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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4월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수도회]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 안에 숨 쉬는 생명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5,34-42
† 복음 요한 6,1-15
★ 유다 지도자들 사이에서 사도들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유다인들의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 지혜로운 제안을 한다.
사도들이 하는 일이 사람에게서 비롯되었으면 얼마 안 가서 사라질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을 박해한답시고 제압할 수도 없을뿐더러
없애지도 못하리라는 것이다. 최고 의회는 그 말에 수긍한다. 교회의
역사는 가말리엘의 말이 옳았음을 보여 줄 것이다(제1독서).
★ 오늘부터 요한 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시작된다. 오늘
복음은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고 구체적인 시기를 알려 주는데,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 주심으로써 이제 새로운
파스카가 이루어지는 것을 암시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독서에서 가말리엘이 제안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활동
전체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
의 입을 빌려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가말리엘이 이렇게 충고하는 것은 그동안 백성을 선동하던 테우다스나
갈릴래아 사람 유다와 같은 이들과 다르게,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는데도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두려움 없이 그분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교회 역사가 입증하듯이, 요한을
제외한 사도들은 모두 순교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수많은
사람도 박해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 신앙은 오히려 들불처럼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비롯하여 박해로 신자들이
쫓겨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은 복음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가말리엘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더욱이 그의
말이 옳았다면, 이 모든 일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날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인 공생활 중에 빵을 많게
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분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 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이 사도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자기들이 선포하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안”(필리 3,10) 이들이었습니다. 부활의 힘을 아는 이만이 고난에
기쁘게 동참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부활을 알았기에 박해와 죽음이
그들의 신앙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성체성사의 서론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백성을 측은히 여기시어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예수님께 인도하였는데, 이 아이가 가져온 빵과 물고기를
통하여 예수님의 위대한 기적의 힘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안드레아 사도처럼 최선을 다해 주님을 도와
드리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면 오늘 복음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 안에 숨 쉬는 생명
2015년 나해 4월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요한 6,1-15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 안에 숨 쉬는 생명
권력을 가진 이들의 눈에는 몇백명쯤의 목숨이나 빈자들의 외침은
무시해도 좋을 하찮은 것일지 모른다. 일상의 삶에서 나보다 못한
소시민들의 움직임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겨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고,
어쩌면 관심을 둘 마음의 여유마저 없을지 모른다. 많은 이들이 힘에 따라
이리저리 쏠리고, 가시적인 실적이나 눈에 띄는 그럴싸한 외양을 좇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께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주신 빵의
표징은(6,10) “새로운 파스카”를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옛것의 종합이실
뿐 아니라, 비록 옛것에서 나왔으나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새로움’
자체이시다. 군중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까지 그분을
따라갔다(6,2).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6,5) 하고 물으셨다. 이에
필립보는 인간적인 계산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그분이 모든 것을
주시는 ‘생명의 빵’이심을 믿지 못하였다(6,7). 안드레아도 ‘생명의 빵’
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밖에서 곧, 한 소년이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는 빵과 물고기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6,9).
예수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미약한
믿음을 탓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이들이 먹는 보리빵과 생선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6,11) 친히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이렇게 그분은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요(6,27),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아있는 빵’이요 ‘살’(51ㄷ절)이며, 모든 생명에 힘과 생기,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생명의 원천’으로서 예시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다 나누어주신 다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6,12)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렇게 군중들과 제자들의
눈에 남은 빵조각처럼 보잘것없고 힘없어 보일지 모르나, 하느님의
생명을 지닌 메시아이며 모두를 살리고도 남는 ‘생명의 빵’이시다.
빵의 표징을 보고 체험한 군중들은 몰이해에 빠져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모시려 한다(6,15). 그들은 하느님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정치적 메시아를 찾고 있었고,
메시아를 찾아 떠났으나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필요와 자신들이 만든 틀에 맞추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혼자 있기 위해’, 곧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그들을 피해 가신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어리석음을 경고하시며 깨우칠 ‘침묵의
공간’을 마련해 주시고, 당신의 메시아로서의 길이 군중의 생각과는
다름을 보여주신다.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그리고 ‘생명의 양식’이신 그분을
알아보기 위해 떠나자. 현실을 살아가면서 박해와 고통과 심한 소외,
고독을 느낄 때 홀로 하느님께로 물러가 ‘생명의 빵’을 먹고 다시
시작하도록 하자. 홀로 있음은 하느님의 숨길 아래 자신을 두고, 맡기는
것이다. ‘홀로 있음’은 그분의 생명의 기운,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얼과 기운을 받는 기본자세이다. 우리 자신도 보잘것없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도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생명이신 하느님을
품고,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모든 이에게 하늘나라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나 자신만 좇는 일상의 번잡함에서 ‘홀로’ 머물며,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들과 힘없는 이들, 저 변두리의 소리를
소중히 여기며 그 안에서 들려오는 주님을 찾아가 만나보면 어떨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2015.04.1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요한 6,11)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기적사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기적에 속합니다. 그래서인지이 기적을 체험한 후
사람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하지요.
그런데 이 기적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의 사람들을 먹였다는 것일까요?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이 기적을 이루셨을까요?
감사와 나눔을 통해서 이루신 기적입니다.
빵 한조각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고
콩 하나도 나누어 먹으려는 자세가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여러분은 음식을 먹을 때 얼마나 감사드리며 먹나요?
행여 반찬투정은 많이 하지 않나요?
어떤 음식이든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은 더 나누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정말 우리 몸에 좋은 보약은 많이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음식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시는 물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먹게 될 음식 깊이 감사하며 먹고 나눕시다.
그때 여러분도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분별의 지혜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사도5,32-42 요한6,1-15
제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34-42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분별의 지혜
오늘은 분별의 지혜에 대한 묵상나눔입니다.
분별의 지혜 역시 은총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분별력을 모든 덕의 어머니라 칭합니다.
교회지도자들은 물론 우리역시 일상생활에서 참 필요한 덕목이
분별력임을 깨닫습니다. 머리가 안좋으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우스개 소리
같은 진리 역시 분별의 중요성을 말해 줍니다.
바로 오늘 본기도와 화답송 후렴은 분별의 지혜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느님, 성실한 사람들의 희망과 빛이시오니, 간절히 비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맞갖은 기도와 찬미의 제사로,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하느님이 희망과 빛이 된 성실한 이들에게, 또 기도와 찬미로 언제나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소원에 따라 늘 주님과 함께 살아갈 때 분별의 지혜입니다.
주님을 닮아갈수록 겸손과 자비, 그리고 분별의 지혜입니다.
얼마전 수도형제와 나눈 대화가 생각이 납니다.
"의욕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의욕이 없으니 방향이 있을 리도
없구요. 의욕이 좋아도 방향이 없어 좌충우돌도 문제입니다만 그래도
의욕이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젊은 이들은 의욕은 많은데 분별력이
부족하고 나이든 어른들은 의욕은 부족해도 분별력은 좋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 그래서 겸손입니다. 젊은 이들은 어른들의 분별의 지혜에 귀기울여야
하고, 어른들은 젊은 이들의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 상호보완의 겸손이 절대적입니다.“
열정이 추진력의 에너지라면 분별의 지혜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새삼 열정과 분별이 함께 갈 때 온전한 영적 삶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열정과 분별의 지혜의 원천이십니다.
하느님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릴 때 열정과 분별의 지혜입니다.
삶은 깊이입니다. 삶은 무게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이를수록 깊이의 삶이요, 내적으로 가벼워지면서
무거워지는 역설적 무게의 삶입니다.
바로 여기서 샘솟는 열정과 지혜입니다.
오늘날 얕고 가벼운 천박(淺薄)한 디지털 시대의 주류적 삶일수록 절실한
열정과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독서의 율법교사 가말리엘이
바로 열정과 분별의 지혜를 지닌 분들임을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대중의 잘못된 메시아관에 현혹되어 헛된 인기에 편승할 주님이
아니십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노자의 말대로 공을 이룬 뒤 거기
머물지 않고 미련없이 떠나는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신이 참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최고 의회에서 가말리엘의 발언은 얼마나 겸손하고 지혜로운지요.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상의 공동체 삶에서, 인간관계에서 깊이 참고할 대목입니다.
때로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그냥 내버려 두고' 기다리며 바라보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일 수 있습니다.
무관심의 방치가 아니라 하느님께 맡기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지요. 새삼 '지혜의 겸손'이요 '무지의 교만'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을 희망과 빛으로 삼아 성실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겸손과 분별의 지혜를 선사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인천] 주님께서 함께 하실 자리를 만들어드려야 합니다.
2015년 나해 4월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34-42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인도 콜카타 지역의 빈민들을 돌보며 헌신하여 ‘빈자의 성녀’로
추앙받았던 복자 마더 데레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복자 데레사
수녀님께서 활동하셨던 인도의 콜카타 빈민 지역은 아름다움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곳이었지요. 도랑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넘쳐났고
계곡에는 상한 음식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시체로 인해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이러한 곳에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한 구호,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곳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곳을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자기 집에 이상한 냄새 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이 냄새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 즉, 나쁜 냄새는 유쾌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에, 창문을
활짝 열고, 초나 방향제를 켜서 냄새를 어떻게든 없애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냄새나고 지저분한 곳을 복자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냄새 나는
것, 지저분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바라보니, 그 사람 모두가 아름다웠던
것이지요.
만약 복자 데레사 수녀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만 사셨다면 결코
콜카타의 삶은 행복하지도 또 있어야 할 곳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셨고,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복자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하느님의 시선으로 살아야 함을
깨달으면서도 몸이 따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그것을 따라야 행복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힘들어 하게
됩니다.
어제는 작년 4월 16일 온 국민을 슬프게 했던 304명의 희생자를 냈던
세월호 1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날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 마련이 확실하게 이루어져야하는데, 경제성과
세속적인 이유를 들어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라면서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안드레아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면서 주님의 힘을 알면서도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힘들다며 포기하는듯한 말을 던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이제 빵의 기적 이후 사람들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하지요. 이 또한
주님만 있다면 배고플 걱정 없겠다는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들을
피해 산으로 가십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곳에서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자리를 만들어드려야 합니다. 그 자리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이 바로 세워져 있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나를 버리는 이런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이런 사랑에서 우리는 복된 삶과 더불어 세상에 나온
보답을 얻으며 세상의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톨스토이).
복자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생전 모습입니다.
장미의 힘으로
독일 시인 릴케가 파리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산책길에 매일 동전을
구걸하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동전 대신에 가지고 있던
장미 한 송이를 건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릴케의 뺨에 키스를 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며칠 동안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할머니께서는 다시 그 산책길에 나타나셔서 구걸을 하셨습니다.
릴케의 친구가 물었지요.
“돈이 없어서 할머니가 그 동안 어떻게 사셨을까?”
이 물음에 릴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장미의 힘으로.”
사랑이 없는 동전 몇 개의 힘이 클까요? 아니면 사랑이 담긴 장미의 힘이
클까요? 지금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건네는 것은 무엇인가요?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의 계획
2015년 나해 4월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복음: 요한 6,1-15
< 사람의 계획 >
중학교 때 개신교 전도사 한 분이 우리에게 종교교육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전교를 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 나라로
가서 선교사로 죽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가야하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해 몇 년간 계속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젠
돈이 얼추 모여서 떠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은행으로 돈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돈을 찾고 나올 때 소매치기들에게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모두 털리고 만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돈을
대주겠다고 하여 오지 나라로 선교를 떠나기는 했지만,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계획이 얼마나 쉽게 허무해 질 수 있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윗사람이나 정치인들의 비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엔 공감을
하다가도 나중엔 본인이 그 자리에 앉으면 더 잘 할 것이라는 표현으로
들립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본당 신부의 사목을 안 좋게만
평가한다던가, 사제가 주교의 사목 방침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는
자신이 사제나 주교가 되면 더 잘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계획은 항상 한계를 지닙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것만 뒤돌아보아도 자신의 계획대로만 되어오지는 않았음을 알 것입니다.
제가 계획한 대로였다면 저는 사제가 되지 않았어야합니다. 항상 인간의
계획이란 하느님의 계획 앞에서는 어리석은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무언가의 책임을 맡으면 더 잘 할 거란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을 박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가말리엘의 의견은 참으로 지혜롭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의 계획이나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살고
움직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만 합니다. 나의 의지나
뜻이 섞이기 시작하면 단기적으로는 잘 되는 것처럼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맙니다. 어쩌면 마르틴 루터도 자신의 뜻이
하느님의 뜻이며 교회를 더 좋게 개혁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교회를 분열시켜 어떤 이들에게는 성체성사도 고해성사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수녀님은 수도회를 3개 세웠지만 죽기
직전에 자신은 사탄에게 조정 당했다고 고백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반면 빗자루 수사로 불리는 마르틴 성인은 청소만 하다가 성인이
되었습니다. 양적인 성장이나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남긴다고 그런 것이 꼭
잘 하는 사목은 아닌 것입니다. 사도들이 한 번에 삼천 명씩 세례를
주었다고 성모님 앞에서 으쓱 댈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각자의
자리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순종 하는 이들을 가장 높게
여겨주십니다.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져야만 성당이나 교회가 잘 될 거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은 자신을 들어 높이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며 나중엔 교회에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거북한 사목자가 나타나더라도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부활 제2주간 금요일
2015년 나해 4월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34-42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교황청에서 ‘강론지침’이라는 책을 발간하였고,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한국어로 출판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읽어 보았습니다. 강론은 화려한 언변, 웅대한 연설, 언어의 기교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강론은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 중에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강론은 그 말씀을 변화된 삶의 모습으로 보여줄 때, 더욱 깊은
감동을 준다고 말을 합니다. 강론은 일반 연설이나 강의와는 달라서
전례의 한 부분이며, 무엇보다 말씀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강론을 하는 성직자는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들에게 내과 수술을 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성직자 개인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오랜 전승과 가르침에 부합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강론 준비의 4가지 단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는 비단
강론은 하지 않더라도 매일 성서 말씀을 통해서 삶을 성찰하고, 변화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읽기(Lectio)입니다. 성서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묵상(Meditatio)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좋은 영화를 보면 내 안에 감동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 번째는 기도(Oratio)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음을
감사드리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나
자신의 변화를 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내 안에 갇혀 있는 마음을
가족과 이웃들에게 열어 놓을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관상(Contemplatio)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을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나도 함께 걸어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관상은 행동으로 드러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이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이 아니라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과 폭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나눔과 사랑으로는 충분히 변화 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 땅을 녹이고, 파란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은 따뜻한 봄 햇살이면
충분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모두를 한 식구로 만드신 예수님
2015년 나해 4월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34-42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모두를 한 식구로 만드신 예수님
먹어야 산다는 건 기본이고 같이 먹는 입 숫자를 식구(食口)라 하지요.
친구들, 회사 직원들이 함께 회식하는 것도 한 식구 되자는 거고요..
이런 먹음에 대해 예수님은 다른 성현들과는 달리 밝히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기적이 그랬고 식사에 초대받아 가신 일이 자주 등장합니다.
남자만도 오 천 명이라는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 대단한 거고요.
결국 최후만찬 때에 자신을 빵으로 주시며 한 식구라는 걸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요한 6,11)”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믿고 감사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요한6,1-15)
제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34-42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믿고 감사하라.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한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 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똥은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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