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24.월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사49,1-6 사도13,22-26 루카1,57-66.80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섭리의 삶, 겸손의 삶, 감사의 삶”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5)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예수님 말고 이렇게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성인은 요한 세례자뿐입니다.
새삼 성 요한 세례자가 우리 교회에 얼마나 독보적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입당송과 화답송 후렴도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 요한 세례자 요한임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입당송>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화답송 후렴;시편139,14ㄱ)
이어지는 시편 내용도 은혜롭습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시편139,1-2)
24절까지 이어지는 시편139장은 참 깊고 좋은 묵상자료가 됩니다.
성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님을 봅니다.
하느님 탐구와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아무리 물어도 하느님 없이는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필생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임과 동시에 참나를 아는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여정을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고도 합니다.
하닮의 여정에 오늘 옛 어른이 좋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느긋한 걸음이 가장 멀리 가니 먼 길을 앞당길 수 유일한 길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다산>
“주저하는 준마보다 꾸준히 가는 둔마가 낫다.”<사기>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적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가는 우보천리(牛步千里; 우직한 소의 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뜻,
한결같은 노력의 자세를 뜻함), 호시우행(虎視牛行;호랑이의 시선으로 멀리보고 소처럼 우직하게 걷는다는 뜻)
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저는 소띠요 우직하게 날마다 '참으로 살기 위하여' 소처럼 몸으로 강론을 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오늘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저절로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짐승들처럼 생각없는, 무의미한 반복의 일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을 따라, 주님을 섬기며, 은총의 도움에 힘입어 주님을 닮음으로 참나를 실현해가야 합니다.
이런면에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은 참 좋은 삶의 좌표가 됩니다.
성인이 되라 불림 받아 성화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인 축일 때마다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우리 또한 성인이 되려는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합니다.
성 요한 세례자가 우리 성화의 여정에 참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첫째, 섭리의 삶입니다.
성인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께 불림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선물들이요 하느님 섭리안에 그 고유의 사명을 지니고 있으니 이런 의식은 정체성의 형성에
결정적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기에 생각없이 함부로 막 살 수는 없습니다.
아마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다음 이사야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거듭 확인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으면 그대로 우리의 신원이 됩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의 영예로운 성소라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도 우리에겐 새로운 힘이 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네가 나의 종이 되어,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세례자 요한,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고유의 제자리에서 주님의 종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으로 살라고 불림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든든한 배경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주님은 우리 삶의 존재이유가 되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만이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위해 평생 기도와 말씀 공부의 수행은 필수입니다.
둘째, 겸손의 삶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일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 평생과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바로 주님께 돌아오는 평생 회개를 통해 참 나를 아는 겸손에 이르게 됩니다.
회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바로 이런 겸손의 모범이 세례자 요한이요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가 잘 증언합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형제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세례자 요한입니다.
겸손의 아름다움, 겸손의 매력, 겸손의 향기, 겸손의 진실, 겸손의 사랑, 겸손의 용기, 겸손의 지혜입니다.
겸손은 우리 인품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향기는 바로 겸손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에게 파견되신 구원의 말씀,
예수님을 닮을수록 겸손과 온유입니다.
예수님이 있어 세례자 요한이듯 예수님 있어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 세례자 요한의 자랑이듯, 세례자 요한, 예수님의 자랑이어라. 예수님, 우리의 자랑이듯,
우리는 예수님의 자랑이어라.”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겸손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성덕의 잣대가 겸손입니다.
셋째, 감사의 삶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관계 속의 더불어의 존재들입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관계는 존재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하느님과 인간의 혼신의 노력을 다한 합작품의 결과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엘리사벳 단독행위가 아닙니다.
복음 서두가 저절로 감사의 마음이 들게 합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함께 기뻐하였다.”
오늘날의 비극이자 불행은 이런 함께 기뻐할, 참 좋은 인정을 지닌 마을 사람들이,
친척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을의 자리에 고립단절의 아파트 숲이 들어서니 더불어의 삶은 날로 악화되고 온갖 질병도 늘어갑니다.
세례자 요한의 작명과정에 연루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것인가?”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작명은 마을 사람들 모두의 경사이자 기쁨이었고,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는 물론 후에 이런 상황을 전해 들었을 세례자 요한 마음 깊이 각인된
하느님께 감사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례자 요한의 생애가 답을 줍니다.
1.섭리의 삶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자녀, 빛의 자녀로서 사명을 다하는 섭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겸손의 삶입니다.
늘 주님앞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르며,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겸손의 삶입니다.
3.감사의 삶입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감사입니다.
이렇게 관계 속에 더불어 살 수 있음에 하느님께, 이웃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섭리에 충실하며 매사 겸손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