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부활주일 설교]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눅 24:13-3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 시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라는 제목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전15:3-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처럼 부활이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고의 복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들도 부활로 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 읽지 못했지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슬픔과 실망에 빠져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부활소식은 들었지만 직접 보지 못했고 남이 전해주는 그 정도 가지고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우리도 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2000년이 지난 상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활의 주님을 마음 깊이 만날까요?
1. 믿음으로 깊이 만납니다.
15-16절에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그 길에 모르는 행인 한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가려져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만나도 깊이 만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지금 우리와 같습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육신의 눈으로는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건 아닙니다. 마28:20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가 없다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다 해서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고후5:7에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한 것처럼 우리가 지상에 살 동안은 보이지 않지만 함께 하신다는 믿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믿지 못해 보여 달라는데 있다는 믿음으로 보라니 그게 논리적으로 맞는 거냐’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 주님을 보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체험이 있든지 없든지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없을지라도 언제나 ‘내 곁에 계신다. 내 말을 듣고 계신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도우신다.’ 이렇게 믿고 늘 대화하고 찬송하고 거룩하게 살면, 주님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음성을 듣게 되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깊이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2. 성경을 통해 깊이 만납니다.
17-27절까지의 내용인데 예수님은 성경을 가르쳐주셨습니다. 25절부터 몇 절만 보면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5-27절)
유대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을 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못 만납니까? 성경을 잘못 믿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잘못되면 절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요일5:5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그랬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도 19-21절을 보면 예수를 선지자로 알았고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로 바랐을 뿐이었습니다. 희망사항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동행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는데 설득력이 있을 뿐 아니라 마음이 어찌나 뜨거운지 견딜 수 없었습니다. 말씀 하나하나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메시야이신 것이 정확하게 다가와 확신이 오고 신이 나고 못 믿은 것이 부끄럽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로 믿어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주이심을 정확히 믿는 자만이 마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오직 예수가 아닌 다원주의로는 주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이1:9에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했습니다.
오직 예수로 믿더라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명의 나의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5:25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그 음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만 전했는데 성령이 임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정확한 복음과 정확한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주님을 깊이 만나는 방법입니다.
3. 기도를 통해서 깊이 만납니다.
28-29절에 “그들의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강권하여 유숙하러 들어간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기도를 의미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두 제자처럼 강권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기도하시란 말씀입니다.
눅11:13에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신 것은 전후문맥을 보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눅11:9) 하신 것처럼 간절한 기도를 가리킵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도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까? 죄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합니까? 힘써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평소에도 기도했어도 능력을 받지 못해 두려워 떨었지만 열심히 기도함으로 부활의 큰 능력을 받았을 때 이길 수 있었습니다.
4. 성찬을 통해서 깊이 만납니다.
30-31절에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이 자리가 성찬의 자리는 아니었건만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과 똑 같이 행하셨습니다. 그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성찬의 은혜입니다.
성찬이란 떡과 포도즙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인데 여러 설 중에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영적임재설과 상징설을 믿습니다. 영적임재설이란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에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고, 상징설이란 떡과 즙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는 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생각하고 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담당하신 영원한 속죄의 피로 알고 믿고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게 생명을 주신 살로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주님의 신령한 몸에 참예한 자가 되고, 함께 떡을 떼는 성도들도 한 몸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찬이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성찬의 장점은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 진리와 그 사랑을 깊이 깊이 묵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에 서게 되고 그 사랑에 감복하면 성 프란시스처럼 어마어마한 임재의 은혜 가운데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찬이란 형상화된 보이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찬예식을 하는 것은 그 진리와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구약의 화목제나 속죄제처럼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속죄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예수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거룩하게 살고, 몸과 마음을 다해 더욱 힘 있게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과 성찬의 복음의 진리에 견고히 서서 흔들림 없이 살아감으로 부활이 큰 능력으로 다가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깊이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