을 가지고 채점했다. 이는 채점관들이 응시자의 필적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응시자가 쓴 답안지를 본초(本草)라 하고, 옮겨 베낀 사본을 주초(朱草)라고 했는데, 역서가 끝나면 대조를 맡은 사동관(査同官)과 지동관(枝同官)이 엄밀히 대조한 다음 주초만 시험관에게 넘겨서 채점하게 했다.)
이날 이진형의 답안은 그야말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훌륭한 문장으로 맨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자의 답권(答券. 답안지)을 다른 답권의 제일 위에 얹어 놓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다른 답권을 누를 만큼 우수하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압권(압권)’이란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벼슬자리에 올라선 이진형은 1777년 좌부승지에 올랐다가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을 역임했다.
그는 병법(兵法)에도 밝았으며, 해서, 초서도 잘 썼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用碑掩哀(용비엄애)
用:쓸 용, 碑:비석 비, 掩:막을 엄, 哀:슬플 애.
어의: 비석을 이용하여 슬픔을 막다. 즉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도 명분만 그럴싸하게 내세
워 사실을 호도한다는 뜻.
문헌: 오상원 우화(吳尙源 寓話)
산속에 사는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권익을 보장받기 위해 대표를 뽑기로 했다.
먼저 의장 성출 투표에서 호랑이가 뽑혔다.
단상에 오른 호랑이는 의젓한 자세로 의사봉을 딱닥 두드리며 인사말을 햇다.
“여러분! 우리 동물왕국도 이제 전제군주제를 버리고 입헌정치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지금가지 약하고 착한 동물가족들은 강자의 횡포 속에 너무도 많은 억압과 서러움을 받아왔으나 이제부터는 똑같은 권익을 갖고 생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과 갈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호랑이를 비롯한 육식동물들에게는 당장 고민이 생긴 것이다.
산양, 사슴, 토끼 등 초식동물들은 가는 곳마다 무성한 풀숲에서 싱싱한 풀잎과 약초 등을 마음껏 뜯어먹고 뛰놀 수 있었지만 이들을 잡아먹고 살던 육식동물들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마다 눈앞에 살찐 먹잇감을 두고도 군침만 삼켜야 했다.
그런데 이리 대표가 사색이 되어 호랑이 의장에게 달려 왔다.
“의장님! 도대체 이럴 수사 있습니까? 우리 동족들이 댁과 같은 호랑에게 잡혀 먹혔습니다.”
이리 대표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승냥이 대표가 헐떡이며 넋이 빠져 달려왔다.
“의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리란 놈들이 우리 동료를 셋이나 잡아먹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뒤따라 여우 대표가 쫓아놔 울먹이며 호소했다.
“의장님, 승냥이란 놈들이 우리 어린 자녀들을 마구 잡아갔습니다. 집 앞에서 천진하게 놀고 있던 어린것들을……. 어찌 이럴 수가…….”
여우의 눈물겨운 호소가 채 끝나기도 전에 산양과 사슴 대표가 핏기를 잃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들이 급히 억울함을 아뢰려 할 때 토끼 대표도 공포에 질린 낯으로 어깨숨을 들까불며 달려왔다.
“의장님,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씀입니까? 착하고 약한 저희 동료들은 지금 모두 죽음의 길목에서 떨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살 길을 열어 주십시오.”
초식동물들의 호소는 한결같이 똑같았다.
이들의 애처로운 호소를 듣고 있던 육식동물 대표들은 입장이 몹시 난처하고 계면쩍어지기 시작했다.
앞뒤를 모두 듣고 보니 자기들 한 두 식구가 잡혀 먹혔다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희생을 많이 입고 있는 것이 산양과 사슴, 토끼 족들임이 뻔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사태는 묘하게 되어 버렸다. 초식동물들을 잘 무마해내지 못하면 육식동물들은 그야말로 사활의 기로에 설 판이었다.
눈치 빠른 여우가 급히 승냥이에게 뭔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어서 승냥이가 이리에게 귀속말을 전했다. 이리는 또 어깨를 으쓱이며 호랑이에게 이를 전했다. 그러자 호랑이의 입가에 웃음이 빙그레 떠올랐다. 이윽고 호랑이 의장은 동물 대표들을 죽 돌아보며 경건하고 엄숙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 가엾도다. 착하게 살다 죽어간 너희들을 위해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위령비를 세워주기로 합의를 했다.”
그리하여 동산 한가운데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육식동물들은 우레같은 박수를 열렬히 보냈다. 그러나 초식동물들은 화려한 위령비 주위에 모여 서서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用秤算數(용칭산수)
用:쓸 용, 秤:저울 칭, 算:셈놓을 산, 數:셀 수.
어의: 저울을 이용하여 수를 세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옹졸하게 부분적으로, 집착하지 않고 거시적으로 처리
함을 뜻한다.
문헌: 한국 천주교회사(韓國 天主敎會史),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이조판서 이천보(李天輔.1098~1761)가 사촌형 이국보(李國輔)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국보의 집에서는 오는 사람이 비록 동생이기는 했지만 국사를 돌보는 판서이기에 정중하게 맞을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일곱 살 난 국보의 아들 문원(文源. 1740`1794)이 손님맞이를 위해 고기를 굽고 있던 어머니에게 고기 한 점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라며 주지 않자 문원은 식칼을 들고 외양간으로 가서 우낭(牛囊. 소의 불알)을 베겠다고 덤벼들었다.
그때 막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이천보가 그 광경을 보고 형에게 물었다.
“형님, 저 애가 식칼을 들고 뭐하려고 저럽니까?”
“그러게나 말일세, 굽는 고기를 한 점 달라고 하는데 주지 않았더니 우낭을 베어 먹겠다고 저러질 않는가! 다 내가 교육을 잘 시키지 못한 탓이지.”
국보는 아들을 불러들여 숙부에게 인사를 하게 했다.
문원은 절을 하고 뒤로 물러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한양의 판서는 별다른 사람인가 했더니 보통 사람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잖아.”
그 말을 들은 천보가 형님 국보에게 말했다.
“제가 형님 아들 중에서 양자를 하나 들일까 하여 왔는데, 저놈을 주시면 안 될까요?”
국보는 하필이면 개구쟁이를 고를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데려가라고 승낙했다.
이렇게 하여 한양으로 올라온 문원은 여전히 상노(床奴)들과 어울려 놀며 장난만 쳤다. 보다 못한 양아버지 천보는 문원에게 독선생을 들여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게 했다. 그런데 이레가 지나도 천자문의 ‘천지현황天地玄黃’ 첫 줄도 읽지 못했다.
천보는 속으로 ‘저놈이 장래 못되어도 판서는 될 줄 알았는데’ 하고 속으로 서운해 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하인과 짜고 문원을 불러 말했다.
“네가 공부에는 마음이 없고 날만 새면 장난만 치니 너를 내칠 수밖에 없다. 당장 짐을 싸서 옛날 네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하고는 하인을 딸려 본래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성 밖에 나가자 하인이 말했다.
“도련님은 참 닥도 하십니다. 공부만 잘하면 벼슬도 할 수 있고 남부러울 것이 없을 텐데 이제 다시 시골구석으로 내려가 나무꾼이나 되게 생겼으니……. 쯧쯧!”
그러자 문원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아무렴 그까짓 천자문쯤 모르겠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라구, 서재를 보니까 책이 산더미처럼 쌓였던데 섣불리 아는 체했다가는 만날 책하고 씨름만 하게 될 것 같아서 숫제 모르는 체했던거야, 내가 써보여 줄까?”
그러고는 땅바닥에 천자문을 줄줄 써내려 갔다.
하인은 기쁨을 감추고 말했다.
“아차! 도련님, 제가 깜빡 잊고 안 가져온 물건이 있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는뎁소.”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 천보에게 문원의 행동을 전했다.
천보는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문원에게 말했다.
“내 허락 없이 다시 돌아왔으니 마땅히 꾸중을 들어야 하겠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어린 네가 먼 길을 가는 게 어려운 일인 듯싶어 그냥 용서하겠다. 그 대신 벌로 광에서 조 한 말을 퍼다가 내가 돌아오는 저녁 때가지 그 숫자를 모두 세어 놓도록 하여라.”
문원은 양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놀기만 했다. 그러고는 천보가 퇴청할 무렵쯤 되자 그제야 저울을 가져다가 좁쌀 한 돈 쭝을 달아서 그 수를 헤아려 놓고, 그 다음에는 똑같은 분량으로 달아서 전체의 수를 계산하였다.
천보는 문원이 제아무리 부지런히 세어도 다 세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문원을 불러 좁쌀이 모두 몇 개나 되더냐고 물었다.
“예. 모두 모모 개였습니다.”
천보는 깜짝 놀랐다. 도저히 셀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헤아렸는지 궁금해서 그 방법을 물었다. 문원은 거침없이 설명했다. 그 계산 방법을 듣고 난 천보는 크게 감탄했다.
“그래 장하다. 이제부터는 글을 익히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런데 지나치게 글에만 매달리다 보면 자칫 소인배가 되기 쉽다. 그러나 행실과 마음을 닦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 후 이천보가 뒤주대왕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옹호하다가 세자가 8일 만에 뒤주 안에서 죽자 신하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자결했다. 그리하여 훗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는 이천보의 의리를 생각하여 천보의 양아들 문원을 친동생같이 보살펴 주었다.
정조는 문원이 썩 밝지 못하지만 큰일을 대범하게 처리하는 능력이 있는 인재임을 알고 전라도의 과거 시험관으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그가 지방에 내려가지 그곳 관료들은 고시관이 글에 밝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기화로 한몫 챙기려고 벼르고 있었다. 문원은 내려가자마자 모든 일을 그곳 시관들에게 맡기고 날마다 기생집에서 술만 마시며 즐겼다.
과거가 끝난 후, 문원은 시관들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놈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니 글 내용 좋고, 글씨 잘 써진 것 몇 점만 골라 주시오.”
그러자 멋모르는 시관들은 진짜로 우수한 답안지를 챙겨 주었다. 문원은 그 답안지 작성자를 장원으로 결정하여 중앙으로 올렸다.
그 글에는 뇌물거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조치였다.
정조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글을 보고 난 뒤, 문원이 선발하여 올린 글이 그 어떤 글보다 우수함을 보고 기뻐하며 물었다.
“어떻게 해서 이처럼 훌륭한 인재를 봅을 수 있었느냐?”
문원이 사실대로 아뢰니 정조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그대야말로 명시관(名試官)이로다. 역시 글만 잘한다고 모두 잘하는 게 아니야.”
그 후 문헌은 동래부사에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대사성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재상으로 제수되었으나 자기의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 사양했다. 시호는 익헌공(翼憲公)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자료출처-http://cafe.daum.net/pal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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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혜(개구리)가 생명을 구한다.
와이구명 마음에 담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