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는 남미의 중심부에 있는 내륙국가로서,
아이마라 족이 중심이 된 티와나쿠 문명에서 시작하여
15세기에 잉카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530년대에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초 독립투쟁을 거쳐 1825년에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딴 공화국을 정식으로 성립하였다.
1820년 이후 보수적인 크리오요들은 차르카스(Charcas)에서 태어난
페드로 안토니오 데 올라녜타(Pedro Antonio de Olañeta) 장군을 지지하였다.
그는 1812년의 자유주의적 스페인 헌법의 복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올라녜타는 이러한 수단들이 왕실에 대한 충성을 위협한다고 확신하였기에
볼리바르와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지휘하의 반란군은 물론
자유주의적 왕당파 군대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하였다.
올라녜타는 페루의 왕당파가 1824년 아야쿠초 전투에서 패배한 후 맺은
조건부 항복문서에 그와 그의 군대를 포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휘권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올라녜타는 수크레가 실질적으로 고지대 페루에 대한 스페인 통치를 종식시킨 전투에서
그를 무찌르기까지 수개월 동안 돈키호테처럼 전투를 지속하였다.
그는 결국 1825년 4월 1일 자신의 부하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제헌의회가 구성되어 8월 6일 볼리비아를 독립적인 공화국으로 선포하였으며
그 기초를 닦은 것으로 여겨진 볼리바르를 기려서 새 공화국은 그의 이름을 따랐다.
1879년에 남아메리카에서 발발한 태평양 전쟁(WarofthePacific)은
볼리비아, 칠레, 페루가 광물자원 영유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의 패전국 볼리비아는 태평양 연안 영토를 칠레에 빼앗김으로써 내륙 국가가 되었으며,
페루 역시 수도까지 함락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은 후 칠레에 일부 영토를 빼앗겼다.
현재 칠레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칠레 북부의 이 지역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주는 리튬, 구리 광산 등 자원의 보고이다.
전쟁이 끝난 지 130년이 되었지만,
볼리비아와 페루는 평화협정으로 설정된 현재의 국경선은
전쟁 이후 승전국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협정의 결과이므로
칠레에 지속적인 재협상 요구를 해왔고,
칠레가 이를 거부하자 국제사법재판소에 칠레를 각각 제소한 상황이다.
칠레와 볼리비아의 관계.
이전 볼리비아 영토였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칠레에 합병된
안토파가스타 지방 등 현재 칠레령인
칠레 북부의 태평양 해안 지대를 둘러싼 오랜 영토 분쟁 대립으로 인해
칠레와 볼리비아는 단순히 사이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국교관계도 맺지 않고,
두 나라의 일반 국민들도 상대국가들에 여행조차 안 가는 등
라틴아메리카에서 숙적으로 유명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사이는 여기에 비하면
사이가 좋아보일 정도로 완전히 원수지간이다.
스페인에게서 독립을 얻은 직후부터 칠레와 볼리비아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북쪽으로 확장을 노리는 태평양으로의 출구를 노리는 볼리비아가
아타카마 사막 일대의 영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인 것이 시초이다.
여기에 1836년 볼리비아가 페루와 통합하여 페루-볼리비아 연합을 결성하려 했으나
이를 자국에 중대한 위협이라 판단한 칠레가 아르헨티나, 북부 페루의 분리주의자들과 연합해
전쟁을 걸어 승리를 거둔 후 페루-볼리비아 연합을 와해시켜 버린 적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위의 아타카마 사막 영유권 분쟁의 연장선으로
볼리비아의 유일한 태평양 출구인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두고
페루-볼리비아 동맹과 칠레가 벌인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가 승리를 거둔 후 칠레가 안토파가스타의 구리와 인광석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은 반면 볼리비아는 경제적 손해는 둘째치고
내륙국으로 전락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완전히 라틴아메리카의 최빈국으로 파탄나 버렸다.
과장해서 말히면 영토 분쟁이 이후 두 나라의 운명을 정반대로 결정지은 셈이다.
태평양 연안 남미 국가 지도.
가운데 빗금이 그려진 곳이 과거 볼리비아 영토였다가
전쟁 후 칠레로 편입돼 양국 간 분쟁이 일고 있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이다.
볼리비아는 내륙국(육지로 둘러싸여 해안이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곳에도 해군이 있다.
출항할 바다를 잃은 채, 해군은 해발 3,800m에 위치한 티티카카호(湖)에 주둔 중이다.
매년 3월 23일에는 바다의 날도 기념한다.
이날 볼리비아 최대 도시 라파스에서는 흰 제복 차림의 해군이 거리를 행진하고,
배 모형과 깃발을 든 아이들이 그 뒤를 따른다.
과거 볼리비아가 가졌던 바다를 기억하고, 언젠가 되찾아오기 위해서다.
볼리비아가 태평양 연안 영토를 잃고 내륙국이 된 건 1
9세기 말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다.
싸움의 발단은 이곳에 풍부했던 ‘구아노’였다.
바닷새 배설물이 굳어 만들어진 구아노는 고농축 천연 비료다.
화학 비료 발명 이전이었던 당시, 구아노는 높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볼리비아가 이곳에 칠레 기업을 유치해 공장을 세운 이유다.
긴장이 고조된 계기는 칠레 기업들에 대한 볼리비아 정부의 세금 인상 조치였다.
이곳에서 막대한 수입을 거두고 있던 칠레는 즉각 반발했다.
결국 1879년 칠레는 전쟁을 감행했다. 볼리비아는 페루와 힘을 합쳐 맞섰지만,
영국ㆍ프랑스가 지원하던 칠레에는 역부족이었다.
1883년 전쟁에서 패한 볼리비아는 태평양 연안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칠레에 내줘야 했다.
총 면적 12만㎢, 해안선 400㎞에 달하는 땅이었다.
태평양 접근권을 잃은 볼리비아는 졸지에 내륙국이 되고 말았다.
이후 양국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분쟁이 일단락된 1904년 체결된 ‘평화조약’은
일대 지역에 대한 칠레의 ‘절대적이고 항구적 지배’를 규정한 반면,
볼리비아에는 아리카 항구 무관세 통행권만을 인정했다.
칠레가 연안 영토뿐 아니라 해양 자원까지 획득하며 경제 성장을 계속하는 동안
볼리비아는 남미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볼리비아는 여전히 자신들의 주권을 내세우고 있다.
2006년 취임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해양 진출권 확보’를 최우선 외교 정책으로 제시했다.
그는 볼리비아 영토 주권을 되찾겠다며 “1904년 평화조약을 폐기하거나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칠레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2011년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해당 조약의 합법성을 재천명했다.
그러자 모랄레스 대통령은 칠레와의 대화가 ‘소득 없는’ 시도라며
2014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 사안을 회부했다.
#볼리비아가_남미_최빈국으로_전락한_까닭
4년의 심리 끝에 지난해 나온 ICJ의 판결은 볼리비아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ICJ는 평화조약의 효력을 인정하고 칠레에 재협상 의무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모랄레스 정부는 ICJ 판결로 볼리비아 해양 진출권 확보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하지만 올해 바다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모랄레스 대통령은
“볼리비아는 바다와 함께 시작된 나라”라며 다시 한번 해양진출권 확보 의지를 내보였다.
소금과 함께 볼리비아를 자원의 보고로 만든 것은 리튬이다.
리튬은 전기자동차 배터리의 핵심 재료로 '하얀 석유'로 불린다.
볼리비아는 세계 리튬 매장량의 24.4%인 2,100만 톤을 보유 중인데
대부분 우유니 호수 바닥에 염화리튬 상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