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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가 아닌 보다 나은 미래로의 배려를…
- 영화 <카사블랑카>
나는 이런 남자가 되고 싶었다. 과묵하고 냉철하며 일에는 철저히 완벽을 기하는,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정의감과 따스한 마음씨를 가진 남자, 그런 멋진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영화에서 만났다. <카사블랑카>에서의 릭!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쯤으로 기억된다. 이른바 ‘2본 동시상영’을 하는 허름한 영화관에서 내내 서서 봤는데도 완전히 영화에 몰입해서 내가 화면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물론 일자로 나오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지적이면서도 순수해 보이는 미모도 내 가슴을 뛰게 했지만, 주인공 릭의 역할을 맡은 험프리 보가트는 ‘남자의 표상’이 바로 이런 분이 아닌가 싶게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위인전에서 읽은 위인들은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어서 존경스럽긴 하지만 왠지 따라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 영화에서의 릭은 보는 순간 바로 나의 롤 모델이 되었다.
내가 되고 싶은 남자가 거기 있었으니 나는 그를 닮도록 따라 하기만 하면 됐다. 세상의 고통을 혼자 짊어
진 듯한 고뇌의 표정 속에서도 자신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않고, 일상에서도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업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그는 그 존재만으로도 나의 멘토였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는 약간 찡그리며 짐짓 심각한 듯한 표정을 지어 왔으며, 그의 목소리를 본떠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나 “어제? 그런 옛날 일은 잊었어. 오늘 밤? 그런 미래는 몰라.” 같은 대사를 읊어 보기도 하고, 담배를 피울 수는 없으니까 연필 토막을 입에 비스듬히 물고 험프리 보가트 특유의 인상을 쓰며 연기를 내뿜는 흉내를 내기도 했으며, 아버지 서재에 있는 위스키를 몰래 따라와 내 방에서 아픈 과거를 추억하는 척하며 조금씩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빨리 커서 릭과 같은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깃 올린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미간을 찡그려 보기를 학수고대하였다. 물론 그때는 아직 사랑이란 게 뭔지 잘 모를 어린 나이여서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은 없이 그저 험프리 보가트의 외면만 따라 한 것이기에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한 모방일 뿐이다.
그 후로도 나는 이 영화를 꽤 여러 번 보았다. 볼 때마다 감탄했고, 또 새롭게 더 배우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나이가 좀 더 들고 남녀 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되면서부터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험프리 보가트가 아무리 멋있어도 나는 <카사블랑카>의 릭처럼 바보짓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여인이 아무런 이유 없이 곁을 떠났다. 그 뒤 모든 것에 환멸을 느껴 세상을 향해 복수하듯이 살아온 한 남자, 그 남자에게 배신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여인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그 여인은 자기가 그 남자를 버린 것이 아니라고 호소하고 그 남자 역시 그 여인이 아직도 자기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다시 타오른 사랑,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녀를 그냥 보내버릴 수가 있느냐 말이다. 나는 도저히 그것은 따라 할 수가 없었고, 또 따라 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사이에 릭을 모방하는 일은 거기서 그치게 되고 말았다.
최근에 리마스터링이 된 필름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또 감탄했고 또 새로운 것을 배웠다. 이제 내가 나이가 들어 사랑도 해보았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알게 돼서 그런지 내가 릭의 입장에 선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릭이 취한 선택이 이해는 된다는 것이지 내가 꼭 그렇게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 영화는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꼽히기도 하고, ‘내 인생의 영화’로 삼는 올드 팬들이 많다. 세계 최초로 별점 평가 제도를 도입한 영화평론가 레너드 말틴도 이 영화를 ‘역대 최고의 할리우드 영화’로 치켜세웠고, 영화 평론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로저 이버트는 <시민 케인>이 일반적으로 ‘더 멋진’ 영화로 여겨지지만 <카사블랑카>는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영화가 이토록 오래 사랑을 받고 명작으로 기억되는 것은 감독 마이클 커티즈의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예술혼이 온전히 농축돼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이 영화 제작 과정을 그린 <카사블랑카의 남자(CURTIZ)>란 영화가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헝가리에서 이주한 유대인인 그는 영화 만드는 재능이 인정되어 많은 영화를 감독했고 그 중 수준작은 많이 있었으나 이거다 하고 딱히 내세울 대표작은 없었는데, 드디어 이 영화로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쥐게 된다.
흑백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깊은 호소력, 어느 하나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듯한 대사, 메시지를 거의 완벽하게 전달하는 연기자들의 표정과 제스처, 잘 맞아 떨어지는 음악 등 정말 이 영화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드니 폴락 감독은 로버트 레드포드를 앞세워 현대판 <카사블랑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하바나>를 만들었으며, 우디 앨런이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은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Play it again, Sam)>은 <카사블랑카>를 패러디한 블랙 코미디이고, <얼라이드>의 로버트 저메키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롭 라이너, <테넷>의 크리스토퍼 놀란 등 많은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보내고 있으며, <라라랜드>,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등 여러 영화에서 <카사블랑카>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럼 이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자(일부 디테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비교적 자세히 썼는데, 스포일러가 걱정이 되는 분은 영화부터 보시기 바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당시 아프리카 모로코의 해안도시 카사블랑카, 독일에 점령당한 유럽의 난민들은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가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든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가야만 하는데, 그리로 가기 위해서는 마르세유에서 지중해와 오랑을 거쳐 일단 프랑스령인 이곳 카사블랑카에 와서 어떻게 해서든지 출국비자(통칭 ‘통행증’)를 얻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큰돈과 권력에 기대지 않고는 통행증을 구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많은 유럽인들이 기약 없이 그냥 카사블랑카에 머물게 된다.
미국인인 리처드(릭) 블레인(험프리 보가트)은 이러한 난민들을 상대로 카지노를 겸한 클럽 ‘릭의 카페 아메리카나(Rick's Café Américain)’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매우 냉소적이고 남의 일에 간섭하길 싫어하며 정치적으로 중립이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를 지원한 바 있고 스페인 내전 때도 파시스트들에 맞서서 활동한 전력이 있다. 그러기에 카사블랑카를 통치하는 프랑스 비시 정부로서는 그를 문제인물로 분류할 수밖에 없는데, 처세에 능숙한 릭은 카사블랑카의 치안을 총괄하는 르노 경찰국장(클로드 레인즈)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어느 날 검문・검색이 강화되는 등 카사블랑카에 긴장감이 고조된다. 오랑에서 카사블랑카로 향하는 기차에서 문서를 운반하던 독일군 병사 2명이 살해당하고 중요문서(통행증)가 사라졌기 때문이다(통행증을 독일 병사가 운반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출국비자를 받으려면 독일군의 허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제3제국의 슈트라서 소령(콘라트 파이트)이 카사블랑카로 급파되고, 르노 경찰국장은 슈트라서에게 범인을 잡아 인도할 것을 약속한다.
릭의 카페 단골손님인 건달 우가트가 찾아와 릭에게 통행증 두 장을 보관해 달라고 부탁한다. 릭은 우가트가 독일군 병사를 죽이고 이 통행증을 가로채어 비싼 값에 팔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 날 밤 카페 와 있던 르노는 릭에게 슈트라서가 이곳에 온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수용소를 탈출한 반 나치 인사인 체코 레지스탕스의 리더 빅터 라즐로를 잡기 위한 것이라고 귀띔을 해준다. 잠시 후 슈트라서가 릭의 클럽을 찾아오는데, 르노는 그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부하 경찰을 시켜 우가트를 체포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독일에 우호적임을 보인다. 르노가 슈트라서에게 릭을 소개하는데, 슈트라서는 이미 릭의 신상을 다 파악하고 있음을 말하고 릭이 문제의 통행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아 이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릭이 어색한 그 자리를 뜬 뒤 문제의 빅터 라즐로(폴 헌레이드)와 그의 부인 일자 (잉그리드 버그만)가 릭의 카페로 들어온다. 우가트와 이곳에서 만나 통행증을 받기로 약속이 돼 있었던 것이다. 둘이 자리를 잡은 뒤 르노가 그리로 와 인사를 하고 뒤이어 슈트라서도 와서 라즐로에게 내일 10시에 경찰로 출두하라고 통보한다. 여자 가수의 애잔한 노래가 흐르는데 라즐로는 우가트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실망한다.
한편 카페의 분위기와 르노의 말에서 뭔가 릭의 느낌을 받은 일자는 파리에서부터의 구면인 샘이 피아노를 치는 걸 보고는 ‘그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Play it, Sam!). 샘이 피아노를 치면서 ‘세월이 가듯이(As time goes by)’를 부르는 것을 듣고는 릭이 나타나 샘에게 그 곡은 다시 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고 혼내다가 일자와 마주치게 된다. 일자는 릭에게 남편 라즐로를 소개한 후 통금 시간이 되어 둘은 카페에서 나간다.
일자를 다시 만난 릭은 마음에 심한 동요를 느낀다. 일자는 바로 릭이 파리에 머무를 때의 연인이었다. 일자는 정치범으로 끌려간 남편 라즐로가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소식에 몹시 상심해 있던 차에 파리에서 릭을 만나 많은 위로를 받고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릭은 반파시스트 활동에 관여하고 있었고 독일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는데, 파리가 독일군에게 함락될 것을 걱정해 일자와 함께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로 도망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일자는 약속 장소인 기차역에 끝내 나타나지 않고 함께 갈 수 없다는 쪽지 편지(“리처드, 당신과 함께 갈 수도, 다시는 만날 수도 없어요. 이유는 묻지 말고….”)만을 전해주어 릭은 혼자서 기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가슴 아픈 과거의 회상에 잠겨 괴로워하면서 안 마시던 술을 혼자 마시는 릭에게 샘이 다가와 옆에서 피아노를 쳐주는데 그에게 ‘세월이 가듯이’를 연주해 달라고 한다. 샘이 못 치겠다고 하자 “그 여자가 견디면 나도 견뎌!”라고 재차 독촉한다. 샘의 연주가 끝나가고 릭이 다시 위스키를 따르는데 일자가 혼자 카페로 찾아온다.
일자가 파리에서 그와 동행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려 하지만, 릭은 “리처드, 어디든 함께할게요.”란 일자의 말이 아직도 들린다면서 또 무슨 거짓말을 하려고 하느냐는 식으로 얼음처럼 냉랭하게 대한다. 그녀는 울며 카페를 떠난다. 릭은 더 괴로워한다.
다음날 경찰에 출두한 라즐로는 유가트가 죽었음을 알게 되고, 슈트라서는 유럽의 반 나치 지하조직에 대해 정보를 주면 통행증을 발급해주겠다고 제의한다. 물론 라즐로는 단호히 거절한다. 경찰을 나선 라즐로는 통행증을 구하기 위해 암거래 시장의 큰손인 페라리 씨를 찾아 ‘파란 앵무새’란 업소로 간다. 페라리를 만나 업무를 보고 나오던 릭이 그 앞에서 일자를 보고는 지난번의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하려 하지만 이제는 일자가 당신은 이미 ‘파리의 릭’이 아니라며 차갑기만 하다.
한편 도움을 요청하는 라즐로 부부에게 페라리는 라즐로가 카사블랑카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일자 혼자라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라즐로는 일자에게 우선 혼자 먼저 빠져나가라고 하지만 일자는 꼭 둘이 함께 가야 한다며 완강히 거절한다. 페라리는 우가트가 잡혀갈 때 통행증은 갖고 있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독일군 병사에게서 가로챈 통행증은 릭에게 있을 거라고 귀띔해준다. 이제 이 부부에게 남은 선택지는 오로지 릭이 가지고 있는 2장의 통행증뿐이다.
그날 밤 라즐로와 일자는 릭의 카페에 다시 간다. 라즐로는 릭의 사무실로 올라가 상당한 금액을 제시하며 통행증을 구해 달라고 하지만 릭은 당신 부인 때문에 통행증은 절대 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라즐로와 릭이 사무실에서 나오는데 아래층 홀 한쪽에서 슈트라서와 독일 군인들이 흥겨워하며 독일 노래(‘라인강을 수비하라’)를 부르는 것이 들리자 라즐로는 이에 대항하여 카페 악단에게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고 본인이 선창한다. 카페에 있는 독일 군인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모두 숙연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크게 따라 불러 독일 노래 소리를 제압하고(이때 그렇게 하는 라즐로에게 보내는 일자의 존경의 눈길이 인상적이다), 이에 화가 난 슈트라서는 라즐로의 존재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며 르노에게 이 카페 문을 닫게 하도록 조치를 명한다.
호텔로 돌아온 라즐로는 릭이 통행증을 못 넘겨주는 이유는 “당신 부인에게 물어보라.”고 한 말에 불쾌함을 표하고, 일자가 말리는데도 겁도 없이 지하 레지스탕스 모임에 참가하러 나간다. 그 틈에 일자는 릭의 숙소로 몰래 숨어든다. 일자는 남편 라즐로가 조국을 되찾기 위해 계속 싸울 수 있도록 통행증을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릭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어떤 말이라도 하겠지만 절대 안 된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일자는 한때는 릭 당신도 같은 걸 위해 싸우지 않았냐며 한 여자에게 버림받고 온 세상에 복수하는 자기연민에 빠졌냐고 대든다. 그래도 릭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일자는 그에게 권총을 겨눈다. 하지만 이미 죽을 생각을 한 사람처럼 릭이 “어서 쏴. 나도 그 편이 좋아.”라고 하자 일자는 곧 무너지고 만다. 일자는 릭에게 왜 그때 역에 나가지 못했는지를 설명한다. 역으로 막 떠나려 할 때 남편이 살아있고 자기 때문에 파리 근교에 숨어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에 차마 그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고. 그리고 너무 어릴 때 라즐로를 만나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는데 그가 죽었다고 알려진 후 릭을 만나고 나서야 그건 존경일 뿐이지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릭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됐고, 그리고 지금도 릭을 사랑한다고….
이때쯤 레지스탕스 모임이 적발되어 급히 피신한 라즐로는 문 닫은 릭의 카페로 숨어들어온다. 릭은 라즐로의 다친 상처를 보며 이렇게 위험한데 그만큼 싸울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 라즐로는 자기에겐 싸우는 것이 숨쉬는 것과 같아서 멈추면 죽는다면서, 릭에게 당신은 스스로에게서 도망치려 하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라즐로는 릭에게 자신의 아내 일자를 데리고 카사블랑카를 떠나달라고 간청한다. 아내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부탁이란다. 이때 경찰이 카페로 들어와 라즐로를 체포해 간다.
이제 릭은 일자와 함께 카사블랑카를 떠날 수 있게 된 셈이다. 다음날 르노를 찾아간 릭은 자기가 일자와 함께 여기를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라즐로의 이번 건은 벌금 정도밖에 안 되는 경미한 것인데, 슈트라서도 좋아하게 라즐로에게 더 큰 죄를 씌워 그를 수용소로 다시 보낼 수 있도록 돕겠다고 르노를 꼬드긴다. 그러고는 오늘 밤 비행기 뜨기 30분 전 자기 카페에 와서 통행증을 가지러 오는 라즐로를 체포하라고 한다. 르노는 “이 카사블랑카에서 나보다 더 양심 없는 건 자네야.”라고 말하며 그 제의에 응한다.
릭은 카페를 탐내던 페라리에게 팔아넘기고 인수한 직원들에 대한 처우 부탁도 해 둔다. 일단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라즐로는 그날 밤 일자와 함께 릭의 카페로 온다. 릭이 준비해 둔 통행증을 라즐로에게 넘기는 바로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르노가 나타나 라즐로를 독일 병사 살해의 공범으로 체포하려고 한다. 허나 릭이 이미 르노에게 총을 겨누고 있어 르노는 할 수 없이 릭이 시키는 대로 공항에 전화하여 리스본 행 비행기에 통행증을 가진 승객 2명을 추가로 탑승시킬 것이라고 연락한다. 그런데 이 전화는 슈트라서에게도 연결된 것이었다.
공항에 먼저 도착한 네 사람. 릭은 르노에게 통행증 2개를 건네주며 라즐로 부부의 이름을 기입하라고 한 후 일자와 작별을 한다. 일자는 “나는… 나는…” 하면서 안타까워하는데 릭은 “당신이 빅터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 당신은 그의 일부고, 그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이야.”라고 말하며 빨리 가라고 한다. 일자가 “그럼, 우리는….”라고 하자 릭은 “우리에겐 언제나 파리가 있잖아.”라고 대답하고 일자를 떠나보낸다.
리스본 행 비행기가 떠나려고 할 때 차로 급히 쫓아온 슈트라서가 르노에게 전화 내용이 무슨 뜻이냐고 묻고 르노는 라즐로와 일자가 비행기에 탔다고 설명한다. 슈트라서가 관제탑에 전화하여 비행기 출발을 막으려 하자 릭은 슈트라서를 향해 권총을 쏜다. 뒤따라 그곳으로 온 경찰들에게 르노는 슈트라서가 총에 맞았으니 용의자를 빨리 찾으라고 지시하여 옆에 있던 릭을 곤경에서 빠져나가게 한다.
일자와 라즐로가 탄 비행기는 리스본으로 출발하고 릭과 르노는 함께 걸으며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데, 그 뒷모습을 배경으로 “이게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인 듯싶군.”이라는 릭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영화는 끝난다.
줄거리에서 보다시피 이 영화는 사랑했던 여인이 떠나가 버린 뒤 모든 것에 환멸을 느껴 세상일을 외면한 채 냉혹하기까지 했던 한 남자가 결국은 사랑의 힘으로 얼어붙었던 내면의 인간미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흔하디흔한 스토리의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헝가리 출신인 마이클 커티즈 감독은 미국 정부 요원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정부 측과 이에 동조하는 제작사 측에서는 이 영화를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유럽에 참전하도록 독려하는 이른바 ‘프로파간다 영화’로 만들기를 강력히 원했고, 철저한 영화 장인(匠人)인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작가정신’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영화 마무리 직전까지도 주연 배우인 험프리 보가트나 잉그리드 버그만도 스토리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른 채 촬영에 임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커티즈 감독은 일자를 라즐로와 함께 비행기에 태워 떠나보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아무튼 커티즈 감독은 이 영화를 프로파간다 영화로 만들지는 않고 끝까지 영화인의 혼을 굽히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어느 선전영화보다 더 훌륭한 정책 홍보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즉, 릭이 경영하는 카페 이름에서 보듯이 릭은 미국을 상징하는데, 릭이 세상일에 관심 없이 ‘나는 남을 위해서 목숨을 걸지 않는다’고 남의 불행을 모른 체하는 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 유럽이 독일 지배하에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음을 빗댄 것으로 본다. 그런데 후에 릭이 일자의 진실된 사랑을 확인한 후 라즐로를 구출하고 그의 곁에 꼭 있어야 할 일자도 함께 보내는 것은 미국이 자신이 받을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의를 위해 나섬을 의미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참전 독려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다(앞에 언급한 <카사블랑카의 남자>를 보면, 마이클 커티즈의 가족사와 전시 상황 속에서 영화감독으로서 많은 통제를 받아야 했던 환경 등이 영화 <카사블랑카>의 내용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제작 의도가 어떠하든 일단 완성된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 할 것인데, 지금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모병을 위한 선전영화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결말이 또 다른 선택지인 빅터 라즐로를 카사블랑카에 남겨둔 채 릭과 일자가 함께 그곳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면, 이 영화가 영화사상 가장 낭만적인 작품으로 기억되거나 지금도 어느 영화관에선가 계속 상영될 정도로 생명력이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고 또 볼 때마다 그 느낌이 달라지는데, 그것은 바로 인생과 사랑을 바라보는 내 시각의 변화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처음 보았을 때는 물론이고 한창 젊었을 때는 그저 릭이 멋있어 보이고 해서 험프리 보카트의 겉멋만 흉내를 내는 정도였는데, 그 뒤 몇 번 더 보고 내 나이가 이 영화에서의 릭의 나이인 서른일곱쯤 되었을 때에는 본격적으로 사랑과 소유의 문제에 대하여 깊은 사유를 하게 되었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한 사람이 그 누구도 주지 못하는 커다란 기쁨을 나에게 주고 그래서 그 사람을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됐다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렇다. 한 사람을 온전히 독차지하고 싶은 생각은 사랑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과의 좋은 관계(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를 다른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오래 전 일인데 소설을 쓰는 한 친구가 나에게 구상 중인 자기 작품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들려준 일이 있다. 화가인 남자 주인공이 소설가인 아내가 작품을 쓸 동인(動因)이 메말라 깊은 침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같은 예술을 하는 입장에서 너무 안타깝고 또 사랑하는 아내가 작품을 쓰지 못해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고심 끝에 몰래 공작을 하여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도록 만든다는 스토리였다. 그 결과 그 아내는 다시 창작열이 타올라 멋진 소설을 쓰게 되어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되고, 아내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 남자주인공 역시 오랫동안 꿈꾸던 훌륭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이러한 스토리가 어떠냐고 나에게 물었는데, 나는 그만 “자네가 사랑하는 와이프를 다른 친구와 바람피우게 할 수 있다면 쓰게나.”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말았다. 물론 내가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 잘못이긴 한데, 그 이후 그 친구가 내게 해준 스토리대로 소설을 썼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내가 <카사블랑카>를 여러 번 보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릭이 일자를 과연 사랑한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자기를 배신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자기 역시 옛날처럼 연정이 다시 타올랐음에도 일자를 라즐로와 함께 떠나보낼 수가 있느냐 말이다. 물론 같은 ‘사랑’이라 하더라도 인류애 같은 보편적인 사랑이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나눠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이건 남녀 간의 사랑이지 않은가? 온전히 혼자 차지하고 싶은 생각, 그것을 소유욕이라고 탓해도 할 수 없다. 그러한 마음이 없는 남녀 간의 사랑이 과연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생텍쥐페리는 “사랑을 소유욕과 착각하지 마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말인 소유욕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생텍쥐페리 잠언집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 참으로 그럴 듯한 내용이다. 소유욕은 불필요한 갈등과 다툼의 불씨가 되고 온갖 괴로움의 시작임은 맞다. 무소유의 상태에 이르러야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소유욕을 탓할 수 있는 것은 재물에 대한 것이 아닌가(물론 명예나 사회적 지위를 탐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사랑이다. 남녀 간의 사랑 말이다. 소유욕 없는 사랑, 그게 어떻게 진짜 사랑일 수 있을까? 우리가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랑, 남녀 간의 사랑은 그 어느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열락(悅樂)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사랑은 어차피 소유욕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온 나는 생텍쥐페리의 글이라는 것에도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아파하고 절망하는 게 ‘사랑’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가장한 소유욕’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아파하고 절망하기가 그렇게 두렵고 싫다면 사랑을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사랑에는 아픔과 절망이 뒤따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더 큰,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사랑이 주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재물처럼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상대를 가두고 꼼짝 못하게 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완전한 인격체로서의 존중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서로에게 믿음의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고, 그래서 무한대의 창공을 함께 자유롭게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관계란 상대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자라나는 것이라는 같은 생텍쥐페리의 말도 맞다. 그러나 역시 사랑, 남녀 간의 사랑은 다른 사람과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최근에 <카사블랑카>를 다시 보면서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내가 이제 노년에 들어섰고 내 삶을 돌이켜보면서 내가 살아온 길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나를 반복하여 되새기고 한 결과로 얻어진 전에 없던 깨달음이 아닌가 한다.
수용소를 탈출한 전설적인 레지스탕스 지도자 빅터 라즐로가 이곳 카사블랑카로 온다는 첩보를 들은 르노 경찰국장은 경고 차 릭의 카페로 온다. 릭이 르노에게 묻는다. “왜 내가 라즐로의 탈출을 도울 거라고 생각했나?” 그러자 르노는 “그 냉소적인 껍질 속의 자넨, 타고난 감상주의자니까.”라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한다. 감상주의자… 낭만적인 센티멘털리스트…. 나치가 조종하는 비시 괴뢰정부의 공직자이긴 하지만 조국 프랑스에 대해 별 충성심이 없고 적당히 부패한 눈치 빠른 르노는 냉담해 보이는 릭이 내면적으로는 정의감 강하고 따뜻한 심성을 가졌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불가리아 출신의 젊은 부인이 릭을 찾아와 매춘을 해서라도 ‘통행증’ 마련 자금을 구하겠다는 딱한 사정을 얘기하자 그는 카지노 쪽으로 가서 그 여자의 남편이 충분한 돈을 따도록 만들어준다.
그 후 라즐로가 레지탕스 모임에 참석했다가 쫓겨 릭의 카페로 피신해 왔을 때 릭이 라즐로에게 묻는다. 당신이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과연 이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이에 라즐로는 이렇게 싸우는 것이 자기에겐 숨쉬는 것과 같아서 멈추면 죽는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자기는 통행증이 필요 없으니 릭 당신이 아내 일자를 안전하게 멀리 데리고 가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이 매우 의미가 큰데 그 동안 <카사블랑카>를 여러 번 보았으면서도 릭이 심경 변화를 일으키게 된 중요한 대목을 놓쳤던 것이다. 릭은 그때서야 라즐로가 일자를 빼앗아간(또는 되찾아간) 단순한 연적이 아니라 그는 조국 해방이라는 대의(大義)를 품고 있는 존경스러운 의인(義人)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라즐로가 일자를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라즐로는 단순히 일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릭과 경쟁하는 남자가 아니고 그에게는 꼭 이루어야만 하는 대업(大業)이 있다.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데에는 일자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 더구나 릭 자신만큼이나 라즐로도 일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여기서 ‘진정한 남자’가 택할 길은 무엇인가? 답이 나온다. 남자는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도 있으나, 또한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랑까지도 나눌 수 있는, 아니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가 되니까 갑자기 릭의 선택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게 되고, 또한 릭이 존경스러워져 다시 험프리 보가트를 흉내내고 싶어진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기보다는 해방시켜주는 것이라는데 릭은 그 사랑을 실현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소유하려는 그 마음으로 인해 결코 소유하지 못하는데, 릭은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기에 더 큰 사랑을 얻었다. 소유욕 없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더 크고, 더 깊은 사랑’일 것인데, 릭은 그 사랑을 이룩한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고통이나 상처를 잊기 위해 내면적으로 무감각해지거나 평화롭게 살기 위해 가슴속의 충동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는 경멸한다.”고 했다. 일자를 떠나보내면서 릭은 ‘더 큰 사랑’을 실현하고 생텍쥐페리의 경멸에서도 벗어나게 됐다. 어느 작가는 ‘작은 사랑’에서 벗어나 ‘더 큰 사랑’을 이룩하면 마치 갓 풀려난 죄수가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실 때처럼 그런 기쁨과 환희를 느끼게 된다고 했다. <카사블랑카>를 그렇게 여러 번 보고서도 이제서야 겨우 ‘더 큰 사랑’을 깨닫고 이해하였으니 나는 정말로 ‘사랑치(痴)’인 모양이다.
최근 이 영화를 함께 보고 나서 아내가 “험프리 보가트는 보고 또 봐도 참 멋있죠?”라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음…, 그렇긴 하지.” 시큰둥 건성으로 대답하자 아내가 이어서 열심히 설명해준다. “마지막 선택이 너무나 절묘하고 감동적이었어요. 모든 생각의 중심에 일자를 두고, 자기가 아닌 일자에게 어떤 선택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고민했잖아요. 그것이 비록 자기가 함께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일자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말예요.” 그러면서 아내는 덧붙인다. “솔로몬의 명판결에 나오는 어머니처럼 자기 자식을 포기함으로써 그 자식을 살리는 그런 사랑이 진짜 사랑이 아니겠어요? 역시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주는 것인 것 같아요. 정말 험프리 보가트는 멋진 남자예요.”라고.
아, 나는 이 영화에서의 릭의 경지에 이르기는커녕 사랑한다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행복해지도록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주는 것이라는 걸 아내에게서 배워야 할 모양이다. 그러나 역시 나는 겁이 난다.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아내가 나보고 자기를 그냥 지켜보라고나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
* 사족: <카사블랑카>의 뒷이야기들
ㅇ 영화 <카사블랑카>의 백미는 역시 마지막 안개 자욱한 공항에서의 이별 장면일 것이다. 흑백필름 특유의 클래식한 감성을 자극하는 유려한 촬영기술이 빚어낸 라스트신으로 말미암아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불멸의 고전이 되었다. 그런데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는 안개라곤 절대 끼는 법이 없다고 한다. 당시는 전시여서 폭격 위험으로 할리우드에 야외촬영 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커티스 감독은 마분지로 공항 세트를 만들어야 했고, 그 조잡한 꼴을 숨기기기 위해 안개제조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ㅇ <카사블랑카>는 ‘대타’로 성공한 예로 꼽힌다. 감독부터가 대타였다. 원래 윌리엄 와일러에게 연출을 맡기려고 했는데 그가 군 입대를 결정하는 바람에 워너 브러더스사로서는 내키지는 않지만 까탈스럽기로 이름난 마이클 커티즈를 대타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ㅇ 여주인공 역도 원래 프랑스의 미셸 모르강이 캐스팅됐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가 출연료를 5만5천 달러나 요구해 골머리를 앓던 차에 스웨덴 출신의 잉그리드 버그먼이 수줍게 찾아왔다고 한다. 버그만은 겸손하게도 출연료 2만5천 달러로 만족해하기에 출연을 확정짓고, 여주인공 이름도 북유럽 식으로 ‘일자 룬트’로 바꿨다고 한다. 그때 잉그리드 버그먼은 헤밍웨이 원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여주인공 캐스팅에서 탈락됐었는데, <카사블랑카>를 찍고 나서는 다시 발탁되어 머리 깎인 그 가련한 여인 마리아 역을 맡게 되었다.
ㅇ 남주인공 역에는 로널드 레이건이 매우 탐을 냈었는데 결국 험프리 보가트로 정해졌다. 레이건은 Casablanca(casa=house, blanca=white)의 주인공은 못됐지만 나중에 대통령이 되어 결국 ‘하얀 집’인 White House(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
ㅇ 릭 역을 맡은 험프리 보가트는 AFI(미국영화연구소)에서 가장 위대한 남배우 1위로 선정될 만큼 큰 인기를 얻고 영화사에 인상적인 업적을 남긴 배우다. 그는 <카사블랑카> 이전에는 트렌치코트와 중절모를 쓴 탐정 캐릭터로 싸늘한 눈빛의 냉혹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는데, 이 영화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깨끗이 떠나보냄으로써 뭇 여성의 가슴을 울리는 로맨티스트로서의 명성도 얻게 됐다. 험프리 보가트 하면 담배가 연상될 만큼 그가 출연하는 영화에서 시니컬한 인상을 쓰며 멋지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으로 흡연의 아이콘이었다. 실제로도 엄청난 골초였기에 결국 후두암으로 아깝게 5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ㅇ 릭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가끔 ‘그 노래’를 무드 나게 불러주는 샘은 ‘엘라’로 불릴 뻔했다. 원래 재즈의 여왕 엘라 피츠제럴드가 내정됐었는데 빡빡한 스케줄로 출연을 포기하는 바람에 피아노 건반도 두드릴 줄 모르는 드러머 둘리 윌슨이 ‘그 노래’를 부르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부르는 그 노래도 립싱크라고 한다.
ㅇ 이 영화에는 축복 같은 행운의 반전이 몇 가지 일어났다. 촬영 후반 작업에 들어가는 시점에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로 진격, 곧바로 카사블랑카를 점령했다. 이 영화 제목이 바로 ‘카사블랑카’여서 다른 제작사들이 통탄해했다는데, 이 우연의 일치에 고무된 워너 브러더스사의 제작 담당자 핼 월리스는 연합군의 카사블랑카 점령 장면을 새로 끼워넣자고까지 했다. 물론 고집불통인 커티스 감독이 이를 단연코 거절했고, 그 덕택에 3류 전쟁영화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던 <카사블랑카>는 불후의 명작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또 이 영화가 개봉된 첫 주인 1943년 1월, 고맙게도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자유 프랑스의 샤를 드골 장군 등이 바로 카사블랑카에서 만나(제3차 연합국 전쟁지도회의) 연합국 측 공동작전을 토의함으로써 <카사블랑카>의 행운은 절정에 달한다.
ㅇ 이 영화에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멋진 대사가 나오는데, 정말로 별빛처럼 반짝이는 잉그리드 버그먼 눈동자와 잘 맞아 떨어진다. AFI에서 뽑은 영화 100대 명대사 중 5위에 꼽히기도 한 이 대사는 원래 “Here's looking at you, kid.”인 것을 이렇게 멋지게 의역한 것이다. 아쉽게도 순수 창작 번역이 아니고 일본어 자막인 ‘君の瞳に乾杯!’를 그대로 따온 중역이라는 논의도 있다.
이 영화에서 “Here's looking at you, kid.”라는 대사를 릭이 세 번 하는데 그때그때 맥락이 다르다. 나로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일자에게 언젠가는 당신도 나를 이해할 거라고 설득하며 눈물 글썽이는 일자의 턱을 살짝 들고는 “자, 이렇게 지켜보고 있잖아, 귀염둥이.”라고 말하며 어서 가라고 하는 장면이 가장 잊히지 않는다. 원래는 “Here's looking at you, kid.”가 아니라 다른 것(“Here‘s good luck to you, kid.”)이었는데 험프리 보가트의 애드리브로 탄생한 대사라고 한다.
ㅇ 언젠가 TV에서 컬러를 입힌 <카사블랑카>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그건 영 아니었다. 역시 오리지널의 흑백만이 풍기는 중후한 깊이는 채색될 수 없는 것이고, 컬러판에서는 일자(잉그리드 버그만)의 눈동자가 건배를 할 만큼 순수하고 빛나 보이지도 않았다.
ㅇ 2000년대 중반에 마돈나가 자기에게 일자 역을 맡겨준다면 그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대겠다고 제의했지만 ‘그것은 <카사블랑카>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라는 이유로 모든 스튜디오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로써 막 나가는 듯한 헐리우드가 이 영화에 대한 경의만은 제대로 표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ㅇ 이 밖에도 이 영화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많이 있다.
잉그리드 버그먼이 175cm의 큰 키여서 거기에 맞추기 위해 173cm인 험프리 보가트가 굽 높은 키높이구두를 신어야만 했고, 보가트와 버그먼 두 주연 배우가 너무 호흡이 잘 맞아 당시 보가트의 부인이었던 마요 메소트가 크게 걱정하며 계속 촬영장에 나와 지켜보는 바람에 두 사람은 점심도 같이 먹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슈트라서 소령 역의 콘라트 파이트를 비롯한 독일군으로 나오는 배우들은 독일 출신이기는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부분 독일을 탈출한 유대인이라고 한다. 콘라트 파이트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웃는 남자> 등에 출연한 전설적인 명배우인데, <웃는 남자>에서 그가 연기한 주인공 그윈 플레인의 찢어진 입 모습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후일 DC 코믹스의 만화 캐릭터 ‘조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끝이 없기에 이 정도로 마친다.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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