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xnvRf1z2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인간의 욕망을 그린 비극
설명이 필요 없는 작가라면 셰익스피어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그의 가장 유명한 희곡 『햄릿』을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되려나. “숫자를 셀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단정하긴 힘들지 않을까. 문학청년이라면, 교양인이라면 셰익스피어 희곡 정도는 당연히 읽는 시절이 있었지만 종이책을 도외시하는 요즘은 그렇지가 못하다. 『햄릿』 대신 『라이언 킹』을, 『로미오와 줄리엣』 대신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보고 환호하는 세상 아닌가. 셰익스피어 작품을 각색한 작품이 많아 ‘셰익스피어 이후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작가가 태어난 영국이 아닌 미국과 캐나다, 호주에서 매년 여름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이 열리는 이유는 뭘까. 1564년, 그러니까 453년 전에 태어난 작가의 작품이 지금도 뜨거운 환호를 받는 건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딜레마에 빠져 최고조의 갈등을 극화한 비상한 작품들은 독서 중에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절묘하고 재미있다.
세계 최고의 극작가인 셰익스피어는 37편의 희곡, 2편의 장시, 154편의 소네트를 남겼다. 대표적인 작품인 4대 비극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를 비롯하여 『로미오와 줄리엣』,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등 유명한 작품이 셀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단연 『햄릿』이다.
네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연극 구경을 다닌 셰익스피어는 열한 살 때 입학한 그래머스쿨에서 다양한 학문을 익혔으며 특별히 『성서』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매료되었다. 햄릿이 레어티즈와의 결투를 말리는 호레이쇼에게 “참새 한 마리가 떨어져도 신의 섭리가 작용하는 법이니”라고 마태복음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햄릿』의 스토리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아버지가 죽은 후 왕권을 이어받은 숙부가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자 햄릿은 충격의 나날을 보낸다. 기막힌 사실 앞에서 햄릿은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라고 탄식한다. 뒤늦게 유령을 통해 아버지가 숙부에게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안 햄릿이 분노에 휩싸이며 복수를 계획한다. 햄릿은 그 과정에서 영혼을 바쳐 사랑한 오필리아와 아프게 헤어진다. 숙부를 살해하려던 햄릿은 실수로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죽이고, 충격을 받은 오필리아가 거의 실성한 상태에서 들꽃을 엮은 화관을 쓴 채 익사하고 만다. 오필리아의 오빠 레어티즈는 숙부의 계략에 빠져 햄릿과 결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레어티즈, 햄릿, 어머니까지 죽고 만다.
5막의 희곡 속에서 왕과 왕비, 햄릿이 사랑한 오필리아,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 마지막으로 햄릿까지 주요 등장인물 6명이 모두 죽음을 맞는 격정적인 스토리가 숨 가쁘게 이어진다. 불행이 배신과 불운을 타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가운데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햄릿의 상황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지 깨달을 수 있다.
스토리는 비극적이지만 주고받는 대사 하나하나는 다 마음에 새기고 싶을 만큼 주옥같다. 줄을 긋거나 노트에 옮겨 적기에 적당한 문구들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너무나도 유명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도 바로 『햄릿』에 나오는 대사다.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가 자녀들에게 남기는 충고는 지금도 유효한 내용들이다. ‘생각을 함부로 내뱉지 말 것, 엉뚱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말 것, 잡스런 친구를 사귀지 말 것, 싸움판에 끼어들지 말 것, 남의 말을 경청하되 가부의 판단은 삼갈 것, 돈은 꾸지도 꾸어주지도 말 것’ 등등.
수양버들 잎이 거울 같은 수면 위로 비치는 곳에서 화관을 쓰고 익사한 오필리어는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현대 문화산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괴테의 말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무대에서 보는 것보다 읽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allthat_art&logNo=221048731213&proxyReferer=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ipssinhada2&logNo=222043124652&proxyReferer=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1052024511
꽃 속에서 진 '햄릿의 연인'…걸작은 몰입에서 탄생했다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물에 빠져 죽은 '오필리아' 그리려
인물보다 풍경 먼저 찾아 헤매
5개월간 파리떼와 싸우며 숲속 묘사
겨울철 욕조 찬물로 익사장면 재현
모델이 폐렴 걸린 줄도 모른 채 몰두
무아지경이 시대 초월한 명작 만들어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1851~1852년, 테이트 브리튼, 런던 소장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1851~1852년, 테이트 브리튼, 런던 소장
미국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창의적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일을 즐기고 그 순간에 몰입했다. 마치 물이 흘러가듯 몰입 상태(flow)에서 최고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일에 집중해 시간의 흐름이나 장소,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잊어버리는 몰입 상태에서 창의성이 증진된다는 칙센트미하이의 ‘플로우 이론’은 명화의 탄생 과정에도 적용된다.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는 11세에 미술 명문 왕립예술아카데미에 최연소 입학한 신기록을 남긴 천재였다. 그가 22세에 그린 걸작 ‘오필리아’는 몰입이 천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영재성이 뛰어날수록 몰입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1852년 왕립예술아카데미에서 선보인 이 작품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의 죽음을 회화로 옮긴 것이다. 오필리아는 연인 햄릿의 칼에 아버지 폴로니어스가 살해되자 그 충격으로 미쳐서 물에 빠져 죽은 비운의 여주인공이다.
‘햄릿’ 4막7장에 햄릿의 어머니이자 덴마크 왕비인 거트루드가 오필리아의 오빠 레어티스에게 비극적인 최후를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애가 화관을 나뭇가지에 걸려고 버드나무에 올라갔는데 그만 가지가 부러지면서 시냇물에 빠지고 만 거야. 그 애는 옷자락이 활짝 펴져서 마치 인어처럼 물 위에 둥실 떠 있는 동안 옛 찬송가를 불렀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옷이 물에 잠겨 무거워지자 가엾은 그 애는 진흙 사이로 끌려 들어가고 아름다운 노래도 끊어지고 말았어.’
가혹한 운명에 희생당한 오필리아의 죽음은 많은 화가에게 영감이 돼 다양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밀레이는 오필리아를 주제로 한 다른 작품과 차별화된 강렬한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혁신적 창작 방식을 도입했다. 인물과 배경을 동시에 그리지 않고, 배경이 되는 풍경을 먼저 그리고 인물을 나중에 묘사한 다음 결합했다. 전통 회화에서 풍경은 인물의 보조 역할에 그쳤지만 밀레이에게는 둘 다 중요했다. 자연 풍경이 오필리아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특히 꽃을 비롯한 식물 표현은 인물 묘사만큼이나 중요했다. 사랑의 기쁨과 고통, 죽음, 순수함을 상징하는 꽃말을 통해 오필리아의 심리 상태와 감정을 대신 전하기 위해서였다.
‘오필리아’의 배경이 된 영국 남부 호그스밀 강.
밀레이는 영국 남부 서리 근교 이웰의 호그스밀강 근처에서 야생화 화관을 쓴 오필리아가 익사하는 장면과 일치하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는 1851년 7월부터 5개월 동안 파리 떼와 모기, 악천후에 시달리면서도 야생화가 자라서 꽃을 피우는 과정을 현장에서 관찰하며 실물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일에 집중했다.
몰입은 놀라운 성과로 나타났다. 수십 종의 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작품인 동시에 식물학 자료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밀레이의 아들 존은 전기(傳記)에서 학생들을 시골로 데려갈 수 없었던 식물학 교수가 이 그림을 수업 교재로 활용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밀레이는 5개월간 풍경 작업을 끝내고 런던 작업실로 돌아와 겨울 동안 인물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오필리아의 모델로 19세의 엘리자베스 시달이 뽑혔다. 밀레이는 익사 장면을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해 시달에게 중고 상점에서 4파운드에 구입한 은실 자수 드레스를 입고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두 팔을 벌린 기도 자세로 눕도록 설득했다. 추운 겨울 4개월 동안 이어진 작업 과정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물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욕조 아래 설치한 오일 램프가 고장났는데도 일에 몰두한 밀레이는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찬물에 방치된 시달이 폐렴에 걸리자 분노한 시달의 아버지는 밀레이에게 치료비를 주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박했다. 밀레이에게 받아낸 돈으로 시달은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이런 일화들은 밀레이가 몰입형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밀레이가 창조한 ‘오필리아’ 이미지는 문학적 주제의 상징성과 자연세계의 사실적 묘사가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으며 회화, 사진,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영국 로런스 올리비에 감독·주연의 영화 ‘햄릿’(1948), 덴마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2011), 세계적인 패션 사진가 듀오 머트&마커스의 작업에 영감을 줬다. 또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1906)에 인용돼 일본에 오필리아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