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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50대이상 불자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본래면목
불교역사 초기, 즉 아비달마 문헌들이 논장(論藏)으로 체계화되기 이전부터 불교의 경전들을 분류하는 데 쓰여온 범주들을 통칭하는 말.
'부'(部) 또는 '분'(分)으로 번역되기도 함.
이 범주들은 경전의 형식과 내용을 근거로 설정된 것이며 원래는 경전들의 소재 유형을 분류하는 데 쓰였으나, 나중에는 경전들 자체를 분류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에서는 9가지 범주로 이루어진 고형(古形) 분류법('九分敎'라고 함)을 채택한 반면, 다른 학파들 특히 대승불교 계통에서는 일반적으로 12가지 범주로 이루어진 분류법('十二分敎'라고 함)을 채택했다.
팔리어 경전의 9가지 범주를 산스크리트 경전에서 상응하는 범주와 대조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수타('經'이라고 번역되며, '담론'이라는 뜻):석가모니의 설법이나 담론을 산문으로 기록한 것이며 이 범주에는 수도 생활의 규범인 율(律 vinaya) 계통의 문헌도 포함된다.
범주로 사용되지 않을 때의 수타는 율과 구별되며, 이때에는 산문이라는 제한도 받지 않게 된다.
② 게이야('重頌'이라고 번역되며, 산문과 운문이 혼합된 것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타(gāthā:'운문')를 포함하는 수타이다.
③ 베이야카라나('記答'이라고 번역되며, '설명' 또는 '예언'이라는 뜻):팔리어 논장 전체와 그밖의 잡다한 작품들을 포괄하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제자들의 성불에 대한 석가모니의 예언 곧 수기(授記)를 의미했다.
④ 가타('偈'라고 번역되며 '운문'이라는 뜻):시의 형태로 된 작품들을 말한다.
⑤ 우다나('감흥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뜻):석가모니의 감흥을 산문 또는 운문으로 기록한 것으로, 팔리어 〈소부(小部) Khuddaka Nikāya〉에 실려 있는 한 경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⑥ 이티부타카('如是語'라고 번역되며,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라는 뜻):'이티부타카'라는 말로 시작되는 석가모니의 말씀들로서 그중의 다수는 〈소부〉에 속하는 〈이티부타카〉라는 작품에 실려 있다. 산스크리트 계통에서는 석가모니의 제자들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포괄하는 범주이다.
⑦ 자타카('本生譚'이라고 번역되며, '탄생'이라는 뜻):석가모니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말한다(본생담).
⑧ 아부타담바('未曾有法'이라고 번역되며, '놀라운 현상들'이라는 뜻):기적과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을 포함한다.
⑨ 베달라('方廣'이라고 번역되며, '정교한 분석'이라는 뜻으로 추정됨):교리문답 형식으로 된 가르침으로 산스크리트 전통에서는 상당수의 중요한 대승불교 경전들이 이 범주에 포함되는데, 예를 들면 〈법화경 法華經〉·〈팔천송반야경 八千頌般若經〉·〈능가경 楞伽經〉 등이 있다.
산스크리트 계통의 12범주 체계에는 아래의 범주들이 첨가되어 있다.
⑩ 니다나('因緣譚'이라는 뜻):경전의 도입부를 이루는 내용들과 역사적 서술들을 포괄하는 범주이다.
⑪ 아바다나('譬喩'라고 번역되며, '고귀한 행위들'이라는 뜻):사람들이 전생에 행한 선한 행위와 현생에 받는 과보에 대해 석가모니가 말씀한 이야기들이 포함된다(아바다나).
⑫ 우파데샤('論議'라고 번역되며, '敎說'이라는 뜻):문답 형식을 위주로 교리를 논의한 것인데, 때때로 밀의적 교리를 논의한 것도 있다.
논장에 속하는 문헌들, 철학적 논서들, 탄트라 계통의 저작들, 주석서들 따위를 가리키는 데 이 말이 쓰이기도 한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싯다르타 고타마(Siddhārtha Gautama)에 의해 현재의 인도 동북부 지방과 네팔에 있던 마가다(Magadha) 왕국을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싯다르타는 카필라 성주(城主) 슈도다나(Suddhodana) 왕을 부친으로 하고 마야(Maya) 부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으며, 샤카 족에 속하는 크샤트리아 계급이었다. 깨달음(覺 · 각)을 성취한 후에는 "깨달은 자"라는 뜻인 붓다(불타 · 부처)라는 칭호를 더하여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 또는 "샤카 족의 성자"라는 뜻인 샤카무니(석가모니 · Śākyamuni) 혹은 석존(釋尊)이라고 불리었다.
고타마 붓다의 출생지는 룸비니(Lumbini)였고 성장지는 카필라 성(Kapilavastu · 迦毘羅城 · 가비라성)이었으나 불교가 종교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마가다 왕국에서였다. 고타마 붓다의 종교적 활동인 수도(修道) · 깨달음(正覺 · 정각) · 포교(布敎) 등이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에 해당되는 마가다 왕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출생지나 성장지보다는 마가다 왕국이 불교 발생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다.
불교가 일어날 당시 인도는 베다(Veda)와 우파니샤드(Upanisad)에 근거를 둔 브라만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당시 브라만교는 우주의 궁극적 근원인 브라만(Brahman · 범 · 梵)과 개인에 내재하는 아트만(Atman · 아 · 我)이라는 두 원리가 동일한 것이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인간의 행위는 전생(前生)의 카르마(Karma · 업 · 業)에 의해 지배된다는 교의를 가졌으며, 현재의 행위의 결과는 미래의 행위를 결정한다는 윤회 사상(輪廻思想)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사상가나 종교가들은 윤회로부터 해탈(解脫)해야 한다는 것을 이론이나 실천 수행을 통해 주장하였다.
브라만교의 카르마 · 윤회 · 해탈의 사상은 후대 인도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불교 역시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 종교 · 철학 사상을 근저로 하여 새로운 종교 사상으로 출현하였다.
싯다르타도 "깨달음(無上正等覺 · 무상정등각 · 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아뇩다라삼먁삼보리 · Anuttarā Samyaksaṃbodhi)"을 얻기 전까지는 이러한 종교적 풍토 속에서 브라만교의 수행 방법을 따랐다.
싯다르타는 29세에 부인인 야쇼다라(Yaśodhara)와 아들 라후라(Rāhula)를 버리고 출가(出家)한 후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을 택하여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당시에 유행되었던 수행법이었다.
싯다르타는 출가 후에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에게 사사하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스승을 버리고 5명의 수행자와 함께 고행의 길을 떠나 6년의 고행을 하였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6년의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이에 고행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택하였다. 이윽고 마침내 싯다르타는 35세의 해 12월 8일 이른 새벽에 부다가야(Buddhagaya)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여 생 · 노 · 병 · 사의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원을 단멸(斷滅)하고 열반(涅槃)의 세계를 체현하였다.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은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사성제(四聖諦)와 생사윤회의 모습인 연기(緣起)이다. 고통(苦)의 원인인 집착(集)을 극복 또는 제거(滅)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방법(道)으로 제시된 것이 정견(正見) · 정사(正思)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銘) · 정정진(正定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의 팔정도(八正道)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법(法 · 다르마)이라 하며 그는 이 법을 펴기 위해 녹야원(鹿野園 · 사르나트)으로 가서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고("초전법륜 · 初轉法輪")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써 불 · 법 · 승의 삼보(三寶)가 갖추어지고 불교는 비로소 하나의 종교로서 교조(敎祖) · 교리(敎理) · 교단(敎團)을 갖추고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고타마 붓다는 45년 동안 교화 활동을 하며 승단을 이끌다가 80세에 쿠시나가르에서 입멸하여 반열반(般涅槃 · Parinirvana)에 들었다. 그 후 승단은 제자인 마하가섭 등이 중심이 되어 붓다의 율과 법을 유지하게 되었다.
불멸후, 곧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붓다가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맞추어 설법한 것("수기설법 · 隨機說法")을 결집을 통해 경전으로 편집하였다. 이것을 제1회 결집이라 한다. 라자기르(왕사성)에 500명의 비구들이 모여 마하가섭을 사회자로 하고 우바리가 율을, 아난다가 법을 암송하여 붓다의 설법을 정전화(正典化)하였다. 그 후 불교는 마가다 왕국을 근거지로 여러 도시의 왕과 제후 그리고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며 각지로 전파되어 갔다.
기원전 317년경 찬드라굽타(Chandra Gupta)에 의해 인도 최초의 통일 국가인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 아소카가 즉위한 후 불교는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을 비롯한 인도 각 지역 · 그리스의 식민지인 박트리아 · 스리랑카(실론) · 미얀마(버마) 등 국외로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아소카 왕은 자신의 아들 마힌다(Mahinda)를 보내 불교를 전파했다. 아소카 왕은 열렬한 불교 신도로서 '법(法)인 진리'에 의한 통치를 지도 이념으로 삼는 등 불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싯다르타가 입멸한 후 100년이 지나자 계율(戒律) 해석을 놓고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部派)로 갈라졌다. 전통적 보수파를 상좌부(上座部 · Theravada · 테라바다)라 하였고 진보적 자유파를 대중부(大衆部 · Mahasamghika · 마하상기카)라 하였다. 바이샬리(Vaisali · 毘舍離 · 비사리)에서 비구계(比丘戒)로 10사(事)를 두고 합법(合法)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非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되었다. 이를 근본2부의 분열이라고 한다. 비법을 주장하는 측이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을 제2회 결집이라 한다.
근본2부의 분열이 가져온 분열의 기운은 교리상의 견해, 지도자간의 대립,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어 붓다의 입멸 후 약 200년 뒤에는 대중부 계통으로부터,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상좌부 계통으로부터 교단의 파생적인 분열이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서력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18-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하였다.
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는 모습과 파의 이름 그리고 분파의 수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부파 발생의 주된 원인은 계율의 해석에 관한 학설 상의 차이에 있었지만, 학설보다는 지도적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달랐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생겼다. 대표적 부파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설산부(雪山部) · 독자부(犢子部) · 화지부(化地部) · 음광부(飮光部) · 경량부(經量部) 등이 존재하였다.
일반적으로 소승20부로서는 대중부 계통의 대중부(大衆部) · 일설부(一說部) · 설출세부(說出世部) · 계윤부(鷄胤部) · 다문부(多聞部) · 설가부(說假部) · 제다산부(制多山部) · 북산주부(北山住部)의 9부와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설산부(雪山部) · 독자부(犢子部) · 법상부(法上部) · 현주부(贅胄部) · 정량부(正量部) · 밀림산부(密林山部) · 화지부(化地部) · 법장부(法藏部) · 음광부(飮光部) · 경량부(輕量部)의 11부, 합계 20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성립 시기는 대략 서력 기원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부파 불교")는 외적 확대와는 달리 성립 당시와 같은 순수성을 잃고 율(律)과 경(經)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에 빠졌다. 즉,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가 발달되어 불교는 승원(僧院) 중심, 출가 중심의 학문 불교로 변화하고, 따라서 대중성을 잃었다. 또 일부에서는 저급한 미신적 신앙에 친화감을 갖게 되어 불교는 본래의 탄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在家) 불교도가 중심이 되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대승 불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대승 불교가 성립된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나 이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승 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6세기 간에 걸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 불교라 불러 대승 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二大) 유파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대두로 소승 불교는 쇠퇴 · 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소승 불교의 부파들은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적 발전을 하여, 스리랑카와 같은 남방 국가로도 퍼져갔다. 스리랑카의 경우 기원후 4-5세기 동안 부다다타(Buddhadatta), 부다고사(Buddhaghosa · 覺音 · 각음)와 같은 일단(一團)의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활동이 바탕이 되어 스리랑카의 소승 불교는 미얀마 · 타이 · 캄보디아 · 라오스 등지의 소승 불교와 함께 남방 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소승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 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 완성을 주장하기 보다 대중의 구원을 우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아라한(阿羅漢 · Arhan) 대신에 보살(菩薩 · 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 대신에 법신(法身) · 보신(報身) ·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의 삼신설(三身說)과 같은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자타카(Jataka · 本生譚 · 본생담), 아바다나(Avadana · 譬喩文學 · 비유문학) 및 아비달마의 우주론의 발달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기원후 1세기 후반에 쿠샨 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인 카니슈카(Kanishka · 迦腻色伽 · 가니색가: 재위 127-151)가 즉위한 후 불교는 또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카니슈카는 푸르샤푸라(Pursapura: 현재의 파키스탄 북서부의 페샤와르)에 수도를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카니슈카는 국내 각지에 불탑과 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 보호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 소그디아(Sogdia) 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부터 이곳의 학승(學僧)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佛典) 번역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이르는 사이 대승 운동의 결실로 수많은 대승 경전들이 출현했다. 초기 대승 경전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般若經)》·《유마경(維摩經)》·《법화경(法華經)》·《아미타경(阿彌陀經)》· 《십지경(十地經)》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 사상(空思想)은 대승 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 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공 사상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 · Nagarjuna: c.150-c.250)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 · Madhyamaka karika)》은 부파 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는 고타마 붓다의 근본사상인 연기설(緣起說)을 공의 입장에서 해명하여 공 사상을 철학적으로 기초지었고, 공 사상은 제자인 제바(提婆 · Aryadeva: 3세기), 또 그의 제자인 라후라발타라 등에게 계승되어 중관파가 성립되었다.
용수 이후에 《승만경(勝鬘經)》·《해심밀경(解深密經)》·《능가경(楞伽經)》 등이 나타났다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 · Vijñapti-mātratā)은 270년과 480년 사이에 미륵(彌勒 · Maitreya: c. 270-350) · 무착(無着 · Asanga: c. 300-370) · 세친(世親 · Vasubandhu: fl. 4세기)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유가행파가 확립되었다. 그 결과 중관파의 공 사상과 유가행파의 유식설은 중기 대승 불교 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공 사상 또는 중관 사상(中觀思想)의 중관파와 유식 사상(唯識思想)의 유가행파는 7세기에 이르러 인도 대승 불교의 주요한 학파로 군림하게 되었다. 중관파는 용수(c.150-c.250) 이래 불호(佛護 · Buddhapalita: c.470-540)의 계통과 청변(淸辨 · Baviveka: c 490-570)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월칭(月稱 · Candrakirti: 600-c.650)과 적천(寂天 · Santideva: 6세기)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적호(寂護 · Santaraksita: 8세기)와 연화계(蓮華戒 · Kamalasila: fl. 713-763)가 계승하였다. 유가행파는 세친(世親 · Vasubandhu: fl. 4세기)을 계승한 진나(陳那 · Dinnaga: c.480-540) 계통과 덕혜(德慧 · Gunamati)와 안혜(安慧 · Sthiramati: 6세기)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호법(護法 · Dharmapala: 530-561) · 법칭(法稱 · Dharmakirti: 7세기)이 계승하였다.
7세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중관파와 유가행파는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에 활발한 논전을 벌였을 뿐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인도 불교는 이렇게 대승 불교의 학파들을 형성하여 발전을 계속하였으며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那爛陀 · Nalanda) 사원이 국제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발라비(Valabhi) 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인도 불교의 종교적 열정은 감퇴되기 시작하여 종교 생활은 나란타(Nalanda) · 발라비(Valabhi) · 비크라마실라(Vikramasila)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7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에 새로운 불교인 밀교(密敎)가 성립하였다. 밀교는 고타마 붓다 당시부터 주법(呪法)으로 전해오던 것으로 주구(呪句) · 진언(眞言 · Mantra) · 다라니(陀羅尼 · Dharani)를 송지(誦持)하여 그것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여 붓다(佛 · 불)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불교의 일파였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조직화되고 종합되어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과 같은 문헌으로 나타남으로써 밀교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밀교도 대승 불교로 분류되고 있으나 인도에서 대승 불교가 쇠퇴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사상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세친(世親 · Vasubandhu: fl. 4세기) 이후 대승 불교가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으로 흘러 일반 대중과 유리되었는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밀교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아비달마 불교의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승 불교가 발생한 것과 동일하다. 또 당시 인도에서 탄트라 문학이 유행되었고 그 풍조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되었다. 중관 사상도 밀교화되었으며 따라서 밀교는 힌두 사회에서 환영받아 급속히 보급되었다. 8세기 후반에 와서는 밀교가 대중화됨과 동시에 저급한 의례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밀교가 대중화되면서 금강승(金剛乘 · Vajrayana)이라는 불교 유파가 형성되었다. 금강승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인타라부저(因陀羅部底 · Indrabhuti: 687-c.717)였다. 그의 아들인 파드마삼바바(蓮華生 · Padmasambhava · 연화생)는 밀교를 티베트로 전했고, 또한 당시에 인도로부터 다수의 고승이 티베트에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한 대승 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에는 중국에서 온 학승들이 있어, 이들과 인도 학승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겨 혼란이 일어났다. 티손데첸(Trisong Detsen · 치쏭 데짼: 755-797) 왕은 수도 라사(Lhasa)에서 회의를 열어 논쟁을 매듭지었고, 그 결과 인도측의 점문파(漸門派)의 설이 인정되고 중국의 돈문파(頓門派)의 설은 배척되었다. 이로써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 불교의 성격을 그 주류로 삼게 되었다. 티베트로 들어간 밀교는 머지 않아 라마교로 발전하여 티베트 고유 불교로 정착하였다.
8세기 중반부터는 금강승(金剛乘) 불교가 팔라 왕조(Pala Empire: 750-1174)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Magadha) 지방과 서벵골(West Bengal) 지방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불교는 거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고 말았다. 불교는 오히려 중국 · 한국 · 일본에서 번성하였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된 것은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미륵(彌勒) · 관음(觀音) · 대일여래(大日如來) 등의 부처나 보살이 힌두교의 신들과 거의 같은 성격과 기능을 갖게 되었고 이슬람교의 박해에 의해 승려의 수가 줄어들고 사원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된 대신 불교는 남방 아시아의 스리랑카 · 미얀마 · 타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 북방 아시아의 티베트 · 중국 · 한국 · 일본 등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어 각 지역의 토착 문화와 융합하여 다채로운 종교 문화를 이룩하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경이라고 추정되지만 불교 경전의 한역(漢譯)은 2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명 시대까지 중국 불교는 크게 번창하여 독자적인 불교 문화를 형성하였다.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전한(前漢: BC 206-AD 8) 시대였으며 불교 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된 것은 후한(後漢: 25-220) 시대에 들어와서였다. 불교의 전래 당시, 세간(世間) 또는 현세를 떠나 출세간(出世間)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불교의 교의는 당시의 중국의 현세주의적 사상풍토와는 상치되어 쉽게 수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처음에 불교는 도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신선방술(神仙方術)의 하나로 수용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초기 수용기는 대체로 전한말(前漢末)에서 4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이라 여겨지고 있다.
전한말(前漢末)에서 4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의 초기 수용기 이후, 5세기 초에서 6세기 말까지의 200년간 불교는 중국에서 착실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불교 경전의 전래가 격증되고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구마라습(鳩摩羅什 · Kumārajīva: 344-413) · 담무참(曇無讖 · Dharmakṣema: 385-433) · 보리유지(菩提流支 · Bodhiruci: 5세기말-6세기초) · 진제(眞諦 · Paramārtha: 499-569) 등이 나타나 불교 경전과 논서들을 본격적으로 번역함에 따라 불교의 학문적 · 신앙적 토대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경론(經論)을 연구하는 학파가 형성되었으며 이들 학파들은 단순한 학파를 넘어 종파(宗派)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종파들로는 아비달마를 연구 · 강술한 비담종(毘曇宗), 《성실론(成實論)》을 연구 · 강술한 성실종(成實宗), 열반경(涅槃經)을 연구 · 강술한 열반종(涅槃宗), 《십지경론(十地經論)》을 연구 · 강술한 지론종(地論宗),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연구 · 강술한 섭론종(攝論宗) 등이 있었다. 수나라(隋: 581-618)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문화의 남북 대립이 통합 · 해소되고 불교계에도 신기풍이 일어났다. 6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의 약 150년간의 시대 동안, 전대(前代)의 연구와 신앙을 기초로 중국 독자(獨自)의 불교 종파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독자적인 중국 불교 종파로는 길장(吉藏: 549-623)의 삼론종(三論宗), 지의(智顗: 538-597)의 천태종(天台宗), 신행(信行: 541-594)의 삼계교(三階敎), 도작(道綽: 562-645)의 정토종(淨土宗), 도선(道宣: 596-667)의 율종(律宗), 규기(窺基: 632-682)의 법상종(法相宗), 법장(法藏: 643-712)의 화엄종(華嚴宗), 혜능(慧能: 638-713)의 선종(禪宗), 일행(一行: 683-727)의 밀교 등의 종파가 있었다.
선종은 중국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는 종파로서 보리달마(菩提達摩: ?-528)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이래 육조 혜능(慧能: 638-713)에 이르러 불교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그 후 선종 5가라고 불리는 임제종(臨濟宗) · 위앙종(潙仰宗) · 조동종(曹洞宗) · 운문종(雲門宗) · 법안종(法眼宗)의 종파가 성립되었고, 선종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불교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처의 가르침을 법(法)이라고 하므로 불교를 불법(佛法)이라고도 하고,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뜻에서 불도(佛道)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의 내용은 교조인 석가모니가 35세에 보리수 아래에서 달마(達磨, dharma: 진리)를 깨침으로써 불타(佛陀, Buddha: 깨친 사람)가 된 뒤, 80세에 입적할 때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말한 교설이다.
그러나 부처가 탄생한 때인 서기전 5세기부터 현재까지 2500년 동안 불교는 원시불교·부파불교(部派佛敎)·소승(小乘) 및 대승불교 등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하게 발전하여 왔고, 경전도 여러 가지가 새롭게 편찬되어 왔다.
따라서 교리나 의식도 여러 지방의 발전과정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졌으므로 한 마디로 ‘불교는 이것’이라고 묶어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의 특이한 면이다.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는 브라만(Brahman)의 정통교리사상이 흔들리던 서기전 5세기에 크샤트리아(Kshatriya: 무사·왕족의 계급)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시기는 브라만 전통사상에 대한 회의 속에서 새로운 사상을 표출하고자 노력했던 비브라만적인 신흥사상가들이 많이 출현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브라만 전통교리를 신봉하는 승려들과 구분하여 이들 신흥사상가들은 사문(沙門)이라고 불렀으며, 불교도 이 같은 비브라만적 신흥사상에 속한다.
그러나 불교는 전통 브라만사상의 형이상학적·본질론적 경향도, 사문의 회의적·부정적인 경향을 나타낸 신흥사상도 지양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부처가 형이상학적·본질론적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보류하였다는 기록이 초기경전에 보인다.
즉, 이 세상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시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내세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등에는 답변을 보류하였다고 한다.
부처는 어떤 전제나 선입관을 근거로 하는 추론을 피하고, 모든 것을 현실의 있는 그대로도 보고 아는 입장을 지향하였다.
아트만(atman: 眞我)이나 브라만(梵神)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보다는 ‘인간이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실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므로 부처가 깨친 진리는 형이상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양식, 즉 연기(緣起)로 설명된다.
이 세계는 신이나 브라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존관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생활의 실제문제와 부딪쳤을 때 그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고 곧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생문제의 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앞서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배제되었던 것이다.
또 부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조건과 개인적 차이에 따라서 그때 그때 가르침의 내용을 달리하는 응병시약적(應病施藥的: 병에 따라 각각 약을 지어 줌)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길보다는 다양한 길을 택하였다.
불교의 교리가 너무 다양하게 전개되어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반면, 사람마다 지닌 사회적 조건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불교의 관용성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가 일어날 당시 인도의 종교계는 다른 고대민족과 마찬가지로 애니미즘적 경향을 띤 원시신앙이 지배하고 있었고,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근거를 둔 브라마니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개인 속에 내재하는 원리로는 아트만을 상정하고, 우주의 궁극적 근원으로는 브라만을 설정하여 이 두 원리는 동일한 것[梵我一如]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인간의 행위는 전생의 업에 의해 지배된다고 하였고, 현재의 행위는 미래의 고락(苦樂)을 결정한다는 윤회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을 당시 사상가·종교가들은 최고의 이상으로 주장하였다.
업(業)·윤회·해탈의 사상은 후대 인도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며, 불교 역시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 사상을 근저로 하고 새로운 종교사상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석가도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이러한 종교적 풍토 속에서 브라마니즘의 수행방법을 따랐다. 석가가 29세에 부인인 야쇼다라(Yasodhara, 耶輸陀羅)와 아들 라후라(Rahula, 羅睺羅)를 버리고 출가하여 택한 수행방법은 당시에 크게 유행하고 있던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이었다.
처음 출가한 석가는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에게서 가르침을 받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5명의 수행자와 함께 고행의 길을 떠났다.
6년의 고행 끝에 고행이 최상의 방법이 아님을 알고 그 동안 행했던 모든 수행법과 이론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부다가야(Buddhagaya)의 보리수 아래에서 다시 7일 동안 명상한 끝에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가 깨달은 진리를 법(法)이라 하며, 그는 이 법을 펴기 위해 베나레스(Benares)의 녹야원(鹿野園)으로 가서 그곳에 있던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고[初轉法輪],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써 불교는 교조·교리·교단을 갖춘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이때부터 부파불교 이전까지를 원시불교시대라 부른다.
원시불교의 중심교리는 중도(中道)·십이연기(十二緣起)·사제(四諦)·팔정도(八正道)이다. 출가 수행 당시의 극단적 고행도 태자시절에 누렸던 쾌락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깨닫는 길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안 석가는 두 극단을 지양하는 길에서 진리를 깨달았다. 이 두 극단을 지양한 길을 원시불교에서는 ‘중도’라고 불렀다.
이 중도의 구체적인 실천항목을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이라 하여 ‘팔정도’라고 하였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言],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신념[正念], 바른 명상[正定] 등이다.
팔정도의 이론적·교리적 근거로는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가 있다. 네 가지 진리는 첫째 고[苦]를, 둘째 고의 근원[苦集]을, 셋째 고에서 해탈함[苦滅]을, 넷째 고에서 해탈하는 방법[苦滅道]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의 존재를 ‘고’로 파악한 초기 경전은 인간의 탄생도 고이고 늙어감도 고이고 병(病)도 고이고 죽음 역시 고이며, 미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고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함도 고이고, 가지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함도 고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인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나 정신적 요소가 모두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팔정도와 사성제는 부처가 깨친 뒤 제일 처음 말한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 알려져 있다. 이 초전법륜의 내용은 그 뒤 설명형식과 방법은 달라졌다 해도 불교교리의 기본적 골격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불교의 실천요목을 계(戒)·정(定)·혜(彗) 삼학(三學)의 체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계는 불교가 가르치는 이상인 열반(涅槃)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행자가 날마다 실천하여야 할 생활규범인 계율이다.
계율은 생활규범이므로 출가수행자와 재가수행자,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본 5계인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란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등은 누구나 지켜야 하는 규범이다.
그렇다고 계율만 엄격히 지키는 일은 윤리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계율에 근거하여 보다 높은 거룩한 종교적 체험을 얻기 위하여는 종교적 수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즉 명상, 정신적 통일, 지관(止觀)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이 선정은 가만히 앉아 있는 소극적·부정적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감각의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무아(無我)의 적극적 자세로 전환하여 자유의 경지를 개발하는 것이 선정의 본분이다.
그러나 선정이 주관적 환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바르고 엄격한 계율적 실천이 앞서야 한다. 따라서 바른 선정은 계율에 의하고, 또 계율은 바른 선정에 의하여 거룩한 종교적 차원으로 고양된다.
그러나 계율과 선정 그 자체가 최종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해탈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길에 지나지 않는다. 윤리적 계율에 의하여 마음과 몸이 청정해진 사람이 선정에 의하여 이르는 최고의 경지가 이 지혜이다.
이같은 지혜를 불교는 반야지(般若智)라고 하여 다른 유형의 지혜와 구별한다. 이 반야지는 곧 해탈이고, 불교에서는 각(覺)이나 오(悟)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근본교리를 중심으로 석가는 45년 동안 교화활동을 하며 승단(僧團)을 이끌다가 80세가 되는 기원전 543년 열반에 들었다. 승단은 마하가섭(摩訶迦葉) 등이 중심이 되어 석가가 제정한 율(律)과 교법(敎法)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때 제자들은 불교의 교법을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석가가 듣는 사람의 바탕과 능력에 맞추어 수기설법(隨機說法)한 것을 결집(結集: 부처님이 말한 내용을 묶어 정리함)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는데, 이것을 ‘제1결집’이라 한다.
왕사성(王舍城)에 500명의 비구(比丘)들이 모여서 마하가섭을 사회자로 하고 우바리(優波離)가 율(律)을, 아난(阿難)이 법(法)을 암송하여 불설(佛說)의 내용을 서로 검증하고 확인한 것이다.
그 뒤 불교는 마가다국을 근거지로 여러 도시의 왕후와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면서 각지로 전파되어 갔다. 특히, 기원전 317년경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 의하여 인도 최대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왕조가 성립되고, 이 왕조 제3대 왕 아소카(Asoka, 阿育)가 즉위한 뒤 불교는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카슈미르·간다라지방을 비롯한 인도의 각 지역과 박트리아의 그리스 식민지역, 스리랑카·버마 등 국외에까지 전파되었다.
아소카왕은 열렬한 불교신도로서 법(法)인 진리에 의한 통치를 지도이념으로 삼는 등 불교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왕이다.
그러나 불교의 급속한 팽창과 유통은 일면 교단 자체의 질서면에서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것은 드디어 교파분열을 초래하였다.
석가의 열반 후 100년경, 계율의 해석 차이로 인해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를 낳았다. 전자를 상좌부(上座部: 장로를 중심으로 한 지도층)라 하고 후자를 대중부(大衆部: 젊은 승려를 중심으로 한 일반층)라 한다.
부파 발생의 원인은 부처의 교설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교단질서확립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유래되었다. 불멸 후 100년경 베샬리(vaisali)에서 비구의 ‘10사(事)’를 두고 합법임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非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된 것이다. 비법이라고 주장한 측이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제2결집’이다.
이때 상좌부는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길은 감각적 욕망의 근원을 끊기 위해 엄격히 계율을 지키는 출가자의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고, 그 목표는 마음과 육체의 안정을 얻어 최고성자인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부처도 아라한에 이른 성자의 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대중부에서는 중생도 본질적으로는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여, 중생과 부처가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윤회가 그대로 열반이라는 이론을 전개할 근거를 마련하였다.
부파는 계속 분열되어 서력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각각 18개 또는 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하였다. 최초의 근본분열은 계율해석의 학술상 차이에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학설보다 지도자인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체계를 달리하였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서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많았다.
대표적 부파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독자부(犢子部)·설산부(雪山部)·화지부(化地部)·음광부(飮光部)·경량부(經量部) 등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는 외적 확대와는 달리 부처님 당시의 순수성이나 참신함을 잃고, 율(律)과 경(經)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을 중심으로 하는 아비달마(阿毘達磨: 論藏) 불교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또한 불교는 승원(僧院) 중심, 출가 중심의 학문불교로 변화하여 대중성을 잃어갔고, 일부에서는 저급한 미신적 신앙에 친화감을 가지게 되어 석가 당시의 탄력성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립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이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在家)의 불교도가 주동이 되어 일어났다. 이것을 대승불교운동이라고 한다.
대승불교가 흥기한 것은 서기전 1세기경이나,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승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상좌부를 중심으로 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불교라 불러, 대승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유파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대두로 소승불교가 쇠퇴 또는 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로서의 발전을 보였고, 그러한 세력은 스리랑카를 위시한 남방제국으로도 퍼져나갔다.
스리랑카의 경우 부다다타(Buddhadatta)·부다고샤(Buddhaghosa)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소승불교의 기지로서 태국·미안마·캄보디아·라오스 등지에 남방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소승에 대한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해탈을 주장하는 대신 대중의 구원을 선행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소승의 최고성자 아라한 대신에 보살(菩薩)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다. 또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부처 대신에 미래의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쟈타카(jataka: 本生譚), 아바다나(avadana: 譬喩文學) 및 아비달마의 우주론의 확립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
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조직적으로 종합되면서 새로운 대승경전이 만들어졌다.
1세기 후반에 쿠샨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인 카니슈카(Kanishka)가 즉위한 뒤 불교는 또 한 차례 흥왕기를 맞게 된다.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던 카니슈카 왕은 국내 각지에 불탑(佛塔)과 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보호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속디아(Sogdia)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부터 이곳의 학승(學僧)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 번역에 종사하였다.
그것은 쿠샨왕조의 영토가 광대하여 중국의 문화와 쉽게 닿을 수 있는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간다라지방에서 마투라지방에 걸치는 지역은 아직 부파불교가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설일체유부를 위시한 대중부·음광부·법장부·화지부 등 여러 부파불교가 병립한 상태에 있었고, 그 중 설일체유부가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파가 중심이 되어 아비달마불교를 더 한층 발전시켜, 그 결과 유부(有部) 학설의 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 카슈미르지방 학승들의 손에 의해 편찬되었고, 이 논서를 중심으로 한 학문경향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적 경향이 지배적인 시기에 대승운동은 계속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대승운동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출현하였다.
초기 대승경전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법화경』·『유마경』·『아미타경』·『십지경(十地經)』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사상(空思想, 中觀思想)은 대승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그 뒤 이 공사상을 확립한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은 부파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 이후에 여래장사상을 천명한 『승만경(勝鬘經)』·『해심밀경(解深密經)』·『능가경』 등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은 270∼480년 사이에 미륵(彌勒)·무착(無着)·세친(世親)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사상으로, 용수의 공사상과 함께 불교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용수는 불교의 기본교리인 연기(緣起)를 보다 심오한 체계로 전개하여 경험에 나타난 모든 대립을 부정하는 절대적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대립의 도식(圖式)을 생과 멸(滅), 오는 것과 가는 것, 중단과 계속, 같은 것과 다른 것 등으로 분류하였고 중생과 부처, 윤회와 열반은 본질적·일원적 입장에서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 본질적 동일성을 아는 지혜가 반야라고 하였다.
또한 용수의 학설과 항상 대립되는 입장을 지닌 무착과 세친의 유식사상은 용수의 절대적인 일원론의 입장을 시인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구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상당히 복잡한 관념론을 내세웠다.
그들은 이 세상이 사유적 구성(思惟的構成)으로 되었다고 주장하고, 사유를 떠나서는 외계(外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결국 외계라고 생각하는 것도 주관적 사유의 투영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의식의 흐름, 즉 아라야식(alaya識)뿐이라는 것이다.
즉, 아라야식이 새로운 행업(行業)을 쌓음으로써 일정한 경향을 형성하고, 이 형성에 의하여 사람의 성격도 결정된다고 보았다.
공사상과 유식사상은 세친 이후 2대학파를 형성하였고, 7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두 학파는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관학파는 용수 이래 불호(佛護) 계통과 청변(淸辨) 계통으로 나뉘었고, 다시 전자는 월칭(月稱)과 적천(寂天)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적호(寂護)와 연화계(蓮華戒)가 계승하였다.
유식학파는 세친을 계승한 진나(陳那) 계통과 덕혜(德慧)·안혜(安慧)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다시 호법(護法)과 법칭(法稱)이 계승하였다.
이 시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이들은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 활발한 논쟁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와 자이나(Jaina)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인도불교는 이와 같이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발전을 계속하였고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사원이 국제대학으로서의 구실을 하였으며, 발라비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열정은 감퇴되기 시작하여 종교생활은 나란타·발라비·비크라마시라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이른바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7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에는 새로운 불교의 대두를 보게 된다.
곧 밀교(密敎)의 발흥이다.
밀교사상은 석가 당시부터 주법(呪法)으로 전해오던 주구(呪句)·진언(眞言: mantra)·다라니(陀羅尼, dharani)를 송지(誦持)하면서 그것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佛)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의 일파이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종합되어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과 같은 문헌으로 나타남으로써 밀교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 밀교도 대승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대승불교의 퇴영적 일면을 드러내는 사상으로 평가된다.
그 발생 이유는 세친 이후 대승불교가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으로 흘러 일반대중과 멀어졌고, 마침내 아비달마불교가 빠진 것과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인도에서 탄트라(tantra)문학이 유행하게 됨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된 것이다.
특히 중관사상이 밀교화되었으며, 따라서 밀교는 힌두교사회에서 환영받아 급속히 보급되었다.
8세기 후반에 와서는 밀교가 대중화됨과 동시에 저급한 의례를 도입하기까지 하였다.
밀교의 대중화는 또 다른 불교유파인 금강승(金剛乘)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인드라부티(Indrabhuti)였다.
그의 아들 연화생(蓮華生)은 밀교를 티베트로 전하였고, 이때 인도로부터 다수의 고승이 티베트에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에는 이미 중국에서 온 학승들이 있었는데 이들과 인도학승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겨 혼란을 일으켰다.
이에 티손데첸왕은 수도 라사(Lhasa)에서 회의를 열어 논쟁을 매듭지었다.
그 결과 인도측 점문파(漸門派)의 설이 인정되고 중국의 돈문파(頓門派)의 설이 배척되어,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의 불교의 성격을 그 주류로 삼게 되었다.
티베트로 들어간 밀교는 머지 않아 라마교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것은 티베트 고유의 종교로 정착하게 된다.
금강승불교가 팔라왕조(750∼1199)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지방과 서벵골지방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불교는 거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어 버렸다.
불교의 세력은 오히려 중국·우리나라·일본에서 흥왕을 보았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것은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미륵불·관음보살·대일여래 같은 불보살들이 힌두교의 여러 신들과 거의 같은 성격과 기능을 가지게 된 점에 있다.
또한 10세기 말에, 아프가니스탄지방에 있던 터키계의 가즈니왕조는 1001∼1027년에 17회나 북인도를 침략하여 많은 노예와 전리품을 얻어갔다.
그때 점령지는 오래 지배되지 않았으나 불교와 힌두교의 사원이나 성지에 대한 파괴와 약탈, 승려의 학살은 세계사상 그 유례가 드물 만큼 철저하였다.
그 뒤에도 이슬람교도의 침략과 파괴는 계속되었다.
1203년 비쿠라마실라사원의 파괴와 더불어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다소 전설적인 것으로는 『위략(魏略)』의 서융전(西戎傳)에 나타나며, 그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년에 대월지왕(大月氏王)의 사자 이존(伊存)이 불교를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65년에 후한 명제(明帝)의 이복동생인 초왕영(楚王英)이 황로(黃老)와 함께 불교를 믿었다고 한다.
이 같은 기록에서 불교는 서력기원을 전후하여 무역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의 북쪽 황하유역에 전수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50년대에는 안식국(安息國)에서 온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반주삼매경 般舟三昧經』이라는 대승경전을 번역하였다.
당시의 역경승(譯經僧)들은 인도·대월지국·안식국·강거국(康居國)에서 온 이방인들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거꾸로 구도(求道)와 구법(求法)을 위하여 서역으로 향하였다.
위나라의 주자행(朱子行)을 비롯하여 많은 순례승들이 서역을 찾아나섰다.
처음 북부지역인 뤄양(洛陽)·장안(長安)에 전래되었던 불교는 그 뒤 역경승 지겸(支謙)이 오나라의 서울 건업(建業)에서 포교하고, 월남에서 북상한 강승회(康僧會) 역시 오나라에 들어와 포교에 종사함으로써 점차 남부중국에까지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특히 불도징(佛圖澄)은 중앙아시아의 구자국인(龜玆國人)으로서 신통력과 주술로 사람들의 신앙을 얻었고 국왕의 고문을 지냈다.
그의 제자 도안(道安)은 전진왕(前秦王)부견(符堅)의 신임을 받아 경전목록과 중국인 출가자를 위한 생활규범을 작성하였다.
또 도안의 제자 혜원(慧遠)은 여산(廬山)에서 백련사(白蓮寺)를 짓고 염불 중심의 결사운동(結社運動)을 전개하였다.
특히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은 불교의 보편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가 대립하면서 불교가 중국적 풍토에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호교적 논설이다.
또한 서진시대(西晉時代)에는 축법호(竺法護)가 『정법화경(正法華經)』·『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 등을 번역하였다.
이 무렵 중국의 일반 사상계에서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불교를 노장사상에 의하여 이해하려는 풍조가 현저히 나타났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하는데, 불교사상의 공(空)을 노장사상의 무(無)와 대비하여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격의불교의 특징이다.
이는 불교가 중국에서 정착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중국 사대부층이 불교에 접근하는 길을 터놓은 것이다.
또 불교의 윤회사상이 도입되어 전생·현생·내세에 대한 인과응보 개념이 중국인의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때였다.
중국불교의 역경사(譯經史)나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인물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이다.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나중에는 대승불교를 공부했던 그는 『대품반야경』·『금강반야경』·『묘법연화경』·『유마경』·『아미타경』 등의 대승경전과 용수의 『중론』·『십이문론』 등 중관학파(中觀學派)의 논서들을 번역하였다.
특히 중관사상은 그의 한역(漢譯)을 근거로 중국에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제자 승조(僧肇)는 『조론(肇論)』을 저술하여 중국인이 이해한 공사상을 피력하였다.
이 『조론』의 영향은 당대 이후 중국불교사상계를 풍미하였고, 구마라습이 번역한 『중론』·『십이문론』은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전개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동진시대(東晉時代)의 역경승이었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는 후대 화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된 『화엄경』을 번역하였다.
담무참(曇無讖)은 『열반경』을 번역해서 중국불교에 ‘일체의 중생에게는 모두 다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사상을 전래하여 불성설(佛性說)의 전개를 위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역경승 진제삼장(眞諦三藏)은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의 유가학파 경전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의 대표적인 논서인 『대승기신론』을 번역하여 당나라의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 경전들은 역경이 이루어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 또는 100∼200년의 간격을 두고 모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우리나라 고승들에 의해서 깊이 있게 연구되고 유포되었다.
이들 경전들은 우리나라 불교의 여러 종파의 근본경전으로 채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육조시대(六朝時代)라 함은 강남(江南)의 건업(建業)에 도읍을 두었던 육왕조시대(六王朝時代)를 말한다.
육조는 강남 땅에서 번영한 귀족정치·귀족문화라는 공통성에 착안한 문화사적인 명칭이다.
육조불교의 특색은 육조문화의 일반적인 특색과 마찬가지로 귀족적·고답적·학술적이었으므로 북조(北朝)의 국가적·주술적·실천적인 불교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남조에는 족벌귀족이 광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제왕 이상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높은 고전적 교양을 몸에 지니고 현학(玄學)을 숭배하며 청담을 즐겼다.
불교도 이들에게는 방외은일적(方外隱逸的:세상 밖의 뛰어난 것)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유마경』과 『반야경』 등이 애호되었다. 격의불교가 성행된 것도 이때였다.
여산의 혜원(慧遠)이 “사문(沙門)은 방외(方外)의 빈(賓)이므로 세속적 정치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된 것도 그 자신이 동진의 귀족사회에 몸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조시대의 불교는 전반적으로 지배자들의 보호를 받아 정치에 참여하는 승려도 많았을 뿐 아니라 북조에서 있었던 폐불(廢佛: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등이 사원·불당·불상·불경 등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장원과 노비를 몰수한 불교탄압사건)도 없었고, 왕후·귀족에 의하여 웅대한 사원이 건립되어서 불교의 연구시대라고 칭할 만큼 경론의 연구와 강설이 성하였다.
제(齊)나라의 태자 문혜(文惠)와 동생 숙자량(肅子良)은 열렬한 불교신자로서 많은 학승을 가까이 하여 강석(講席)과 법회를 설치하고 불교서적의 편찬사업을 행하였다.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남조의 여러 제왕들 중에서도 높은 교양을 가지고 있어서 불교의 교리에도 정통하였다.
그는 스스로 『단주육문(斷酒肉文)』을 저술하고 대사원을 건립하였으며, 육지나 물에 있는 고혼을 제도하는 법회인 무차대회(無遮大會)를 10여 차례나 열었다.
역경사업도 육조시대에 가장 성행하였다. 앞에서 열거한 외에도 강량야사(畺良耶舍)·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등의 외국승과 법현(法顯) 등의 중국승이 활약하였다.
또한 양대(梁代)에는 승황(僧晃)·법운(法雲)·지장(智藏)의 3대법사가 출현하고, 또 불교사가로 유명한 승우(僧祐)는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과 『홍명집(弘明集)』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고승전(高僧傳)』을 지은 혜교(慧皎)도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중국 불교가 새로운 전개를 보이게 된 시대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불교에 가장 큰 폭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도 이 시대의 불교이다.
남북의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는 통일국가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불교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정의 경론에 입각한 새로운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특색이 종파불교(宗派佛敎)이다.
수·당 이전에도 비담종(毘曇宗)·섭론종(攝論宗)·성실종(成實宗)·지론종(地論宗)·열반종(涅槃宗) 등의 종(宗)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파라고 불러야 할 것이고, 후대에 생겨난 종파와는 다른 것이었다.
학파로부터 종파로의 발전을 촉진한 계기가 된 것은 사원경제의 독립과 교판(敎判)의 확립이다.
수나라의 지의(智顗)가 대성한 천태종이 『법화경』을 지상으로 하는 독자적인 교판을 확립하여 처음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당나라 때에는 법장(法藏)이 『화엄경』을 중심으로 불교를 체계화하여 화엄교리를 완성하였다.
또한 도선(道宣)은 계율(戒律)을 연구하여 율종(律宗)을 창시하였고, 현장(玄奘)과 규기(窺基)는 인도의 새로운 유가유식설(瑜伽唯識說)을 기초로 하여 법상종(法相宗)을 열었다.
아울러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 등이 들여온 밀교의 융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종과 화엄종이 수·당불교의 사상적 절정이라고 한다면 선종(禪宗)과 정토교(淨土敎)는 불교의 중국화와 민중화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선종은 5조 홍인(弘忍)의 무렵에 이르러 도속(道俗)의 귀의자가 급증하게 되었고, 6조 혜능(慧能)은 그때까지 없었던 도시에 대한 포교를 중시하였다.
홍인으로부터 갈라지게 된 혜능의 계통은 남종선(南宗禪)이라 불리고, 신수(神秀)의 계통은 북종선(北宗禪)이라 불렸는데, 이 두 파는 처음 대등한 교세를 유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북종은 쇠퇴하고 말았다.
정통교는 담란(曇鸞) 이후 도작(道綽)·선도(善道)가 나와 구칭염불(口稱念佛)을 보급함으로써 무지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아 많은 신자를 획득하였다.
845년의 폐불과 연속된 전란으로 말미암아 불교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으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한 선종과 민중의 마음속 깊이 파고든 정토교는 그 세력을 더하여갔다.
수·당의 불교는 중국불교 융성의 정점에 위치한다.
2.3.1. 선종의 발달
선(禪)은 인도에서 기원된 것이나 중국에 전해져서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되어 유력한 종파의 하나가 되었다.
선종의 조사(祖師)인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이입사행설(二入四行說)에 입각한 좌선을 권장하였다.
선종은 그 뒤 혜가→승찬→도신→홍인에게 차례로 전해졌고, 홍인의 시대에는 법회에 참가하는 이가 500명에 이르렀다.
당의 초기에는 신수의 북종과 혜능의 남종이 대립하여 분열되었다.
북종은 차츰 닦아 깨닫는 점오(漸悟)를, 남종은 단번에 깨닫는 돈오(頓悟)를 표방하였다.
혜능은 6조가 되어 그 문하에 회양(懷讓)·행사(行思)·신회(神會) 등이 있었고, 강서와 호남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백장(百丈)은 선원에 있어서의 규범이 되는 청규(淸規)를 만들었다.
특히 혜능 이후 5대에 걸쳐서 위앙(潙仰)·임제(臨濟)·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종(法眼宗)의 5가(家)가 성립됨으로써 송대(宋代) 이후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는 6조 혜능의 남종선을 이어받아 신라 말에 선문구산(禪門九山)이 성립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5가 중 임제종의 선을 이어받아 현재의 조계종(曹溪宗)에까지 그 맥락은 이어지고 있다.
2.3.2. 밀교의 발달
현교(顯敎)에 대응하여 불교의 비밀, 심오한 교리를 뜻하는 밀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된 것은 동진시대의 전반에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와 담무란(曇無蘭)에 의하여 『대관정신주경(大觀頂神呪經)』·『시기병경(時氣病經)』·『청우주경(請雨呪經)』 등의 많은 밀교경전이 번역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경전은 병을 고치고 비를 오게 하는 주문이나 제천(諸天)의 위덕을 찬미하는 따위의 주문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을 잡밀(雜密)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술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순수한 밀교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진언다라니(眞言陀羅尼)나 그 밀법(密法)은 중국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 당나라 때의 선무외·금강지·불공의 3대사(三大士)에 의하여 밀교의 교리와 의식궤범·만다라 등이 조직되고 체계화되었다.
이들이 전한 밀교는 『대일경』이나 『금강정경』 등에 기초를 둔 인도의 정통밀교로, 잡밀에 대응하여 순밀(純密)이라고 부른다.
이 순밀 또한 선무외의 제자였던 불가사의(不可思議) 등에 의해 신라로 전래되었으나 종파로까지 발전되었음을 입증하는 사료는 찾아볼 수 없다.
2.3.3. 유·불·도 3교의 담론
당나라 중기부터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대표자들은 궁중에서 잦은 토론회를 가졌었다.
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3교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궁중에 초대하여 토론을 벌이는 행사가 매년 개최되었다.
3교의 담론은 당나라 초기 고조(高祖)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고조는 624년에 박사(博士) 서광(徐廣)에게 『효경(孝經)』을, 사문 혜승(慧乘)에게는 『반야심경』을, 도사 유진희(劉進喜)에게는 『노자』를 각각 강의하게 하였다.
또 태종(太宗)은 639년에 공영달(孔穎達), 사문 혜정(慧淨), 도사 채황(蔡晃)의 3인에게 홍문전(弘文殿)에서 3교에 대한 담론을 하게 하였다.
그 뒤 대종·덕종·경종·문종·무왕·선종·의종·소종 등의 역대 황제들도 연례행사로 개최하였으나 차츰 형식화되면서 진지한 맛이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3교의 담론은 초기의 종교토론회 성격과는 달리 전혀 내용이 없는 궁중의례의 하나로 변질되고 말았다.
3교의 논쟁은 당나라 중기부터 격화되었으나 논쟁의 이면에는 서로 융합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서, 절에서는 노자의 상을 그려 붙이기도 하고 유자(儒者)나 도사로서 불교를 연구하여 출가하는 자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2.3.4. 교선일치(敎禪一致)
선종과 교종이 교세를 확장하여 가면서 말과 글을 통하여 가르침을 펴는 화엄종·천태종 등의 교종과, 말과 글에 의하지 않고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종이 서로 일치한다는 주장을 낳게 되었다.
교선일치의 주장은 당나라 중기의 화엄종 제4대조인 징관(澄觀)의 사상으로부터 싹이 터서 제5대조 종밀(宗密)에 의하여 명료한 형태로 나타났다.
종밀은 처음 선을 공부하고 뒤에 징관의 가르침을 받아 화엄교학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엄과 선을 융합하여 일치시키고자 교선일치론을 주장하였다.
이 교선일치의 사상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차츰 뚜렷해져서 선종과 교종의 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송나라 초기에 연수(延壽)가 주장한 교선일치를 비롯하여 천태선·화엄선·염불선 등이 두드러지게 유행하게 되었고, 교종을 배우는 자가 선문(禪文)을, 선에 몸을 담은 자가 교종의 제학(諸學)을 탐구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의천(義天)과 지눌(知訥)이 교선일치의 사상을 깊이 포용하여 교관병수(敎觀竝修)·정혜쌍수(定慧雙修) 등을 주창함으로써 한국불교의 한 정통으로 정착시켰다.
송나라의 불교는 염불선(念佛禪), 송학(宋學)과 선(禪)의 교류, 거사불교(居士佛敎)의 성립, 백련교(白蓮敎) 등으로 집약된다.
2.4.1. 염불선
당나라 중기에 일어난 교선일치 운동은 송나라 때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연수의 교선일치설이 확립되자 천태·화엄·정토종의 학도로서 선을 연구하거나 선가에서 교학을 공부하는 이도 출현하였다.
그리고 정토종은 특별한 하나의 종파로서보다는 이들 각 종파의 사람들이 염불신앙을 가지게 됨으로써 성행하게 되었다.
송대의 정토교도로서 유명한 이들 중에는 선종이나 천태종 출신자들이 많았고, 특히 천태종 계통의 정토교가 성행하였다.
선종에서는 염선일치(念禪一致)를 주창하려고 『종경록(宗鏡錄)』·『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을 지은 연수를 비롯하여 종이(宗頤)·종본(宗本)·법수(法秀)·의회(義懷) 등은 모두 염불선을 강조하였고 선정습합(禪淨習合)을 취했던 인물들이었다. 거사들로는 양걸(楊傑)·왕일휴(王一休) 등이 유명하다.
이와 같은 풍조는 선종을 더욱 성행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인물들이 일반 사회의 종교로서 민중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애호되고 보급되었던 정토교를 배워 매일의 일과로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게 됨에 따라 염불선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명대(明代) 와서도 역시 선정융합(禪淨融合)의 형태인 염불선이 성행하였으며, 청조(淸朝)의 옹정제는 스스로 원명거사(圓明居士)라 칭하고 염불선을 고취하였다. 민간에서는 명나라 이후 이와 같은 염불선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고 실천되었다.
2.4.2. 선과 송학(宋學)
송나라 때에는 훈고학(訓詁學)을 탈피하고 성(性)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성리학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를 ‘송학’이라고 한다.
송학자들 중에는 학문과 실천의 방법으로서 참선을 익힌 이들이 많다.
주돈이(周敦頤)는 귀종사의 불인(佛印)과 동림사의 상총(常總)으로부터 불교의 학문을 배웠고, 장재(張載)도 상총에게 배웠으며, 정이(程頤)도 선을 배웠다.
특히 주자(朱子)는 어릴 때부터 종고(宗杲)의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애독하고, 당나라의 선사인 위산(潙山)의 사상을 사랑하였다.
선이 당시의 이름 있는 유학자를 사로잡게 된 이유는, 선이 간단명료한 교리에 의거하여 적절한 수행방법으로 지심견성(指心見性)을 터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에 차차 정비되어 간 승원(僧院)은 다른 종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고, 그 중에도 초범탈속(超凡脫俗)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후배를 지도하였고, 기지에 차고 준열한 문답과 대담이 가득찬 선가(禪家)의 어록에는 청신하고 기발한 문자가 약동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선종의 제1서라고 일컬어지는 『벽암록(碧巖錄)』과 당나라 중기 이후에 처음으로 교계의 표면으로 나타난 『능엄경』은 많은 사람에게 애독되었고, 거사(居士)로서 주석서를 남긴 이들도 있다.
송나라 이후 명·청나라 때에도 중국불교는 삼종일원(三宗一源)·민간불교 등의 독특한 성격을 띠면서 발달하였으나,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의 배불정책으로 불교가 쇠퇴되어 명나라 이후의 중국불교는 우리나라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인도의 불교가 원류로서 한국불교의 뿌리를 점한 것이라면 중국불교는 각 시대마다 한국불교가 새로운 옷을 입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고려 말까지 중국불교의 큰 특색은 우리 나라에 수용, 변형되어 새로운 물결을 조성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