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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왕국
시편 2 : 1 - 12
우리가 지난 시간부터 구약 시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편은 어떤 사상의 체계적인 표현을 한 것도 아니며 저자가 일정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150편의 시 가운데 거의 반수에 가까운 72편의 시는 다윗의 시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만 그밖에는 저자가 밝혀져 있는 것도 있고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을 읽어 볼 때 이 시를 쓴 사람들의 참으로 깊은 신앙의 체험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을 읽으시면서 비슷한 내용의 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은 될 수는 있는 대로 피하면서 강해를 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도의 성원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제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좀더 깊은 신앙의 경지에서 이 시련을 생각하게 될 때 큰 은혜가 될 것을 믿습니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우리 기도회가 끝나는 대로 남아서 좀더 자유롭게 기도하시기 원하시는 분들이 이 본다 아래층 앞자리에 나와서 기도하시는데 시간마다 더 많은 분들이 함께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을 볼 때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댁이 먼 데 계시거나 바쁘신 분들은 말할 것 없지마는 그렇지 않으신 분들은 좀 남으셔서 10분이든, 20분이든, 30분이든 여러분 형편되시는 대로 남으셔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은혜가 많습니다. 마음이 클클하신 분 주님께 나아와서 여러분의 그 클클한 마음을 쏟아 놓으세요. 안타까운 사정이 계신 분도 주님께 고하세요. 그리고 “네 소원이 무엇이냐? 네 소원대로 되라”는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개인이 복을 받습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더욱 왕성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2편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서 쓴 시입니다.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소망의 대상입니다. 시편 146편 5절에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에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하였습니다.
로마서 15장 12-13절에 더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개인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사랑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 42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기를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을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을 앎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하였습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이것 보세요. 이와 같은 그리스도를 세상이 모른척하고, 배척하고,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늘 본문에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실제로 가능합니까?
시편 139편을 한 번 읽어보십시다(1 - 12).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피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날개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 메시야는 예언하신 대로 오셨습니다.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전체 구약 성경 중에 456회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세 5경 중에 일흔 다섯 번, 선지서 가운데 이백 마흔 세 번, 시서 가운데 백서른 여덟 번 나와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7 - 9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2편 7 - 9절을 한 번 읽어보십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은 미리 자기 원수들에게 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그들의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이미 그 계획이 좌절되고 그들의 간교함이 방해가 된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 받은 사랑하는 아들이 권세를 입고 보좌에 올라 있습니다. 세상의 방백들이 그의 손에서 왕권을 빼앗지 못하며 그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길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스리고 계시며 원수들이 그의 발 앞에 쓰러질 때까지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거룩한 산 시온에 견고하게 세우셨으며 분노하는 열방들이 그를 쓰러뜨릴 수가 없습니다. 쓰러뜨리겠다는 바로 그 생각은 여호와를 자극하여 비웃게 할 것이며 그들이 광분한다고 해서 그의 심령이 상할 것도 없습니다. 싸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연희처럼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왕으로서 그의 왕자, 다시 말해서 기름 부은 받은 아들에게 말씀을 하시며 그의 법의를 입고 예수님께 큰 명예를 수여하신 것입니다.
옛날 군주는 잔칫날이 되면 자기가 총애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바를 내게 말하라. 오늘은 거절치 않고 주리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대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영광스러운 아들, 평화의 왕자에게 “네게 구하라 그러면 내가 너의 유업으로 열방과 이 땅을 너의 소유로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무한한 지배권을 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온 땅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도 “예수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하였습니다.
원수들이 외치는 소리가 아무리 드높아도, 저희들의 흉계가 아무리 흉악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왕국은 너무나 대조적으로 장엄한 잔치와 화평의 즐거움이 넘치고 있습니다. 싸움터에서도 지휘관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때 부하 사병들이 희망을 가지고 용감해지는 법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그는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전쟁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고 그의 뜻에 따라 온 세상을 먼지로 뒤덮을 수도 있고, 또다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 믿기 전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를 대항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오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서를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다메섹을 향하여 가다가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하늘에서 내려 비치는 것을 체험하고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습니다.
그때 일을 사도행전 26장 14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가 고생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만왕의 왕을 대항하고 대적하는 일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어리석음 밖에는 없습니다. 가시채를 뒷발로 차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뒷발에 피밖에 흐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안식은 영원히 능력으로 계시는 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 모든 근심과 걱정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심령이 피곤하신 분이 계십니까? 굳게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십시다. 흔들리는 법궤를 멎게 하려고 우리의 연약한 손길을 내밀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속한 자를 지켜 주심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염려를 물리쳐 버리고 주님의 발 아래앉아 그의 음성을 들읍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다스리시고 또 장차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을 자께서도 역시 통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어느 면에서나 실패함이 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점점 더 확장되어 나아갑니다. 이사야 49장 12절에 보면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 14절 이하에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사 49:13-18) 하였습니다.
이런 예언은 이사야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도 같은 예언을 했습니다. (렘 3:17) 구약 성경의 요한이라고 말하는 다니엘도 장차 올 왕국에 대해서 밝히 내다보았습니다(단 7:18). 그런데 이것 보세요. 오늘 본문에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동일한 왕국을 우리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32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신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실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자 되신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께 구해야 겠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그러므로 믿을만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일상 생활에서 평범한 교훈을 이용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에게 주리라” 여러분, 이보다 더 큰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의 영역을 넓히십시다. 나 자신이나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만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세계 모든 나라가 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도록 간구하십시다. 이 둥근 지구가 주의 나라가 되도록 간구하십시다. 그래서 이 땅끝에서도 주를 찬양하는 노래가 들리도록 기도하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리라”
인간의 힘으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니며 더욱이 그의 종들이 싸우는 곳도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물리적인 힘이나 정신적인 힘, 계급, 명성으로 개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세상이 인간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줄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안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혹 어떤 사람은 문화의 소산으로 이 세상이 그리스도에게로 전향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문화는 항상 복음에 뒤따르는 것이지, 다른 말로 문화는 복음의 수산이지 문화에 의해서 복음화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이 세상을 끌어올립니다. 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죄를 범하고 공포의 밤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의 빛을 비쳐주며 인간을 암초와 난파선으로부터 구조하여 평화의 항구로 인도하는 등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이 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스리고 계심을 이방인에게 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힘써 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할 것을 믿습니다.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네게 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간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것까지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회개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방해되는 일이 있지마는 앞으로는 이 모든 방해되는 세력을 파괴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로다”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27절에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하였습니다. 12장 5절에도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했습니다. 19장 15절에는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신다” 했습니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게 쳐부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19장 11절에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 했습니다. 철두철미하게 멸망시킨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30장 14절에도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산산조각이 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이고, 튼튼해 보이고, 굉장해 보인다고 해도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끝장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어떤 계획이나 음모에 대해서 조금도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말씀합니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하였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지혜를 얻고 교훈을 받는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보통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여론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잠언 8장 13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악한 것을 미워합니다. 교만한 것, 거만한 것, 패역한 입을 미워합니다. 악을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악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빚지는 것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빚을 지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을 미워하는 사람이 거짓말하지 아니합니다.
끝으로 12절 말씀에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였습니다.
여기 입맞추라는 데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입맞춤은 화해를 의미합니다. 모든 적의가 사라지고 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은혜의 첫 번 역사도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입맞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화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났던 방탕한 아들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향해 돌아올 때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는 달려 나아가서 아들을 껴안고 거지처럼 되어 버린 아들과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응답의 입맞춤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하나님을 멀리 떠나거나 허사를 경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생활을 하지 맙시다.
그리고 이 입맞춤은 충성을 의미합니다.
신하가 왕의 발에 입맞추는 것은 그만을 따르고 섬기겠다는 마음의 표시합니다. 여러분,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용서함 받아 살게 되었으면 바울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만을 우리의 왕으로 삼아 전에는 다른 주인이 우리를 지배했으나 이제는 주님만이 나를 지배하고 전에는 우리의 정욕과 쾌락과 자만심과 이기심에 굴종했으나 이제는 주님의 가벼운 멍에에 우리 자신을 맡기겠습니다. 나로 하여금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라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 모두 오늘 저녁 주님께 입맞추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십시다.
이 입맞춤은 감격의 표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으며 머리털로 발을 닦고 그의 발에 입맞추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러분, 아직까지 주저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고 더럽고 오래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내게 오는 자를 내가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에게 오면 그는 언제나 맞아 주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왜 입맞추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했습니다. 누구에게 이 진노가 임합니까? 끝내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의 자비를 거절하고 그의 희생을 경멸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여러분, 과연 주님을 온전히 의지합니까? 그러면 복이 있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복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신앙 생활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꼭 그대로 믿습니까? 여러분, 축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세요. 의지하는 것만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복
시편 2편 7-9절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복 (시편 2편 7-9절)
1. 아들이 되는 복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7절).”란 말씀은 다윗 왕가의 대관식 선언문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 선언과 함께 왕으로 즉위했다. 이 구절의 표현은 하나님이 다윗 가문의 왕위가 영원할 것이란
‘다윗 언약’대로 다윗 왕국의 능력과 권세가 대단할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더 나아가 이 구절에 나오는 ‘너’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다윗 왕을 아들로 삼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도 아들로 삼아주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그처럼 아들이 된 것도 복이지만 아들답게 사는 것도 복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참된 아들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거룩한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라.
2. 기도 응답의 복
성도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 중의 하나가 기도 응답의 복이다(8절).
기도 응답의 복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구체화된다.
기도는 영적인 운동과도 같다.
기도해야 믿음의 근육에 힘도 붙고 하나님의 결재도 나면서 축복의 문이 열린다.
기도의 깊이만큼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깊어지고 기도의 손을 모으는 시간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 안에 머물게 된다.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고 기적을 일으키는 영적인 마술 통로만이 아니다.
기도는 기도 응답 이전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표시로서 해야 하는 것이고
거룩한 비전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추진력의 원천으로서 거룩한 비전이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지 않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길 기뻐하신다.
비전은 기도를 통해 구체화된다.
기도를 통해 사람의 해결책이 아닌 하나님의 해결책을 신뢰하는 훈련을 할 때 거룩하고 찬란한 비전은 현실이 된다.
3. 지경 확장의 복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고 소유를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겠다고 했다(8절).
이 복은 다윗 때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이뤄졌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고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큰 복을 주길 원하신다.
즉 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서 멋지게 이뤄지길 원하신다.
큰 시야를 가지고 넓은 세계를 바라보며 깊은 상처로 인한 이 땅의 한숨소리와 신음소리를 들으라.
왜 하나님은 성도에게도 시련을 허락하시는가?
그때 낮은 자의 소리를 잘 듣는 귀가 발달하면서 거룩한 꿈이 커지기 때문이다.
큰 꿈을 가지고 살 때 주어지는 복이 있다.
그것은 작은 일에 매여 요동하는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행복을 얻으려면 흔들리지 않는 영혼이 되는 삶은 필수조건이다.
4. 능력을 얻는 복
고대 일부 왕들은 대관식 때 주변 나라들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과시하려고
그 나라들의 이름이 적힌 질그릇들을 철장으로 깨뜨리는 의식을 행했다.
그런 관습을 염두에 두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철장 권세와 능력 앞에서 세상 나라들은
질그릇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묘사했다(9절).
하나님은 성도에게 세상을 정복할 능력을 주셨다.
즉 성도에게는 이기도록 프로그램화된 영적인 유전자가 이미 심겨져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처음 만드시고 창세기 1장 28절에서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세상 만물을 다스리라.”
성도는 창조 당시의 사람보다 위대한 존재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에게는 큰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다.
두려워서 출발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믿음의 발길을 내딛으면 사탄을 정복할 수 있고
문제를 극복할 수 있고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