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크리스챤에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까?"라고 질문하면
거의 대부분 구원을 염두해 두고 "Yes"란 대답을 합니다.
다시 물어 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집니까?"
이렇게 질문하면...순간 당황을 합니다. 그러다가 "Yes"란 대답을 마지 못해 합니다.
또 다시 물어 봅니다.
"욥기서는 역사적 사실입니까? 아니면 홍길동전 처럼 문학입니까?"
씩씩하게 대답하던는 사람도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답을 힘겹게 합니다.
그러면 욥의 친구들이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사람의 말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거의 대부분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사단이 들락날락 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하면...거의 죽음입니다.
모세와 선지자, 그리고 사도들의 신앙관에서 볼 때
사단이 하나님의 보좌에 설 수 있다는 의식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혹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진다는 말은
덧셈...뺌셈 하듯 그렇게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Yes", 아니면 " No"란 답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불신자에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입에 침도 안바르고 "No"라는 답을 합니다.
그러면 또 물어 봅니다. 성경을 아느냐고 질문하면
읽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답을 합니다.
성경을 알지도 읽어 보지도 않았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을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사람의 말과 똑 같은 것입니다.
무조건 덮어 놓고 믿는 맹신은
믿음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믿음은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념입니다.
믿음은 눈으로 보는 것이요, 귀로 듣는 것이며, 손으로 만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 말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보다 더 정확한 인식에 대한 믿음의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대올로기 신념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혹은 "믿지 않는다"고 답을 하는 것입니다.
둘 다 불신자인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것을 신념으로 믿는 사람은
성경의 모든 유익을 은총으로 누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진정한 기독교인입니다.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진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 입니다.
외식적 신앙을 가진 바리새인의 후예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을 글자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확무오한 축자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이라고 절대 맹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정확무오한 축자영감이라는 맹신의 이데올로기 단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정확무오한 축자영감"이라는 것은 신학일 뿐입니다.
신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학은 견해요, 관점일 뿐입니다.
성경에 대한 철학적 이해인 것입니다.
신학은 신앙의 기초를 이루지만 신앙의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글자로 믿는 사람은 신학적 이데오로기 신념일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글자로 읽는 사람.....
성경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고...읽는 데
글자로 읽는 사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어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도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정통 신학의 이데올로기 신념에 투철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떄부터 성경의 야성을 가지면서 놀라운 사실들을 깨우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맹신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목회자가 이 글을 읽게 되면....
신종 이단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도 방종의 이데올로기 신념일 뿐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 되어지는 과정은
적어도 "정확무오한 축자영감"의 이데올로기 신학 신념을 뛰어 넘어야만 가능합니다.
글자의 맹신은 투철한 신념일 뿐입니다.
글자가 담고 있는 글의 내용을 염감으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확무오한 축자영감이란 성경의 모든 내용까지를 포함합니다만
신념에 머물게 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역동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글자를 맹신하다보니....온갖 해석이 나오고....글자에 영해를 더하니 알레고리가 되고....
원전주의자들은 단어의 숨은 뜻까지 말하다 보니 서로 충돌하는 설교를 밥먹듯이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설교를 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 아니며,
신학자들이 난도질하는 해부용의 글이 아닌 것입니다.
맹신은 기도와 은혜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는데도 주요하게 역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구원 역사의 숨결이 담겨 있는 성경의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것은 이데올로기 신념이 아닌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똑같은 느낌의 하나님 말씀으로 이해된다면
이것도 맹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의 66권이.....
전부 다른 시각과 강도의 느낌으로 이해 되어져야 합니다.
언젠가부터 한국 교회에 QT의 열풍이 불었는데....
성경으로 나아가는 긍정적인 생각은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한 참 좋은 습관이지만.....
QT의 부작용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지혜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 QT인 것입니다.
더 더욱 짧은 본문 정해서 하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하게 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고 믿어지는 것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리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성경은 성경으로 기록 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서만 하더라도 신명기 사관으로 기록된 역사서가 있는가 하면.....
역대기 사관으로 기록된 역사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를 하여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
짧은 본문 선택해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를 하게 되면
아전인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은 하나인데 서로 충돌되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설교는
수 천 수 만 개인 현실은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며 모습인 것입니다.
짧은 본문을 선택해서.....
종교적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설교를 합니다.
짧은 본문을 선택해서
기복적인 설교를 합니다.
짧은 본문을 선택해서
인본주의적이며, 윤리도덕적인 의식을 일깨우며 교훈을 하는 설교를 합니다.
짧은 본문 선택해서
무속 신앙의 근거를 삼고, 하면 된다는 신념을 일깨우는 설교를 합니다.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내용과 결론은
거의 다 똑같습니다.
한편의 설교를 듣고......
그래서 본문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어지게 하는 감동을 전하는 설교는
정말이지...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한편의 설교로 복음적인 이해를 가진 설교를 듣기는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기형적 성장과 기독교 유사 종교로 사이비화 되어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고 믿어지는 신앙을 .....
그 동안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과 번영을 위한 맹신의 이데올로기로 피괴시켜 버린 것이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거짓된 자기 생각의 논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맹신하게 한 결과인 것입니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바알 신앙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저주로 받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있었고.....선지자들의 강렬한 외침이 있었고....제사장들의 거룩한 성전 봉사의 직무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을 복대신 저주의 심판으로 받고만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많고,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설교는 쏟아지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고 믿어지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가진 설교는
듣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구원의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의 은혜가 임하여야 하는데
번영과 성공의 건강 복음으로 중산층 신앙을 양성하여 복음의 생명력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를 추종하는 신도들로 가득한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유사 종교이지....
성경의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고민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 싸매고 고민해야 합니다.
성경은 글자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글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신념으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성경 말씀의 영감을 믿음의 감각으로 이해되고 느껴져야 합니다.
성경의 축자영감설은 가장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말하는 신학이지만
축자영감을 맹신하는 껍데기에 머물러 있으면 신학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글자보다 글의 내용이 영감된 것으로 믿어지고 느껴지며 이해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상태를 그대로 지속할 때......
항상 하나님 구원 역사의 숨결은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으며 깊이 묵상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을 멀리 두고 있으면....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믿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고 믿어지고 느껴지는 생명의 약동은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 쓰여진 글이 아닙니다.
성경은 QT를 통해서 나에게 어떤 메세지를 주기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읽지만 청세기 전체는 물론 요한 계시록까지
마음으로 느껴지도록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온 몸에 피가 흐르듯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의 강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고 느껴질 때 .....
가장 은혜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성경에 대한
불신의 이데올로기 신념을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개티들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학자들의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설교자들의 외식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인 것입니다.
참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고 느껴지고 믿어질 때......
내 안에 말씀으로 계신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충만히 거하시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복음편지로 항상 느껴질 때.......
자기 백성의 마음에 성령으로 말씀을 기록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약동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말씀으로 거하신는 그리스도 예수로 항상 호흡하는 기도를
성령 안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데올로기 신념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생명의 약동을 느끼는 실제 상태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기 백성의 마음에
늘항상 진리의 복음으로 생명수 강이 되어 흐르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고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성경의 내용과 그 기록된 시차는 몇 백 년에서 몇 천 년인데
그 엄청난 시차를 극복하고 성경의 말씀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