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내 어깨는 기상관측소이요. 건강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9월 초순경이다. 아내와 둘이서 선산에 벌초하러 갔다. 후손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해마다 둘이서 조상의 묘에 벌초를 해왔다. 선산을 지키는 굽은 소나무 마냥 고향인근에서 직장을 얻어 살고 보니 궂은일은 혼자 도맡아 하게 되었다. 남들은 예초기를 사용하느라 산천을 울리면서 시끌벅적 거렸지만 조부묘지부터 차례로 정성을 다해 낫으로 풀을 베고 주변 정리를 했다. 오늘따라 9월의 뙤약볕이 강렬하다. 온 전신이 땀으로 얼룩졌다. 다음 차례는 어머님 묘소이다. 벌초를 할 때마다 애틋한 사연이 떠올라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다. 여든 둘의 연세까지 사시면서 슬하에 6형제를 두었지만 넷째인 내가 모시면서 살았다. 10여 년 전, 임종 시에도 혼자 지켰다. 나는 어머니의 애정과 은혜를 많이 받아 행복했지만 대신에 아내는 시어른을 모시고 사느라 고생이 많았으리라 짐작이 간다. 다행이 단 한 차례도 고부간에 갈등이나 마찰 없이 친딸처럼 지내온 것이 늘 고마웠다.
어머니께서는 1924년 갑자년생 쥐띠이다. 김해김씨 양반 가문의 막내로 태어나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열 서너 살 쯤 됐을 때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일제 군국주의자가 일으킨 대동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전선이 불리하자 처녀 한 명씩 강제로 공출하여 정신대라는 명목 아래 군수공장이나 건설현장에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노심초사하던 외할아버지께서 결단을 내린 것이 딸을 일찍 시집을 보내는 것이었다. 서둘러 중신애비 말 만 믿고 11살 많은 강 건너 가난한 이씨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다. 그 때 어머니의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시집은 변변한 내 땅 한마지기 없던 소작농의 아내로 시작했다. 층층시하의 시부모와 시누이 시동생을 보살피며 고생과 눈물의 시집살이였다.
내 기억의 뒤안길에는 어머니에 대해 두 가지 얼굴상이 있다. 하나는 동네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삼단 같은 윤기 나는 갑사댕기 생머리의 이조시대 여인과 빠글빠글하게 파마머리를 한 신식 여인이었다.
어린 시절, 베적삼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감고 나서 참빗으로 빗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쩜 저렇게 고울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머리를 빗고 난 뒤에 떨어지는 잔 머리카락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모아두곤 했다. 나중에 엿장수가 지나가면 그 머리카락으로 엿으로 바꿔 우리형제들의 주전부리에 요긴 하게 쓰였다. 고무신 떨어진 것이나 부러진 놋쇠숟가락 등 고물만이 엿장수가 모으는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머리카락도 엿으로 바꿔 주었다. 그 당시 우리 지방에서는 여성들의 긴 머리카락을 ‘달비’라 했다. 부녀자들의 생머리 자른 것을 동네마다 다니며 비싼 돈을 주고 사 모으는 사람을 ‘달비장수’라고 불렀다. 동네를 다니면서 “달비 삽니다! 동동 구리무 팝니다!”라고 외치고 다녔다. 동동 구리무는 여성용 화장품으로 용기에 담아 팔거나 달비와 맞교환을 하기도 했다. 농번기가 끝난 늦가을이나 초겨울쯤이면 초저녁이나 새벽 달밤에 동∼♪ 동 ∼♪ 하는 작은 북소리를 울리면서 달비장수 아저씨가 다녀가곤 했다. 뒤에 알고 보니 달비라는 머리카락은 1960년대 수출의 효자 품목인 가발의 원료로 쓰여 인기가 좋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초등학교 졸업이 다가오자 하루는 담임선생이 중학교에 진학할 사람과 진학 못 할 사람을 별도로 불러 모았다. 한 반이 60여 명이었는데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 30여 명에게 일일이 왜 그 이유를 따져 물으면서 무안을 주어 어떤 애들은 분하고 서러워서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나는 당연히 진학반 무더기에 서서 그 친구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상급학교에 갈 꿈을 꾸었다. 하루는 잠결에 부모님이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둘이 학비를 감당하기도 벅차는데, 자아(쟤)까지 중학교에 보내면 우짜노, 장리쌀도 다 못 갚는데!...,”
한숨 섞인 아버지의 말에,
“꼬장주우(고쟁이)를 팔더라도 넷째놈은 마 중학교에 보냅시더.
다 무슨 수가 있겠지예“
어머니의 단호한 결단이었다. 가난한 소작농으로 논 몇 마지기를 부치며 시부모를 모시고 6형제를 낳아 길렀다. 자식 둘은 이미 중학교, 고등학교에 보내면서 밤낮으로 뼈 빠지게 일을 하는 집안 형편이었다. 결국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티격태격 싸우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어머니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등굣길에 도시락을 싸주면서, “걱정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입학시험에 꼭 합격 하그래!”라고 했다. 갑자기 학교가기가 싫었다. ‘내가 꼭 중학교에 진학할 필요가 있나, 다른 애들처럼 머슴살이나 하든지, 도시로 돈을 벌러 갈까’ 하는 회의와 갈등이 생겼다. 집안 분위기도 반반 인 것 같았다. 무조건 상급학교는 가야된다는 쪽과 1∼2년 쉬었다가 형편이 되면 그때 가서 진학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원하던 중학교에 합격을 했다.
어느 날 기쁨에 들떠 친구 집에 놀다 오니 어머니가 없었다.
저녁이 저물어 가는데도 나타나지를 않아 이웃마을로 찾아 다녔지만
찾지를 못했다. 불안한 예감이 들어 아버지에게 물어봐도 말없이 애궂은 담배만 뻑뻑 피우고 계셨다. 걱정이 되어 밤 새 잠을 못 잤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아버지께서, “너거 외삼촌 집에 가봐라” 하셨다.
셋째 형과 함께 물어물어 김해의 외삼촌댁에 갔다. 거기에도 없었다.
낙심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니 외숙모가 달래면서, “곧 돌아 올거니까
걱정 말고 하루 쉬어가라“면서 웃었다. 다음 날 다시 기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아직 없었고 아버지는 낮에부터 술에 취해 있었다.
어머니가 없으니 어린 내가 봐도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5일 째 되는 날, 자다가 싸우는 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웬 낯선 여자가 등을 보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아버지는 노발대발 성을 내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의아해서 눈을 비비고 살펴보니 그 여인네는 어머니이었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고 짧게 잘라 빠글빠글 파마를 한 모습이었다. 방바닥엔 참빗과 은비녀가 내동댕이쳐 있었다. 비녀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 온 것이고 참빗은 아버지가 나뭇짐을 팔아 사준 것이었다. 놀라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머니가 다른데 재가라도 하려나?’ 평소에도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마다 어디 멀리 다른 데로 살러 가 버린다고 했던 것이 머리에 떠올랐다. 뒤이어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더니 지게작대기를 들고 들어와서 우리 형제들을 패기 시작했다. 나도 어깨를 수차례 맞았다. 어머니가 몸으로 막았다. 몽둥이가 내게 더 집중되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 신발도 못 신고 도망을 갔다. 아버지가 계속 뒤따라 왔다. 골목길을 요라조리 피해 멀리 동구 밖까지 달아나서야 작대기를 버리고 주저앉았다. 그 후 중학교는 집에서 학비를 마련해 준 것으로 다니고 고등학교부터는 부모의 도움 없이 고학과 아르바이트해서 졸업했다. 몇 십 년이 흘러 어머니로부터 지나가는 말로 그때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담담하게 웃으시면서, “너거 형제들, 공납금 마련하려고 달비 안 팔았나! 머리결은 곱기도 했고 숱도 많았는데... ” 하셨다.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물론 철도 없었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학교를 못 가더라도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공납금을 마련 한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대학도 못 간 신세타령과 함께 가난을 물려받은 것을 조상을 탓으로 여겨 부모님을 얼마나 원망을 많이 했던가.
어느덧 내가 자식 둘을 공부시키는 입장이 되었다. 적은 봉급에 혼자 벌어서는 마음껏 대도시의 좋은 학교를 보내기가 벅찼다. 중고등학교까지는 그런대로 남같이 보냈지만 대학교와 대학원, 해외 어학연수는 빚을 내어 보충하기로 했다. 그래도 어렵고 팍팍한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갑자기 구원자가 나타났다. 집에서 얌전하게 살림만 하던 아내가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약간이나마 아이들 학비를 보태겠노라고 선언했다. 평소 취미로 해오던 서예솜씨를 살려 서예학원을 개설하였다. 온 가족이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 등에 원생모집 인쇄물을 돌리며 같이 일을 도왔다. 처음 한 명으로 시작한 학원이 야무지게 가르친 덕분에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등록생이 서른 명이 넘기도 했다. 그 사이 나도 한자급수 1급을 취득하여 주말마다 한자급수 따기에 도전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행이 아이들 등록금과 생활비에 보탬이 되었다. 두 아이도 부모 속 안 썩이고 공부도 열심히 해주고 바르게 잘 자랐다. 아이들에게 풍족한 생활비를 못 주어 항상 미안한 생각이 들곤 했지만 본인들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 주는 쪽으로 방침을 세우고 실천 해왔다. 대신에 큰 욕심 없이 평범한 사회인으로만 성장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머리채를 팔아 우리 등록금을 주었고 아내는 지식을 팔아 애들 교육비를 보탰다. 방법과 세월만 다르지, 부모의 역할과 희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할까. 가끔씩 사유에 젖을 때마다 부모자식의 관계가 무엇인지? 역할을 어떻게 해야 잘 할지 생각해 본다. 희생과 사랑으로 내려 온 우리 집안 내 두 여인의 내리사랑에 대해 항상 가슴속 깊이 경외를 표하면서 살아간다.
*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 』중에서 제목을 따 왔습니다
첫댓글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행복이 배가 될 것 같습니다...
마음에 닿는 따스한 글에 머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