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19>
첫댓글 조선 시대의 수군 진성(鎭城)이다.조선 시대 전라좌수영 산하에는 5관(관아)과 5포(수군 진성)가 있었다. 발포만호성은 5포(사도·여도·녹도·발포·방답) 중 하나로,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던 중요 해상 요충지였다.
세종 21년(1439년)에 발포진이 처음 설치되었고, 성종 21년(1490년)에 돌로 성을 쌓았다. 고종 31년(1894년) 군제 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발포만호성이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유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36세(1580년)에 '발포만호(종4품 무관)'로 부임하여 약 18개월간 재임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직속 상급자였던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발포영의 오동나무를 베어 오라고 하자, "나라의 물건은 사사로이 베어 갈 수 없다"며 거절한 유명한 청렴 일화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이를 오동나무 일화라고 한다.
성곽의 규모는 둘레 약 560m, 높이 약 4m이며, 형태는 해안선을 따라 지형에 맞춰 쌓은 사다리꼴(항아리 형태) 성곽이며, 유적의 동·서·남·북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 있으며, 관아터(동헌, 객사) 및 무기고, 배수로, 문터 등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첫댓글 조선 시대의 수군 진성(鎭城)이다.
조선 시대 전라좌수영 산하에는 5관(관아)과 5포(수군 진성)가 있었다. 발포만호성은 5포(사도·여도·녹도·발포·방답) 중 하나로,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던 중요 해상 요충지였다.
세종 21년(1439년)에 발포진이 처음 설치되었고, 성종 21년(1490년)에 돌로 성을 쌓았다. 고종 31년(1894년) 군제 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발포만호성이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유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36세(1580년)에 '발포만호(종4품 무관)'로 부임하여 약 18개월간 재임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직속 상급자였던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발포영의 오동나무를 베어 오라고 하자, "나라의 물건은 사사로이 베어 갈 수 없다"며 거절한 유명한 청렴 일화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이를 오동나무 일화라고 한다.
성곽의 규모는 둘레 약 560m, 높이 약 4m이며,
형태는 해안선을 따라 지형에 맞춰 쌓은 사다리꼴(항아리 형태) 성곽이며,
유적의 동·서·남·북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 있으며, 관아터(동헌, 객사) 및 무기고, 배수로, 문터 등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