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데뷔 40년 '국민 명창', 18년째 孝콘서트
김영임
이 여인의 소리에100만명 눈시울이 붉어졌다
문갑식 기자 / 조선일보 : 2012.09.08.
"제자 양성할 공간 마련이 꿈… 꿈 이뤄지는 날 무료공연 할 겁니다"
#회심곡
고수(鼓手)의 힘찬 팔놀림이 정적을 깬다. 꽹과리 선율이 뒤따르는가 싶더니 이승과 저승을 잇는 듯한 여인의 저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일심으로 정념은 극락세계라~보옹호오호오홍이의 아미로다~" 회심곡(回心曲) 도입부 '인생의 길'이다.
사람들은 여인의 노래를 들으며 운다. "억조창생 만민 시주님네~"로 시작되는 '부모님 은혜' 대목에서 더 그렇다. 불효(不孝)를 뉘우치며 울고 눈 깜빡하면 지나갈 삶의 덧없음에 울며, 남은 자식들이 건너야 할 고해(苦海) 같은 인생 행로가 안쓰러워 운다.
회심곡은 서산대사가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려 충효신행 버리고 애욕망(愛欲網)에 걸려 멸망하지 말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 노래가 사백년 세월 넘어 지금 우리를 울리는 것은 고승의 법력인가, 한 소리꾼의 공력 때문인가.
▲ 사백년 전 우리 민중의 마음을 가라앉혔던 회심곡이 오늘날에 되살아났다. 서산대사가 지은 곡이 김영임의 목소리를 통해 환생하자 사람들은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생각하며 운다. / 라이브 엔터 제공
#명창의 탄생
김영임(金英姙·59)의 어릴 적 추억은 딱 한 가지다. 몸단장하고 거울 보고 춤추며 노래만 불렀다. 광희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랬다. 이유를 묻자 "한 가지 꿈에 빠져 지냈다"고 했다. 요즘 같으면 '스타' 될 허망(虛妄)에 감긴 한심한 청춘쯤 됐을 것이다.
여덟 살 때 중앙시장에서 장사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5남매의 막내인 그를 정지영이 운영하는 고전무용학원에 보냈다. 문주란, 이미자, 은방울자매에 빠져 지내느니 춤이라도 배우면 낫겠다 싶었을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거기서 그녀의 앞날이 단숨에 풀린다. 정지영의 선친 정득만 밑에서 춤에 이어 국악까지 배우게 된 것이다. 정득만은 친구 이창배에게도 김영임을 가르치도록 했다. 둘은 소문난 경기 명창(名唱)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3년 기회가 운명처럼 찾아왔다.
◇명창 세 명이 내 스승
경서(京西)민요는 서서 부르는 입창(立唱·남자)과 앉아 부르는 좌창(坐唱·여자)으로 나뉜다. 무형문화재 19호인 정득만·이창배와 57호 묵계월을 김영임은 30년가량 스승으로 모셨다. 한국 국악이 배출한 3대 천재 밑에서 그는 국악의 새 경지를 연다.
―깜짝 데뷔를 하게 된 겁니까.
"MBC-TV에 '내 강산 우리 노래'라는 국악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출연자 한 분이 갑자기 펑크를 냈어요. 엉겁결에 대타로 나간 게 기회가 됐지요. 자그마하면서도 인형같이 예쁘장한 처녀가 구성진 타령을 하는 게 당시로서도 신선한 충격이었나 봐요."
―그다음엔 '이춘풍전'에 출연했지요.
"조상현 선생님이 이춘풍 역을 맡았고 저는 주연 격인 기생 역을 맡았어요. 달밤에 머리 푼 채 하얀 속옷 차림으로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장안의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작곡가 고 박춘석(朴椿石) 선생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오더군요. 알고 보니 박 선생님도 그 장면을 보셨대요."
―유명 작곡가가 찾았으니 가슴이 설��겠습니다.
"두근두근했지요. '혹시 트로트 가수 시켜주려나' '하라면 해야지' 하며 별의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박 선생님께서 제게 회심곡을 부를 줄 아느냐고 물으셨어요.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아는 몇 대목만 불렀는데 '이야~' 하고 손뼉을 치시더군요. 그 자리에서 1년 반 전속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분이 레코드회사도 하셨거든요."
―트로트 가수를 하라는 말이 아니어서 실망했습니까.
"당시 그분 밑에는 이미자, 문주란, 패티김, 남진, 나훈아처럼 기라성 같은 가수가 즐비했어요. 그분은 머리가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국악을, 그것도 회심곡을 스무 살도 안 된 처녀에게 시킬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분이 이창배 선생님에게 목돈을 턱 내놓더니 이러시더군요. '영임이에게 회심곡을 가르쳐달라'고."
―그 레코드가 밀리언셀러가 됐지요.
"'대박'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였어요. 제가 박춘석 선생님의 머리가 비상하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어요. 회심곡을 다 배우자 박상규씨가 진행하는 '이 밤을 즐겁게'라는 프로그램에 출연시켰습니다. 토크쇼에서 머리 한쪽으로 묶은 생머리에 남색 치마, 갑사 저고리 입고 나가 창을 하니 난리가 났지요. 그뿐이 아니었어요."
―또 뭘 주문하던가요.
"박 선생님이 이번엔 '남들 안 하는 거 해보자'며 굿을 해보라는 겁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지연하 선생님에게서 한양 천신굿을 배웠죠. 음반도 냈고요. 지금도 제가 조상굿을 하면 객석이 울음바다가 됩니다. 특히 어머니의 혼(魂)이 들어와 자식과 대화하는 부분에서요. 제가 작두 탈 정도로 신이 들리진 않았지만 제법 굿을 합니다."
―그 후 국악계의 디바(Diva)가 됐습니다.
"당시 국악 프로그램에는 이상한 관행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안비취 선생님이 출연하시면 제자들이 수십 명 늘어서서 함께 창을 하는 것인데 전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소리에 자신이 있으면 독창(獨唱)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전 독창만 고집했어요. 그 때문에 화난 선배들이 출연 거부한 적도 있지만요."
―선생의 성공은 실력 때문입니까 미모 때문입니까.
"이창배 선생님께 체계적으로 배웠지요. 아침 9시부터 한 시간은 시조하며 목을 가다듬고 10시부터는 긴 소리로 경기 12잡가(雜歌)를, 11시부터는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배우는 식이었습니다. 수업이 12시면 끝나는데 전 귀가하지 않았어요. 박동진 선생님이 자주 놀러 와서 이 선생님과 바둑을 둘 때면 옆에서 그날 배운 것을 복습했습니다. 귀찮을 법도 한데 박 선생님은 꼭 '저놈 사람 되겠구먼' 하고 칭찬을 해주셨어요."
―방송 출연 많이 했으니 돈도 꽤 벌었겠습니다.
"남들은 환갑잔치 같은데 자주 나갔지만 전 그런 자리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습니다. 섭외도 아무것이나 승낙하지 않았고요. 돈을 벌기 위한 무대는 무교동 엠파이어 극장식 나이트클럽에 출연해본 게 전부입니다. 윤복희씨 같은 가수들 틈에서 국악인으론 유일하게 패키지 쇼를 했지요. 회당 100만원을 받았는데 지금으로 치면 1000만원쯤 될까요."
―젊은 처녀가 나이트클럽에 출연하는데 건달들이 놔두던가요.
"제가 그곳에 몇 년을 출연했지만 내부 통로를 몰라요. 뒷문으로 들어가 공연 끝나면 바로 뒷문으로 나왔으니까요."
◇경기 12잡가
적벽가·방물가·출인가·선유가·십장가·평양가·유산가·소춘향가·제비가·집장가·형장가·달거리가 경기 12잡가다. 한국을 대표하는 서울과 경기도 국악 달인이 되려면 완창에 꼬박 4시간이 걸리는 열두 곡을 연창(連唱)해야 한다. 가사가 틀려도 안 된다.
―국악이 체력 소모가 심하지요.
"판소리나 남도 가락을 국악의 간판으로 오해하시는데 국악의 중심은 경서민요이고 그중 대표적인 게 12잡가입니다. 제가 직접 장구 치며 완창(完唱)하는 데 꼭 4시간 걸려요. 나중엔 누가 일으켜주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가사도 길어 틈만 나면 외워야 합니다. 2005년에 완창하고 음반도 냈는데 그럴 때는 시작하기 전에 소변을 쥐어짜듯이 보고 들어가야 하죠."
―그런데 왜 '김영임=회심곡'으로 연상될까요.
"(책을 보여주며) 여기 수록된 것이 100곡이 넘습니다. 이런 것을 전부 관객 앞에서 부를 줄 알아야 진정으로 소리를 한다고 할 수 있지요. 흉내만 내서도 안 되고 진정으로 그 소리의 속을 파헤쳐야 합니다. 회심곡으로 유명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요."
―과거 명창들은 폭포 앞에서 득음(得音)하려다 목에서 피(血)가 나왔네, 인분(人糞)을 들이켰네 합니다만.
"요즘엔 그렇게 안 하지요. 무리하지 않는 게 최선인 걸 아니까요. 창 하는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집념입니다. 무대에서 쓰러지겠다는 각오, 그런 걸 저는 1989년 뉴욕 카네기홀 독창 때 느꼈어요."
―어떤 일이 있었길래요.
"출국 1주일 전에 돼지고기를 먹다 탈이 났어요. 온종일 토하고 설사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잤고요. 교포 세 분이 초청해 3000석이나 되는 카네기홀에 국내 국악인으론 처음 서는 건데 포기할 수도 없잖아요. 죽을 각오로 공연 이틀 전 뉴욕으로 갔어요. 마침 김영삼 대통령 시절 비서관을 지내다 워싱턴에 유학 와있던 정병국씨가 뉴욕으로 절 보러 왔다가 귀신 같은 몰골에 놀라 '형수님 안 되겠다'며 등에 올라타더군요."
―그분이 외간 여자 몸에는 왜 올라탔습니까.
"청와대 비서관들은 유사시에 대비해 지압법을 배운다고 하더군요. 한참을 주물렀는데도 가슴에 뭔가 얹힌 것 같은데 내려가질 않는 거예요. 나중에 들었는데 제 증세가 당시 유행했던 O-157균에 감염된 것과 같았어요. 그런 상태로 무대에 섰는데 예정보다 30분을 넘겨 세 시간 공연을 무사히 끝냈습니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식욕이 돌아오더군요."
―다른 국악인들과는 달리 라이브 무대를 마다하지 않으시죠.
"1994년부터 시작한 '소리 효(孝)대공연'이 올해로 18회째를 맞았습니다. 누적 관객만 100만명을 넘었고요. 표값이 보통 10만원이 넘는데 암표가 나돌 정도입니다. 국악을 사랑하는 분이 그만큼 많이 계시다는 증거죠. 공연 시간이 120분인데 전 수익보다 투자를 앞세워요. 600인치짜리 와이드 LED를 설치해 2, 3층 관객들도 편히 보실 수 있게 하고요. 국악과 드라마를 결합한 극(劇)도 하는데 거긴 탤런트 서우림·사미자씨도 출연합니다."
―1년에 대체 몇 회나 공연을 합니까.
"60번씩은 꼭 하지요. 지난 주말에도 부산 공연을 했어요. 그렇게 공연을 많이 했는데도 제가 겁이 많아 그런지 잠을 꼭 단원들과 함께 자요. 호텔에 넓은 방 잡아서."
―일종의 파격이랄까, 세종문화회관 독창,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처럼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걸었습니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달린 길을 간 건 그게 우리 소리를 알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런던 필하모닉과 협연한 것도 일종의 크로스오버(Cross over)인데 제가 시도한 것은 우리 국악이 서양 음악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예 연기인으로 변신한 적도 있지요.
"'맥(脈)'이라고 KBS에서 한 6부작 드라마였지요. 신구씨가 아버지로 나오고 저는 수양딸로 국악을 하는데 득음하기 위해 피를 토하는 장면이 그때 나왔습니다."
―그 탓에 주변에서 시샘을 많이 받았지요. 김영임이 하는 건 정통 국악이 아니라고.
"전 그런 분들께 되물어요. 그럼 정통 국악이 뭐냐고. 전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국악의 범주에서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몇 년 전 빅쇼(Big show)에서 이미자 선생님의 '모정'과 보니 타일러의 'It's a heartache'를 부른 게 유일했는데 그것도 팬 서비스 차원이었습니다. 지금도 '가요무대' 같은 프로그램에서 출연 요청이 많이 옵니다만 나가면 꼭 국악을 합니다."
▲ 한양천신굿을 하면서 관객과 손을 맞잡은 김영임 / 라이브 엔터 제공
◇궁정동의 그 여인
―김영삼 대통령 얘기가 나온 김에…, 역대 대통령을 한 번씩은 보셨겠지요.
"전두환 대통령 내외는 제 공연에 왔고 김영삼 대통령과는 열린음악회를 함께 했지요. 노무현 대통령은 전쟁 유공자들과 식사할 때 그분들이 '김영임을 불러달라'고 해 간 적이 있습니다. 국악을 아낀 분은 김대중 대통령과 박원순 서울시장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연예인 초청 오찬 때 뵌 적이 있고 돌아가시기 직전 박지원씨와 함께 제 공연을 보러 오셨을 정도입니다. 박 시장은 참여연대 활동할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요."
―기업인 중에도 관심을 갖는 분이 있었습니까.
"이병철 전 삼성회장이 유일하셨어요. 외국 바이어들이 오신 자리인데 용인으로 초청돼 두 차례 공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데뷔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못 봤나요.
"그분과는 이상한 인연밖에 없어요. 1979년 10월 26일 팔을 다쳐 붕대를 감았는데 그날 늦은 밤 장위동 제 집으로 기자 수십 명이 온 겁니다. 함께 있던 이상해씨가 놀라 다락방으로 숨었는데 기자들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다 알고 왔으니 사실대로 얘기하라'고 윽박지르더군요."
―뭘 다 알고 왔다는 겁니까?
"그날 저녁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궁정동 술자리에 심수봉과 함께 있었던 여자가 나라는 소문이 퍼졌다는 겁니다. 다친 팔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분도 계셨고요. '내일이면 다 밝혀질 일을 왜 감추겠느냐'고 억지로 설득해 돌려보냈는데 그 소동을 이상해씨는 다 듣고 있었어요."
―부군과 '괴상한 러브스토리'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방송은 그런 부분을 좋아해서, 내키진 않았지만 말한 건데. 이상해씨가 절 그렇게 연모했대요. 하루는 찾아와 할 얘기가 있다면서 대뜸 '결혼하자'는 겁니다. 전 그분이 미친 줄 알았어요. 이리저리 피하니 이번엔 코미디언 한무씨, 장고웅씨를 동원해 억지로 엮어놓더군요."
―이른바 '수상스키 사건'이죠.
"경기도의 한 호수로 가니 그분이 온갖 수상스키 묘기를 보이는 겁니다. 그 뒤 제가 잘못한 부분도 있어요. 한 신문 인터뷰 때 '취미가 뭐냐'고 묻길래 엉겁결에 '수상스키'라고 대답한 거죠. 기자분이 '김영임이 수상스키 타는 사진 나가면 대박'이라고 흥분해 졸라대더군요. 결국 이상해씨에게 수상스키를 배워 사진을 촬영해야 했지요. 그것만 배우고 관계를 끊으려 하긴 했지만."
―그런데 납치당했죠. 인천의 한 호텔로.
"무작정 택시를 잡아타고 갔는데 호텔이잖아요. 얼굴이 알려질 대로 알려졌는데 어쩌겠어요. 태연히 방으로 들어갔죠. 문을 잠그자마자 상의를 벗더니 절 끌어안으려 하더군요. 요리조리 피하니 화가 났던지 얼굴을 한 대 때리더군요."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인데.
"나중에 싹싹 빌더군요. 자기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아 그랬다고. 호텔 나와 그날 저녁에 방송에 출연했는데 퉁퉁 부은 얼굴을 보고 전부 놀라더군요. 다쳤다고 둘러댔습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결혼한 뒤에는 속 많이 썩였죠.
"제주도 신혼여행 첫날밤에 행방불명이 됐어요. 밤새 도박을 했다더군요. 전 막내로 귀여움만 받고 자랐지만 그분은 5남매의 맏이로 동생들 뒷바라지를 혼자 해야 했어요. 사귈 때와는 달리 무뚝뚝하기만 하고. 요즘은 안 그래요. 서로 의지하니까."
―나중엔 남편이 암 투병까지 했습니다.
"올해로 3년째인데 완치됐어요, 초기에 발견해서. 누군가 그래요. 저희 살아온 이야길 듣고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하지만 헤어질 생각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차피 바꿀 수도 없는 인생이라면 적응해야죠."
◇인간문화재를 향하여
김영임의 남은 목표는 인간문화재와,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꿈이 이뤄지는 날 그는 노인들을 불러 무료로 공연하고 음식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박원순 시장에게 부탁해보라고 했더니 "아는 사이일수록 더 어렵다"고 했다.
―알려지기론 남편만 암 투병한 줄 알았는데 실상은 다릅니다.
"제가 12년 전에 큰 병을 잇따라 얻었습니다. 처음엔 우울증을, 그다음에는 자궁을 다 들어내고 나중엔 갑상선암 치료까지 받았습니다."
―우울증은 왜?
"제 입으로 밝히긴 그렇지만 국악계의 암투(暗鬪)가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음해, 투서가 경쟁자끼리는 물론이고 사제(師弟) 간에 벌어질 때도 있어요. 인간문화재 지정을 둘러싸고는 더 그렇죠. 혹시 추적 기사 쓰실 일 있으면 오세요, 그때 다 말씀드릴 테니."
―어느 정도였길래 우울증까지….
"어느 날 갑자기 온몸의 에너지가 한꺼번에 빠져나간 느낌, 전 그게 우울증인지도 몰랐어요. 종합병원에 가보니 정신과로 가보래요. 약을 탔는데 '내가 이 나이에 벌써부터 이런 약을…' 하는 생각이 들어 먹지 않았어요."
―국악판이 무슨 동물의 왕국 같습니다. 먹고 먹히는.
"1년 만에 기적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번엔 심한 하혈(下血)이 시작됐습니다. 경북 영주 같은 곳에 공연 다녀오면 8시간이 걸리는데 손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죠. 자궁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잇따른 질환은 너무 무리한 탓도 있지 않았을까요.
"어느 날은 온몸에 열이 심하게 나더니 팔 한쪽이 끊어져나갈 듯이 아팠어요. 의사 선생님이 조직검사를 하자는데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갑상선암이라더군요. 수술은 어렵지 않은데 문제가 있었어요. 성대에 혹이 붙어있는데 잘못하면 소리를 못할 수도 있다고."
―남편의 암 투병은 알리면서 왜 정작 본인의 아픔은….
"주변에서 '김영임이 암 걸렸으니 금방 죽을 거 아니냐'고 수근댈 것 같아 참았습니다. 정신력이 없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원래 규정대로라면 묵계월 선생이 명예 무형문화재에서 물러났으니 그 자리를 잇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제가 묵계월 선생님 문하에서 28년을 지냈습니다. 전수 조교는 저 하나뿐이고요. 경기명창이 모두 세 분입니다. 이은주 선생님은 계시고 안비취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묵계월 선생님은 명예 보유자로 물러나셨으니 당연히 후임을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안 선생님 후임은 정했어요. 그런데 묵계월 선생님 이야기가 나오자 다른 분 제자들과 통합해 정하자고 하네요. 말이 안 되는데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그것도 경기 12잡가 가운데 세 곡씩 불러 뽑자는데 인간문화재가 '나는 가수다'는 아니잖아요. 말썽이 생기자 선정 작업이 중단되긴 했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 많았어요."
―정말 궁금한데 왜 그렇게 다른 분들이 김영임을 경계할까요.
"저보고 그래요. 너는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고 돈도 있고 명예도 있는데 그 밖에 뭘 더 탐내느냐고. 돈 있고 빌딩 가진 분들은 따로 있어요. 제가 이 지하에만 들어오면 숨이 막혀요. 여기서 춤이나 제대로 추겠어요?"
명색만 '소리 전수원'인 너덧 평 남짓한 지하실의 4시간 대화가 끝났다. 우리는 둘 다 지쳤다. 함께 간 고깃집에서 그는 씨름 선수나 먹을만한 어마어마한 양을 해치우는 것이었다. 작은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의 비밀을 목격한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