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직면(直面)
새벽의 기운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동안 몇번이나 그녀를 찾아 다니던 길이었다.
지난 몇 달동안 순천을 거의 꿸 정도로 찾아다녔건만 자신은 찾지 못했던 지수를 명훈이 찾아내었다는 말에 마음이 너무나 조급했다.
빨리 그녀를 보고 싶었다. 저 모퉁이만 돌아가면 춘천시내로 들어가는 톨게이트가 있다.
선우는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빨리 그녀를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차를 달렸다.
멀리 헤드라이트가 강하게 비추고 경적소리가 선우의 귀를 때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햇살이 살짝 비추기 시작하는 하늘 저편에 지수가 손짓하고 서 있었다.
“혹시 강선우씨를 아십니까?”
“예, 저희회장님 이십니다만.”
“다행이군요. 이곳은 춘천시 소방본부입니다.”
“예? 소방본부요?”
“예 오늘 새벽 강선우씨가 차가 전복했습니다. 맞은편 차량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회전하다가 그렇게 된것 같습니다.”
“아... 저.. 회장님 상태는...”
“다행히 트럭운전수의 빠른 신고로 목숨은 건지셨지만 지금 수술중이라 보호자가 빨리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도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강회장에게 간단히 보고를 한후 급히 춘천으로 달려온 비서실장은 힘없이 누워있는 선우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핏기라곤 없는 얼굴에 수술로 인해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선우의 모습은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담당의 말로는 오늘밤을 지나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잇을 것 같다고 했다.
오늘밤이 고비라는 말에 그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어쩌면 다시 영영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비서실장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기 춘천으로 선우가 그밤에 나서야 했던 까닭. 그대상인 하우지수.
해야 할 일과 그대상이 떠오르자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늘 따라 마음 한자락이 편하질 않았다.
왜그런지 번역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어둑어둑해져 오는 마당에 혼자 앉아 있었다.
가끔씩 선우가 보고 싶은 날에는 이렇게 혼자 앉아 있었다.
연우와 함께 놀러간 논현동집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왠지 자꾸만 눈이 가던 선우에게 연우의 장례식날 모질게 질타를 당했을 때 어쩌면 연우의 죽음보다 선우의 냉대에 더 가슴 아팠던 것 같았다.
수행비서 시절 처음 엘리베이터에서 부딪 친 그에게 말을 걸었던 것도 자신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의 자아는 선우를 알아보고 그토록 가슴이 떨렸던 가 보다.
그였기에 정략결혼이라는 것을 알면서 했고, 떠나오기 전날 밤. 자신을 강제로 안으려는 선우를 끝까지 뿌리치지 못한 것 도 바로 선우였기 때문이었다.
오늘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선우의 얼굴이 떠오르면 밤새 잠이 오지 않아 걱정스러웠다. 발현증세가 아닐까하는 마음에 조바심도 났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슴 저미도록 보고픈 날에는 선우라는 남자를 알고 사랑하게 된 자신의 모진 운명에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저기 하우지수이사님?”
“누구...”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가끔 성북동 집까지 선우를 데려다 주고 가던 사람. 해서그룹 회장실 비서실장이었다.
“어떻게 여길....”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저 혼자입니다.”
“ 그래요? 어디 좀 앉으세요”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일이라도 ?”
“오늘 이른 새벽 저희 회장님께서 이곳에 대표님이 계신것을 알고 만나시려 오셨습니다.”
“아니예요. 전 만나지 못했는데요?”
“예. 그러셨을 겁니다. 회장님께서 급히 오시다 사고를 당하셔서...”
“예? 사고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순천향병원에 지금 계십니다.”
“상태는요? 괜찮은.... 아닌가요? 혹시...”
“아닙니다. 다행히 아직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살아계시다면서요? 그런데는 뭐예요? 왜 그런거죠?”
“오늘밤이 고비라고 합니다. 갈비뼈가 폐를 찔러서 수술을 했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아직 깨어나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비서로서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분이 가장 보고파 하시던 대표이사님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지난 몇 달을 애타게 찾으셨는데 얼굴 한번 못 보시고 만약 가신다면 전 그분에게 죄를 짓고 맙니다.
그래서 모시러 왔습니다. 같이 가 주실거라고 믿어도 될런지요?“
“........”
“그분에게 얼굴이라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아이도 꼭 보여 드려야 합니다. 그분은 그 정도의 요구를 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부디...”
“그래요... 같이 가요. 만약의 경우라고 하셨죠. 그런 경우의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죽음과 싸우고 있다면 당연히 그 곁을 지키는 것이 제가 할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잠깐만 계십시오. 옷을 갈아 입고 나오겠습니다.”
옷을 갈아 입으려 방으로 들어서던 지수는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기도했다.
‘내가 가기전에 당신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당신을 절대 용서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 기다려요. 내가 갈때까지...’
중환자실 안.
호흡장치를 하고 상반신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선우를 지수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으려 다가서는 지수의 얼굴은 하얀 선우의 붕대보다 더 파리했다.
그가 자신을 찾아오다 사고를 당했단 소리를 듣고부터 자신이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죄책감에 온몸에서 피가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예전같이 반짝이지 않고 창백한 모습을 보자 지수는 애써 웃으며 선우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선우씨 나 보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 피해 다녀도 당신이 결국은 날 찾아 냈잖아요.
그런데 왜 눈을 감고 있어요? 당신 나 원망하고 있나요? 그렇지 않음 어서 날 봐요. 우리아이도 같이 왔는데.... ’
금방 일어날 거라고 기대했던 선우는 그렇게 애타게 찾던 지수를 곁에 두고도 며칠째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모든 의료진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선우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며칠째 자신의 몸을 살피지 않았던 지수가 중환자실에서 쓰러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 일주일째 의식이 없는 선우와 사흘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수 때문에 두그룹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두사람이 이상태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재계에 끼칠 영향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손실도 어마어마 할 것이라는 예측하에 모든 신문에서 두사람의 얘기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두사람의 보호자로서 해서그룹의 전 회장이자 시아버지인 강회장은 애써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